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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제3주 변질된 회심과 온전한 회심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8-01-19 21:57
조회
1859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욘 3:1-5, 10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응송 | 시 62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 였다 하셨도다
서신 | 고전 7:29-31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 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복음 | 막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욘 3:5을 묵상하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 였을 때,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②고전 7:29-31을 묵상하십시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사 람의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③막 1:15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알렌 클라이더가 쓴 '회심의 변질'이란 책이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강조하였던 회심이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지를 조명한 책입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초대교회에서는 신념(Belief)에 변화가 찾아오고, 소속(Belonging)에 변화가 찾아오고, 행동(Behavior)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비로소 그것을 회심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그저 간단히 신념에 동의하면 회심한 것으로 여겨주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나 성도들을 들여다보면 알렌 클라이더의 이 진단이 결코 과장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오늘날 우리의 회심이란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모릅니다. '회심의 변질'에서 인용된 다른 글에 의하면, 회심이란 '삶의 방식의 재구성이고, 가치체계의 재구성'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킬 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회심이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았고,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비 신자들에게도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비 신자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윤리적 삶을 살 것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준수하는 경우에만 형제자매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군인이라면,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야만 신앙문답 예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자가 초대교회의 높은 기준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교회의 신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어떻게 그렇게 번성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지독한 회심'이 세상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드높은 회심'이 세상의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지독한 회심, 드높은 회심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기독교 공인 이후로 축소되고, 변질되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평화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제국의 안전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변질되었고, 귀족의 신분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벗지 않으면 아예 세례조차 베풀지 않던 교회는 오히려 귀족들을 교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례를 받고자 할 때, 그에 응당한 삶의 변화를 요구했던 교회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고자 할 때, 투구를 쓴 채 물속에 들어가도록 허용하며, "하나님이 왕의 군대에 더 큰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며 아부가 담긴 축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하고 소외된 자들이 영글어낸 변화의 열매를 통해 성장했던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더 큰 성장을 위해 복음을 강요하고 협박해서 개종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점점 세상을 역류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의 주류에서 헤엄치는 지배종교로 변질되어갔습니다. 회심의 변질은 교회와 성도의 변질로 이어졌고, 회심의 타락은 교회와 성도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회심이란 무엇입니까? 과거의 잘못된 삶에서 올바른 삶으로의 '돌이킴(turning)'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 모두에게 바로 그런 회심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이 요청을 무겁게 받아들여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가 뚜렷한' 진정한 회심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때에 대한 '무심함'이 우리의 회심을 변질시키지 않았는가?
②때에 대한 '예민함'이 우리 회심을 온전함으로 이끌었는가?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욘 3:1-5, 10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응송 | 시 62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 였다 하셨도다
서신 | 고전 7:29-31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 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복음 | 막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욘 3:5을 묵상하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 였을 때,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②고전 7:29-31을 묵상하십시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사 람의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③막 1:15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변질된 회심과 온전한 회심
신앙생활 혹은 영성생활이란 인간의 현실을 초월하거나 자기와 분리되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창조하신 나 자신과의 진실한 만남이고, 나의 나 됨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대개 잘생기고 똑똑하고 강한 나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그 열망이 '내가 아닌 나' 혹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나'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나약함과 진실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흙으로 돌아갈 육체로서의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회복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니니베의 이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안에 있는 보고(寶庫)로 들어가라. 그러면 하늘과 만날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내면과 하늘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내면을 바라봄으로서 하늘도 볼 것이다. 하늘나라로 향하는 길은 네 안에, 네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다. 죄를 끊어버리고 너 자신 안으로 들어가 잠겨라. 그러면 네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발견할 것이다."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말씀하심으로서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구도자적 삶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니니베의 이삭의 표현대로라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구도의 삶을 살며 자신의 내면에 있는 보고(寶庫)로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0, 51)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오랜 시간 구도하며 다듬어 온 내면의 보고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천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십니다. 즉 그 동안 나다나엘이 다듬어 온 내면을 통해 마침내 하늘과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야 합니다. 거기서 '나약한 나', '흙으로 돌아갈 육체로서의 나'와 진실하고 치열한 만남을 가지고, 자신의 나약함과 거짓됨에 절망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 돌아섬이 바로 회심(悔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부인되는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그 어떤 질적 변화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약한 나'를 진실하게 만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아서셨습니까? 여러분은 '흙으로 돌아갈 육체로서의 나'와 진실하게 만나고, 그 진실한 만남의 결과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셨습니까?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한결같이 '때의 임박성' 안에서 회심을 촉구하는 말씀들입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요나 선지자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고 경고합니다. 40일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회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긴급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때의 임박성' 만큼이나 긴급하게 행동합니다.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 욘 3:4
'때'를 예민하게 받아들인 그들의 회심이 그들의 인생 전체를 구원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적 절박성의 이야기는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도 민감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 고전 7:29-31
여기에서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는 말씀은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 역시 '시간의 절박성' 안에서 고린도 사람들의 회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으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기쁨이 있는 사람은 기쁨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가정이나, 삶의 희로애락이나, 상거래 등 인간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가치관도 하나님 앞에서의 영성생활보다 우선할 수 없으니, 비록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세속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이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현세의 시간 안에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은 임시적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에 우리의 시선을 두고 '그 나라에 합당한 인물'로 사는 것입니다.