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글터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1 예배의 삼위일체(교회력, 성서일과, 성찬)
기고문
작성자
한석문
작성일
2018-01-24 16:23
조회
2721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1
예배의 삼위일체(교회력, 성서일과, 성찬)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학이 없는 교회, 신학을 하지 않는 교회라는 데 있다"라며 염려하시는 감리회 원로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교회는 신학을 적대시하고 축출했으며, 신학은 교회를 버리고 엉뚱한 곳을 배회하고 있다고 말이다. '교회가 내버린 신학' 그 중심에는 예배와 설교가 있다. 예배가 신학적 성찰을 벗어나 실용적인 고려에 휘둘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설교 또한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지 오래 되었다. 필자가 느끼기에 1990년대 초반은 한국 교회 예배에 있어 아주 중대한 전환기였다. 당시 한국 교회는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숙의의 결과로 반포했던 '리마예식서(Lima Liturgy)'의 영향으로 예배갱신의 필요성이 에큐메니컬 진영으로부터 조심스레 논의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한국 교회에는 또 하나의 예배가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캐나다의 빈야드 교회로부터 한국에 흘러들은 소위 '열린 예배'라는 것이었다. 물론 열린 예배도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예배'와 '진정한 예배'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는 공교회적 질서 안에서 예배하고 설교해야 한다.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는 '교회력과 성서일과'이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해 먼저 성찬( Eucharist)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찬과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결코 떼어놓으면 안 되는 예배의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력을 따라 공전하며 선포된 성서일과는 반드시 성찬을 통해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도달하게 한다. 크라이튼(J. D. Crichton)은 '전례의 신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구약성서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루는 신약성서의 케리그마 선포를 위한 준비가 된다. 성찬( Eucharist)은 파스카 축제와 광야의 계약 체결이라는 맥락의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파스카의 신비는 성찬의 핵심이며, 기념(Anamnesis)에 의하여 재현되며,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교회는 성찬과 기타의 성사들을 거행하는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완성되는 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도달한다. 대림절에서 오순절에 이르는 전례 주기는, 바로 이 동일한 과정을 따르고 있다." 나형석 교수는 그의 책 '감리회 예배 원형과의 대화'에서 "성찬이 없다면 설교는 무익하고 공허하다"면서 그 이유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 없다면(성찬) 단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만으로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라고 되묻는다. 머리와 귀로 들은 설교는 대개 관념으로 머무른다. 성찬에 참여해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서 이 관념은 비로소 영적 리얼리즘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교회들이 성찬을 예배에서 배제한 이유는 아마도 예배의 역동성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찬식 예배란 우리 개신교인이 흔히 생각하듯, 메마르고 딱딱하며 역동적이지 못한, 권위적인 의식의 반복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과 같이 자유로우신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감응하며 움직이는 우리들의 영(靈)의 율동이다. 말씀과 성찬으로 완성된 예배는 대림절로부터 시작되어 성령강림주간으로 마감 짓는 교회력의 공전 안에서 매해 반복된다. 이것은 목회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교파와 교단을 막론해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는 반드시 이 삼위일체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교회의 교회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성만찬 이해하기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려주신 예배'가 '성만찬'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만찬의 기원은 유월절 식탁이다. 구약성서의 유월절 식탁과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Pascha)'라는 중대한 주제 안에서 서로 만난다. 유월절 식탁이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이라면, 최후의 만찬은 죄와 사망 그리고 소외에 처한 인간 실존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탁을 계승하여 최후의 만찬으로 재현하셨으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시며 그것을 초대교회로 흘려보내셨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원형 그대로 계승해 아가페 식사란 이름으로 재현하고 반복했으며, 이후로 3세기를 전후해 아침에 행하던 '말씀 묵상'과 결합되면서 '말씀과 성찬'의 예배로 정착되었다.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물려주신 예배는 오직 '성찬'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성찬을 배제하고 말씀의 예배만 고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를 거스르는 것이다. 오늘날 전례적 교회들에서 성찬이 없는 예배는 '구도자 예배' 즉 '초신자 예배'로 국한하고 있다. 웨슬리는 독립 전쟁으로 인해 영국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후, 영국 교도들과는 달리 성례전의 은혜를 알지 못하던 북미 대륙의 메도디스트들을 '광야의 주린 양떼'라고 표현하며 1784년 9월10일 브리스톨에서 편지를 쓰게 되는데, 그 문서가 바로 '북미주 감리교도들의 주일성찬예배식'이다. 웨슬리는 이 책의 서론에서 "모든 감리교도들은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만 하며 주의 만찬에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며 십자가의 요의가 성찬식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1744년 영국 교회에서 주례적 성찬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매주 성찬식을 고집하며 '예전을 가진 교회', '객관적 예배'의 균형을 중요시했다. 그가 1784년 미국에 가서 그곳 감리교도들의 너무나 간소화된 예배를 보고 나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렇게 멀리 전통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한 말은 오늘의 감리교회가 음미해 볼 말이다.
