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글터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2 교회력을 따라 걸으며 성서일과 묵상하기
기고문
작성자
한석문
작성일
2018-01-24 16:21
조회
3027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2
교회력을 따라 걸으며 성서일과 묵상하기
생태력으로 본 교회력
교회력의 다른 표현은 예배력(Litugical Calender)이다. 농부들이 사용하는 24절기 생태력을 생각해 보면 교회력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쉬울지 모르겠다. 이정배 교수는 ‘24절기 문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라는 글에서 한국민속대관의 자료를 인용해 24절기 생태력이 주는 다섯 가지 교훈을 말하는데, 그중 첫째 교훈이 우리 시선을 끈다. “생태력은 농사일이 항시 때를 맞추어 적기에 이루어져야 하고 매년 반복되는 것임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해 아래 모든 것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순응(順應)하는 것이다.” 생태력이 주는 이 교훈은 교회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고스란히 연결된다. 농부들이 24절기 생태력을 따라 매년 반복되는 시간의 공전 안에서 농사를 지어왔듯이, 우리 그리스도교도 2세기경에 ‘교회력’이라는 것을 만들어 교회력을 따라 매년 반복되는 시간의 공전 안에서 예배와 신앙생활을 해왔다.
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미 혹은 목회 실천적 의미를 말한다면 교회력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들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교회력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있다. 박효섭 목사는 교회력에 대한 기막힌 설명을 덧붙였다. “교회력은 시간으로 설명되는 케리그마이다. 교회력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음미하게 하고 참여하게 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교회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회상하도록 초대된다.”(박효섭, 「전례력 나해 주일 독서와 강론집」, 카리스마타수도회) 그렇다.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으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에서 시작하여 그의 오심을 맞이하는 성탄절, 그리고 세상의 빛으로 점점 밝아 오는 그를 바라보는 주현절(현현절)과 그의 수난과 죽으심의 전 과정을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로 사는 사순절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에서 성령강림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생태적 발걸음, 이것보다 어떻게 더 그분을 가까이에서 현장감 넘치게 바라볼 방법이 있을까? 따라서 오늘의 교회들은 이 교회력의 공전을 따라 걷도록 초청받고 있다.
필자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각 교회력이 가진 심층적인 메시지를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것이었다. 대개 강림절, 성탄절, 사순절,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절, 성령강림절 등등 큰 틀에서의 절기 메시지를 찾아 전하는 것에는 익숙해 있지만, 그 외에도 52주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다가오는 교회력의 메시지는 어디서 알 수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성서일과에 있었다. 매 주의 교회력이 지닌 메시지는 해당 주일의 성서일과에 담겨 있고, 그 메시지는 성서일과를 묵상하는 목회자마다 성령께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섬세하게 비쳐 주시는 까닭에 목회자마다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각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에 적절하게 깨우쳐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성서일과 묵상하기
교회력을 따라 낭독되는 성경본문의 일람표를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Lectionary)라고 한다. AD 4세기경 만들어진 이 성서일과는 독서를 뜻하는 라틴어의 ‘Lectio’에서 온 말로, 공적인 예배에서 회중에게 낭독하기 위해 질서 있게 정리한 ‘성구집’을 일컫는다. 강림절 제1주부터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까지, 연간 52주 교회력을 따라 성구를 배열한 ‘주일성서일과’와 연간 365일 동안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매일성서일과’가 있는데, 이것은 3년을 주기로 반복되며 매주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나씩 택하여 세 개를 낭독하게 된다. 이 외에도 시편이 매주 성서일과와 함께 주어지지만 루터교를 제외한 나머지 전례적 교회들은 설교 본문의 범주에 포함하기보다는 혹은 예배순서의 '응송'에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시편 역시 위 세 개의 성서일과와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히 인용하면 보다 시편 저자들의 감성이 한껏 배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일과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교회력에 따라 성서일과를 봉독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인류의 구원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기쁨의 소식이다. 신약성서의 4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해 행하신 구원 사업을 전하고, 사도행전과 사도서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구원 사업을 계승한 사도의 활동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으며,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종말적 완성을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전례는 성서봉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전하지만 성서 전체를 그대로의 형태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 목록에 의해 각 장을 있는 그대로의 순서로 봉독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관계있는 구절을 성서 전체에 걸쳐 읽는 것이다.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중심으로 신구약을 통해 일관된 것으로 이 구원 역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구약성서와 사도서간과 복음이 봉독되고, 강론으로 그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 전통의 성서학자들의 참여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 완성된 까닭에 오늘날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회들은 이 문헌에서 개정된 성서일과를 공동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당 교회력에 따른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 간의 통합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앞의 문헌에서 보았듯이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고,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고,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 보면 반드시 그 안에 감추어진 통합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보화처럼 감추어져 있는 통합적 메시지’, 목회자는 반드시 그 메시지를 찾아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통합적 메시지에서 바로 그 주일 설교의 제목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말씀 묵상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