알렌 클라이더가 쓴 '회심의 변질'이란 책이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강조하였던 회심이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지를 조명한 책입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초대교회에서는 신념(Belief)에 변화가 찾아오고, 소속(Belonging)에 변화가 찾아오고, 행동(Behavior)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비로소 그것을 회심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그저 간단히 신념에 동의하면 회심한 것으로 여겨주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나 성도들을 들여다보면 알렌 클라이더의 이 진단이 결코 과장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오늘날 우리의 회심이란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모릅니다. '회심의 변질'에서 인용된 다른 글에 의하면, 회심이란 '삶의 방식의 재구성이고, 가치체계의 재구성'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킬 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회심이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았고,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비 신자들에게도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비 신자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윤리적 삶을 살 것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준수하는 경우에만 형제자매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군인이라면,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야만 신앙문답 예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자가 초대교회의 높은 기준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교회의 신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어떻게 그렇게 번성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지독한 회심'이 세상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드높은 회심'이 세상의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지독한 회심, 드높은 회심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기독교 공인 이후로 축소되고, 변질되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평화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제국의 안전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변질되었고, 귀족의 신분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벗지 않으면 아예 세례조차 베풀지 않던 교회는 오히려 귀족들을 교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례를 받고자 할 때, 그에 응당한 삶의 변화를 요구했던 교회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고자 할 때, 투구를 쓴 채 물속에 들어가도록 허용하며, "하나님이 왕의 군대에 더 큰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며 아부가 담긴 축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하고 소외된 자들이 영글어낸 변화의 열매를 통해 성장했던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더 큰 성장을 위해 복음을 강요하고 협박해서 개종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점점 세상을 역류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의 주류에서 헤엄치는 지배종교로 변질되어갔습니다. 회심의 변질은 교회와 성도의 변질로 이어졌고, 회심의 타락은 교회와 성도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회심이란 무엇입니까? 과거의 잘못된 삶에서 올바른 삶으로의 '돌이킴(turning)'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 모두에게 바로 그런 회심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이 요청을 무겁게 받아들여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가 뚜렷한' 진정한 회심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막 1:14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요한이 잡힌 후' 라는 다소 어두운 상황설정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볼 때는 요한이 잡힌 것에 대해 그다지 무게를 두지는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이 잡힌 후' 라는 상황 설정은 그저 세례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활동 사이의 어떤 연속성을 말하기 위한 마가의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도 요한이 잡힌 것에 대해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저 요한의 사역만 이어받아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막 1:15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때'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처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구별되는 시간 개념으로 '카이로스(χαιρὸς)' 즉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시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가에 의하면 이 '때'가 찼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완료 수동형입니다. '때'가 밖으로부터의 어떤 힘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힘이 '때가 차게' 함으로서 목적하고 있는 건 과연 뭘까요?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구약의 때가 차고 신약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으며, 요한의 때가 차고 예수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으며, 흑암의 때가 차고 구원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때가 지금 막 찬 것입니다.(단 7:22, 겔 7:12) 그래서 마가는 '때가 찼다'는 선언에 이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 세우는 나라가 아닌, 역사 밖에 세우는 나라였습니다. 주님은 요 18:36에서 그 나라를 '내 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주님이 왜 그렇게 절박하게 회개를 촉구하는지 설명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현존해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밖에 머물러 있던지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 주님은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회개하는 것이고, 하나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시간적 절박성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변화에의 절박성을 우리에게 더해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회개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고, 회개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란 지금까지 길들여져 온 내 삶의 방식을 근원에서부터 뒤집어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셨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나'를, '자아'를 붙들고 있다는 것은 내가 회개를 포기했다는 증거이고, 내가 하나님 나라 사람이 아니라 '그 나라 밖의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이제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막 1:16-20
가까이 왔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현존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응답의 표본은 주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시던 날 그들의 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부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 장면에서 정말 인상적인 것은 부름이나 응답이 똑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오늘 복음서에서 '곧'이라는 부사를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입니다.(막 1:20) 그리고 한 번은 제자들의 응답에서입니다.(막 1:18) 주님께서 '곧' 부르시니 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주님의 신속한 부르심 앞에서 제자들은 '곧' 과거를 떠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회심이란 그렇습니다.신속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생각해보고, 계산해보고, 뒤돌아보면 우리는 주님을 영영 따라나서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성서적 전통을 이어받아 삶의 총체적 변화로서의 회심(悔心)을 강조했습니다. 고든 스미스는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이란 책에서, 훌륭한 회심의 7가지 요소를 정리했습니다. 첫째, 믿음 즉 지적 요소의 회심입니다. 둘째, 회개 즉 진정한 참회입니다. 셋째, 용서에 대한 확신입니다. 넷째,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다섯째, 물세례입니다. 여섯째,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일곱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회심이 결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심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거쳐 거듭거듭 일어나는 영속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변질되고 타락해온 회심으로부터 다시 회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때에 대한 '무심함'이 우리의 회심을 변질시키지 않았는가?
②때에 대한 '예민함'이 우리 회심을 온전함으로 이끌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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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제3주 변질된 회심과 온전한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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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18.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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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제2주 나는 '성령의 전(殿)'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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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18.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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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제1주 예수님의 세례와 삼위일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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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18.0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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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후 제 1 주 기다림의 신앙, 바라봄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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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18.0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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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제4주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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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17.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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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제3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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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17.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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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제2주 너희 내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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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17.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