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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해운대감리교회</title>
		<link>http://hudmc.org</link>
		<description>사랑하고 축복합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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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부활절 제3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인류의 희망]]></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6]]></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3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2:14a, 36-41</strong>
<strong>14</strong>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strong>36</strong>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strong>37</strong>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strong>38</strong>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strong>39</strong>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strong>40</strong>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strong>41</strong>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16:1-4, 12-19
<strong>1</strong> 주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 | 주시니
○ 내가 주님을 | 사랑합니다.
<strong>2</strong> 나에게 귀를 기울여 | 주시니
○ 내가 평생토록 기도 | 하겠습니다.
<strong>3</strong>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 은혜를
○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 있겠습니까?
<strong>4</strong>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 | 습니다.
○ 주님께 서원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 | 루겠습니다.
<strong>5</strong> 성도들의 죽음을 주님께서는 소중히 여기 | 십니다.
○ 주님, 진실로, 나는 주님의 | 종이옵니다.
<strong>6</strong> 당신 여종의 아들인 이 종을 결박에서 풀어주셨 | 습니다.
○ 내가 주님께 감사제사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 부르리이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벧전 1:17-23</strong>
<strong>17</strong>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strong>18</strong>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strong>19</strong>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strong>20</strong>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strong>21</strong>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strong>22</strong>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strong>23</strong>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 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눅 24:13-35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3</strong>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strong>14</strong>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strong>15</strong>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strong>16</strong>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strong>17</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strong>18</strong>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strong>19</strong>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strong>20</strong>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strong>21</strong>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strong>22</strong>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strong>23</strong>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strong>24</strong>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strong>25</strong>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strong>26</strong>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strong>27</strong>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strong>28</strong>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strong>29</strong>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strong>30</strong>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strong>31</strong>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strong>32</strong>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strong>33</strong>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strong>34</strong>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 지라 <strong>35</strong>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눅 24:31, 32절 묵상하십시오. 제자들이 눈이 밝아진 순간, 그리고 마음에 뜨거움을 느낀 순간은 각각 어느 때였습니까?

② 행 2:38절 묵상하십시오.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벧전 1:18-19절 묵상하십시오. 유대인들이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무엇으로 된 것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인류의 희망</h2>
지난 4월8일은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교수의 탄생 100주년이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포로가 되어 3년간 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그 시기 성경책을 읽으며 절망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무신론적 ‘희망의 철학’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희망의 신학’(1964)을 저술한 이후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1980), ‘희망의 윤리’(2010)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2024년 6월, 98세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독일 고백교회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그가 남긴 희망의 신학은 오늘 우리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신학 안에 내재되어 있는 희망은 결코 막연한 기대나 근거 없는 낙관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의한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는 비판적 도구요,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일구어내는 거룩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26년의 현실은 여전히 그가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절망의 징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계에는 중동전쟁의 먹구름이 어둡게 드리워 있고, 과도한 탄소배출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지구 생태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16일)은 세월호 참사 12주기였습니다. 벌써 봄이 열두 번이나 지났음에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유족들은 슬픔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부활절 연합예배 때는 이태원 참사 유족들과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참석해서, 고통을 호소하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당부했었습니다.

몰트만이 거의 한 세기 동안 역설한 희망의 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 교회, 신앙과 구원 및 미래의 희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부터 생성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비하(卑下)’를 실현하심으로서, 죄와 죽음에 빠진 인간과 함께 계셨습니다. 완전히 자기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타인 가운데에, 비인간 가운데에, 그 어떤 신적 본성도 끄집어낼 수 없는 무능 가운데에 있는 ‘케노시스(kenosis)’ 즉 ‘하나님의 자기 버리심’으로부터, ‘그로 인한 인류의 희망의 미래’가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J.몰트만/김균진옮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205-214쪽

오늘 복음서에 모든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마치 몰트만이 유대인 600만 학살의 상징인 아우슈비츠(Auschwitz)의 비극 앞에서 ‘하나님은 고난 당하실 수 없는 신’이라는 전통적 신관(神觀)의 붕괴를 보았듯이, 그들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관이 붕괴된 것에 침통해하는 모습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 눅 24:13-14</strong></p>
여기 누가가 언급하는 ‘그들 중 둘’은 9절에 있는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 중에서 ‘다른 이들 중 둘’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부활현장을 목격한 여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뒤로 하고 힘없이 ‘엠마오(Εμμαοῦς)’라 하는 촌으로 낙향하고 마는 것인데, 그들이 길을 걸으며 나눈 ‘이 모든 된 일’(눅 24:14)이란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일’을 의미합니다. 어둡고 절망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 눅 24:21</strong></p>
이 한 문장 안에서 두 제자의 기대와 절망이 안타깝게 교차합니다. ‘바랐노라(엘피조멘 ἠλπίζομεν)’라는 과거형 동사가 ‘이미 끝나버린 희망’을 보여줍니다. 어떤 메시아를 바랐기에 이토록 침통해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바란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였습니다. 여기서 ‘속량(뤼투르스다이 λυτροῦσθαι)’은 단순한 영적구원이 아니라 ‘정치적 해방’ 즉 ‘로마로부터의 민족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중에게 있어 예수라는 존재는 단지 병이나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런 차원을 넘어, 로마의 지배와 독재자 헤롯 가문의 폭압과 유대 종교권력자들이 지워준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게 하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문과 모멸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당하고 맙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메시아관은 ‘죽지 않으면서 승리하는 메시아’인데, 예수는 사형을 당했고, 그것도 로마 방식으로 처형되는 것을 보면서 두 제자는 ”우리가 완전히 잘못 믿었구나”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 받는 메시아’를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관에 적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서 희망의 몰락을 보고 맙니다. 즉 그들의 절망은 메시아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무너진 절망이었습니다. ‘계시의 부재’에서 오는 ‘영적 둔감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처방이 ‘성경을 풀어 주신 것’(눅 24:27)이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눅 24:15-16</strong></p>
문득 한 남자가 다가와 그들과 동행을 합니다(눅 24:15). 누가는 그 남자를 ‘부활하신 예수’라고 말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누가는 ‘눈이 가리어져서’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의 눈이 ‘붙잡혀 있었다(ἐκρατοῦντο)’란 의미입니다. 두 사람의 의식과 시각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가림에 의해 억제되어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왜 알아보지 못하게 가리셨을까요? 보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즉 성경을 풀어주시고, 떡을 떼어주실 때 눈이 열려 참으로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말씀이 먼저 가슴을 뜨겁게 하고, 떡을 떼어주실 때 비로소 예수를 바로 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이 가리어진 상태에서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선’(눅 24:17b) 그들에게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미련한 자들’(눅 24:25)이라고 꾸짖으시면서도 ‘그리스도는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반드시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눅 24:26)이라고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사 50:6 혹은 사 53:3-9절의 ‘고난당하는 어린 양’ 이야기와 슥 11:13절에 예언된 유다의 배신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낯선 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엠마오마을에 도착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더 가시려는 듯 하시자, 그들이 “날이 저물었으니 여기서 함께 묵자”(눅 24:29)며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지혜로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십니다. 제자들은 등불을 켜서 집안을 밝히고 기쁜 마음이 되어 식탁을 차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을 자세히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눅 24:30-31</strong></p>
예수님은 여기에서 더 이상 그들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떡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그것을 쪼개 나누어주셨을 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 즉 유월절 만찬을 상기시켜주시는 것이었고,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켜주시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지만, 이미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떼어주신 떡을 매개로 지금부터 주님은 그들 안에 계셨습니다. 누가가 말하고 싶어 했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떡을 떼어주실 때, 비로소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성찬식탁에서 떡과 잔을 나눌 때, 우리의 눈도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 밝아진 눈으로 내 주님을 알아보고, 동행의 감격으로 내면을 채워가는 우리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져서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려면 우리 마음도 주님을 향해 절박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라며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하며 묻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이때 베드로의 대답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 행 2:38</strong></p>
회개는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찔려하는 마음이 절실한 회개로 연결되고, 세례를 통해 다시 사는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시리아의 성聖 에프렘(AD 306-373)은 자신의 관상 시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낱낱이 꿰뚫어보는 분이시라,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사람의 결심도 미리 알아채시나이다. 그리하여 그가 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당신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시며, 그가 당신 앞에 엎드리기 전에, 당신은 손을 뻗어 그를 맞아주시나이다. 그가 채 눈물을 흘리기도 전에, 당신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가 제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당신은 그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나이다. 성 에프렘/박효섭 옮김 ｢성 에프렘의 시편기도｣(카리스마타코이노니아) 212쪽