성만찬 준비하기
성만찬 예배를 매 주 시행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대두된다. 그 중 첫째가 시간에 대한 부담이다. 대개 1시간 하는 예배에 성만찬이 추가될 때 자칫 지루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불평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목회자가 먼저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목회자는 성도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에게 있어 목회는 설득이었다. 왜 성서일과와 성찬을 회복해야 하는지, 왜 교회력을 따라 걸어야 하는지, 새해마다 어김없이 교우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설득과 함께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의 변화이다. 늘어나는 예배시간의 부담은 목회자의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철저한 준비는 예배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첫째는 설교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설교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예배 시간은 줄어든다. 성서일과를 충분히 묵상하고 그에 따라 설교 원고를 작성했으면 장인(匠人)의 손길처럼 공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서일과 즉 구약과 서신서와 복음서를 모두 낭독하면서 설교까지 30분이 소요된다면, 예배 인원 300명 기준으로 성만찬을 포함한 전체 예배 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일 것이다.
둘째는 성만찬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①목회자 자신이 성찬 예문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성만찬 예문집이나, 웨슬리 예배서, 리마예식서 등을 참고하기를 권한다. ②예배 음악이다. 사전에 성찬 음악을 충분히 준비해 두면 보다 영감이 넘치는 예배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떼제 음악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리마예식서에도 약간의 악보가 마련되어 있다. 찬송가의 경우 성찬예배가 너무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바른 성찬을 위해서는 최소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 등 악보를 미리 구해 연습해 두면 좋다. 그레고리안 성가를 많이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③성도들을 준비 시키는 것이다. 성만찬을 위한 성서연구를 사전에 함께 하기를 권한다. 가흥순 목사의 '성만찬과 예배갱신'(도서출판 나단)을 참고하면 성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성서연구 및 묵상 자료를 얻을 수 있다. ④성찬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교우들이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사전에 고지해 두어야 한다.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성찬 보좌하는 분들이 회중석을 찾아가는 것과 회중들이 나와서 성찬을 받는 방법이다. 후자의 경우 교회 형편에 따라 예배당의 양쪽 통로로 나와 성찬을 받은 후 가운데 통로로 돌아가게 하든지 그 반대의 방법으로 할 수 있다.
성만찬 예배하기
자, 이제 예문이 충분히 숙지되었고, 예배 음악이 완성되었고, 성도들도 성서연구와 묵상을 통해 마음의 준비가 되었으며, 성찬 분급의 방법도 고지가 되었다. 남은 것이 있다. 성만찬 예배에서 집례자의 영감 (혹은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마치 화가가 갤러리를 견학하며 영감을 얻듯이, 음악가가 거장들의 음악을 감상하며 영감을 얻듯이, 수많은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목사 역시 영감 넘치는 예배를 위해 다른 교회의 예배에 많이 참여할 것을 권한다. 가까운 전례적 교회(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등을 방문해 미사에 참여함으로 예배의 영감을 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 모든 것이 나의 내면에 빚어져 준비가 되었으면 이제는 정직한 예배자로 하나님과 회중 앞에 서야 한다. 우선 나를 멈추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선 순간이 아닌가? 나를 멈춘다 함은 나의 욕망이나 감정이나 허영이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내 자아에서 분출되는 테크니컬한 말이나 행동이나 무슨 제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단지 목마른 대지와 같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재하시어 나를 채우시고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이다.
