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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해운대감리교회</title>
		<link>http://hudmc.org</link>
		<description>사랑하고 축복합니다 !</description>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7.19]]></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안기성청년필리핀 단기 선교</strong>
우리교회 안기성 청년(부경대학교 CCC 순장 훈련 중)이 7일(화)-23일(목)까지 필리핀 다바오에서 단기선교 중입니다. 교우들께서 기도로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단기 선교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소서.
⋅복음과 사랑을 가득 안고 나아갑니다. 믿음과 담대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영육 간의 강건함 허락하시고, 주 안에서 성장하는 시간 되게 하소서.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함께 연합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시간되게 하소서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9주차 녹색 실천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닙시다.(삿 6:19)
⋅한 줄 기도 “한번ﾠ쓰고ﾠ버려지는ﾠ것이ﾠ없도록, 일상의ﾠ실천ﾠ습관을ﾠ만들 어ﾠ나가게ﾠ하소서.”
⋅잠깐의ﾠ편리함을ﾠ위해ﾠ사용되는ﾠ비닐봉지가ﾠ분해되기까지ﾠ최소 20년에서ﾠ최대 1000년의ﾠ시간이ﾠ걸립니다. 장바구니ﾠ휴대를ﾠ생활화합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8 Jul 2026 00:05: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7.12]]></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1]]></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안기성청년필리핀 단기 선교</strong>
우리교회 안기성 청년(부경대학교 CCC 순장 훈련 중)이 7일(화)-23일(목)까지 필리핀 다바오에서 단기선교 중입니다. 교우들께서 기도로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단기 선교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소서.
⋅복음과 사랑을 가득 안고 나아갑니다. 믿음과 담대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영육 간의 강건함 허락하시고, 주 안에서 성장하는 시간 되게 하소서.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함께 연합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시간되게 하소서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8주차 녹색 실천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태적 여행을 계획합시다.
⋅한 줄 기도 “쉼의 여정 속에서 창조세계를 깊이 만나며, 자연과 상생하는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여행의 매순간 오감을 통해 창조세계의 소중함을 느끼고, 물, 토양 오염을 줄이기 위한 친환경 여행 물품을 준비하며, 여행과정에서도 물과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 합시다. 여행지에서도 적정 실내온도를 지킵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21:28: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자동차보험비교]]></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0]]></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sambowoonsu.co.kr"> 다이렉트자동차보험비교견적사이트</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0:39: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6주 감사, 은혜에 대한 좋은 응답]]></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9]]></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6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24:34-38, 42-49, 58-67</strong>
<strong>34</strong>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strong>35</strong>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strong>36</strong>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strong>37</strong> 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strong>38</strong>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strong>42</strong>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strong>43</strong>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strong>44</strong>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strong>45</strong>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내게 마시게 하라 한즉 <strong>46</strong> 그가 급히 물동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이르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낙타에게도 마시게 한지라 <strong>47</strong>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 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strong>48</strong>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strong>49</strong>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strong>58</strong>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strong>59</strong>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strong>60</strong>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strong>61</strong>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strong>62</strong>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strong>63</strong>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strong>64</strong>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strong>65</strong>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strong>66</strong>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strong>67</strong>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45
<strong>1</strong>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 | 으시며
○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 지극합니다
<strong>2</strong> 주님은 모든 것을 선대 | 하시며
○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 베푸십니다
<strong>3</strong>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 | 하오며
○ 주의 성도들이 주를 | 송축합니다
<strong>4</strong>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이오니
○ 주의 통치는 대대에 | 이르리이다
<strong>5</strong> 주님은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 붙들고
○ 비굴한 자들을 | 일으킵니다
<strong>6</strong>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 주시며
○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 하시나이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7:15-25a</strong>
<strong>15</strong>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strong>16</strong>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strong>17</strong>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strong>18</strong>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strong>20</strong>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strong>21</strong>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strong>22</strong>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strong>23</strong>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strong>24</strong>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strong>25</strong>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1:16-19, 25-30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6</strong>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strong>17</strong>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strong>18</strong>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strong>19</strong>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strong>25</strong>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strong>26</strong>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strong>27</strong>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strong>28</strong>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strong>29</strong>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strong>30</strong>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11:16-17절 묵상하십시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봅니까?

② 롬 7:25절 묵상하십시오. 죄의 법에 사로잡혀 힘겨워하던 바울이 감사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로 말미암음입니까?

③ 창 24:63절 묵상하십시오. 이삭은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그가 눈을 들었을 때 그를 향해 온 것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감사, 은혜에 대한 좋은 응답</h2>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5주이자, 맥추감사주일입니다. 24절기로는 소서(小暑)를 이틀 앞두고 있는데, 예년과 달리 장마전선이 늦게 찾아오다 보니 7월이 시작된 요즘에야 습도와 무더위를 체감합니다. 우리나라 농경문화에서는 이 즈음 보리추수를 마치기 때문에, 교회는 해마다 7월 첫째 주를 맥추감사절로 지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칫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곳간이 찬 다음에 드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명하는 맥추절은 그런 절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히브리들에게 맥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 23:16). 맥추절은 ‘완성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한 해 농사가 다 끝나기 전, 아직 절반의 밭이 비어 있는 채로, 이제 막 거둔 보리 첫 단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절기입니다. 수필가 한흑구는 ‘보리’라는 글에서 보리의 생애를 애틋하게 그려냈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大氣)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 찬 눈이 너의 온 몸을 덮어 엎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한흑구 ｢동해산문｣(도서출판 득수) 38쪽