회개란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우리가 탕자의 회개를 통해서도 보았듯이,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사람의 결심을 아시는 주님은, 죄인이 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문을 열어주시고, 당신 앞에 엎드리기도 전에 손을 뻗어 맞아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보배로우신 피로서 그간의 우리의 헛된 행실들을 씻어주시고 깨끗한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벧전 1:18, 19</strong></p>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흠도 티도 없는 그리스도의 피를 내 안에 모시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서, 그분과의 벅찬 동행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벧전 1:22, 23</strong></p>
진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때, 비로소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마음에 어두움을 품고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약성경을 설명해주심으로서 마음의 뜨거움을 회복시켜주시고, 떡을 떼어주심으로 가리어졌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눅 24:33), 자기들이 떠나왔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길에서 있었던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주실 때, 자기들의 가리어졌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던 일을 증언합니다(눅 24:35).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몰트만에 따르면 그런 은혜를 입었다 해서 당장 억압적 현실이 무너지거나 전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엄연한 죽음이고, 부패는 역겨운 냄새를 풍깁니다. 죄악은 여전히 죄악으로 남아있으며, 고난은 간단한 해결책이 없는 버거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이런 현실이 아예 없는 피안의 세계나 유토피아(Utopia)를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또 하나의 다른 현실’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의 현실, 죽음이라는 현실 안에서,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를 때 주어지는 자유와 기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는 한계선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 속에서 깨어질 때, 신앙은 희망을 향해 열려질 수 있고, 또 당연히 열려지게 됩니다. 이 때 신앙은 담대한 확신이 되고, 인내가 되고, 열정이 됩니다.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희망의 신학-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의 근거와 의미에 대한 연구｣(대한기독교서회) 29쪽
몰트만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한국인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날을 ‘죽은 날’로 쓰지 말고 ‘부활한 날’로 쓰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신옥수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이해’, ｢기독교사상 통권 808호｣ 31쪽
우리도 그의 신학과 신앙처럼, 현재의 고난을 피하지 말고, 고난 위에 굳게 서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그 분의 부활에서 나의 부활을 보며, 희망의 신앙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매일 매순간 말씀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찬 식탁에서 눈이 밝아지는 경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영적 시선이 어두워 가까이 계신 주님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찬을 통해 눈이 밝아졌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21:50: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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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교회소식 2026.04.19]]></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5]]></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저금통</strong>
사순절 기간동안 모아주신 분유보내기 저금통은 4월 말 YWCA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출하지 않으신 분들은 다음 주일까지 가져와주시기 바랍니다.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② 해운대교회 명랑운동회</strong>
⋅날자 : 26일(주일) 오전 10:00 - 오후 4시
10시00분 ☞ 교회 집결 및 개회예배
11시20분 ☞ 양운중학교로 이동
⋅장소 : 양운중학교 강당

<strong>③ 속장, 인도자 모임</strong>
오늘 11시 3부예배 후 ☞웨슬리 채플

<strong>④ 원활한 주차관리를 위하여 교우들의 주차관리대장을 작성 중입니다.</strong>
남누리 전도사님(010-8305-0223)께 성함과 차량번호를 보내주시거나, 2층 주보대에 본인 성함과 차량번호, 전화번호를 기재해주시기 바랍니다.

<strong>⑤ 주는반석교회 봉헌예배</strong>
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 ‘영남선교대회 기념교회’입니다. 교우들의 기도와 참여 부탁드립니다. ☞ 25일(토) 오전11시 (해운대교회 출발: 오전 7시30분)]]></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23:34: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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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부활절 제2주 도마의 부활절]]></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4]]></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2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2:14a, 22-32</strong>
<strong>14</strong>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strong>22</strong>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strong>23</strong>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strong>24</strong>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strong>25</strong>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strong>26</strong>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strong>27</strong>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strong>28</strong>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strong>29</strong>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strong>30</strong>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strong>31</strong>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strong>32</strong>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편 16편
<strong>1</strong>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 있도다
○ 나의 기업이 실로 | 아름답도다
<strong>2</strong>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 | 할지라
○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 교훈하도다
<strong>3</strong>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 모시고
○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 않으리로다
<strong>4</strong>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 기쁘고
○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 안전하리니
<strong>5</strong>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 | 하시며
○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 것임이로다
<strong>6</strong>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 | 시리니
○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 있습니 - 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벧전 1:3-9</strong>
<strong>3</strong>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strong>4</strong>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strong>5</strong>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strong>6</strong>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strong>7</strong>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strong>8</strong>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strong>9</strong>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20:19-31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요 20:19-31</strong>
<strong>19</strong>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strong>20</strong>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strong>21</strong>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strong>22</strong>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strong>23</strong>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strong>24</strong>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strong>25</strong>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strong>26</strong>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strong>27</strong>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strong>28</strong>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strong>29</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strong>30</strong>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strong>31</strong>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요 20:27절 묵상하십시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신 주님께서 그 다음에 요청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② 행 2:31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보다 천년을 앞서 살았던 다윗이 미리 보고 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벧전 1:8, 9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30여 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가 칭찬한 것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도마의 부활절</h2>
바로크시대의 가장 혁명적인 화가로 알려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가 1601-1602년경에 그린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라는 유화(油畫) 작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도마의 행동을 통해, 인간의 의심과 믿음, 본성과 신앙 사이의 복잡한 심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화면의 3분의 2를 채운 짙은 어둠은 ‘믿지 않는 자의 세계’ 즉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인간의 완고한 내면의 색’입니다. 왼쪽 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이 쏟아집니다. 이 빛은 창백한 피부의 그리스도와 그의 흰 천을 가장 환하게 비춥니다.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후광(halo)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성, 즉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적 선택입니다. 도마의 손가락이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 속으로 실제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불편하고 충격적인 장면인데, 카라바조가 전하려 한 것이 바로 이 불편함입니다. 믿음의 부재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의심은 언제나 무언가를 찌르고 헤집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손을 붙잡아 상처 안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믿음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이 손이 말해줍니다. 도마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뒤로 두 제자의 이마가 그리스도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네 머리가 모여 만든 형상이 십자가를 닮아 있습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확인하는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가 나타난 것에서 카라바조의 신학적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티스토리 주립미술관 ‘부활절, 우리 손가락은 어디를 향하는가’에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성聖 도마주일로 지키는데, 오늘 복음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 두 가지 간절한 호소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손으로 만져보기를 원했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그리고 또 하나는 요한복음 저자가 자기가 쓴 책의 목적을 밝히고 있는 결론 부분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 31). 그러니까 성聖 도마주일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고,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그 신앙의 요구를 두 가지 상황 설정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드레 후 도마도 함께 있을 때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두 상황은 제자들을 둘러 싼 동일한 빠스카적 분위기로 인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요 20:19-22</strong></p>
지금 요한의 관심은 부활해서 찾아오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분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신이 들어가셨고, 이제는 제자들도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에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로서는 지금 그 ‘새로운 생명’이 눈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모여 있는 집의 문들을 모두 닫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아직 자신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부활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시자마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하시고, 당신의 상처입은 손과 옆구리도 보여주십니다. 이때 비로소 제자들은 기쁨을 회복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단지 기쁨만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세상으로 보냄 받아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의 인사를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숨을 내쉬어 성령도 주신 것입니다. 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진흙으로 빚으신 후,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셨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습니다(창 2:7). 그 사실을 깨달은 욥은 기막힌 고백을 남겼습니다. “어느 동물의 목숨이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있으며 어느 사람의 숨결이 주의 손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욥 2:7 공동번역). “나도 하나님의 콧김으로 생겨난 몸, 전능하신 분의 입김을 받아 숨쉬게 된 몸이오”(욥 33:4 공동번역). 시편의 고대 시인 역시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바로 그 입 기운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제자들은 기쁨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부활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 도마는 냉정하게 반응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요 20:25</strong></p>
이 한 마디 때문에 도마는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도마’라고 회자되는 불명예를 떠 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그렇게 함부로 평가되면 안 되는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안에서 그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사려 깊고 냉철한 제자로 그려집니다. 요 10:30절에 보면 사람들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하신 말씀을 트집 잡아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고 예수님께서 그 유대지방으로 또 가시려 하자 제자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도마 역시 유대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알고 있었고, 두렵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고자 합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도마가 다시 한 번 등장하는 것이 요한복음 14장에서입니다. 떠날 날이 가까웠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요 14:2)시며,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요 14:4)고 하십니다. 그러자 도마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이런 모습들 속에서 느껴지는 도마는, 무엇이든 대충 믿어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아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고, ‘아멘’에 이르기 위해 물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도마 식으로 재구성 하면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관찰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물음 없는 아멘은 맹목이다.” 의심과 성찰의 숲을 통과하지 않는 한, 그 어느 것도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정직함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적은 이런 정직한 회의(懷疑)가 아니라 무작정 관념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적당히 믿는 관념적 믿음은 정작 급진적 헌신이 필요할 때, 뒤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나서 여드레가 지난 후에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이번엔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서서 인사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 20:26</strong></p>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요 20:27</strong></p>
예수님은 왜 도마의 손목을 이끌어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을까요? 도마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온통 죽음의 그늘에 삼키어 버린 제자들이, 빨리 회복해야 할 것은 부활에의 확신이었습니다. 도마가 정말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 20:28</strong></p>
회의의 밤이 지나가고 부활의 빛이 그를 감쌉니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제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존재이고, 다시 하나님 곁으로 가신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이제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죽음에 삼키어 기쁨을 상실한 제자들, 두려움에 삼키어 평화를 잃은 제자들이 다시 기쁨을 회복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손으로 눈으로 주님을 확인하고 성령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제자들은 주님이 자기들 앞에 계셨기에 손으로 눈으로 확인했던 것인데, 오늘 우리는 주님이 앞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 20:29</strong></p>
이후로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할’ 우리들을 향해 주님은 “그래서 너희는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도마와 같은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가 훗날 박해와 환난 중에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벧전 1:8, 9</strong></p>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인 AD 60년경에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이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라고 칭찬하면서 그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거듭남과 산 소망의 삶을 살고 있었고(벧전 1:3), 시험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벧전 1:6). 베드로는 그들이 그 부활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간직된 유업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벧전 1:4).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부활이 우리 현세의 삶에 가져다 준 새로운 변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굳게 닫힌 문을 거침없이 통과하셔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의 현세적인 삶 속에서 거침없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의 현실 안에 현존하시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의 현실 안으로’ 즉 ‘예수님의 영적 차원 안으로’, ‘지금’, ‘여기’에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가슴 벅찬 현실을 ‘아이온(aeon)’이라고 합니다. 희랍어 ‘아이온’은 현세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시간 즉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영적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영적인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되다”고 주님은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증언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 행 2:25</strong></p>
시 16:8-11절에서의 다윗의 고백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다윗이 가리키는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은 예수님보다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다”는 고백과,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다”는 고백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30절에서 베드로는 다윗에 대해 “그는 선지자라”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 행 2:31</strong></p>
비록 예수님보다 천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었기에, 미리 보고 사랑할 수 있었고, 미리 믿고 요동하지 않았고, 미리 보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오늘 응송에서의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 시 16:9, 10</strong></p>
물론 베드로에 따르면 그는 죽어 장사되었고 묘에 묻혔습니다(행 2:29).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부활을 믿었고, 천년 전에 죽은 자신의 부활도 믿었습니다(시 16:10). 그랬기 때문에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그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 행 2:26-28</strong></p>
예수님보다 천년 앞서 살았던 다윗의 고백이나, 다윗보다 천년 후에 살았던 베드로의 고백이나, 베드로보다 이천년 뒤에 사는 우리의 고백이나, ‘각각의 현세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기쁨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금의 질병들과 고난들로 인해 잠깐씩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닫힌 문을 통과해 제자들에게 오셨듯이, 오늘도 고난과 회의의 밤을 통과해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주님은 과거의 제자들과 도마의 주님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 모두를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2천년 전의 도마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성찬의 식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 단단한 일치와 연대에로 이끌어줍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연합된 관계 안에서 믿음이 시작되고 부활이 완성됩니다. 주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본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역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만을 믿으며 땅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시간(aeon)과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3 Apr 2026 22:11: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4.12]]></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3]]></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저금통</strong>
주보대 위에 올려놓아주시기 바랍니다.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② 부산동지방 여선교회 계삭회</strong>
⋅16일(목)오전11시 ☞꿈이있는교회 (교회 출발 : 10시30분)