효과적인 말씀묵상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태도가 요구된다 하겠다. 첫째,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순연한 본연의 자아가 된다는 뜻이다. 둘째, 말씀 묵상의 태도는 이성과 마음의 조화, 균형, 통합이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문자적 의미는 이성적 두뇌로 파악한다. 이것은 묵상에 있어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묵상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이성으로 파악한 진리는 마음(심장)에서 사랑으로 덥혀야 한다. 이처럼 말씀의 묵상은 지성적 이해를 넘어, 글자와 말의 배후에 있는 영적 실재 혹은 하나님 현존과의 뜨거운 연합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기도이다. 이성으로 파악한 진리가 마음에서 사랑으로 덥혔을 때 우리는 그 결정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묵상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큐티도 있고, 베네딕도 묵상법, 혹은 이냐시오 묵상법 등등이다. 필자는 이 중에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권하고 싶다.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거룩한 독서’ 혹은 ‘성독’(聖讀)이라는 말로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의 핵심 영성훈련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을 듣는 훈련’이요, ‘말씀을 체화(體化) 하는 훈련’이요,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로 시작하지만 실제 그 중심에는 기도가 있다. 12세기의 수도자였던 귀고(Guigo)가 정리한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영적 사다리)는 ‘읽기(Lectio), 묵상하기(meditatio), 기도하기(oratio), 관상하기(Contemplatio)’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4단계의 영적 사다리를 잘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분주함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말씀에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방해 받지 않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는 것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매 주 성서일과를 처음 직면할 때의 심정은 늘 막막함이다. 구약성서와 서신서, 복음서로 이어지는 각 본문의 메시지도 파악하기 어려운데 각 본문 간의 통합적 요점을 찾아내기란 사실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시간이 충분해야 조급하지 않고 인위적인 해석을 피할 수 있으며 성령님의 섬세하신 도움 안에서 성서일과가 지닌 본연의 메시지를 발굴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늦어도 목요일 저녁까지는 성서일과의 대략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묵상과 설교기획을 마치는 편이다. 그래야만 금요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원고 작성이 가능하다. 처음 성서일과를 직면할 때의 캄캄함은 조용한 시간의 흐름과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점차 밝아진다. 그러면 길이 보이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통합적 요점이 떠오르는 감격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숨은 그림 속의 그림처럼 말씀의 실체가 명료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정하라
중요한 것은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설교는 얼마나 개인적이고 자의적이었던가? 공교회적 질서 안에 있지 않은 설교는 자칫 목회자 자신의 의도나 편협한 주관에 종속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필자 역시 나름대로 균형 잡힌 성서해석(Text)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삶의 자리(Context)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건강한 설교를 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목회의 연수가 늘어갈수록 한 ‘개인’으로서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옹색한 것인지를 실감하곤 했다.
“어떻게 예수를 닮아갈 것인가?” 이 물음은 결국 오랜 그리스도교 역사와 그 공교회적 질서 안에서 다듬어져온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해주었다. 마음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시작된 ‘교회력과 주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는 교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성도들은 매년 반복되는 교회력의 공전 속에서 차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묵상하며 그분을 닮으려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매주의 성서일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은혜를 성서 자신의 목소리로 전해 주었고, 렉시오 디비나 자료로 만들어진 해당 주일의 말씀 묵상은 성도들의 한 주간의 영성생활을 지탱해 주었다. 마음을 정하면 우리에게는 변화가 찾아온다.
이상과 같이 교회력과 성서일과, 그리고 그에 따른 말씀 묵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당위성을 인식하고 마음도 먹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막연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 이야기에서는 ‘묵상된 성서일과를 토대로 설교를 구상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을 실례를 들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일치가 전제되지 않은 다양성은 천박하기 그지없다. 부디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와 한국 교회가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목회의 중심에 회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고 공교회적 질서를 회복하기를 소망해 본다.