땅 속에서 밟힐수록 강해지는 곡식, 혹한을 지나야만 이삭을 맺는 곡식, 그래서 보리의 감사는 편안함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칼날 같은 바람을 견디며 밟힘을 통과한 감사입니다. 오늘 맞이한 맥추감사절에 우리가 드리는 감사가 바로 그러한 감사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응송인 시편 145편은 ‘테힐라(תְּהִלָּה)’ 즉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인데, 찬송의 절정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 시 145:15-16</strong></p>
‘때를 따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이토(בְּעִתּוֹ)’는 ‘그의 때에’란 뜻입니다. 내가 정한 때가 아니라 그 분의 때에, 내가 요구한 방식이 아니라 그 분이 손을 펴시는 방식으로 양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사의 방향이 교정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시인의 눈은 식탁 위의 양식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양식을 내어주시려고 ‘펴신 손’을 보고 있습니다. 열매는 계절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손은 언제나 펼쳐져 있습니다. 감사의 근거를 열매에 두는 사람은 흉년에 감사를 잃지만, 펼쳐진 하나님 손에 두는 사람은 아직 반년이 남아있는 때, 아직 거두지 못한 밭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맥추감사란 바로 이 ‘펴신 손을 향한 감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는 이 감사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당신의 세대를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 마 11:16-17</strong></p>
장터의 아이들이 혼인놀이를 하자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장사(葬事) 놀이를 하자고 애가를 불러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기쁨의 가락에도, 슬픔의 가락에도 공감도 반응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금욕의 모습으로 오자 ‘귀신 들렸다’ 하고, 인자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는 자’라 합니다. 은총이 어떤 모양으로 찾아와도 거절할 꺼리를 찾아내는 마음, 주님께서 탄식하신 것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감사란 본질적으로 ‘응답’입니다. 피리 소리에 춤으로 응답하고, 애가(哀歌)에 눈물로 응답하듯, 은총에 응답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 응답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께서 손을 펴셔도, 때를 따라 양식을 주셔도, 심지어 아들을 보내 주셔도 감사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감사에 이를 수 있을까요? 주님은 성부께 드리는 감사 안에서 그 답을 보여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마 11:25</strong></p>
여기서 ‘어린 아이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피오스(νήπιος)’는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젖먹이들’을 가리킵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며, 오직 받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바로 그런 존재에게 열립니다. 소위 지혜롭고 슬기 있다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것’ 앞에서도 ‘내가 이룬 것’을 계산하지만, 젖먹이는 ‘받은 것’을 그저 ‘받은 것’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성취의 언어가 아니라 수용의 언어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속 큰 아들을 오래 응시하며, 아버지의 집에 늘 있었으면서도 감사를 잃어버린 그 마음이 곧 자신의 마음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사란 마음에 ‘절로 솟아나는 감정’이 아니라 매 순간 원망 대신 선택해야 하는 ‘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최종훈 옮김 ｢탕자의 귀향｣(포이에마) 112-123쪽
큰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사랑을 받으며 평생을 살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내 몫의 염소 새끼’를 바라보았기에 감사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 감사의 신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오늘 서신서의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내적 분열과 곤고함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절규하던 바울이, 바로 뒤 이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롬 7:25a</strong></p>
이 한 고백이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감사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카리스 데 토 데오(χάρις δὲ τῷ θεῷ)’인데, 직역하면 “하나님께 카리스를!”입니다. 헬라어에서 ‘카리스(χάρις)’는 ‘은혜’이자 동시에 ‘감사’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흘러내려올 때 그것은 ‘은혜’이고,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되돌아 흐를 때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혜와 감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강물의 내려옴과 되올라감입니다. 그러니까 감사란 내가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가 내 존재 안에서 되울리는 메아리입니다. 바울이 곤고함의 밑바닥에서 감사를 토해낼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형편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펴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손’ 즉 ‘은혜(카리스 χάρις)’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교회는 이 ‘카리스(χάρις)’라는 단어 앞에 ‘좋은, 선한, 잘’이라는 의미의 ‘유(εὖ)’를 붙여서, 성찬 식탁을 ‘유카리스티아(εὐχαριστία)’, 즉 ‘은혜에 대한 좋은 응답’이라 불렀습니다. 카리스(χάρις)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수직의 빛이고, 유(εὖ)는 그 빛을 받은 피조물이 그것을 좋게, 선하게, 잘 되돌려 드리는 각도입니다. 은혜(χάρις)를 받았을 때, 그것을 움켜쥐면 소유물로 전락하지만, 받은 은혜를 ‘잘(εὖ)’ 되돌려 드리면, 은혜(χάρις)가 은혜답게 받아들여진 상태, 은혜를 받은 자가 그것을 ‘잘(εὖ)’ 갚는 태도 즉 ‘은혜에 대한 좋은 응답(εὐχαριστί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에배를 ‘감사성찬예배’라고 부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이제 곧 우리가 나아갈 성찬 식탁은, 주님께서 당신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 차려주신 사랑의 식탁입니다. 우리는 깊은 감사로서 성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보면 노을진 저녁 하늘 아래 조용히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삭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 창 24:63</strong></p>
이 장면을 눈여겨보십시오. 어머니 사라가 죽은 후 저물녘 들판에 이삭이 홀로 서 있는데, 창세기 저자는 이때 그가 ‘슬퍼했다’고 말하지 않고 ‘묵상했다’고 전해줍니다. ‘묵상하다’라고 번역된 ‘수아흐(שׂוּח)’는 구약성경에서단 한 번만 사용된 말이라 해석하지가 쉽지 않지만,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도 ‘묵상하다’ 혹은 ‘기도하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LXX, Vulgate). 그러니까 그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소란한 장막을 떠나 고요한 들로 나아갔고, 저무는 하늘 아래서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한편으로는 눈앞에 닥친 결혼문제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눈을 들어 보니 그의 위로가 될 리브가가 낙타를 타고 오고 있었습니다(창 24:63-64). 감사는 어디서 자라나는 것일까요? 감사는 기도의 들녘에서 자랍니다. 감사는 묵상의 들녘에서 자랍니다. 소란함 속에서는 다가오는 위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처럼 고요한 때, 고요한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는 사람만이, ‘때를 따라’ 자기에게로 오는 은총을 알아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영적 전통 안에 ‘헤지키아(hesychia)’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고요와 적정’을 의미하는 용어인데, 그리스도교 영성형성의 핵심이 헤지키아 안에 담겨 있고, 헤지키아를 추구하는 영성을 헤지카즘(Hesycha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에 맞추어 재단할 수 없는 전적으로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헤지카즘 영성을 추구하는 헤지카스트들은, 모든 사념과 상상과 기억과 추론을 벗어난 고요와 적정의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합니다. 존재의 중심인 마음이 고요와 적정 상태를 벗어나 사념과 상상 혹은 기억과 추론에 휘둘려서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박효섭 목사님은 “마음의 근저에 이르면 무엇이 있는가?” 라고 물으시고, ‘헤지키아(고요, 빛, 평화로 가득한 하나님과의 일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계(nepsis)와 집중(prosoche), 항거(antilogia), 기도(proseuche)’라는 네 가지 연금술을 통해 영적 성장과 성숙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이때 가져야 할 감정이 바로 ‘펜토스(penthos)’ 즉 ’통회와 슬픔’을 통한 은총의 호소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전 기둥 뒤에 숨어 울던 세리나 예수님을 향해 울부짖던 소경 바디매오, 주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던 부정한 여인이었던 마리아,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둘째 아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근본 자세입니다. 이 슬픔의 자세에는 세 층위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보며 슬퍼하는 슬픔, 죽음을 기억하는 슬픔, 그리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일치에서 오는 기쁜(황홀한) 슬픔입니다. 박효섭 ‘마음에 이르는 길 – 예수기도(Path to the Heart - Jesus Pryaer)’ 12쪽
토마스 머튼과 같은 관상가들의 통찰을 빌려 부연하면, 이러한 기쁜 슬픔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본 눈물이며, 그 눈물이 열린 사람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가 된다고 했습니다. 동방 그리스도교 영적 전통 안에서 말하면 정념의 안개가 걷힌 맑은 지성이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의 뜻을 읽어내는 것과 같은 신비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 창 24:67</strong></p>
비록 어머니를 잃었지만 그러나 슬픔에만 빠져있지 않고, 고요한 들로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리브가를 보내셔서 위로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해의 절반을 지나 맥추감사절 들녘에 서 있습니다. 지난 반년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 밭의 절반은 익었으나 절반은 아직 비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거둔 것이 있고, 어떤 분은 밟힌 것밖에 없다고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리는 추운 겨울날 밟히면서 뿌리를 내리고, 맥추절은 완성이 아니라 첫 열매의 절기이며, 감사의 근거는 내 곳간이 아니라 때를 따라 펼치시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장터의 아이들처럼 은총 앞에서 무감각한 마음을 회개하고, 젖먹이처럼 ‘받은 것’을 그저 ‘받은 것’으로 받으며, 이삭처럼 기도와 묵상의 들녘에서 위로를 받을 때, 우리는 바울과 같은 감사에 이르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롬 7:25</strong></p>
이제 우리는 그 감사의 식탁, 유카리스티아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수직의 빛, 예수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 차려주신 사랑의 식탁, 우리는 이 은혜(χάρις)의 식탁을 감사로서 좋게, 선하게, 잘(εὖ)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에 대한 좋은 응답(εὐχαριστία)’입니다. 지나온 반 년 동안 주님의 은혜가 멈춤 없이 우리와 함께 하셨듯이 남은 반 년도 주님의 살과 피로 완성하신 파스카의 은혜가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남은 반년도 힘차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함 없이 욕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의 은총에 ‘좋은 응답(εὐχαριστία)’으로 반응하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04 Jul 2026 22:00: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7.05]]></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7]]></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맥추감사주일</strong>
지나온 시간 속에서 함께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해 첫 시간에 결심했던 것들을 다시 점검하고, 남은 반년을 새롭게 다짐하는 맥추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주일예배 해설</strong>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strong>③ 안기성청년필리핀 단기 선교</strong>
우리교회 안기성 청년(부경대학교 CCC 순장 훈련 중)이 7일(화)-23일(목)까지 필리핀 다바오로 단기선교를 떠납니다. 교우들께서 기도와 훙원ㄴ으로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단기 선교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소서.
⋅복음과 사랑을 가득 안고 나아갑니다. 믿음과 담대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영육 간의 강건함 허락하시고, 주 안에서 성장하는 시간 되게 하소서.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함께 연합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시간되게 하소서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 27주차 녹색 실천</strong>
⋅빨래가 충분히 모였을 때 세탁기를 사용합시다.
⋅한 줄 기도 “지구를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절제의 마음을 주소서.”
⋅세탁물을 모아 한 번에 세탁하는 것은 무심코 낭비되는 물과 전기를 아끼는일입니다. 일상의 작은 부스러기 같은 자원까지 귀하게 모으는 기다림으로창조 세계를 보전합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04 Jul 2026 21:41: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5주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6]]></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5주, 순교자기념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22:1-14</strong>
<strong>1</strong>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strong>2</strong>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strong>3</strong>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strong>4</strong>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strong>5</strong>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strong>6</strong>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strong>7</strong>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strong>8</strong>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strong>9</strong>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strong>10</strong>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strong>11</strong>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strong>12</strong>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strong>13</strong>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strong>14</strong>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3
<strong>1</strong>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 니이까
○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 | 시겠나이까
<strong>2</strong>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 | 하기를
○ 어느 때까지 | 하오리이까
<strong>3</strong> 여호와 나의 하나님, 굽어살피시고 대답해 | 주소서
○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 빛을 주소서
<strong>4</strong>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 하오며
○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 두렵습니다
<strong>5</strong>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 | 사오니
○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 기뻐합니다
<strong>6</strong> 내가 여호와를 찬송 | 하리니
○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 주심입니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6:12-23</strong>
<strong>12</strong>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strong>13</strong>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strong>14</strong>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strong>15</strong>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strong>16</strong>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strong>17</strong>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strong>18</strong>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strong>19</strong>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strong>20</strong>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strong>21</strong>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strong>22</strong>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strong>23</strong>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0:40-42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40</strong>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strong>41</strong>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strong>42</strong>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22:3절 묵상하십시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의 요구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② 롬 6:13절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누구에게 어떻게 내어주라고 합니까?