<strong>③ 해운대교회 명랑운동회</strong>
⋅날자 : 26일(주일) 오전 10:00 - 오후 4시
10시00분 ☞ 교회 집결 및 개회예배
11시20분 ☞ 양운중학교로 이동
⋅장소 : 양운중학교 강당

<strong>④ 주는반석교회 봉헌예배</strong>
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 ‘영남선교대회 기념교회’입니다. 교우들의 기도와 참여 부탁드립니다. ☞ 25일(토) 오전11시 (해운대교회 출발: 오전 7시30분)

<strong>⑤ 예배순서 변경 및 참여 안내</strong>
⋅구약성서 봉독 후의 시편 응송(화답송)과 서신서 낭독 후의 층계성가는 모든 회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성가입니다. 시편 응송의 ○은 회중 모두 함께 부르시기 바랍니다.

<strong>⑥ 차량관리대장 작성</strong>
원활한 주차관리를 위하여 교우들의 차량관리대장을 작성 중입니다.
남누리 전도사님(010-8305-0223)께 성함과 차량번호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22:59: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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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부활주일 죽음의 죽음, 부활]]></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2]]></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10:34-43</strong>
<strong>34</strong>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strong>35</strong>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strong>36</strong>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strong>37</strong>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strong>38</strong>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strong>39</strong>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strong>40</strong>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strong>41</strong>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strong>42</strong>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strong>43</strong>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strong>응송(Responsorial Psalm), 시편 118:1-2, 4-24</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노래 | 불러라
○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 영원하시다
<strong>2</strong> 이스라엘아 노래 불러라 그의 사랑 영원 | 하시다
○ 아론아 노래 불러라 그의 사랑 | 영원하시다
<strong>3</strong> 정의의 문을 열어라 내가 | 들어가
○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기도 | 드리리 - 라
<strong>4</strong> 이것이 주님의 문,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 | 가리라
○ 나의 기도 들으셨으니 주님께 | 감사합니다
<strong>5</strong>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 | 었나니,
○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 기이한 바로다
<strong>6</strong>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 | 하신 날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 기뻐하리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골 3:1-4</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strong>2</strong>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strong>3</strong>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strong>4</strong>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strong>복음서 | 마 28:1-10</strong>
<strong>1</strong>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strong>2</strong>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strong>3</strong>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strong>4</strong>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strong>5</strong>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strong>6</strong>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strong>7</strong>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strong>8</strong>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strong>9</strong>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strong>10</strong>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28:17절 묵상하십시오. 천사로부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의 마음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② 행 10:39-41절 묵상하십시오. 주님의 부활소식을 전해 듣고 의심했던 베드로가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어떤 변화를 보여줍니까?

③ 골 3:1, 2절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의 지향과 생각은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죽음의 죽음, 부활</h2>
오늘 아침 부활의 밝은 빛이 우리의 마음마다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간 내내 달맞이는 벚꽃으로 화사했습니다. 만개한 꽃들을 보며 만개한 생명도 함께 보았습니다. 하지만 마냥 즐거울 수 만은 없었던 것이 지구 저편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이미 숱한 생명을 앗아갔는데, 미국과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중동전쟁까지 가세해, 인류가 쌓아온 생명 존중과 평화의 가치를 처참히 파괴하고 있습니다. 2016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 출품한 작품으로, 전쟁의 참상과 무의미함을 극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한 ‘무시무시한 계곡(Uncanny Valley)’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전쟁의 그림자가 음산하게 드리워진 가운데, 병사들이 겪은 정신적 물리적 충격과,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다루면서, 전쟁이라는 것이 영광이나 숭고한 그 무엇이 아니라,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잘 드러낸 영화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전쟁에 젊은이들을 파병하라고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을 그런 반인륜적이고, 생사가 걸린 파병에 몰아넣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1일에는 4대 종단 성직자들이 “모든 살상을 멈추라! 생명의 길에 총칼이 설 자리는 없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민족이고,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들에게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전쟁을 연습하지 말 것’(사 2:4)을 당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항상 분쟁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일까요? 지정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문제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뜻을 말하지만 실제는 힘과 이익을 따라 전쟁하는 것입니다. 힘을 숭배하다 보니 생명과 평화의 나라가 죽음과 분쟁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 죽음의 그림자를 음산하게 드리워놓고 그 죽음을 지키려 한 세력은 2천 년 전에도 유대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을 돌로 봉인하고 경비병까지 세워 죽음이 무덤을 열고 부활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죽음을 지키려 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지키려 오셨습니다. 죽음과의 전쟁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시작되었고, 우리를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서 건져내려는 전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전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완결시킨 쾌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결코 파괴적이지 않았습니다. 성육신 하실 때도 남자를 모르는 어머니의 동정을 손상시키지 않으셨고,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훼손하지 않고, 새벽의 고요함이 깨지지 않게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부활절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사건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 시 118:22-24</strong></p>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키심으로써 생명의 머릿돌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버렸을까요? 쓸모 없다고, 가치 없다고 판단해서입니다. 그들이 욕망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일구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힘의 논리로 쟁취하는 하나님 나라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일구셨습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우리가 무시한 진리, 우리가 듣기 싫어한 말씀으로 인해 예수님은 오늘도 버려진 돌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버린 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십니다. 구원은 사람이 예수님을 버린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네 복음서가 각기 다르게 전해주는데, 향료를 들고 무덤에 간 여인을 마태는 두 여인으로 기록하고(마 28:1), 마가는 세 여인으로 기록했습니다(막 16:1). 그런가하면 누가는 몇 명의 여인이 갔는지 언급하지 않고(눅 24:1),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 무덤에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 마태의 기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 마 28:1</strong></p>
여기서 마태는 안식 후 첫날 새벽 (동틀 무렵 ἐπιφὡσχω), 두 여인이 무덤으로 갔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알겠는데, ‘다른 마리아’는 누구일까요? 27:56절에 의하면 그녀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즉 ‘세베대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이후로도 마태는 계속 그녀를 ‘다른 마리아’라고 소개합니다. 마태는 이 두 여인이 ‘무덤을 보려고’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가에 의하면 단순한 구경이 아닌 ‘경배하려고’(막 16:1) 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여인이 무덤에 다가갔을 때,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 마 28:2-4</strong></p>
구약성경에서 지진은 주로 ‘신(神) 현현(thophany)’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현시(現視)’로 경험한 것이고, 같은 현상 안에서 여인들은 죽음의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사건을 목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들도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만큼이나 무섭기는 매 한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마 28:5, 6</strong></p>
러시아의 쌍트 뻬쩨르부르그 미술관에 있는 ‘빈 무덤 이콘’에 보면 두 여인이 빈 무덤에 서 있습니다. 그녀들은 그곳에 있음으로써 죽음에 항거하고 있는 것이고, 죽음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수의(壽衣)가 주님 몸에 입혀져 있던 형태 그대로 남아있는 묘사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군인을 매수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자기들이 잘 때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마 28:13)고 퍼뜨린 소문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아주 위엄 있는 모습으로 돌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활짝 펴든 커다란 두 날개가 뒤에 있는 산 정상 위로 치솟아 있는 것은, 천사가 방금 하늘에서 도착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손으로 어두운 동굴의 석관을 가리키며, 여인들을 향해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고 합니다. 석관 안에는 몸을 싸맸던 수의와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화를 보면서 지금 여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 즉 빈 무덤과 부활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빈 무덤이 무덤 앞에 선 여인들의 충격과 좌절감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는 천사의 증언은 충격과 좌절에 희망을 일깨워주는 생명의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매개적 사건’ 즉 ‘시간과 믿음을 이어주는 사건’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시간 개념 안에서 지각되고 있지만, 시간을 뛰어 넘어 부활을 향한 믿음으로 이끌어줍니다. 장긍선 편저 ｢이콘-신비의 미｣(기쁜소식) 193-196쪽
우리는 여기에서 빈 무덤의 역설을 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부재(不在)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내셨습니다. 텅 빈 무덤, 그 ‘현장 부재의 알리바이’를 통해 예수님은 무덤이 당신의 최후 종착지가 아니라, 부활이 당신과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도달하는 궁극의 지점임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부활의 첫 목격자인 여인들의 마음은 아직 무서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마 28:9</strong></p>
마침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여인들의 그늘 없는 기쁨을 봅니다. 군인들을 매수해서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자들과 대비를 이룹니다(마 28:11-13). 그들은 진실을 덮고 싶었지만, 예수님 부활의 소식은 유대인 사회에 두루 퍼져나갔습니다(마 28:15).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부활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갈릴리의 산에 이릅니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지만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 17)라고 마태는 전해줍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부활이 몸으로 체득된 진리이기보다는 아직은 관념의 상태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동안 의심했던 그들이 훗날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확인해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엠마오 길의 두 제자가 했던 고백도 그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6). 그런가하면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 행 10:39-41</strong></p>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 받는 제자였음에도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아닌 여인들에게 ‘전해들은’ 안타까운 제자였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7) 한 마태의 증언에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는 얼마나 당당한 부활의 증인입니까? 우리도 베드로처럼 변화되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골 3:1-4 공동번역</strong></p>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 생명을 얻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것을 추구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영광의 왕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으며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탄생에서부터 영광스러운 승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섭리를 훌륭하게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태어난 이들을 재탄생시키기 위해 여자를 통해 태어나셨다. 자신들의 의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자들을 당신 가까이로 부르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무지한 죽음은 그리스도를 삼켰다. 그러나 삼킨 후에 그는 누구를 삼켰는지를 깨달았다. 생명을 삼켰고 생명에 의해 패망했다. 만인과 함께 하는 한 분을 삼켰고, 그 한 분으로 모든 이가 풀려났다. 사자처럼 그분을 물었는데 이빨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렇게 죽음은 보잘 것 없는 존재처럼, 우리의 무시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사자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가죽처럼 그를 짓밟는다. 니콜라스바실리디아스/박용범 옮김 ｢죽음의 신비｣(정교회출판사) 166쪽

