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환대歡待, 깨어있음의 열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겔 34:11-16, 20-24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 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 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 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 와의 말씀이니라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 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21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 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 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응송 | 시 100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서신 | 엡 1:15-23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 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 함이니라
복음 | 마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 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 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 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 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 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 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 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 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25:40, 45을 묵상하십시오.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왼편에 있는 자들이 칭찬과 꾸중을 들은 기준은 무엇입니까?
② 겔 34:16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싸매 주는 양은 어떤 양이며, 없애고 심판하실 양은 어떤 양입니까?
③ 엡 1:15, 16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기도할 때에 에베소교회 성도로 말미암아 감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환대歡待, 깨어있음의 열매
오늘 우리는 마침내 교회력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오늘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왕이시고, 모든 창조물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교회력을 끝맺습니다. 때로는 끝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허무함으로 몰아갈 때가 있습니다. 김동리 시인은 '밀다원 시대'에서, 부산에 도착해 역마당에 발을 딛는 주인공의 심정을 '끝의 끝', '막다른 끝'이라 묘사하며,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虛無)의 공간으로 떨어질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부산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부산 중에서도 해운대에서 사는 우리는 지금 우리는 공간적으로 '끝의 끝', '막다른 끝'에서 살며, 시간적으로도 끝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정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해의 교회력의 끝인 오늘은 그리스도와 함께 맞이하는 영적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인 오늘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왕국주일' 혹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 부르는데, 이 기념일이 제정된 성서적 배경은 요 18:37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리스도의 이 선언을 배경으로 시작된 왕국주일을 공교회(公敎會)가 교회력의 끝에 배치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 의미에서 교회력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고, 우리 신앙생활의 총체적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 되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권력이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그리스도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왕'이든 '주님'이든 의미는 같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우주와 모든 만물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 주님의 나라가 세상과 교회와 인류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福音)이라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나의 왕이신 주님께 통치를 받는 것은 선포된 복음을 삶으로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력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할 일은 나의 왕이신 주님과의 대면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성경과 복음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 왕이신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심판하시는 주님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종말의 때에 다시 오실 주님은 심판의 왕으로 오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목자로서의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주님 또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웃을 사랑하며 산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을 엄격하게 구별해서 심판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구약성경과 복음서의 말씀이 보여주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심판도 하신다. 인생에는 끝이 있으며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 엄중함을 가장 실감 있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최후 심판을 보여주는 세 개의 비유가 연속해서 등장합니다. 1-13절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 비유이고, 14-30절은 달란트의 비유이며, 오늘 복음서인 31-46절은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입니다. 각각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첫째 비유에서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에게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마 25:13). 둘째 비유에서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종에게 주인이 이렇게 판결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 그리고 오늘 복음서인 셋째 비유 역시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는 단호한 결론적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세 비유 모두 심판을 주제로 합니다. 그런데 그냥 심판이 아닌 최후의 심판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이미 지나가버린 심판입니다. 회개하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인 자비의 시간을 놓치면 엄격한 심판의 시간만이 남게 됩니다. 바로 그 사실을 주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마 25:31-33
이 비유는 매우 중요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인자가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공간적으로는 인자의 영광의 보좌 앞입니다. 인자의 보좌 둘레에는 천사들이 서 있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실로 엄청난 순간인데, 이 종말론적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왕'으로 그리고 '심판자'로 계시하십니다. 이 비유는 기승전결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두 그룹이 대조되어 있는 형식을 가집니다. 예컨대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겠다는 것은 심판의 명료성을 보여줍니다. 즉 제3의 자리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오직 최후 심판의 순간에는 옳거나 아니면 틀리거나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모두 섞여 살고 있습니다. 의로운 이들과 사악한 이들이 나란히 섞여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별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날에는 명료히 구분됩니다. 먼저 임금은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며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임금의 선언을 따라 이들은 정 반대의 운명을 맞이합니다. 한쪽은 그들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고(마 25:34), 한쪽은 마귀를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갑니다(마 25:41). 이 극명한 대조는 문학적으로 독자들을 결단으로 인도합니다. 나는 오른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왼 편에 설 것인가? 그러면 각각 오른 편과 왼 편에 설 자가 갈라지는 그 심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에 그 답이 나옵니다.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마 25:34-36
지금 임금의 오른편에 세워진 사람들은 그 동안 살아온 삶의 결과로 그 자리에 선 것인데, 그것은 임금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이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처했던 어려웠던 순간들이 오늘 말씀에 여섯 가지로 나옵니다. 주림, 목마름, 나그네 됨, 헐벗음 그리고 병듦과 옥에 갇힘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당시 사람들이 처해있던 보편적 현실이었고, 주님은 그 현실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곡하고 장례에 참예하는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은 자에게 보이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살았을 때의 돌봄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너희가 나를 돌아보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시오.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 마 25-37-39
의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임금의 대답이 놀라웠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마 25:40
너희가 그 동안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대해온 그 자세가 곧 나를 대하는 자세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임금은 당시 사람들이 무수히 지나쳐 온 그 작은 자들이 곧 자기였다고 말하는데, 나도 부지중 주님을 주림과 목마름과 나그네 됨과 헐벗음과 병듦과 옥에 갇힌 가운데 방치해 둔 채, 내 만족에 겨운 신앙생활을 해온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주님 말씀대로라면 내가 무심히 스쳐 지나온 내 주변 사람들이 곧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왼편에 있던 자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 마 25:41-43