이상과 같이 성만찬예배에 대한 간단한 이해와 성만찬 준비, 그리고 성만찬 시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 이후로 전개될 두 번의 이야기에서는 '교회력에 맞추어 주일성서일과를 묵상하는 과정' 그리고 '묵상된 성서일과를 토대로 설교를 구상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을 실례를 들어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시간으로 분할해 묵상하고 따라가는 작업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다 가까이서 뵈옵는 일이고, 그 분이 걸어가신 동선을 더 진득하게 따르는 여정이며, 구약성서의 예언과 서신서의 해설을 들으며 복음서를 더 깊이 수긍하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배의 삼위일체(교회력, 성서일과, 성찬)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학이 없는 교회, 신학을 하지 않는 교회라는 데 있다"라며 염려하시는 감리회 원로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교회는 신학을 적대시하고 축출했으며, 신학은 교회를 버리고 엉뚱한 곳을 배회하고 있다고 말이다. '교회가 내버린 신학' 그 중심에는 예배와 설교가 있다. 예배가 신학적 성찰을 벗어나 실용적인 고려에 휘둘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설교 또한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지 오래 되었다. 필자가 느끼기에 1990년대 초반은 한국 교회 예배에 있어 아주 중대한 전환기였다. 당시 한국 교회는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숙의의 결과로 반포했던 '리마예식서(Lima Liturgy)'의 영향으로 예배갱신의 필요성이 에큐메니컬 진영으로부터 조심스레 논의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한국 교회에는 또 하나의 예배가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캐나다의 빈야드 교회로부터 한국에 흘러들은 소위 '열린 예배'라는 것이었다. 물론 열린 예배도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예배'와 '진정한 예배'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는 공교회적 질서 안에서 예배하고 설교해야 한다.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는 '교회력과 성서일과'이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해 먼저 성찬( Eucharist)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찬과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결코 떼어놓으면 안 되는 예배의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력을 따라 공전하며 선포된 성서일과는 반드시 성찬을 통해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도달하게 한다. 크라이튼(J. D. Crichton)은 '전례의 신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구약성서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루는 신약성서의 케리그마 선포를 위한 준비가 된다. 성찬( Eucharist)은 파스카 축제와 광야의 계약 체결이라는 맥락의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파스카의 신비는 성찬의 핵심이며, 기념(Anamnesis)에 의하여 재현되며,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교회는 성찬과 기타의 성사들을 거행하는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완성되는 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도달한다. 대림절에서 오순절에 이르는 전례 주기는, 바로 이 동일한 과정을 따르고 있다." 나형석 교수는 그의 책 '감리회 예배 원형과의 대화'에서 "성찬이 없다면 설교는 무익하고 공허하다"면서 그 이유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 없다면(성찬) 단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만으로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라고 되묻는다. 머리와 귀로 들은 설교는 대개 관념으로 머무른다. 성찬에 참여해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서 이 관념은 비로소 영적 리얼리즘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교회들이 성찬을 예배에서 배제한 이유는 아마도 예배의 역동성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찬식 예배란 우리 개신교인이 흔히 생각하듯, 메마르고 딱딱하며 역동적이지 못한, 권위적인 의식의 반복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과 같이 자유로우신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감응하며 움직이는 우리들의 영(靈)의 율동이다. 말씀과 성찬으로 완성된 예배는 대림절로부터 시작되어 성령강림주간으로 마감 짓는 교회력의 공전 안에서 매해 반복된다. 이것은 목회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교파와 교단을 막론해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는 반드시 이 삼위일체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교회의 교회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성만찬 이해하기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려주신 예배'가 '성만찬'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만찬의 기원은 유월절 식탁이다. 구약성서의 유월절 식탁과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Pascha)'라는 중대한 주제 안에서 서로 만난다. 유월절 식탁이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이라면, 최후의 만찬은 죄와 사망 그리고 소외에 처한 인간 실존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탁을 계승하여 최후의 만찬으로 재현하셨으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시며 그것을 초대교회로 흘려보내셨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원형 그대로 계승해 아가페 식사란 이름으로 재현하고 반복했으며, 이후로 3세기를 전후해 아침에 행하던 '말씀 묵상'과 결합되면서 '말씀과 성찬'의 예배로 정착되었다.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물려주신 예배는 오직 '성찬'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성찬을 배제하고 말씀의 예배만 고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를 거스르는 것이다. 오늘날 전례적 교회들에서 성찬이 없는 예배는 '구도자 예배' 즉 '초신자 예배'로 국한하고 있다. 웨슬리는 독립 전쟁으로 인해 영국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후, 영국 교도들과는 달리 성례전의 은혜를 알지 못하던 북미 대륙의 메도디스트들을 '광야의 주린 양떼'라고 표현하며 1784년 9월10일 브리스톨에서 편지를 쓰게 되는데, 그 문서가 바로 '북미주 감리교도들의 주일성찬예배식'이다. 웨슬리는 이 책의 서론에서 "모든 감리교도들은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만 하며 주의 만찬에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며 십자가의 요의가 성찬식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1744년 영국 교회에서 주례적 성찬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매주 성찬식을 고집하며 '예전을 가진 교회', '객관적 예배'의 균형을 중요시했다. 그가 1784년 미국에 가서 그곳 감리교도들의 너무나 간소화된 예배를 보고 나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렇게 멀리 전통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한 말은 오늘의 감리교회가 음미해 볼 말이다.