벚꽃은 가을에 꽃눈을 만들어 겨울 동안 휴면기에 들어간 뒤, 2월 무렵 해제해 한두달 뒤 개화하는데, 꽃눈 상태인 겨울에 온도가 충분히 낮아야 제때 휴면 해제가 된다고 합니다. 꽃눈이 차가운 겨울을 견디며 생명 만개할 봄을 기다리듯, 예수님도 무지한 죽음에 삼키어져 사흘간의 어둠과 침묵을 견딘 후에 부활생명을 꽃피우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그 사람들을 불멸(不滅)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놀라운 생명의 신비가 기념되고 찬미를 받는 날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죽음을 붙잡고, 죽음을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꽃피우고, 생명을 지키려 오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부활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찬미하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찬양대의 칸타타를 통해 예수님께서 살리신 생명이 기념되고 찬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합니다. 주님은 이 식탁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죽음을 삼켜버린 생명이 떡과 잔 안에 감추어져 우리에게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에게는 부활만 남게 되었습니다. 찬미 예수님입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참 생명의 신비를 보지 못한 채 죽음에 삼켜져 있지는 않은가?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신 부활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05 Apr 2026 20:19:4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4.5]]></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1]]></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 <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strong>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strong><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22:28: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4.05]]></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0]]></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은 부활절입니다.</strong>
부활 절기는 부활주일 전날 저녁부터 50일 후 오순절 전날 저녁까지 계속됩니다. 부활절은 교회력의 가장 오래된 절기이며 교회력의 핵심입니다.
⋅예배 후 나가실 때 부활절 달걀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1층 입구에 이웃을 위한 계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북한 어린이 분유 보내기 저금통’ 가져오신 분은 1층 교역자실 수거함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부활절 칸타타 | 그의 이름
<p style="padding-left:80px;">1. 전능하신 이름 Name of All Majesty
2. 예루살렘 문을 열고 Open the Gates
3. 네가 나를 사랑하면 If You Love Me
4. 주의 어린 양 Behold the Lamb of God
5. 그의 이름 At His Name
6. 전능하신 이름 Name of All Majesty(Reprise)</p>
<strong>② 오늘 찬양예배</strong>
1시30분에 시작하며, 남누리 전도사님께서 설교해 주십니다.

<strong>③ 예배순서 변경 및 참여 안내</strong>
⋅오늘부터 매 주일 성찬례를 행합니다. 존 웨슬리는 성찬을 ‘믿음을 강화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에 매주 1회 이상 성찬을 권했습니다. 2025년 개정된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조직과 행정법‘ 제2절 교인, 제9조는 교인의 은혜 받는 방법으로서 ‘성찬식에 참례한다’고 규정했고, 제12조는 ‘교인의 권리’로서 ‘교인은 성찬식에 참례한다’라고 못 밖고 있습니다. 감리교인으로서 이 의무를 다하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22:26: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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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다이렉트자동차보험비교견적사이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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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유진]]></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19:06: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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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사순절 제6주 십자가의 예수님, 자유하신 예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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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strong>사순절 제6주 | 종려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50:4-9a</strong>
<strong>4</strong>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strong>5</strong>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strong>6</strong>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strong>7</strong>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strong>8</strong>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strong>9</strong>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strong>응송(Responsorial Psalm), 시편 31편</strong>
<strong>1</strong>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괴롭| 습니다.
○ 울다 지쳐 목이 타며 애간장이 | 끊어집니다.
<strong>2</strong> 괴로와서 한숨으로 세월을 보 | 냅니다.
○ 기운은 다하였고 뼈 마디마디가 | 녹아납니다.
<strong>3</strong> 사람들의 비방소리 들려 | 오-며
○ 이 목숨 없애려고 | 음모합니다.
<strong>4</strong> 주님, 나는 당신만을 믿사 | 옵니다
○ 당신만이 내 하나님이시라 | 고백합니다
<strong>5</strong> 나의 앞날을 당신의 손에 맡 | 기오니
○ 악을 쓰는 원수들의 손에서 이 몸을 | 건져 주소서
<strong>6</strong> 나는 당신의 종이오니 웃는 얼굴을 보여 | 주소서
○ 한결같은 사랑으로 이 몸을 | 구원하소서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빌 2:5-11</strong>
<strong>5</strong>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strong>6</strong>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strong>7</strong>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strong>8</strong>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strong>9</strong>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strong>10</strong>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strong>11</strong>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strong>복음서</strong>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strong>마 26:36-46</strong>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36</strong>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있으라 하시고 <strong>37</strong>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strong>38</strong>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strong>39</strong>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strong>40</strong>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strong>41</strong>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strong>42</strong>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strong>43</strong>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strong>44</strong>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strong>45</strong>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strong>46</strong>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사 50:4, 5을 묵상하십시오.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이사야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② 마 26:38-43을 묵상하십시오. 수난을 이겨내신 주님과, 주님을 팔거나 부인하거나 수난을 피해 달아난 제자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③ 빌 2:5-8을 묵상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십자가의 예수님 자유하신 예수님</h2>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오늘부터 수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성聖 주간의 시작이고 사순절의 끝인 오늘을 ‘예수 수난 (성지) 주일’이라고도 부르는데, ‘성지(聖枝)’는 ‘거룩한 나뭇가지’라는 의미이고, 이때의 나뭇가지는 ‘종려 나뭇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거나, 옷과 함께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행동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왕입니다”라는 의미와 “나는 낮고, 당신은 높습니다”라는 의미, 그리고 종려 나뭇가지가 상징하는 ‘승리, 기쁨, 축제’의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이때 ‘성지주일(Palm Sunday)’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시는 왕을 맞이하는 기쁨’이었고, 그 왕이 가져다 줄 승리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성지주일의 벅찬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주간에는 참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일들이 우리를 위해 실현된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죽음이 소멸되며 저주가 사라지고 악마의 노예 살이가 종식되어 그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화해하시게 되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인간들과 천사들이 하나로 일치된다. 서로 멀리 갈라져 있던 것들이 결합되고 울타리가 없어지며 장벽이 무너져버리고 평화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평화롭게 하신다. S. 치프리아니/오영민 옮김 ｢말씀과 전례｣(성바오로출판사) 251쪽