이들도 주님께 반문합니다.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 마 25:44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 마 25:45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도,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도 그들의 공통된 반응은 '우리가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무얼 말합니까?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당시의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 주면서도 그것이 곧 주님을 돌아보는 것임을 몰랐고,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당시의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그것이 주님을 외면하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임하는 복과 저주는 부지중(不知中) 일상의 삶에서 이미 결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임금은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부터 하지 않고,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축복부터 먼저 하는 것일까요? 혹자는 이 장면에 대해, 주님께서는 칭찬부터 먼저 하시고, 꾸지람은 나중에 하시는 걸 선호하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만,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해석에 따르면, 심판은 사실상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로서 앞의 두 비유를 꼽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의해 심판을 받았고(마 25:1-13),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게으른 종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에 의해 심판을 받았습니다(마 25:14-30), 그렇듯 왼편으로 분류된 자들도 오른 편에 분류된 이들에 의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 중 누구의 모습일까요? 중요한 것은 소외된 자들을 대해온 내 모습에 따라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불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러한 해석은 논란을 불러올 여지가 있습니다. 마치 구원의 기준이 믿음이 아닌 선행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전체의 경향으로 볼 때, 이웃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닌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실천이라 하겠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전기를 쓴 마이클 앤드루 포드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환대란 손님에게 집중하는 능력이며(집중), 손님이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능력이다.(공동체)", "환대는 다른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홀로'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힘을 숭상하고, 사회적 강자와 약자를 만들어내는 제국주의적 삶은 예수님과의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보다 제국주의적 삶의 방식에 더 예민하게 길들여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소외된 이웃들은 모두 내 곁에 다가오신 나의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들을 환대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을 외면하고는 절대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겔 34:2-6절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목자들의 게으르고 포악한 모습을 꾸짖은 바 있습니다. 그들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고, 털을 깎아서 옷을 지어 입으면서도 정작 양떼를 먹이는 것에는 게을렀습니다(겔 34:3).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주어야 하고,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은 포악하게만 굴었습니다(겔 34:4). 그런 거짓 목자들을 꾸짖은 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겔 34:11b-15
행여 먹구름이 덮여 흐리고 캄캄한 날일지라도 흩어진 모든 곳에서 찾아오시겠다는 말씀에서 그들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의 약속 끝에 엄중한 경고도 잊지 않으십니다.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 겔 34:16a
여기까지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b). 살진 자와 강한 자, 그들은 누구입니까? 거짓 목자들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기생하면서 약한 백성들을 착취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염소 같은 자들이고, 그 내면은 오만함으로 가득 찬 자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내 마음이 마지막 심판을 자처하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서신서의 말씀에서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 엡 1:16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기쁨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준비된 기름으로 등불을 밝혀 신랑을 맞이했던 슬기 있는 다섯 처녀처럼, 예수님 향해 깨어있는 '신실한 믿음'이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는 믿음'이어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 맞아들이듯 사랑으로 환대하는 '실천적인 믿음'이어서, 기쁨과 사랑으로 오른 쪽에 앉으라 하시고,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테오판 수도자는 말씀하기를 "우리가 자신에게서 떠나면 하나님과 이웃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에게서 떠나 작은 자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깨어있음이, 우리 자신을 떠나 하나님과 이웃을 환대하는 사랑으로 열매 맺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작은 자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외면하지 않았는가?
② 일상에서 형제를 환대하며 더불어 공감하며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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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4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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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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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3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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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2주 너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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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1주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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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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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후 제1주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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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3.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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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제4주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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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3.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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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제3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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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제2주 하나님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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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3.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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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제1주 주를 바라고 기다리는 게 내 삶의 이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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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3.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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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환대歡待, 깨어있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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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3.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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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5주 소명召命, 깨어있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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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3.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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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4주 그런즉 깨어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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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3.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