③ 마 10:42절 묵상하십시오. 우리 지체를 의의 종으로 내주는 것 가운 데 하나를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h2>
고려 말기 학자 이곡(李穀)이 쓴 한문수필 중에 차마설(借馬說)이 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었기 때문에 간혹 ‘차마(借馬)’ 즉 남의 말을 빌려서 탔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소유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데,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잠시 빌린 것인데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릇된 소유관념을 꼬집고 있습니다. 차마설에서 이곡 선생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尊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寵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 계집종과 사내종)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반성) 보려고 하지 않는다(終莫之省). 이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곡/탁양현 엮음 ｢가정집｣(e퍼플) 49쪽

만약 우리가 지금 내 수중에 있는 소유들을 다 내 것이라 여기고 반성할 줄 모른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내 것이라 여기는 그 무언가에 매여 미혹된 삶을 사는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에 매여서 사는 동안에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포기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을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포기하게 하십니다. 마치 갈대가 갈대밭에서 잘려나가듯, 지금껏 그의 존재의 근거였고, 삶의 터전이었으며, 그가 누려온 가장 익숙한 세계였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포기하고 “너는 ... 가라(레크 ... 레카 לֶךְ- לְךָ)”(창 12:1)시는 명령을 따라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이후로 아브라함은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란으로, 세겜으로, 베델 동쪽 산간지방으로, 네게브사막으로, 이집트로, 헤브론으로, 그랄로, 브엘세바 광야로 떠도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그는 그 삶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종의 몸을 통해 꿈에 그리던 자식을 얻습니다(창 16:15-16). 그런데 그 행복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하나님은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 포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토록 어렵게 얻은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창 21:12-13).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으로서 자기 핏줄을 포기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아”(창 22:1a)라시며 그를 부르십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는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라고 목적을 귀띰해줍니다. 그 목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히네니, הִנֵּנִי)”(창 22:1b). 창세기 22장 안에서만 아브라함은 이 대답을 세 번 합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히네니, הִנֵּנִי)”라고 하고, 7절에서는 이삭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히네니, הִנֵּנִי)”라고 하고, 11절에서는 천사에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히네니, הִנֵּנִי)”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 번의 대답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어떤 영혼의 사람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유대 신학자인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Man Is Not Alone)’에서 인간 성품의가장 값진 이상 중 하나로 경건(敬虔 piety)을 들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경건은 인간의 내심이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성스러움은 행위, 느낌, 생각의 궁극적 가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관심에 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의 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음성이 그의 행동과 결단의 방향을 다스리는 추진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이현주 옮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Man Is Not Alone)｣(한국 기독교연구소) 296-301쪽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내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고, 행위, 느낌, 생각이 하나님의 성스러움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언제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의 귀에 들려온 하나님의 요구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잔인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창 22:2</strong></p>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종교적 언어와 문화의 한복판에서 듣기에도 끔찍한 명령을 들은 것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소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끈질기게 하나님과 협상을 시도하던 아브라함입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18:23)라며, 남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을 가로막고 항변하던 아브라함이 정작 자기 문제 앞에서는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어지는 그의 행동을 보며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 그의 부성애(父性愛)를 또 한 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창 22:3</strong></p>
일말의 감정도 언어도 배제된 이 장면은 오직 아브라함의 행동만이 행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 순간의 아브라함을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라고 부르면서, 종들에게도, 사라에게도, 심지어 이삭에게도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 그의 침묵을 ‘윤리의 목적론적 정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라고 해석했습니다. 쇠얀 키르케고르/임춘갑 옮김 ｢공포와 전율｣(치우) 108-166쪽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보편적 윤리보다 더 높은, 설명될 수 없는 신앙의 역설(paradox) 앞에 아브라함이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 길을 걸은 후의 그의 모습을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창 22:4</strong></p>
고도의 압축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건조하게 보도합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 머물게 한 후에 번제에 쓸 나무를 가져다가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함께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들이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간의 침묵이 깨어지고 대화가 시작됩니다. 아들 이삭이 먼저 “내 아버지여”(창22:7) 하고 부르자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하고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부자가 처하고 있는 상황과 사뭇 다르게 이들의 대화는 일상처럼 평온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b) 하고 아들이 묻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후에 벌어진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러 주신 곳에 이른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습니다. 그런 후 이삭을 결박해서 제단 나무 위에 누이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 순간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카라바조의 ‘이삭의 희생(1603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어린 이삭의 얼굴과 칼로 그의 목을 겨누고 있는 아브라함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천사의 손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의 ‘아브라함의 희생(163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는 아브라함이 한 손으로 이삭의 얼굴 전체를 덮어 다가오는 칼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천사가 그 순간 급하게 손목을 잡아 칼이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동작을 그렸습니다. 이삭의 얼굴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지된 듯한 한 장면 안에서 아버지의 고통과 천사의 다급함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그림에서 그 동안 우리가 고백해온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상(像)은 해체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보는 하나님 상은 매정한 하나님, 잔인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오직 이삭에게 달려있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늘어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이삭이 살아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아브라함은 더 본질적인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삭이 비록 약속의 아들이고 아브라함의 미래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육의 것을 포기하고 영의 것을 얻는 영적 고양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삭을 통해 장차 늘어나게 될 ‘별보다 티끌보다 더 많은 자손’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해 해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3, 18)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이룰 큰 민족이 어떤 나라인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그냥 ‘큰 민족’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두고 약속하신 ‘그 나라’는 그냥 ‘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빵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육(肉)의 나라가 아니라 영(靈)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를 이루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자기 포기’라는 시험의 과정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자기 포기의 시험을 치열하게 겪어내는 동안 느슨하고 표면적이던 그의 신앙에 새로운 불이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제련의 과정을 통과함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주변에 흔한 ‘떡으로만 사는’ 그런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나라를 일굴 뿐 아니라, 믿음의 표상으로 굳게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 마 10:42</strong></p>
내 소유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은 감히 그 누구의 미래도 되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생애에 가장 행복하던 그 때, 네가 행복해 하는 바로 그 조건을 내려 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삼일 길을 걸어 끝내 이삭과 함께 도착한 그 여호와의 산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숫양은 그냥 이삭을 대신한 단순한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양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셔서, 그가 사흘 동안 걸었던 그 길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걸으실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사흘간의 담담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듯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과 무덤 속의 사흘이 성경에 하도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연민과 슬픔이 있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의 슬픔을 누르시고,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하나님은, 훗날 당신 자신에게 그 요구를 하시고, 스스로 그 요구를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 희생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이 모리아에서 죽으셨습니다. 칼로 이삭의 목을 찌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의 동작을 멈추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하며 울부짖던 당신의 외아들은 침묵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우리의 미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여호와 이레’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롬 6:13, 14</strong></p>
바울의 이 당부의 무게중심은 “드리라(파라스테사테 παραστήσατε)”에 있습니다. 16절과 19절에서도 반복되는 이 “드리라”는 본래 법정 용어이자 군사 용어로 “바치라”는 의미이기도 한데, 바울 사도가 이 단어를 제의적 언어로 전환시켜서 ‘봉헌’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도구인데, 누구에게 드리냐에 따라 용도와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이 이 당부의 핵심입니다.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면 우리 지체는 불의의 무기로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 지체는 의의 무기로 사용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대구법은 명료합니다. 오늘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행한 바침은 이 “드리라”라는 동사의 원형적 사건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 의의 병기로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연장인 이삭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이 순종이 되어 구원을 결실하는 표상이 되었습니다.

“드리라(파라스테사테 παραστήσατε)” 바울의 이 당부는 성찬상의 언어와도 만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눅 22:19)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내어주신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자기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봉헌 행위의 원형이자 근거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드리신’ 봉헌과 우리가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봉헌이 매주 성찬상에서 행해지고, 일상의 삶으로 확장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죽음 같은 시간을 통과해 영적 자식을 얻은 아브라함처럼, 죽음의 순간을 통과함으로 진짜 생명을 얻어낸 이삭처럼,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지체를 통해 구원의 지경을 넓히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은혜 아래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롬 6:14).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내 수중의 소유들을 내 것이라 여기며 살아가는가?