그런데 이 성지주일의 기쁨과 축제가 그만 오래 가지 못하고 맙니다. 다윗의 자손인 새 왕이 승리와 해방을 가져다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성지(聖枝)’ 즉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거나 길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라며 환호하던 예루살렘 군중들의 소리는 이내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자들의 예수를 향하는 음모의 빌미가 되고, 잔인한 살해의 서곡(序曲)이 되고 맙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전통 안에서 ‘예수 수난 (성지) 주일’을 기념은 하면서도 ‘성지(聖枝)’라는 단어를 괄호 안에 넣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저들 환호소리에 가려진 무서운 뒷이야기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환호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는 인간들의 차디찬 법정에서 조사를 받습니다. 희망에 들떠 소리 높여 외치던 예루살렘 군중들은 현실문제에 부딪치자 전혀 이기적인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간들의 사악함과 변덕, 그리고 죄 없으신 예수를 향해 자행되는 인간들의 폭력을 오늘 성서일과는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인간의 광기가 집단으로 드러나는 그 현장에서 예수께서는 반대로 당신의 왕다운 모습을 견지하시며 참된 승리의 가치를 보여주십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주님의 수난’을 감격적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여호와의 종의 셋째 노래’를 통해 여호와의 종은 비록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 사 50:6, 7</strong></p>
그리고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 안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참담한 모욕들을 그 분의 ‘비움’과 ‘낮추심’이란 관점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 빌 2:6-8 공동번역</strong></p>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낮추셔서 극도의 인간적 굴욕에 빠져드시는 모습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수난을 관상하는 사도 바울의 시선은 그분이 겪으신 참담한 능욕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우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빌 2:9-11). 복음서에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자유함 속에 맞이하셨음을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 마 26:39 공동번역</strong></p>
이 기도에서 마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하소서”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비워 아버지께 드리는 순간 예수님께 찾아온 것은 자유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복음서 저자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한다기보다는, 그 역사적 사실에 담긴 신앙의 메시지를 발굴해서,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건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때로는 복음서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강조점의 차이들로 인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고백의 일치 가운데서도 때로는 서로 상이한 부분이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되거나 가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의미를 확대시켜주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태는 예수님의 수난에서 자유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잔인한 음모와 소용돌이에 무기력하게 휘말려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조율하고 스스로 결단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흔들림 없이 걸으십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귀를 떨어뜨렸을 때도 오히려 그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2-54). 예수님께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래서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몸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마 26:42</strong></p>
그리고 세 번째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는 피곤함에 잠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마 26:45, 46</strong></p>
바로 이 장면에서 학자들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유사점을 보아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속(救贖)의 시간’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역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가 철저하게 아버지의 때에 맞추어져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순종하시게 된 동기를 마태는 구약성경에서 찾았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마 26:24</strong></p>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 마 26:31</strong></p>
어디에 기록된 말씀일까요? 슥 13:7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보낸 사람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당신을 잡으러 왔을 때도 주님은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 마 26:55, 56</strong></p>
유다가 절망에 빠져 성소에 내동댕이친 은으로 대제사장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장면에서도 마태는 구약의 말씀의 실현을 보았습니다(마 27:3-10, 렘 32:6-15, 슥 11:12-13).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온 수난과 죽음이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 글로서 밝혀놓으신 것을 알고 계셨고, 당신께서 알고 계시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의 이 순종을 언급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 2:8</strong></p>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모두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죽음’을 수용하신 것입니다. 죽지 않을 수 있었지만 친구를 위해 죽으신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따라서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수난사는 온통 자유와 사랑으로 넘실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수난사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님을 ‘죽을 죄인’(마 26:66)으로 옭아매려고 사람들이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예수님의 무죄하심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수난사 전체를 통해서 보지 않더라도 마태가 전해주고 있는 두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 아내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입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습니다”(마 27:19 공동번역).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자신들의 음모를 빌라도를 이용해 정당화하려 할 때, 그 살해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군중 앞에서 손을 씻는 빌라도의 행동(마 27:24-25)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죄하심’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인간들의 잘못 또한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는 스승을 은 삼십에 팔고(마 27:3),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마 26:69-74).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마 26:56). 빌라도는 예수를 죄 없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고 맙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하는 말에서 그의 비겁함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율법을 수호할 책임의 중심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을 어기는 살해음모에 앞장을 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피에 대해, 자신들과 자기의 자손들이 책임을 지겠다며 큰소리를 칩니다(마 27:25). 그들은 그렇게 그리스도와 길을 달리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서 이탈해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사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인간들의 불의한 심판만이 아니라, 불의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함께 강조되고 있습니다.

범죄 후에 스스로 목매달아 죽은 유다의 절망적 행위(마 27:5)는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 눈이 어두운 오늘날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우리를 보여줍니다. 진리보다 자신의 성공이 더 중요했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의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의 수난사에 비추어 본다면 가해자이거나 방관자이거나 혹은 도망자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수난사는 직접적으로 우리들 자신과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들 자신 안에 빌라도의 모습이 있고, 예루살렘 성전 권력자들의 모습이 있고, 유다나 베드로 혹은 두려움에 달아난 제자들의 모습이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방향을 잃고, 유다처럼, 빌라도처럼, 대제사장이나 군중들처럼, 혹은 연약한 제자들처럼 방황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기를 볼 때, 머리와 심장에 큰 통증을 느끼곤 했습니다. 머리의 고통은 지성이 죄를 지을 때, 심장의 고통은 마음이 죄를 지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심장을 들여다보며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기도할 때마다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눈물을 통해 그들은 지성과 마음의 정화를 이루곤 했습니다. 교부들의 금언집에 소개된 아르세니오스는 평생 동안, 앉아서 일할 때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 때문에 가슴에 천 조각을 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빠스 푀멘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르세니오스, 당신은 행복한 분이십니다. 당신은 여기 이 세상에서 당신 자신을 두고 애통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승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영원히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승에서 자발적으로 애통한 삶을 살든, 저승에서 고통 속에 울부짖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에로테우스/박노양 ｢예수기도｣(정교회출판사) 111쪽

우리에게도 이 눈물이 있기를 바랍니다. 죄를 슬퍼하는 우리의 눈물이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으로 나아갈 때, 그 눈물과 갈망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참여하는 자리로 이끕니다. 은혜는 ‘이해’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참여’로 받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2천년 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오늘 우리를 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유다처럼, 베드로처럼, 빌라도처럼 때로 비겁하고, 때로 흔들리는 존재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피다.” 성찬은 단순한 기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사건이며, 그분의 사랑이 내 존재 안으로 들어오는 식탁입니다. 나의 지성이 죄를 지어 통증을 느낄 때, 나의 마음이 죄를 지어 통증을 느낄 때, 우리는 눈물의 회개와, 믿음의 고백과, 성찬의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정화(淨化)를 얻게 됩니다. 그런 후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으로써 성화를 이룹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마음과 지성은 순수해질 수 있고, 그렇게 순수해질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압니다. 참된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현실의 이익에 급급해 살아가는가?

② 예수님처럼 절대적 자유로서 십자가를 감당하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06:55: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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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사순절 제5주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17]]></link>
			<description><![CDATA[<strong>사순절 제5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겔 37:1-14</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strong>2</strong>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strong>3</strong>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strong>4</strong>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strong>5</strong>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strong>6</strong>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strong>7</strong>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strong>8</strong>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strong>9</strong>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strong>10</strong>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strong>11</strong>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strong>12</strong>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strong>13</strong>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strong>14</strong>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편 130편

<strong>1</strong> 여호와여 내가 깊은 | 곳에서
○ 우리 주님께 부르 | 짖었나이다
<strong>2</strong> 주님께서 내 소리를 들으 | 시오며
○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 기울이소서
<strong>3</strong>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 | 리-며
○ 나는 주님의 말씀을 | 바라는도다
<strong>4</strong>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 | 림보다
○ 내 영혼이 주를 더 | 기다리나니
<strong>5</strong>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 | 도-다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 바랄지어다
<strong>6</strong>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 있도다
○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 건지시리라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롬 8:6-11</strong>

<strong>6</strong>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strong>7</strong>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strong>8</strong>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strong>9</strong>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strong>10</strong>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strong>11</strong>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11:1-44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strong>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strong>2</strong>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strong>3</strong>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strong>4</strong>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strong>5</strong>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strong>6</strong>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strong>7</strong>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strong>8</strong>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strong>9</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strong>10</strong>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strong>11</strong>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strong>12</strong>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strong>13</strong>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strong>14</strong>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strong>15</strong>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strong>16</strong>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strong>17</strong>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strong>18</strong>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strong>19</strong>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strong>20</strong>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strong>21</strong>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strong>22</strong>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strong>23</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strong>24</strong>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strong>25</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strong>26</strong>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strong>27</strong>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strong>28</strong>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strong>29</strong>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strong>30</strong>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strong>31</strong>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strong>32</strong>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strong>33</strong>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strong>34</strong>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strong>35</strong>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strong>36</strong>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strong>37</strong>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strong>38</strong>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strong>39</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strong>40</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strong>41</strong>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strong>42</strong>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strong>43</strong>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strong>44</strong>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요 11:24을 묵상하십시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아나이다”라는 고백에서 드러나는 마르다의 부활관은 무엇입니까?