교회력을 따라 걸으며 성서일과 묵상하기
생태력으로 본 교회력
교회력의 다른 표현은 예배력(Litugical Calender)이다. 농부들이 사용하는 24절기 생태력을 생각해 보면 교회력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쉬울지 모르겠다. 이정배 교수는 ‘24절기 문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라는 글에서 한국민속대관의 자료를 인용해 24절기 생태력이 주는 다섯 가지 교훈을 말하는데, 그중 첫째 교훈이 우리 시선을 끈다. “생태력은 농사일이 항시 때를 맞추어 적기에 이루어져야 하고 매년 반복되는 것임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해 아래 모든 것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순응(順應)하는 것이다.” 생태력이 주는 이 교훈은 교회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고스란히 연결된다. 농부들이 24절기 생태력을 따라 매년 반복되는 시간의 공전 안에서 농사를 지어왔듯이, 우리 그리스도교도 2세기경에 ‘교회력’이라는 것을 만들어 교회력을 따라 매년 반복되는 시간의 공전 안에서 예배와 신앙생활을 해왔다.
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미 혹은 목회 실천적 의미를 말한다면 교회력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들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교회력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있다. 박효섭 목사는 교회력에 대한 기막힌 설명을 덧붙였다. “교회력은 시간으로 설명되는 케리그마이다. 교회력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음미하게 하고 참여하게 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교회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회상하도록 초대된다.”(박효섭, 「전례력 나해 주일 독서와 강론집」, 카리스마타수도회) 그렇다.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으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에서 시작하여 그의 오심을 맞이하는 성탄절, 그리고 세상의 빛으로 점점 밝아 오는 그를 바라보는 주현절(현현절)과 그의 수난과 죽으심의 전 과정을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로 사는 사순절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에서 성령강림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생태적 발걸음, 이것보다 어떻게 더 그분을 가까이에서 현장감 넘치게 바라볼 방법이 있을까? 따라서 오늘의 교회들은 이 교회력의 공전을 따라 걷도록 초청받고 있다.
필자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각 교회력이 가진 심층적인 메시지를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것이었다. 대개 강림절, 성탄절, 사순절,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절, 성령강림절 등등 큰 틀에서의 절기 메시지를 찾아 전하는 것에는 익숙해 있지만, 그 외에도 52주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다가오는 교회력의 메시지는 어디서 알 수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성서일과에 있었다. 매 주의 교회력이 지닌 메시지는 해당 주일의 성서일과에 담겨 있고, 그 메시지는 성서일과를 묵상하는 목회자마다 성령께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섬세하게 비쳐 주시는 까닭에 목회자마다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각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에 적절하게 깨우쳐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성서일과 묵상하기
교회력을 따라 낭독되는 성경본문의 일람표를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Lectionary)라고 한다. AD 4세기경 만들어진 이 성서일과는 독서를 뜻하는 라틴어의 ‘Lectio’에서 온 말로, 공적인 예배에서 회중에게 낭독하기 위해 질서 있게 정리한 ‘성구집’을 일컫는다. 강림절 제1주부터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까지, 연간 52주 교회력을 따라 성구를 배열한 ‘주일성서일과’와 연간 365일 동안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매일성서일과’가 있는데, 이것은 3년을 주기로 반복되며 매주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나씩 택하여 세 개를 낭독하게 된다. 이 외에도 시편이 매주 성서일과와 함께 주어지지만 루터교를 제외한 나머지 전례적 교회들은 설교 본문의 범주에 포함하기보다는 혹은 예배순서의 '응송'에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시편 역시 위 세 개의 성서일과와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히 인용하면 보다 시편 저자들의 감성이 한껏 배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일과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교회력에 따라 성서일과를 봉독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인류의 구원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기쁨의 소식이다. 신약성서의 4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해 행하신 구원 사업을 전하고, 사도행전과 사도서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구원 사업을 계승한 사도의 활동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으며,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종말적 완성을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전례는 성서봉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전하지만 성서 전체를 그대로의 형태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 목록에 의해 각 장을 있는 그대로의 순서로 봉독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관계있는 구절을 성서 전체에 걸쳐 읽는 것이다.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중심으로 신구약을 통해 일관된 것으로 이 구원 역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구약성서와 사도서간과 복음이 봉독되고, 강론으로 그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 전통의 성서학자들의 참여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 완성된 까닭에 오늘날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회들은 이 문헌에서 개정된 성서일과를 공동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당 교회력에 따른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 간의 통합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앞의 문헌에서 보았듯이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고,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고,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 보면 반드시 그 안에 감추어진 통합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보화처럼 감추어져 있는 통합적 메시지’, 목회자는 반드시 그 메시지를 찾아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통합적 메시지에서 바로 그 주일 설교의 제목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말씀 묵상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