성만찬 준비하기
성만찬 예배를 매 주 시행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대두된다. 그 중 첫째가 시간에 대한 부담이다. 대개 1시간 하는 예배에 성만찬이 추가될 때 자칫 지루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불평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목회자가 먼저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목회자는 성도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에게 있어 목회는 설득이었다. 왜 성서일과와 성찬을 회복해야 하는지, 왜 교회력을 따라 걸어야 하는지, 새해마다 어김없이 교우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설득과 함께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의 변화이다. 늘어나는 예배시간의 부담은 목회자의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철저한 준비는 예배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첫째는 설교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설교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예배 시간은 줄어든다. 성서일과를 충분히 묵상하고 그에 따라 설교 원고를 작성했으면 장인(匠人)의 손길처럼 공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서일과 즉 구약과 서신서와 복음서를 모두 낭독하면서 설교까지 30분이 소요된다면, 예배 인원 300명 기준으로 성만찬을 포함한 전체 예배 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일 것이다.
둘째는 성만찬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①목회자 자신이 성찬 예문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성만찬 예문집이나, 웨슬리 예배서, 리마예식서 등을 참고하기를 권한다. ②예배 음악이다. 사전에 성찬 음악을 충분히 준비해 두면 보다 영감이 넘치는 예배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떼제 음악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리마예식서에도 약간의 악보가 마련되어 있다. 찬송가의 경우 성찬예배가 너무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바른 성찬을 위해서는 최소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 등 악보를 미리 구해 연습해 두면 좋다. 그레고리안 성가를 많이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③성도들을 준비 시키는 것이다. 성만찬을 위한 성서연구를 사전에 함께 하기를 권한다. 가흥순 목사의 '성만찬과 예배갱신'(도서출판 나단)을 참고하면 성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성서연구 및 묵상 자료를 얻을 수 있다. ④성찬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교우들이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사전에 고지해 두어야 한다.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성찬 보좌하는 분들이 회중석을 찾아가는 것과 회중들이 나와서 성찬을 받는 방법이다. 후자의 경우 교회 형편에 따라 예배당의 양쪽 통로로 나와 성찬을 받은 후 가운데 통로로 돌아가게 하든지 그 반대의 방법으로 할 수 있다.
성만찬 예배하기
자, 이제 예문이 충분히 숙지되었고, 예배 음악이 완성되었고, 성도들도 성서연구와 묵상을 통해 마음의 준비가 되었으며, 성찬 분급의 방법도 고지가 되었다. 남은 것이 있다. 성만찬 예배에서 집례자의 영감 (혹은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마치 화가가 갤러리를 견학하며 영감을 얻듯이, 음악가가 거장들의 음악을 감상하며 영감을 얻듯이, 수많은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목사 역시 영감 넘치는 예배를 위해 다른 교회의 예배에 많이 참여할 것을 권한다. 가까운 전례적 교회(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등을 방문해 미사에 참여함으로 예배의 영감을 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 모든 것이 나의 내면에 빚어져 준비가 되었으면 이제는 정직한 예배자로 하나님과 회중 앞에 서야 한다. 우선 나를 멈추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선 순간이 아닌가? 나를 멈춘다 함은 나의 욕망이나 감정이나 허영이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내 자아에서 분출되는 테크니컬한 말이나 행동이나 무슨 제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단지 목마른 대지와 같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재하시어 나를 채우시고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이다.
이상과 같이 성만찬예배에 대한 간단한 이해와 성만찬 준비, 그리고 성만찬 시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 이후로 전개될 두 번의 이야기에서는 '교회력에 맞추어 주일성서일과를 묵상하는 과정' 그리고 '묵상된 성서일과를 토대로 설교를 구상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을 실례를 들어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시간으로 분할해 묵상하고 따라가는 작업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다 가까이서 뵈옵는 일이고, 그 분이 걸어가신 동선을 더 진득하게 따르는 여정이며, 구약성서의 예언과 서신서의 해설을 들으며 복음서를 더 깊이 수긍하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전체 51
번호 | 제목 | 추천 | 조회 |
3 |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1 예배의 삼위일체(교회력, 성서일과, 성찬)
한석문
|
추천 -1
|
조회 2721
|
한석문 | 2721 |
2 |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2 교회력을 따라 걸으며 성서일과 묵상하기
한석문
|
추천 -1
|
조회 3121
|
한석문 | 3121 |
1 |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3 성서일과를 따른 설교 기획 및 원고 작성
한석문
|
추천 -1
|
조회 2852
|
한석문 | 28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