② 겔 37:5을 묵상하십시오.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 생명이 없는 뼈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③ 롬 8:6-9을 묵상하십시오.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 이유는 무엇이고, ‘영의 생각’이 생명과 평안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h2>
교회력이 어느덧 사순시기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부활절이 한 발짝 더 가까이 온 오늘인데, 오늘 성서일과에서 하나님은 죽음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세상에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본질적 희망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지나온 사순시기 동안 우리가 묵상해 온 말씀들과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마치 겨울을 딛고 피워낸 봄꽃 같은 생명의 신비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사순절 셋째 주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속된 갈망을 영생에 이르도록 해갈해주시는 ‘샘물’이셨고(요 4:11-15), 사순절 넷째 주 복음에서의 예수님은 맹인을 치유하시고, 계속된 대화를 통해 존재의 어둠을 밝혀주시는 ‘빛’이셨습니다(요 9:7, 35-38). 그리고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 성서일과는 죽음 가득한 골짜기에 생기가 불어와 생명을 꽃피우고, 무덤에서 부활을 싹틔우는 복음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복음의 흐름을 따라 걸어와서, 어느덧 사순절의 끝자락을 밟고 선 우리는, 저만치 보이는 부활절을 기다리며 마치 오늘 응송의 시인과도 같은 고백을 갖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우리 주님께 부르짖었나이다 | 시 130:1</strong></p>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 영혼이 주를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 시 130:6</strong></p>
바닥을 헤아릴 수 없도록 ‘깊은(밈마아마킴 ממצמקים)’ 이 ‘해연(海淵)’ 혹은 골짜기는 외롭고 절망적이며 모든 것을 상실한 곳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것은 죽음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세계인데, 시인의 부르짖음은 그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펼쳐서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 겔 37:1, 2</strong></p>
지금 에스겔 선지자는 죽음의 골짜기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뼈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작열하는 햇볕에 오랜세월을 나뒹굴며 표백되고, 메마르고 부서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당시 바벨론에 끌려가 돌아올 희망을 다 잃어버린 히브리인들의 처지를 이 뼈들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이 ‘인간에게 예외 없는 폭군’이라고 명명한 죽음들과, 그로 인한 뼈들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저 주검들마다에는 어떤 사연들이 담겨있는지,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며, 어떤 상황이 인간을 기다리는지,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죽음은 어둠의 신비에 싸여있습니다. 알렉스 슈메만은 죽음을 ‘침묵의 음모’라고 했습니다.니콜라스 바실리아디스/박용범 옮김 ｢죽음의 신비｣(정교회출판사) 25쪽
그렇습니다. 저 죽음의 골짜기는 완전히 끝난 상태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곳에 선지자를 세워놓고 하나님은 뜻밖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 겔 37:3a</strong></p>
갑작스러운 질문 앞에서 에스겔은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립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겔 37:3b 새번역). 죽은 자들의 살이 이미 썩어 없어진지 오래고, 뼈들마저 닳을 대로 닳아버린 상태에서 제 아무리 선지자라 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을 갖기란 그렇게 어렵고도 모호한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신앙의 언어로 답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이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당신이 하실 일을 대신 전하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 겔 37:4-6</strong></p>
여기서 ‘생기’는 ‘루아흐(רוּחַ)’인데,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어넣으셨던 ‘생기(네샤마 גשמה)’와 동일한 의미로 ‘바람, 숨, 하나님의 영’을 의미합니다.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돌려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2절과 13절에서도 두 번 씩이나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겠다"시며, "그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기승을 부리는’ 이 두려운 세상에서, ‘죽음이 가족을 갈라놓는’ 이 슬픈 세상에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생명의 근간이 되시는 하나님 말씀과, 그 분께로부터 불어오는 숨결만이 우리의 샘물이며, 빛이며 희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역시 죽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보러가기를 미루십니다. 그 사실에 대해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생명께서 안 계신 곳에서 죽음이 질병을 이용해 행세할 여지를 허용하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 요한 그리소스톰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이들에게도 겪어야 할 자기 몫의 고통과 죽음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질병이나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거나 불쾌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 보다 희망의 여지를 담아서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 요 11:4</strong></p>
주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생애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통해 당신이 마련하신 가장 밝은 빛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죽음으로 대변되는 어둠의 자리가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사로의 병과 죽음 뒤에 부활이 있게 하심으로, 나사로가 도달한 궁극의 행복 안에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셔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자, 마리아가 발끈해서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 11:39)라고 대꾸했을 때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라고 하신 말씀에서 ‘죽음을 딛고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예수님 메시지의 일관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이란, 모든 사람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생의 밑바닥 중의 밑바닥인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통한 생명을 싹틔워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요 11:25-26</strong></p>
놀랍지 않습니까? 삶의 밑바닥에서 갈증하던 수가성의 여인에게는 “내가 주는 물은 네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맹인에게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시며 빛을 회복시켜 주셨던(요 9:5-7) 주님께서, 지금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서의 주님, ‘세상의 빛’으로서의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중요한 건 오늘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내 존재의 빛으로 부활 생명으로 경험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과연 지금, 예수님을 생명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하셨을 때, 마르다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마르다의 이 대답은 분명 믿음을 담고 있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모호함이 드러납니다. 믿음 안에 체념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미래’에 살아날 것을 내가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어쩌면 마르다의 이 모습은 오늘 믿음의 모호함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겔 37:3b 새번역)라며. 내 가능성이 아닌 하나님의 가능성에 맡겼던, 에스겔의 믿음이 죽은 뼈들의 희망의 시작이었듯이,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고백한 마르다의 믿음도 죽은 자들의 희망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요 11:39</strong></p>
그렇습니다. 현실은 그토록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망 앞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왜 기도하시는 걸까요? 그것이 태초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긴밀하게 대화하며 창조된 세상입니다. 그 대화 끝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사로야 나오라 | 요 11:43</strong></p>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멀리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죽음 속으로 들어와 부르시는 분입니다. 이 복음으로 사고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서신서에서 ‘영의 생각’이라고 말하고, ‘영의 생각이 우리의 생명과 평안’이라고 단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롬 8:6</strong></p>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신’은 단순히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존재 방식’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삶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결국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즉 ‘죽음’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롬 8:9</strong></p>
여기 보면 한 문장 안에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동시에 언급됩니다. 이것은 똑같이 성령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모든 것이 바뀝니다.생명은 밖으로부터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시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현존입니다. 이 성령의 현존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생명의 능력이 지금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 롬 8:10</strong></p>
바울이 깨달은 새로운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靈)’ 만이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합니다. 그러나 곧 죽는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시간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생명을 시간에 예속되어 있는 생물학적인 목숨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죽고 사는 목숨 너머에 하나님께 속한 진짜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침내 이렇게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롬 8:11</strong></p>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소망하는 생명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으신 예수님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막연한 전능자, 창조주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시고,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당신 안에서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통 안에 있는 교회들은 부활절이 가까우면 성무 조과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구세주여, 당신은 하데스에까지 내려주시어
전능자로서 그 자물쇠를 부수시고,
창조자로서 당신 자신과 함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어,
죽음의 가시를 꺾으시고 저주에서 아담을 구원하셨나이다.
주여, 우리들은 간절히 원하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장긍선 ｢이콘-신비의 미｣(기쁜소식) 189-191쪽

지옥의 자물쇠를 부수시고, 죽음의 심연에서 우리를 끌어올리시는 주님만이 생명의 샘물이요 빛이십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요한복음 8장의 ‘나사로의 무덤’, 로마서 8장의 ‘죽을 몸’은 모두 십자가의 은총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생명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해서 옵니다. 지금 우리는 성찬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성찬은 단순한 기념이 아닙니다. 부활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듯,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오듯, 내 존재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 ‘죽을 몸’을 살리는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 요 11:44</strong></p>
교회는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곳, 그리고 묶인 자를 풀어주어 활보하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생명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생명은 ‘지금’ 말씀과 성령과 성찬 안에서 시작됩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으로 다가오는 부활절이 생명의 노래 가득하고 우리 모두의 내면이 온통 예수 생명으로 꽃피어지는 진정한 파스카의 날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부활을 미래적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현실을 절망하고 있지 않은가?

② 예수를 살리신 분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참 생명으로 살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23:16: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3.29]]></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16]]></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부모님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 <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strong>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strong><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23:01: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3.29]]></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14]]></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고난주간 일정</strong>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4일까지 고난주간이 이어집니다. 고난주간 동안 이어지는 예배에 힘써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성목요일 예배 ☞2일(목) 오후 7:30, 웨슬리 채플
⋅성금요일 예배 ☞3일(금) 오후 7:30, 웨슬리 채플

<strong>② 부활절 안내</strong>
⋅세례예식(세례 입교 : 최영숙성도) &amp; 칸타타 ☞오전11시, 본당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부활절 연합예배 ☞오후3시, 샘터교회

<strong>③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저금통</strong>
부활절에 가져오시면 부산 YWCA를 통해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④ 예배순서 변경 및 참여 안내</strong>
⋅구약성서 봉독 후의 시편 응송(화답송)과 서신서 낭독 후의 층계성가는 모든 회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성가입니다. 시편 응송의 ○은 회중 모두 함께 부르시기 바랍니다.
⋅4월 첫 주부터는 매 주일 성찬례를 행합니다. 존 웨슬리는 성찬을 ‘회심과 성화를 위한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이라고 했고, 성찬은 ‘믿음을 강화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매주 1회 이상 성찬을 권했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제3편 조직과 행정법 제12조는 ‘교인의 권리’로서 ‘세례 받은 교인은 성찬식에 참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22:59: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3.22]]></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13]]></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부모님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 <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strong>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strong><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0 Mar 2026 22:53: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3.22]]></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1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2026 웨슬리 아카데미</strong>
공학자가 본 창세기 연구 노트
제 2강 고대근동 창조신화와 창세기 창조 이해
⋅강사 : 김병수 권사(공학박사)

<strong>② 플라톤 | 국가 강좌</strong>
⋅일시 : 4월6일(월) 저녁7시-9시 | 4층 티베리아
⋅강사 : 이경우 집사(철학박사)

<strong>③ 예배순서 변경 안내</strong>
⋅말씀과 성찬의 연결성을 위해 ‘환영 및 소식’ 순서를 ‘성찬의 예배’ 뒤로 옯겼습니다. 교우들은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4월 첫 주부터는 매 주일 성찬례를 행합니다. 존 웨슬리는 성찬을 ‘회심과 성화를 위한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이라고 했고, 성찬은 ‘믿음을 강화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매주 1회 이상 성찬을 권했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제3편 조직과 행정법 제12조는 ‘교인의 권리’로서 ‘세례 받은 교인은 성찬식에 참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0 Mar 2026 22:52: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사순절 제4주 참다운 시선, 영적 시선]]></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11]]></link>
			<description><![CDATA[<strong>사순절 제4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삼상 16:1-13</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strong>2</strong>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strong>3</strong>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strong>4</strong>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strong>5</strong>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strong>6</strong>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strong>7</strong>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strong>8</strong>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strong>9</strong>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strong>10</strong>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strong>11</strong>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strong>12</strong>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strong>13</strong>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strong>응송 | 시편 23편</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는 나의 목자 | 시 – 니
○ 내게 부족함이 | 없으리로다
<strong>2</strong>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 | 이시며
○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 하시는도다
<strong>3</strong>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 위하여
○ 의의 길로 인도 | 하시는도다
<strong>4</strong>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 지라도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 하시나이다
<strong>5</strong>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 주시고
○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 넘치나이다
<strong>6</strong>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 | 르리니
○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 살리로-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엡 5:8-14</strong>
<strong>8</strong>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strong>9</strong>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strong>10</strong>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strong>11</strong>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strong>12</strong>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strong>13</strong>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strong>14</strong>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strong>복음서 | 요 9:1-41</strong>
<strong>1</strong>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strong>2</strong>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strong>3</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strong>4</strong>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strong>5</strong>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strong>6</strong>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strong>7</strong>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strong>8</strong>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strong>9</strong>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strong>10</strong>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strong>11</strong>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strong>12 </strong>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strong>13</strong>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strong>14</strong>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strong>15</strong>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strong>16</strong>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strong>17</strong>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strong>18</strong>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strong>19</strong>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strong>20</strong>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strong>21</strong>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strong>22</strong>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 함이러라 <strong>23</strong>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strong>24</strong>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strong>25</strong>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strong>26</strong>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strong>27</strong>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strong>28</strong>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strong>29</strong>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strong>30</strong>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strong>31</strong>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strong>32</strong>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strong>33</strong>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strong>34</strong>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strong>35</strong>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strong>36</strong>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strong>37</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strong>38</strong>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strong>39</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strong>40</strong>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strong>41</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삼상 16:7절 묵상하십시오.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 으실 자'라고 생각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② 요 9:36-38절 묵상하십시오. 육의 눈을 뜨게 된 맹인이 마침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했을 때, 그의 '봄'은 무엇으로 변합니까?