②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내 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27 Jun 2026 19:34: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6.28]]></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5]]></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순교자기념주일</strong>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의 피와 함께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복음 을 위한 선한 싸움에서 피 흘린 순교자의 희생정신과 신앙을 기억하고 계승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strong>② 맥추감사주일</strong>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함께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맥추감사주일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또 새해 첫 시간에 결심했던 것들을 다시 점검하고, 남은 반년을 새롭게 다짐하는 맥추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strong>③ 주일 성찬예배 해설</strong>
오늘부터 오후예배 시간 ‘주일 성찬예배 해설’을 진행합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성찬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 꼭 참석하셔서 예배생활에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 26주차 녹색 실천</strong>
⋅우리 식단의 탄소 발자국 계산해 봅시다.
⋅한 줄 기도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평화가 되게 하소서.”
⋅음식을 먹을 때, 영양과 칼로리 뿐 아니라 음식의 이동거리를 생각해 봅시다. 기후미식으로 모두를 살리는 식단을 준비합시다.(기후미식이란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면서 즐길 수 있는 음식,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염두에 둔 음식을 준비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6 Jun 2026 23:50: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4주 위대한 영혼으로 나아가는 근심]]></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4]]></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4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21:8-21</strong>
<strong>8</strong>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strong>9</strong>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strong>10</strong>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strong>11</strong>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strong>12</strong>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strong>13</strong>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strong>14</strong>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strong>15</strong>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strong>16</strong>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strong>17</strong>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strong>18</strong>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strong>19</strong>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strong>20</strong>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strong>21</strong>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86
<strong>1</strong>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 | 하오니
○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 응답하소서
<strong>2</strong>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 | 하소서
○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 구원하소서
<strong>3</strong> 주여 내게 은혜를 베 | 푸소서
○ 내가 종일 주를 | 부르옵니다
<strong>4</strong>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 보오니
○ 주여 내 영혼을 기쁨으로 | 채워주소서
<strong>5</strong>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 | 하시며
○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 후하십니다
<strong>6</strong>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 | 이시고
○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 들어주소서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6:1-11</strong>
<strong>1</strong>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strong>2</strong>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strong>3</strong>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strong>4</strong>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strong>5</strong>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strong>6</strong>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strong>7</strong>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strong>8</strong>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strong>9</strong>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strong>10</strong>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strong>11</strong>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0:24-39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4</strong>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strong>25</strong>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strong>26</strong>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strong>27</strong>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strong>28</strong>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strong>29</strong>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strong>30</strong>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strong>31</strong>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strong>32</strong>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strong>33</strong>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strong>34</strong>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strong>35</strong>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strong>36</strong>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strong>37</strong>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strong>38</strong>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strong>39</strong>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21:11-14절 묵상하십시오. 아들로 말미암아 근심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후에 어떻게 바뀝니까?

② 마 10:28절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고통에 직면해 있을 때에라도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③ 롬 6:11절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엇에 대하여는 죽고, 무엇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라고 말씀합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위대한 영혼으로 나아가는 근심</h2>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후기 작품인 ‘언어로의 도상(On the Way to Language)’은 사유가와 시인의 대화로 엮어져 있는 작품입니다. 즉 ‘사유(思惟)와 시작(詩作) 사이의 대화’라 하겠는데, 여기에서 사유가(思惟家)는 하이데거를 지칭하고, 시인(詩人)은 게오르그 트라클(Georg Trakl)과 슈테판 게오르게(Stefan Geo- rge)입니다. 게오르그 트라클이 원초를 향한 귀향의 시인이라면, 슈테판 게오르게는 낱말의 본질을 노래한 시인으로 손꼽힙니다. 게오르크 트라클은 자신의 시에서 인간 실존을 ‘타오르는 고문과 찌르는 가시에 버려진 분해된 형체’, ‘야생성에 의해 완전한 어둠으로 향하는 야생동물’에 비유합니다. 필멸의 존재들이 ‘낯선 무언가’를 따라갈 때, 그들은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 고독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 고독이 인간의 분해된 형태의 주형인데, 인간이 이 지점에 이르게 된 이유는 ‘어둠이 그를 인종, 부족, 가족과 같은 친족 관계와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낯선 사람’은 ‘따로 떨어져 있는 자’입니다.Martin Heidegger,On the Way to Language, trans. Peter D. Hertz (New York: Harper &amp; Row, 1971), pp. 169–171. Originally published asUnterwegs zur Sprache(Pfullingen: Neske, 1959).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처지를 이 트라클의 표현 안에서 보면 ‘가족에게 버림 받아 따로 떨어지고, 낯선 사람, 고독해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갈라지는 고독은 비단 하갈과 이스마엘만은 아니었습니다. 육의 자녀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내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도 스스로 낯선 고독에 처해졌다는 면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이야기’는 바로 앞에 있는 ‘이삭의 출생 이야기’로부터 빚어진 사건인데(창 21:1-7), 사건의 연속성 안에서 들여다보면 두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보인 비정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 때 사라의 반응을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노경(老境)에 낳은 아들’(창 21:7) 이삭이 그들에게 얼마나 벅찬 존재였을지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랑스러운 아기가 자라 젖을 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큰 잔치를 베풉니다(창 21:8). 고대 이집트나 앗시리아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기간이 대략 3살 정도였던 것으로 미루어, 이때 이삭의 나이도 3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영아(嬰兒) 사망률이 높았던 고대 사회에서 젖을 뗄 때까지 아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모두가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날 잔치 석상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창 21:9</strong></p>
창세기 저자가 이스마엘을 소개하면서 굳이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사라가 이스마엘을 얼마나 경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에 대한 에두른 표현일 것입니다. 사라가 보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희롱’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메짜하크, קחצמ’인데 ‘멸시하다’, ‘비웃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이 ‘적자(嫡子)’인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상실한 것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희롱하며 핍박했던 것 같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이 사건에 대해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다”(갈 4:29)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가뜩이나 경멸어린 시선으로 이스마엘을 보던 사라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격노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사태는 아브라함에게 매우 불행한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사라가 말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 창 21:10 공동번역</strong></p>
하갈과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엄연히 있음에도 ‘그 계집종과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을 향한 경멸을 담은 표현입니다. ‘내 쫓으라’는 사라의 요구는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밟아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 대해 지니고 있는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까지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함무라비 법전 등 고대 법(法)에 의해 하갈이 아브라함의 첩으로서의 합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갈을 내쫓으라는 사라의 요구는 표면적으로는 이삭이 희롱당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지만, 법적인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내심이 실제적 이유임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라의 입장에서는, 하갈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줘서 대를 잇고 싶어 했던 것은 사라였습니다(창 16:2). 그런데 하갈이 임신한 후 태도가 변해 자신을 멸시하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다”(창 16:5)라며 분을 터뜨리고, 그 상황이 곤란했던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창 16:9)라며 하갈의 운명을 사라에게 넘겨줍니다. 하갈이 배제된 강자들끼리의 대화였습니다. 그때부터 사라는 마음 놓고 하갈을 구박하기 시작했고, 하갈은 구박을 견디지 못해 임신한 몸으로 도망칩니다. 빈들에서 방황하던 하갈은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는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을 듣고 돌아와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두 여인의 갈등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아브라함의 문제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대를 잇자는 사라의 주장을 따른 것, 그 믿음 없음의 결과가 이 사태까지 온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심정을 창세기 저자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 창 21:11</strong></p>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과, 거기서 비롯된 우유부단함은 고스란히 근심거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근심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지금부터 아브라함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 창 21:12, 13</strong></p>
지금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네가 정작 해야 할 근심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목적으로 나아가는 근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로의 도상’에서 트라클의 시 ‘루시퍼에게’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고통은 영혼을 유일하신 분으로 이끌고,
그 안에서 영혼의 여정을 시작하게 합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영혼의 무거운 마음은 본질적인 존재, 즉
본성의 가장 먼 곳에 들어갈 때만 빛납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그것은 영혼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그 광채를 볼 때 일어납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위대한 영혼’입니다.</p>
하이데거는 트라클의 이 시 언어에 대해 ‘이 언어는 고립 속에서의 귀향, 자기 분해에서 통합으로 돌아오는 귀향의 노래’라고 분석하며, 트라클의 시가 기독교적인 방식의 언어인지, 어느 정도까지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인인지 그의 표현의 모호함으로 인해 사려 깊게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시어(詩語)는 성경의 세계에서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책 181-193쪽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음의 아버지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근심이 보다 영적인 것으로 승화되어서, 영혼에게 빛을 선사하는 근심, 위대한 영혼으로 나아가는 근심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생사를 보장 받을 수 없는 사막으로 매정하게 쫓겨나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면서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기막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 창 21:14</strong></p>
하나의 절에서 두 개의 장면이 교차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아브라함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끝내 내쫓김을 당하는 하갈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들은 약속이 있으니 더 이상 근심하지 않고 하갈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갈의 입장에서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브엘세바 광야로 하루아침에 내침을 당한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후로 벌어지는 하갈의 처지를 매우 적나라하게 그려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가죽부대에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지니,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 창 21:15 새 번역</strong></p>
이후에 전개되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협상을 성사시키는 장면(창 21:22-31)이 나오는데, 그 협상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소와 양을 주는 대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소와 양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우물을 확보하는 협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협상이 이루어진 곳은 바로 브엘세바였습니다(창 21:31). 이 브엘세바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가죽부대에 물이 떨어져 죽어가는 바로 그 광야입니다. 비정한 아버지가 소와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우물을 확보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는 그 땅에서 어린 자식과 그 어미는 정작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하갈과 이스마엘이 겪는 고통은 비단 물과 양식이 없어 죽는 고통만이 아닙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것 외에, 가족에게 버림 받고 낯선 사람, 고독해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비열한 인간의 역사를 뒤집고 새롭게 공의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 창 21:17, 18</strong></p>
‘언어로의 도상’에서 하이데거는 “거센 고통이 오늘날 영혼의 뜨거운 불꽃을 기르고 있네”(천둥번개, 175쪽) 라던 시인의 고백을 받아서 “이 거센 고통을 지켜주는 자 누구일까?”라고 묻습니다. 이들의 고통이 거세어진 상황에서, 그들에게 처음으로 들려온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뒤에 이어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 창 21:19</strong></p>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시자, 눈이 밝아진 하갈이 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영안(靈眼)을 뜨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에 겨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의 불꽃을 기르시는 분, 거센 고통에서 그들을 지켜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마 10:28</strong></p>
‘죽일 수 있는 육신’과 ‘죽일 수 없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몸도 영혼도 지옥에 멸하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정말 시선을 두어야 할 것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어쩌지 못하는 어떤 현실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능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하갈이 그랬습니다. 그녀가 광야라는 ‘현실’ 만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육신의 죽음을 직감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갈에게 말씀하시기를 시작하셨을 때, 하갈은 비로소 영의 눈을 떠서 몸도 영혼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선이 우리가 회복하고, 갖추어야 할 영적 시선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롬 6:10-11</strong></p>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르면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죽어야 할 나’가 있고, ‘살아야 할 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죽어야 할까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하여는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육에 대하여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의 영은 살 것입니다(롬 6:8). 이것은 대립적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육의 씨를 버렸을 때,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영의 목표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울부짖던 하갈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그녀는 자신과 이스마엘을 살릴 수 있는 샘물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울부짖는 자를 살리실 때, 그 과정을 통해 영의 불꽃을 회복시키시고, 단지 육신의 고통을 회복하는 것만이 아닌 영적 회복을 통해 참 생명을 보게 하십니다. 하갈이 발견한 그 샘물이 그녀와 이스마엘을 살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 앞에 차려진 성찬의 떡과 잔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샘물입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목마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생명의 샘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근심 가운데 계십니까? 그 근심에 시선을 빼앗겨, 바로 곁에 샘을 두고도 보지 못한 채 하갈처럼 울부짖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갈의 눈이 밝아져 곁에 있던 샘을 보았듯, 오늘 우리도 눈이 밝아져 이 떡과 잔 안에 감추어진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이 들려주는 영적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이 성찬의 식탁에서 생명의 떡과 잔을 모셔들이며, 지금 우리 머리 속을 휘감고 있는 온갖 근심들이 육적인 것을 지나 영혼에게 빛을 선사하는 근심, 위대한 영혼으로 승화시키는 불꽃이 되기를 바랍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내게 다가온 고통을 의미 없는 푸념으로 지나지 않는가?