효과적인 말씀묵상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태도가 요구된다 하겠다. 첫째,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순연한 본연의 자아가 된다는 뜻이다. 둘째, 말씀 묵상의 태도는 이성과 마음의 조화, 균형, 통합이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문자적 의미는 이성적 두뇌로 파악한다. 이것은 묵상에 있어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묵상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이성으로 파악한 진리는 마음(심장)에서 사랑으로 덥혀야 한다. 이처럼 말씀의 묵상은 지성적 이해를 넘어, 글자와 말의 배후에 있는 영적 실재 혹은 하나님 현존과의 뜨거운 연합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기도이다. 이성으로 파악한 진리가 마음에서 사랑으로 덥혔을 때 우리는 그 결정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묵상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큐티도 있고, 베네딕도 묵상법, 혹은 이냐시오 묵상법 등등이다. 필자는 이 중에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권하고 싶다.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거룩한 독서’ 혹은 ‘성독’(聖讀)이라는 말로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의 핵심 영성훈련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을 듣는 훈련’이요, ‘말씀을 체화(體化) 하는 훈련’이요,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로 시작하지만 실제 그 중심에는 기도가 있다. 12세기의 수도자였던 귀고(Guigo)가 정리한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영적 사다리)는 ‘읽기(Lectio), 묵상하기(meditatio), 기도하기(oratio), 관상하기(Contemplatio)’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4단계의 영적 사다리를 잘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분주함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말씀에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방해 받지 않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는 것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매 주 성서일과를 처음 직면할 때의 심정은 늘 막막함이다. 구약성서와 서신서, 복음서로 이어지는 각 본문의 메시지도 파악하기 어려운데 각 본문 간의 통합적 요점을 찾아내기란 사실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시간이 충분해야 조급하지 않고 인위적인 해석을 피할 수 있으며 성령님의 섬세하신 도움 안에서 성서일과가 지닌 본연의 메시지를 발굴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늦어도 목요일 저녁까지는 성서일과의 대략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묵상과 설교기획을 마치는 편이다. 그래야만 금요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원고 작성이 가능하다. 처음 성서일과를 직면할 때의 캄캄함은 조용한 시간의 흐름과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점차 밝아진다. 그러면 길이 보이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통합적 요점이 떠오르는 감격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숨은 그림 속의 그림처럼 말씀의 실체가 명료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정하라
중요한 것은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설교는 얼마나 개인적이고 자의적이었던가? 공교회적 질서 안에 있지 않은 설교는 자칫 목회자 자신의 의도나 편협한 주관에 종속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필자 역시 나름대로 균형 잡힌 성서해석(Text)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삶의 자리(Context)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건강한 설교를 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목회의 연수가 늘어갈수록 한 ‘개인’으로서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옹색한 것인지를 실감하곤 했다.
“어떻게 예수를 닮아갈 것인가?” 이 물음은 결국 오랜 그리스도교 역사와 그 공교회적 질서 안에서 다듬어져온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해주었다. 마음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시작된 ‘교회력과 주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는 교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성도들은 매년 반복되는 교회력의 공전 속에서 차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묵상하며 그분을 닮으려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매주의 성서일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은혜를 성서 자신의 목소리로 전해 주었고, 렉시오 디비나 자료로 만들어진 해당 주일의 말씀 묵상은 성도들의 한 주간의 영성생활을 지탱해 주었다. 마음을 정하면 우리에게는 변화가 찾아온다.
이상과 같이 교회력과 성서일과, 그리고 그에 따른 말씀 묵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당위성을 인식하고 마음도 먹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막연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 이야기에서는 ‘묵상된 성서일과를 토대로 설교를 구상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을 실례를 들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일치가 전제되지 않은 다양성은 천박하기 그지없다. 부디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와 한국 교회가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목회의 중심에 회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고 공교회적 질서를 회복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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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1 예배의 삼위일체(교회력, 성서일과,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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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 기획 3 성서일과를 따른 설교 기획 및 원고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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