③ 엡 5:8, 9절 묵상하십시오. 빛의 자녀들이 맺는 빛의 열매는 궁극적으로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참다운 시선, 영적 시선</h2>
지난 2월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연합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이 연일 격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작전명을 ‘장엄한 분노(Epic Fury)’라 하고, 이스라엘은 ‘포효하는 사자(Roaring Lion)’라며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이미 2,000여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고, 그 중 어린이, 청소년 사망자만도 160여 명이고 보면, 이 전쟁의 배경과 목적이 무엇이든 속히 이 야만적인 행동이 멈춰져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전쟁의 명분도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뉴스를 보며 묻습니다. “누가 옳은가?, 누가 더 강하고, 결국 누가 이길 것인가?”. 세상은 그렇게 힘과 승패의 기준으로 역사를 봅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물음은 달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계시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선의 방향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시선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표면을 보지만 하나님은 내면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일으킨 명분이나 승패보다도,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속내를 달아 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잔인한 속내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생명과 평화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참되고 본 된 그리스도교 영성이란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함으로서만 갖춰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자녀의 아름다움을 실천하고, 창조 목적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에서 그 깊이와 넓이가 더해지는 것이겠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영적 감수성이 깊어져야 합니다. 포화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울부짖는 가족을 보며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떡의 유혹과 권력의 음험한 유혹을 물리치고 십자가를 향해 걸으시던 주님의 모습을 관상하며, 힘의 세계, 자본의 세계가 아닌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고 기도하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영성에 눈뜰 때,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고대 이스라엘이 부족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 때 일어난 한 일화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한 인물은 사무엘이었는데, 어느 날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당시 라마에 있던 사무엘을 찾아가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라고 요구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고 숙고(熟考)하던 끝에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세웁니다. 당시 사울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물론 사울은 외모만 준수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한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 마음의 소유자였고(삼상 10:9),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여 예언도 했었습니다(삼상 10:10).하지만 그는 새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합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고(삼상 15:19), 여호와께서는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삼상 15:35). 마침내 사울은 폐위되고 마는데, 그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이 있게 된 배경입니다. 사울이 폐위된 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시며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삼상 16:1)고 하십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해 장남부터 차례대로 자기 앞에 서게 합니다(삼상 16:5). 엘리압이 가장 먼저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마음속으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삼상 16:6)라며 흥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삼상 16:7a 새번역)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의 무엇을 보신다는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삼상 16:7b</strong></p>
사람은 드러난 용모와 출신과 배경을 보지만 하나님은 감춰진 내면을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깨달아야 하고, 이 차이를 좁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새가 데리고 온 일곱 명의 아들들을 다 보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중 아무도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아들이 없느냐고 묻자 이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막내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 떼를 치러 나가고 없습니다. | 삼상 16:11a 새번역</strong></p>
사무엘이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오라고 합니다(삼상 16:11b). 그리고 마침내 다윗이 오는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 삼상 16:12 새번역</strong></p>
양을 지키다 왔으니 목동의 복장 그대로였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다윗을 마음에 두시고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하신 것으로 볼 때, 다윗은 그 중심이 곧은 신앙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과 형들 사이에 있었던 중심의 차이, 그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삼상 16:13</strong></p>
“이 날 이후로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는 것은 그가 걸어간 ‘평생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후의 다윗의 삶이 평생 동안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로서 살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한 순간 그는 권력다툼에 치중한 자로 살고,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은 정욕으로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시며 일평생을 통해 그를 변화시켜 내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 은총을 신뢰하고, 우리 또한 평생을 통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내면이 완고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섬세하며 부드러워지고 맑으며 깊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요한은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이웃들(요 9:8) 혹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시선(요 9:40, 41)과, ‘육신(肉身)의 눈’만이 아닌 ‘영(靈)의 안목’을 떠가는 맹인의 시선(요 9:7, 29-38)을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던 중 시각장애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 요 9:2</strong></p>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통념상 맹인이나 문둥병에 걸리는 것은 그 질병에 걸린 자신 혹은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생각은 출 20:5, 34:7, 민 14:18절 등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랍비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해석을 내려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 요 9:3</strong></p>
사실 주님의 이런 해석도 우리에게 흔쾌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맹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지금껏 억울하게 고통을 당해왔다는 말씀일까요? 성 요한 크리소스톰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맹인처럼 갖가지 장애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중 이 맹인을 통해 당신 일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선의 차이입니다. 맹인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시선(요 9:2)과 이웃들의 시선(요 9:8)은 유대교의 통념과 세계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통념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래서 맹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그의 존재에 깃든 존귀함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통념에 갇히지 않았고, 따라서 영혼도 갇히지 않았습니다. 성 테오그노스토스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만일 당신이 영적으로 거룩한 것을 보기 원한다면, 먼저 평온하고 고요한 생활을 하며,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정념 때문에 요동하지 않는 영혼의 순수한 상태를 획득하면, 당신의 지성은 그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감지할 것이며, 구원의 복된 소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성산의 성 니코도모스·고린도의 성 마카리오스/엄성옥 옮김 ｢필로칼리아 2｣(은성출판사) 596-597쪽</p>
예수님의 시선과 영혼이 그러했습니다.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예수님, 하나님의 뜻에 시선을 두신 예수님, 그러하신 예수님이셨기에 맹인을 만나셨을 때, 그를 향하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볼 수 있었고, 회복의 복된 말씀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다가가셔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주십니다(요 9:6).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 | 요 9:7</strong></p>
그는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사건을 두고 마을에는 일대 소란이 벌어집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요 9:8)라며 놀라워하며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요 9:16)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바리새인도 있었습니다. 갇힌 시선은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시선이 율법에 갇히고 어두워지니, 결국 사람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는 이날 이후로 매일매일 새로운 시선을 떠가며, 영혼이 깊고 맑고 섬세해져가는 맹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고, 부모와 맹인을 차례로 불러 이렇게 요구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요 9:24 새번역). 하지만 맹인은 자기가 알게 된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답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요 9:25 새번역</strong></p>
바리새인들이 재차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요 9:26)라고 묻자 그는 천진난만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 요 9:26 표준 새 번역</strong></p>
사람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요 9:28, 29)라고 하자, 맹인은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 요 9:30-33 표준 새 번역</strong></p>
마침내 사람들은 “죄 가운데 태어난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요 9:34)라며 그를 쫓아내고 맙니다. 헨리 나우웬은 단절된 인간상의 특징을 ‘마비’로 보았습니다. 가슴이 마비된 사람들은 실존적 인간들이 자아내는 불안이나 기쁨이 아닌 무관심과 권태로 가슴을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봉우 역 ｢상처 입은 치유자｣(분도출판사) 20쪽
평생 맹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눈을 떠 보게 되었는데, 그가 보게 된 기쁨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율법적인 옳고 그름만 따지는 이들에게 도대체 신앙이란 어떤 의미인 걸까요? 그렇게 그들은 사람을 향하는 시선이 망가져 있었던 겁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서서히 눈이 밝아져 가고, 정상이었던 사람들은 서서히 눈이 어두워지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가 봅니다. 영혼이 어두워지니 시선이 어두워지고, 시선이 어두워지니 행동이 어두워지는 가련한 사람들의 모습과, 시선이 밝아지니 영혼도 밝아지고, 영혼이 밝아지니 믿음이 살아나는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 교차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 이때 그의 대답을 보십시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 9:36)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 요 9:37</strong></p>
그리고 그는 마침내 “피스튜오 퀴리에(πιστεύω κύριε)”, 즉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라며 땅에 엎드립니다. ‘피스튜오 퀴리에(πιστεύω κύριε)’라는 표현은 완전한 신앙고백인 동시에 예배의 언어입니다. 여기에서 그의 시선은 완전해집니다. 그리고 그의 존재마저 완전해집니다. 그는 육체적인 시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영광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靈)의 눈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둘러보시며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 요 9:39</strong></p>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택함 받은 이후 오히려 영적 맹인의 삶을 살고 만 비극적인 사람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스스로 본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던 우리가 나의 소경됨을 겸손히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절기입니다. 육(肉)의 눈을 감으면 영(靈)의 눈이 뜨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소위 ‘본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의 빛 앞에서 소경이 되었을 때, 그 날 이후로 바울은 '영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은총을 체험한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이렇게 촉구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엡 5:8, 9</strong></p>
전에 그들이 ‘어둠’이었다는 것은, 내면이 어두웠다는 의미이고, 그 내면의 어둠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어두웠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내면의 어두움을 본 사람만이 빛을 향해 설 것이고, 성령의 감동으로 빛의 자녀가 된 사람만이 빛의 열매로서의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삶을 살아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를 ‘보며’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보는 것과 참으로 보는 것은 다르고, 많이 아는 것과 참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으로 보고, 참으로 알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예가 오늘 복음서의 맹인입니다. 그는 육체의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는 영적 눈을 뜨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바른 고백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선의 탄생이고, 새로운 앎의 탄생입니다. 사순절은 보지 못하던 우리가 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식탁으로 나아가는데, 성찬은 우리의 눈이 열리는 식탁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주님이 떡을 떼실 때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우리도 이 식탁에서 그리스도를 새롭게 알아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구원의 빛입니다. 따라서 이 식탁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바리새인처럼 ‘본다’ 하는 교만 속에서 완고해지고 있지 않은가?