② 고통이 신앙 안에서 내 영혼의 진보로 이어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21 Jun 2026 20:21: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6.21]]></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3]]></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 </strong><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strong>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strong><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9 Jun 2026 23:45: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6.21]]></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1]]></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2026 웨슬리 아카데미</strong>
웨슬리 아카데미를 은혜중에 마쳤습니다. ‘공학자가 본 창세기 연구 노트’ 강의를 통해 창세기를 이해하는 시야를 넓혀주신 김병수 권사님과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을 통해 로마서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집을 지어주신 강문구 권사님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② 창조 세계와 생태적 삶 ‘자연, 사랑, 돌봄’</strong>
⋅일시 : 오늘 오후 2시 ▶웨슬리 채플
⋅강사 : 은혜동산지기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어울려 살아가는 생태적 삶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strong>③ 주일 성찬예배 해설</strong>
다음 주부터 오후예배 시간 ‘주일 성찬예배 해설’을 진행합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성찬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 꼭 참석하셔서 예배생활에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5주차 녹색 실천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 이용합시다.
⋅“내 몸의 편안함보다 지구의 호흡을 먼저 배려하는 발걸음 되게 하소서.”
⋅차가 가득한 도로는 다량의 온실가스와 매연을 내뿜어 공기를 오염시킵니다. 주 1회 이상 자가용 열쇠를 내려놓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거나, 가까운 거리는 걸어가 봅시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발걸음이 지구를 숨 쉬게 하는 ‘새 길’이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9 Jun 2026 23:43: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3주 작은 실천이 큰 결실을 이룬다]]></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50]]></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3주, 환경선교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18:1-17</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strong>2</strong>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strong>3</strong>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strong>4</strong>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strong>5</strong>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strong>6</strong>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strong>7</strong>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strong>8</strong>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strong>9</strong>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strong>10</strong>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strong>11</strong>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strong>12</strong>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strong>13</strong>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strong>14</strong>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strong>15</strong>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strong>16</strong>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strong>17</strong>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trong>응송 | 시 116:1-2, 12-16</strong>
<strong>1</strong> 주님은 나의 사랑,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 | 주셔서
○ 내가 주님을 | 사랑합니다
<strong>2</strong> 내가 부르짖을 때마다 귀를 기울 | 이셔서
○ 내가 평생에 | 기도합니다
<strong>3</strong> 내게 주신 모든 | 은혜를
○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 - 까
<strong>4</strong>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 부르며
○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 갚으리로다
<strong>5</strong> 그의 경건한 자들의 | 죽음은
○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 귀중하도다
<strong>6</strong>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 종이요
○ 주께서 나의 결박을 | 푸셨나이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5:1-8</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strong>2</strong>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strong>3</strong>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strong>4</strong>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strong>5</strong>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strong>6</strong>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strong>7</strong>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strong>8</strong>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strong>복음 | 마 9:35-38</strong>
<strong>35</strong>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strong>36</strong>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strong>37</strong>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strong>38</strong>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18:2-8절 묵상하십시오. 낯선 이들을 보았을 때,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맞이하는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② 마 9:37-38절 묵상하십시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③ 롬 5:6-8절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연약할 때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작은 실천이 큰 결실을 이룬다</h2>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인 오늘은 또한 제 43회 환경선교주일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주일을 갓 지나 계속해서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맞이한 환경선교주일은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성찰을 갖게 합니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ϋrgen Moltmann)’은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y)’를 고백한바 있습니다. 삼위의 교제(koinonia)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삼위일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대한기독교서회) 171-185쪽

그의 이 고백 안에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의 교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모본삼아야 한다는 신학적 성찰이 배여 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은 좁쌀 한 알에 우주가 담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무수한 생명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생명이면서도 고리처럼 연결되고 연합된 큰 생명체로 존재합니다. 이 생명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 안에서 아름다운 우주를 이루어갑니다. 그래서 장일순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사람과 똑같이 존엄하게 봐야한다고 했습니다. 최성현 ｢좁쌀 한 알 장일순｣(도솔출판사) 36쪽

