담임목사 글터
부산일보 칼럼 - 사랑의 실타래
기고문
작성자
한석문
작성일
2018-01-24 16:52
조회
2127
사랑의 실타래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는 빨치산 정하섭을 사랑한 무당 딸 소화의 이야기가 나온다. 책속에서 그들이 숨죽이며 이별하는 장면은 얼마나 애잔한지...“정하섭은 돌아섰다. 그리고 뒷산 쪽을 향하여 날쌔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이내 어둠에 묻혔고, 눈을 부릅뜨다시피 한 소화의 시야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화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에서는 실타래가 풀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은 정하섭에게 묶여 있었다. 정하섭이 아무리 험한 길을 아무리 멀리 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끝도 한도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었던 것이다.” 언제 붙잡혀서 총살당할지 모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한 여자로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그럼에도 그 난리 중에 무르익어버린 사랑은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인연의 실타래를 서로에게 매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졌던 마음은 지리산 자락 무당 딸보다도 못했던 것일까?
주님과의 약속대로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며칠 전에 부활하신 주님을 한 번 뵈었고, 평강의 인사를 주님께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님을 다시 만난 이때의 분위기를 마태는 매우 서먹하게 전해준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28:16, 17) 같은 상황을 요한의 시선으로 보면 그는 마태보다 더 실망스러운 사실을 보여준다. 이 서먹한 현장에 그나마 찾아온 제자는 유다를 뺀 나머지 제자 가운데 일곱 명 뿐이었다는 것이다.(요21:2) 그러면 나머지 네 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열 두 제자 중 절반에 육박하는 다섯 명이 제자 공동체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은 과반수에 육박하는 제자가 주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상황에 베드로가 뜬금없이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 하며 자리를 뜨고 만다. 화가 난다. 유대인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모여 준 신앙의 동지들에게 그게 과연 맏형으로써 할 말일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제자들의 부족함에 개의치 않고 다시금 부활의 따뜻함 속으로 그들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마치 처음 예수님을 만나던 그날처럼, 밤새 허탕을 친 빈 배를 끌고 포구로 돌아오던 베드로가 본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 숯불을 피워 조반을 마련하고 조촐하게 제자들을 맞으시는 예수님은 그 어떤 타박도 힐난도 없으시다. 요한은 전한다.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21:12)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그들에게 현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벅찬 사랑의 실타래는 우리가 매는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의 허리춤에 매어주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이 매어준 그 실타래의 끝에는 애잔한 사랑이 있다.
한석문 목사 | 해운대교회
전체 51
번호 | 제목 | 추천 | 조회 |
15 |
겨울, 마지막 몸부림
한석문
|
추천 -1
|
조회 2358
|
한석문 | 2358 |
14 |
첫차 타는 사람들
한석문
|
추천 0
|
조회 2096
|
한석문 | 2096 |
13 |
시선을 품다
한석문
|
추천 0
|
조회 2740
|
한석문 | 2740 |
12 |
설날 아침
한석문
|
추천 0
|
조회 1904
|
한석문 | 1904 |
11 |
부산일보 칼럼 - 나에게 연민을 느낄 때
한석문
|
추천 2
|
조회 2916
|
한석문 | 2916 |
10 |
부산일보 칼럼 - 나무가 단풍이 드는 이유
한석문
|
추천 1
|
조회 2208
|
한석문 | 2208 |
9 |
부산일보 칼럼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한석문
|
추천 0
|
조회 2110
|
한석문 | 2110 |
8 |
부산일보 칼럼 - 부활의 신비
한석문
|
추천 0
|
조회 2394
|
한석문 | 2394 |
7 |
부산일보 칼럼 - 성령강림절 단상(斷想)
한석문
|
추천 0
|
조회 1949
|
한석문 | 1949 |
6 |
부산일보 칼럼 - 예수님처럼
한석문
|
추천 0
|
조회 2357
|
한석문 | 2357 |
5 |
부산일보 칼럼 - 사랑의 실타래
한석문
|
추천 0
|
조회 2127
|
한석문 | 2127 |
4 |
성서일과에서 시편의 위치
한석문
|
추천 0
|
조회 2593
|
한석문 | 25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