자연을 한 혈육으로 대하는 따뜻한 이 가슴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어떠한 자세로 한 혈육들을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여호와(창 18:1)와 천사들(히 13:2)을 대접합니다. 믿음에서 우러난 그의 따뜻한 배려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라시며 당신의 속마음을 그와 함께 나누셨습니다. 복음서에서 마태는 병들고 약한 무리를 지켜보시던 주님의 심정을 이렇게 전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 마 9:36</strong></p>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병들고 약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심정이 사랑으로 발현된 것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 롬 5:7-8 새번역</strong></p>
오늘 말씀들은 궁극적으로는 무더위에 지쳐있던 나그네를 대하는 아브라함의 자세, 혹은 병들거나 죄를 지은 이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가슴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이런 가슴들을 조금 확대해서 성찰해 보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참된 마음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하는데, 어쩌면 ‘그리스도인 됨’이란 이렇게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서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을 대하는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 창 18:1-5</strong></p>
‘날이 뜨거울 때에’란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오정 즈음(םויה םחכ 케홈 하욤)’을 뜻합니다. 태양이 하늘 중앙에 치솟아 올라 가장 뜨거운 시간, 대개 고대근동 사람들은 이때 식사와 함께 휴식을 취하는데, 아브라함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장막 어귀에 앉아 상수리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낯선 사람 셋이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 13절, 그리고 19:1절에 따르면 이 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둘은 천사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보기에는 그저 정오의 태양에 지친 사람 셋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눈여겨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을 향한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낯선 나그네들에게 자기를 좋게 보시면, 자기를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마음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라고 말합니다. 그는 나그네들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길어오고, 그들이 쉴 수 있도록 나무 아래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창 18:6-8</strong></p>
한낮의 더위에 지쳐있는 사람들의 허기와 목마름을 해결해주고 쉴 수 있게 해주기 위해, 마음도 행동도 급해져버린 아브라함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더욱이 처음 본 사람들임에도 마치 하인처럼 자세를 낮추어 시중을 드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람의 자태를 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온통 배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행여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마저 읽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사랑이듯이, 아브라함의 존재방식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읽다 보면 결국 하나님은 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창 18:17</strong></p>
지금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고 가시던 중입니다. 그런데 낯선 나그네를 지극히 배려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주님은 당신 속내를 털어놓으십니다. 이토록 사람을 귀히 여기고, 생명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생명을 살리는 길’을 귀띰해 주는 것이 옳다고 하나님께서는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들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때,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내가 하려는 것을 ○○○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라시며 우리를 통해 당신의 심판을 거두시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생태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빙하는 녹고 해수면은 상승하며, 폭염은 해마다 최고 기록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폭설, 집중호우, 가뭄 등 이상기후는 이미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고, 산불로 인해 수많은 식물과 동물이 주검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025년 3월 의성 산불로 인해 서울 면적의 1.73배인 10만ha의 임야가 불탔고, 2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의성 산불은 ‘괴물 산불’이라 불릴 만큼 심각했지만, 이곳에서 불타 죽은 수억, 수천의 곤충과 새, 동물의 이야기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실된 자원 정도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건을 빠르게 잊었습니다. 지구 자연이 훼손되고, 인간의 삶이 무너져내리고, 동식물이 고통스러워하는데 우리는 무감각합니다. 기후위기는 우리 일상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2025년 여름, 토마토 1kg이 11,000원, 상추 한 봉지가 5,000원이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먹거리와 생필품, 에너지 가격이 치솟는 이른바 ‘기후플레이션(Climateflation)’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그런 위기가 아닙니다. 경제적 안정, 개인의 성취, 가족의 건강과 행복 등등입니다. 그러나 질문해야 합니다. 지구의 생태 기반이 붕괴하고 있는데 인간의 건강과 번영이 가능한 것일까요? 인간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요?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하나님의 흡족함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요? 우리는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을 살고 있습니다. AI(인공지능)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지구가 하나의 생활권이 되고, 첨단 의료기술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며 보다 건강한 삶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후위기,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양극화, 사회 내 갈등, 팬데믹의 출현, 만연한 정신적 피폐함, 각종 중독 같은 사회 병리적 현상은 심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끊임없는 전쟁과 폭력은 우리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4년 넘게 지속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 탄소중립의 의지를 꺾어놓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에 의한 중동 전쟁은 보편적 인권의 가치마저 무시했습니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란 전쟁 발발 이후, 2주 간 발생한 탄소 배출량이 아이슬란드의 연간 탄소 배출량을 능가했습니다. 전쟁은 인간과 동식물을 살해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며 전 세계인을 무기력과 공포에 몰아넣었습니다. 게다가 탄소배출은 수치로 계산되지 않을 만큼 막대했고, 원유 확보가 생존과 직결되면서 세계는 안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군비시설 강화에 나섰습니다. 지구를 살리고 인류의 종말을 늦추고자 연대했던 탄소중립에의 의지는 좌절되었고, 그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 같은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을 살리기 위해 급히 달리고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 같은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것들을 불쌍히 여기신 그 심정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매우 역설적인 표현을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롬 5:3a</strong></p>
누가 환난이 즐겁겠습니까? 그러나 이익과 아무 관계없는 일에 몸을 바쳐본 사람은 그로 인한 환난이 왜 즐거움이 될 수 있는지를 압니다. 죄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 사역에 매진하고, 파괴된 창조세계를 살리는 일에 힘을 쏟는 일은 내 이익에도 아무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 그로 인한 고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생명을 살리고, 창조세계를 살리는 일에 나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 5:3a)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롬 5:3b-4</strong></p>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서서 강하게 밀고 나가는 저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인내의 뿌리는 사랑에 맞닿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또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롬 5:5-8</strong></p>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죽음에서 살아난 존재들입니다. 우리 생명 살리자고 하나님께서는 저 오랜 옛날, 고대 세계에 살던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나게 하셨고, 심지어 당신 아들마저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는데, 그 꺽이지 않는 사랑은 우리가 연약할 때 더 강해졌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으로 다른 생명들을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생명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생명들 말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길 잃은 날의 지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p>
<p style="padding-left:40px;">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p>
<p style="padding-left:40px;">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p>
<p style="padding-left:40px;">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p>
<p style="padding-left:40px;">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p>
<p style="padding-left:40px;">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p>
<p style="padding-left:40px;">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p>
주님은 참으로 옳은 일은 겨자씨 한 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작은 행동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사람을 살리려면 내 곁의 사람을 먼저 사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강을 살리려면 물 한 컵부터 아끼고, 일회용품 줄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무와 푸른 숲과 열매를 살리려면 종이 사용 줄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작은 행동 속에 큰 행동이 있고, 작은 진보 속에 큰 진보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모본 삼아 먼저 우리교회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이루고, 물 한 컵 아끼고, 종이컵 하나 아끼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겨자씨만한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거대한 우주의 회복을 이루실 것입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좋아하신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가?

②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생명들을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4 Jun 2026 21:12: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6.14]]></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9]]></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환경선교주일</strong>
오늘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제43회 환경선교주일입니다. 모든 창조세계와 생태계는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창조세계와 생태계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웃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사라지는 안타까움 속에서도 창조세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작은 실천을 감당하는 녹색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strong>②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4주차 녹색 실천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사용합시다.
⋅한 줄 기도 “편리함보다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절제의 마음을 주소서.”
⋅편리함을 위해 무심코 쓰는 일회용 컵은 분해되는데 수백 년이 걸립니다. 나 한 사람의 작은 불편함이 지구 전체의 아픔을 돌보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개인 텀블러를 챙깁시다.

<strong>③ 2026 웨슬리 아카데미 |</strong>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제5강 결론을 대신하여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신앙생활의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3 Jun 2026 01:04: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6.14]]></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8]]></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 <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strong>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strong><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3 Jun 2026 01:02: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다이렉트자동차보험비교]]></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7]]></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usjsc.kr"> 자동차보험비교</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김민정]]></author>
			<pubDate>Mon, 08 Jun 2026 20:04:5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2주 너 자신을 위하여 가라]]></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6]]></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2주, 평신도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12:1-9</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strong>2</strong>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strong>3</strong>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strong>4</strong>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strong>5</strong>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strong>6</strong>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strong>7</strong>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strong>8</strong>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strong>9</strong>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33
<strong>1</strong>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 | 워하라
○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 할바로 - 다
<strong>2</strong>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 | 하 - 고
○ 열 줄 비파로 | 찬송하여라
<strong>3</strong>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 | 하시며
○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 충만하도다
<strong>4</strong>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어 | 졌으며
○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 이루었도다
<strong>5</strong>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 서 - 고
○ 그의 생각은 대대에 | 이르리로다
<strong>6</strong>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 나라들
○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 복이 있도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4:13-25</strong>
<strong>13</strong>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strong>14</strong>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strong>15</strong>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strong>16</strong>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strong>17</strong>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strong>18</strong>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19</strong>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strong>20</strong>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strong>21</strong>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strong>22</strong>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strong>23</strong>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strong>24</strong>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strong>25</strong>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9:9-13, 18-26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9</strong>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strong>10</strong>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strong>11</strong>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strong>12</strong>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strong>13</strong>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strong>18</strong>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strong>19</strong>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strong>20</strong>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strong>21</strong>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strong>22</strong>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strong>23</strong>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strong>24</strong>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strong>25</strong>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strong>26</strong>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12:1절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② 롬 4:18절 묵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는 말씀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마 9:9절 묵상하십시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로서의 마태의 모습과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일어나 따르는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너 자신을 위하여 가라</h2>
13세기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수피 시인 루미의 ‘마스나비(Masnawi)’는 ‘갈대피리의 슬픔’으로 시작합니다.

이별의 괴로움을 부르짖는 갈대의 이야기를 들어라.
갈대밭에서 잘려나온 나의 슬픔을 모두가 슬퍼한다.

내 사랑의 아픔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별로 조각조각 난 가슴을 가진 이가 필요하다.

자신의 뿌리에서 잘려나온 모든 이는
뿌리와 연결되어 있던 처음 그때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나는 모두에게 신음한다.
행복한 이에게도 불행한 이에게도 나의 고통을 신음한다.

... 갈대의 울음은 바람이 아닌 불꽃이다. 잘랄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정제희 옮김 ｢마스나비｣(시공사) 17쪽 ▶‘마스나비(Masnawi)’는 페르시아의 시(詩) 형식 이름인데, 오늘 날에는 ‘마스나비’ 하면 대부분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 루미의 ‘내면의 의미를 담은 시(혹은 영적 노래)’로 이해합니다.

루미는 갈대가 갈대밭에서 잘려나가는 순간의 그 ‘고통스러운 분리’가 바로 울음이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갈대밭에 그대로 있는 갈대는 울지 않습니다. 분리되지 않은 존재는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갈대는 잘려나감으로써 비로소 울 수 있게 됩니다. 루미에 따르면 바로 이 분리와 고통과 울음이 인간을 성숙함으로 이끄는 결정적 조건입니다. 그 성숙함은 분리와 외로움이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잘림에서 비롯된 비워짐이 가져다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갈대피리는 갈대를 잘라야 만들어지고, 자른 후에 속을 비워야 소리가 납니다. 인간의 성숙 과정도 그렇습니다. 무언가에 잘리고 상실해 봐야 인간 안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빈 공간이 비로소 깊은 것을 받아들이는 자리가 됩니다. 한 번도 무엇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은 깊이가 없습니다. 슬픔, 결핍, 좌절이 없으면 모든 것이 표면에서 끝납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바로 이 분리로부터 비롯되는 영적 성숙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고향을 떠난 것, 마태가 세관을 떠난 것은 갈대가 갈대밭에서 잘려나가는 순간입니다. 이 분리가 없었다면 성숙도 없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아브람 이야기를 먼저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 12:1</strong></p>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여기가 바로 아브람에게는 갈대밭이었습니다. 이곳은 그의 존재의 근거이고, 삶의 터전이며, 그가 지금껏 누려온 가장 익숙한 세계입니다. 아브람은 이곳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곳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 가라(레크 ... 레카 לֶךְ- לְךָ)” 이 명령은 직역하면 “너 자신을 위하여 가라”입니다. 이건 단순한 여행 명령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길을 나서라는 울림을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랍비 전통에서는 이 표현을 ‘자기 본성의 발견을 위한 여정’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자세히 보면 아브람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만 하십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미래 완료형으로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너에게 보여줄 수 없지만 미래에는 보여주겠다는 말씀인데, 우리는 그 땅이 가나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고향 땅에서 잘려 나갈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불확실한 미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안해하는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더 체결해 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창 12:2</strong></p>
그를 한 민족의 아버지로 세워 구원사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배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아브라함의 결단입니다. 자기 존재의 근거이고, 삶의 터전이며, 가장 익숙한 세계인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고수하던지, 아니면 약속을 따라 불편을 감수하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던지 입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 창 12:4</strong></p>
창세기의 저자는 칠십오 세의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갔다”고 보기에도 듣기에도 훈훈한 결말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대개 위인들이 지나온 삶은 후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공과 과가 매우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삶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우선 우리는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의 평가를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롬 4:18</strong></p>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 말씀은 헬라어 구조의 긴장을 잘 살려낸 번역입니다. 직역하면 “희망에 반하여, 희망 위에서”라는 뜻입니다. 이성적 계산이 불가능한 상황에 오히려 더 깊은 층의 희망이 작동했다는 역설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표현한 아브라함의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은 단순한 지적 동의를 넘어 영혼이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신 신학자 시메온이 ‘믿음에 관하여’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봅니다. 성산의 성 니코도무스/엄성옥 옮김 ｢필로칼리아 4｣(도서출판 은성) 37쪽

아브라함의 믿음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시선’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 때의 믿음은 실천으로 이어진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사도 야고보의 증언을 통해서 더욱 구체화 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 22). 사도 바울도 야고보도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으로 이어진 믿음이었고 행함으로 온전하게 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바울은 여기에서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며, 그 은혜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힘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한 일을 하라고 지으셨는데, 그 선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브람의 떠남을 다시 성찰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으로부터 떠나 ○○○을 향하여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떠나는 행동’으로서 반응했습니다. 그는 그 결과로서 큰 민족을 이루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중요한 것이 믿음만 이었다면 그냥 고향에서 믿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바벨탑 사건(창 11:1-9)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능을 따라 힘의 지배 원리를 추종했고, 그러한 경향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숭배가 만연 했었는데,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아무 불편함 없이 살았다는 것은 그 역시 우상의 비호를 믿고 살았다는 의미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곳을 떠나게 하심으로써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새로운 민족을 건설하게 하셨습니다. 악에서 떠나지 않는 믿음은 아무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떠나야만 새로운 민족을 이룰 수 있고, 떠나야만 새로운 질서를 이룰 수 있고, 떠나야만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마태라는 세리가 주님께 부름 받아 따라나서는 것을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 마 9:9</strong></p>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장면을 주석하면서 마태가 그 때 자신이 ‘세관 앞에 앉아있었다’라고 장소까지 밝힌 것에 대해 ‘세리라는 사악한 직무에서 아직 완전히 손 떼지 않았던 어느 순간, 악의 한 가운데서 부름 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리오 시모네티 엮음/노성기 옮김 ｢교부들의 성경주해 Ⅰ｣(분도출판사) 282쪽
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관에 매여 있었고, 세리라는 직업에서 떠날 마음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내면에 악이 없음을, 그리고 그가 회개한다면 누구보다 신실한 사도가 될 수 있음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속의 자리에 두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 ‘말씀을 따라가도록’ 하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그를 세관에 그냥 두시지 않고, 그곳을 ‘떠나서’ 당신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아콜루데이 모이 ἀκολούθει μοι)” 이 당부는 현재 명령형으로, 지체하거나 주저함 없이 당장 따르라는 말씀이고 단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지속적·반복적으로 따르라는 당부입니다. 마태가 지체 없이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식사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어울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먹느냐”고 항의했을 때의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마 9:12</strong></p>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개 절실하게 돌아서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이 의사를 찾아가듯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 나섭니다. 지금 우리는 건강한 사람일까요? 지금 우리는 의로운 사람일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마태처럼, 지금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떠날 고향은 육체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죄에 찌든 육체에서 떠나도록 요청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은 후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기 위해 육적인 관습을 떠날 때, 우리는 올바르게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내가 겸손해지고, 방종했던 내가 정숙해지고, 탐욕스런 내가 청빈해지고, 시샘 많던 내가 관대해지고, 투박하던 내가 온화해질 때, 그것은 내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서 기쁨으로 주님 말씀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 9:13</strong></p>
주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눅 18:9),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눅 18:12)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모양은 의로웠지만 긍휼이 없었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스스로를 낮출 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 새로운 자신을 향해 떠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의 결과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이면서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제정한 평신도주일이기도 합니다. 평신도(平信徒)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어감은 자칫 성직자와 반대되는 개념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서일과의 아브람과 마태처럼 이 땅의 평신도는 모두 “떠나라”(창 12:1), 혹은 “나를 따르라”(마 9:9) 라는 소명에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너는 ... 가라(레크 ... 레카 לֶךְ- לְךָ)”라는 소명을 따라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떠나야 합니다. 또한 “나를 따르라(아콜루데이 모이 ἀκολούθει μοι)”라는 소명을 따라 지체하거나 주저함 없이 우리 주님을 따라야 하고, 지속적으로·반복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스페인과 접경한 프랑스 산맥 어느 기슭에서 태어난 토머스 머튼은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본성은 자유로웠지만, 그러나 세상의 모습을 따라 횡포와 이기심의 노예이기도 했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면서도 공포와 절망적 자기 모순 속에 허덕이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떠남과 더불어 감내했던 오랜 방황 끝에 그가 참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섰을 때, 그는 마침내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의 안식처, 내가 택하였으니 여기 영원히 거하리라!” 토머스 머튼/정진석 옮김 ｢칠층산｣(바오로딸) 778쪽

갈대밭에 그대로 있는 갈대는 이렇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랜 익숙함과 결별하는 분리와 고통과 울음이 인간을 성숙함으로 이끄는 결정적 조건입니다. 오늘 저마다의 갈대밭과 결별하고 주님께 나와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말씀을 경청하는 이 자리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이 자리에서 주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의 고백을 남기며 깊어지고 성숙해지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익숙함과 편안함의 자기세계에서 과감하게 떠남을 이루었는가?

② 한 번 만이 아닌 지속적인 따름 가운데 성숙을 이루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07 Jun 2026 21:15:1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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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교회소식 2026.06.0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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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은 평신도주일입니다.</strong>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79년 3월16일 총회 결의에 따라 매년 6월 첫째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킵니다. 평신도 주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의 각 지체’라는 평신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공동체적으로 성찰하며 교회, 가정,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주일입니다.

<strong>②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3주차 녹색 실천
⋅못난이 채소, 못난이 과일로 먹거리를 준비합시다.(삼상 16:7)
⋅한 줄 기도 “겉모습에 감춰진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소서.”
⋅겉모양은 조금 투박해도 맛과 영양은 똑같습니다. 모양 때문에 버려지는 수많은 식재료를 살리는 것은 환경오염을 줄이고 농가의 수고를 기리는일입니다. 편견 없는 소비로 식탁 위 생명을 살립시다.

<strong>③ 2026 웨슬리 아카데미 |</strong>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제4강 로마서 종합 논의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신앙생활의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5 Jun 2026 22:28: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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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4]]></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hokyung.kr"> 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이수정]]></author>
			<pubDate>Tue, 02 Jun 2026 06:49: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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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관계이신 하나님, 관계에로 부르시는 하나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3]]></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1:1-2:4a</strong>
<strong>1</strong>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strong>2</strong>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strong>3</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strong>4</strong>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strong>5</strong>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strong>6</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strong>7</strong>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8</strong>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strong>9</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10</strong>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11</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strong>12</strong>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13</strong>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strong>14</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strong>15</strong>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16</strong>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strong>17</strong>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strong>18</strong>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19</strong>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strong>20</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strong>21</strong>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22</strong>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strong>23</strong>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strong>24</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25</strong>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26</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strong>27</strong>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strong>28</strong>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strong>29</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strong>30</strong>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31</strong>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strong>1</strong>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strong>2</strong>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strong>3</strong>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strong>4</strong>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8
<strong>1</strong>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 | 운지요
○ 주의 영광이 하늘을 | 덮었나이다
<strong>2</strong>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의 위엄을 찬양 | 합니다
○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 하심입니다
<strong>3</strong>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 하늘과
○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 내가 보오니
<strong>4</strong>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 | 하시며
○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 돌보십니까
<strong>5</strong>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 하시고
○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 | 우셨나이다
<strong>6</strong>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 하시고
○ 만물을 그의 발 아래 | 두셨습니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고후 13:11-13</strong>
<strong>11</strong>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strong>12</strong>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strong>13</strong>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28:16-20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6</strong>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strong>17</strong>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strong>18</strong>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strong>19</strong>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strong>20</strong>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28:19절 묵상하십시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베푸는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까?

② 고후 13:13절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누구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습니까?

③ 창 1:1-5절 묵상하십시오. 태초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각각 어떠한 분이십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관계이신 하나님, 관계에로 부르시는 하나님</h2>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주이자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Τριάδος, Trinitas) 교리는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제정되었는데, 이 교리의 기본 내용은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위격은 신성에서 동일하고 지위에서 동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동.서방 교회가 모두 관심을 기울였던 신학 쟁점에 속합니다. 일반적으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은 세 위격(hypostases)의 독특한 개별성을 강조하면서도 성자와 성령이 모두 성부로부터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세 위격의 단일성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의 단일성, 특히 계시와 구속에서의 단일성에서 출발하고, 세 위격의 관계를 셋 사이의 상호교제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이 견해를 대표하는 신학자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을 넘어 이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독일 태생으로 미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고 목사이기도 했던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조직신학’에서 자신의 신학 방법을 상관관계(correlation)로 제시했습니다.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대답’ 즉 ‘인간의 실존적 물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신학적(복음적) 대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유장환 역 ｢조직신학 1｣(한들출판사) 81-93쪽

그의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단지 삼위일체 교리 안에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탐구적 이성이 묻는 물음에 계시로서 대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관상하게 됩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창조의 한 장면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을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창 1:1-5</strong></p>
성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며, 로고스인 성자가 창조의 능력으로 함께 계십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각자 따로 일하시는 장면이 아닙니다. 영원부터 서로 안에 거하시며 서로를 통해 존재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인 교제 즉 ‘페리코레시스’가 창조사역 안에 구현되는 장면입니다. 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체계화한 개념인데, 고전 헬라어로 ‘페리(περι)’는 ‘둘레에’라는 의미이고, ‘코레시스(χώρησις)’는 ‘공간을 내어주다’ 혹은 ‘춤을 추다’라는 의미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의 안에 완전히 머물면서 상호내주를 통해 존재하고 활동하는 역동성을 가리킵니다. 창 1:26절에 언급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복수형은 바로 이 성삼위 하나님간의 대화이자 관계적 결단입니다. 그리고 매 창조 때마다 반복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감격적인 선언은 성 삼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확인되는 기쁨의 선언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고후 13:11</strong></p>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작별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면서 간곡하게 당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당부가 “기뻐하라”입니다. 그들이 기쁨을 잃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당부는 “온전하게 되라”입니다. 그릇된 행실에서 벗어나서 성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당부는 “위로를 받으라”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위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당부는 “마음을 같이 하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과 하나의 복음을 통해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속지 말고 서로 화목하라는 당부입니다. 다섯 번째 당부는 “평안하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은혜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고, 그랬기 때문에 평안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그들 신앙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신앙의 기초를 세우지 못한 채 그들은 하염없이 하나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축복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의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후 13:13</strong></p>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카리스 χάρις)’는 역사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ἀγάπη)’은 영원 전부터 계시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고, 성령의 ‘교통하심(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끄심을 의미합니다. 이 때의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사귐'이 아닙니다. 서로 공유하고, 참여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공유와 참여와 연합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갈라지고, 기뻐하지 못하고, 평안을 잃었음을 알기 때문에 이 삼위적 축복으로 마무리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만이 그 모든 결핍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를 정리해 지켜내려 했던 신앙의 선배들의 노력 속에는, 후세의 신앙을 확고하게 삼위일체하나님 안으로 이끌려는 열망이 가득 배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머리가 아니라 전 존재로 마주 대할 때, 놀라운 변화가 나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제자들을 통해 보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 마 28:16, 17a</strong></p>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뵌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래서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는데, 거기서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 받으실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고 주님께 경배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경배하는 제자들만이 아닌 다른 반응을 보이는 제자들도 소개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 마 28:17b</strong></p>
여기서 ‘의심’을 의미하는 헬라어 ‘디스타조(διστάζω)’는 ‘두 곳에 동시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한 발은 믿음 위에, 다른 발은 불신 위에 놓은 분열된 실존의 초상입니다. 불신앙까지는 아니지만, 망설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도 알고, 죽음을 딛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알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분열된 실존을 끌어안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라는 마태의 표현 속에서 안타깝게 감지됩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연약함은 우리의 내면에도 잠재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때때로 믿음으로 승리하지만, 때때로 의심하며 넘어지기도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제1비가를 이런 절규로 시작합니다.

누구라고,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겠는가, 천사들의 질서로부터? 이제 어느 한 천사 느닷없이 나를 안아준다 해도, 나는 사라지고 말리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안문영 옮김 ｢두이노의 비가｣ 9쪽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변 절벽의 두이노 성 위에서, 대서양의 폭풍 소리를 들으며 써 내려간 이 절규는 응답 없는 관계 앞에서 울부짖는 인간의 고독을 담고 있습니다. 릴케는 이곳에서 1911년 10월22일부터 1912년 5월9일까지 손님으로 머무는 동안 ‘제1비가’와 ‘제2비가’를 완성했습니다. 죽음과 고독에 쌓인 인간의 부정적 실존과 자연과 더불어 존재계를 대표하는 천사들이 각각 일인칭으로 묘사 되고, 서로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외로움만이 가득 묻어납니다. 그에 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안에 존재하며 기도 마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로 초대 받은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입니까?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마 28:18</strong></p>
일부 제자들의 의심을 아신 주님은 먼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 것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친밀감을 갖게 하시려는 배려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신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막 광야의 금식을 마치셨을 때, 사탄이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이끌고 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했던 유혹 기억하십니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그 때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신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셨다’는 말씀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영광을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 마 28:19a</strong></p>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그러므로’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신 성자께 성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므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 28:19b-20</strong></p>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교제 즉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안에 실제로 잠기는 사건입니다. 단순한 종교적 결단이나 입교식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성도는 성부의 사랑, 성자의 은혜, 성령의 코이노니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상호내주 안에 성도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 과정을 ‘좋은 전염(Good Infecti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자가 우리의 인성을 취하셔서 인간이 됨으로써, 인간이 성자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제자들이 의심과 망설임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더 이상 삼위일체 하나님 밖을 배회하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신앙의 기초를 세워야 했습니다. 비록 아직은 성령께서 강림하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연약할 수밖에 없었고,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볼 수 있는 영적시선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는 ‘육안(肉眼)’이나 ‘지성(知性)’으로 보는 것 외에 본질적으로 다른 시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육안이나 지성의 행위가 중단될 때, 비로소 발휘되기 시작하는 ‘영적 시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은총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정지련 ｢조직신학｣(KMC) 185쪽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온전하게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기도나 성경지식 만으로는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중시했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 체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에 참여해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모셔들일 때, 그 공경의 행위를 통해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리가 아닌 실제로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적 영적 전율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경이로움입니다. 오늘 응송의 시인이 경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있었습니다(시 8:1). 주께서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관상하며(시 8:3). 저 광활한 우주 앞에서 자신의 작음을 봅니다. 시인은 묻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 시 8:4</strong></p>
이 물음은 지적 탐구가 아닙니다. 경이로움에서 터져나오는 전율이고 경탄입니다. 이 경이로움이 바로 삼위일체 신앙의 출발점이고 감정적, 영적 관문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먼저 이해하고 경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삼위일체 신앙이 계시됩니다. 삼위일체는 이해하면 끝나는 교리가 아니라, 체험하고 느낄수록 더 깊어지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단자(單子)가 아니셨습니다. 창조 때, 성부 하나님은 말씀하셨고(창 1:3), 성령님은 수면 위를 운행하셨으며(창 1:2), 로고스인 성자는 창조의 능력으로 함께 계시다가(요 1:1-3; 골 1:16-17; 잠 8:30), “하나님 아버지께는 당신이 낳으신 독생자가 늘 있었습니다. 성자이신 그분은 지혜(חָכְמָה, Hokmah)라고도 불리십니다. 이 지혜는 세상을 창조하신 뒤 하나님께서 즐거움으로 삼으셨던 바로 그 지혜이십니다.”(오리게네스-원리론)

지금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요 1:14).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영원부터 서로 안에 거하시며 서로를 통해 역동적으로 교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역시 벅찬 관계 안으로 초청 받아 함께 서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자 예수님은 부활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성령님은 코이노니아를 통해 우리를 삼위일체의 은총 안으로 초대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삼위일체 하나님 신비를 교리와 지식만으로 알려하지 않는가?

②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나의 존재도 견고히 세워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06:50: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5.31]]></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strong>
인류를 향한 구원의 은총이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원천에서부터 출발된 것임을 깨달아 자신의 내면적 두려움과 저항을 이겨내고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거듭남과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사랑이듯,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사랑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strong>②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2주차 녹색 실천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 있는 생활용품을 사용하지 맙시다.
⋅한 줄 기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깨끗하여 창조 세계를 보전하게 하소서.”
⋅우리가 사용하는 세정제나 화장품 속 미세 플라스틱은 결국 바다로 흘러가 만물을 오염시킵니다. 천연 수세미나 고체 비누 등 친환경 제품을 선택하여 깨끗한 물과 바다를 보전합시다.

<strong>③ 2026 웨슬리 아카데미 |</strong>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제3강 로마서 정리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신앙생활의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22:19: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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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기도제목 26.5.31]]></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1]]></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 <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22:18: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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