② 신앙의 시선이 맑고 깊어지며, 영혼 역시 맑고 깊어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6 Mar 2026 05:06: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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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사순절 제3주 갈증에서 생명으로]]></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10]]></link>
			<description><![CDATA[<strong>사순절 제3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17:1-7</strong>
<strong>1</strong>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strong>2</strong>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strong>3</strong>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 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 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strong>4</strong>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 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strong>5</strong>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 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strong>6</strong>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 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strong>7</strong>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 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 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strong>화답송(Responsorial Psalm), 시편 95편</strong>
<strong>1</strong>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 | 하-며
○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 | 거이 외치자
<strong>2</strong>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 | 아가며
○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 노래하-자
<strong>3</strong>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 | 이시오
○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 때문이로다
<strong>4</strong>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 있으며
○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 것이로-다
<strong>5</strong>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 | 드셨고
○ 육지도 그의 손이 | 지으셨도다
<strong>6</strong>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 | 하-며
○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 무릎을 꿇자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롬 5:1-11</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strong>2</strong>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strong>3</strong>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strong>4</strong>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strong>5</strong>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strong>6</strong>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strong>7</strong>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strong>8</strong>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strong>9</strong>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strong>10</strong>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strong>11</strong>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strong>복음서 | 요 4:5-26</strong>
<strong>5</strong>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strong>6</strong>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strong>7</strong>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strong>8</strong>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strong>9</strong>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strong>10</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strong>11</strong>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strong>12</strong>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strong>13</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strong>14</strong>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strong>15</strong>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strong>16</strong>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strong>17</strong>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strong>18</strong>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strong>19</strong>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strong>20</strong>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strong>21</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strong>22</strong>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strong>23</strong>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strong>24</strong>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strong>25</strong>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strong>26</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strong>27</strong>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strong>28</strong>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strong>29</strong>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strong>30</strong>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출 17:5-6절 묵상하십시오. 물을 달라며 모세와 다투던 이스라엘 자손이 해갈을 얻은 것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② 요 4:10, 14절 묵상하십시오.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어디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③ 롬 5:3, 4절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겪는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유익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갈증에서 생명으로</h2>
생명은 항상 씨앗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겨자씨 안에 아름드리 겨자나무가 숨겨있고, 작은 씨앗들 안에 울창한 숲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씨앗은 나무도 숲도 아닙니다. 씨앗은 자라야 합니다. 씨앗이 자라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리입니다. 둘째는 시간입니다. 셋째는 물과 햇빛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씨앗은 처음부터 위로 자라지 않습니다. 먼저 아래로 뿌리를 내립니다. 땅 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흙 속에서는 조용히 뿌리가 깊어집니다. 뿌리가 깊어질수록 나무는 더 높이 자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는 우리의 영적 성장과도 고스란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 존재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심겨 있습니다. 이 생명의 씨앗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시간’ 안에서 자랍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에 물과 햇빛이 필요하듯, 인간 존재에도 말씀의 샘물과 생명의 빛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기 전에, 먼저 뿌리부터 깊이 내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겪는 기다림의 시간, 때로는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내리게 하십니다(골 2:7). 그런 다음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듯, 우리 역시 하늘을 향해 자라게 하십니다.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세상을 발견하는 일은 그저 우리의 외부 세계를 바라보고 관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내적 토대를 발견하는 데 있다. 나의 가장 심오한 자아의 안,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이 되게 하는 생생한 자기창조적 신비이며, 내가 나 자신이 되는 독특한 문이다.

심오한 ‘나’는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법칙에 따라 행동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적 법칙들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바람처럼 움직이는 성령의 법칙들이다. 로버트 인초스티/강창헌 옮김 ｢토마스 머턴의 씨앗｣(생활성서) 29-30쪽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 안에서 그 성령의 법칙을 따라 행동하고 존재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먼저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불평하는 광야의 히브리 자손들을 보여줍니다. 씨앗의 예로 보면 그들은 이제 막 심겨진 씨앗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아름드리 나무의 영광을 모릅니다. 하지만 씨앗의 과정을 거쳐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뜨겁고 목마른 광야를 내적 토대가 익어가는 자리 즉 소명의 자리로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온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 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서히 존재의 뿌리를 말씀 안으로 내리고, 영적으로 고양되어 갑니다. 여인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소명의 자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각각의 존재가 자라고 영성이 자라는 고유한 자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우리)를 어디에 심어 놓으셨는가?” 바로 그 자리, 때로는 광야와도 같고, 때로는 우물가와도 같은 이 소명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뿌리를 내리고, 시간을 통과하며 영적으로 성숙해갈 때, 우리도 하늘을 향해 자라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 출 17:1</strong></p>
이스라엘 자손들이 신 광야에서 떠나 돕가와 알루스를 거쳐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민 33:12-14). 고단한 노정(路程) 끝에 장막을 친 ‘르비딤(םידיד 레피딤)’이라는 지명은 ‘원기회복’이란 뜻으로 시내 산에 이르는 마지막 장소로 보입니다. 혹자는 이곳을 오늘날의 ‘와디 페이란(Wadi Peiran)’으로 추정하는데, 이 지역은 본래 샘과 개울이 있어서 ‘시내 산의 진주’로 불릴 만큼 물이 넉넉했지만, 히브리들이 도착했을 때는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말라있었던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이 상황은 이스라엘 자손이 처한 ‘집단적 갈증’을 보여줍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 말라버린 모래사막을 끝도 없이 걸어오며 그들이 얼마나 목이 마르고 신경이 곤두섰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끝내 모세를 향해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라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 질문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것이 맞는가?” 즉 물이 아니라 하나님 현존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들의 이 언사는 마라의 쓴 물 사건(출 15:22-26)에 이어, 물로 인한 두 번째 원망이었습니다. 광야의 목마름은 그들로 하여금 번번이 ‘하나님 현존’과 ‘하나님의 전능하심(ידשׁ לא 엘 샤다이)’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배제하고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항의합니다. 처절한 목마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들의 두려움과 불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도 그것을 알기에 그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택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 출 17:4</strong></p>
혹자는 이 장면에서 히브리들이 본질적으로 문제를 삼은 것은 물이 아니라 출애굽 자체라고 보았습니다. 영성신학자인 ‘아르투로 파올리(Arturo Paoli)’는 고독 속의 비움을 배우기 위해 사막에 갔을 때, 사막생활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그것은 불편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사막생활의 무익함 때문이었다고 회고하면서, 그 느낌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식(浸蝕)해가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들의 내면에는 그런 갈증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노동의 치열함과 생산의 보람을 잘 아는 그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처해진 사막은 지극히 수동적인 장소였고, 그 어느 것도 생산할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은 스스로 침식되고 있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진정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고,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막일기’에서 아르투로 파올리는 ‘베른하르트 벨테’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여러 한계 상황에 직면했을 때,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마치 텅 빔처럼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런데 그런 한계 상황에서는, 예수께서 지니셨던 비전을 지닐 필요가 있다. 그분은 우리를 근심에 빠뜨리는 고통 저 너머에서 “이것을 믿어라. 너희는 행복하다.”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아르투로 파올리/최현식 옮김 ｢사막일기｣(보누스) 79쪽

‘텅 빔’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의 자리로 여겨졌던 사막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같은 비전을 지닐 수 있다면, 사막은 더 이상 어두운 심연(深淵)이 아니라 영성 발현의 장소이자 소명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라고 하십니다(출 17:5). 그리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십니다(출 17:6). 이들은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마시면서 다시 한 번 생명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이 반석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전 10:4). 하나님은 그들이 해갈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단지 육신의 해갈만이 아닌 영적 해갈을 경험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자라는 과정에 차원이 있듯, 영적으로 자라가는 과정에도 차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영적 자람’이란 하나님을 아는 차원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처음 자유인이 되어 광야로 나올 때는 애굽 땅에서 자기들을 호령하던 지배자들처럼, 자기들도 어서 강대한 제국을 이루어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호령하고 싶은 속된 갈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신 것은 그런 갈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즈음 성숙하게 변화되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마 4:4)임을 온 천하에 증명하는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갈망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갈망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갈망이 삶을 성실과 행동으로 이끄는 에너지임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처음 갈망은 속되고 육체적입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멈추어있지 않는 것입니다. 방향을 하나님께 두고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며 점차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속된 갈망의 껍질들이 하나씩 벗겨지며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완전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여인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요 4:6-8</strong></p>
예수님과 수가(Sychar) 성의 여인이 야곱의 샘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이 대화의 흐름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우물의 물을 달라고 하시며 대화가 시작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의 이 요청에 대해 여자의 믿음에 목마르셨기 때문이라고 했고, 토리노의 막시무스는 예수님께서 물을 청하신 것은 온 세상의 구원에 목마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놀랍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a)라며 퉁명스럽게 쏘아부칩니다.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요 4:9b),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요 4:10</strong></p>
예수님께서는 대화의 주제를 계속 ‘물’에 두시면서도 대화의 방향을 ‘그’ 즉 ‘당신’에게로 이끌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여인 안에 있는 갈증을 보셨습니다. 그녀의 갈증은 깊었고, 야곱의 우물만으로는 해갈할 수 없는 존재의 공허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 공허를 해결하려고 다섯 남자와 결혼했지만 번번이 관계는 깨졌고, 지금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요 4:11-15</strong></p>
여인은 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팽팽하게 평행선을 이룹니다. 예수께서 ‘영(靈)의 음료로서의 생수’를 말씀하시면, 여인은 ‘육(肉)의 음료로서의 우물물’로 대답하고, 예수께서 “내가 너에게 샘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면 여인은 “당신은 두레박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시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요 4:16-17</strong></p>
저 옛날 광야에서 부르짖던 히브리들의 집단적 갈증과, 해소되지 않는 목마름으로 남자들의 품을 떠돌던 여인의 개인적 갈증은, 그것을 육신의 갈증으로만 여겼다는 점, 그리고 우물물만으로는 해갈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상 같은 것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광야에 있던 히브리들의 갈증이 생존의 갈증이었다면, 우물가에 있던 여인의 갈증은 존재의 갈증이었습니다. 히브리들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갈증 속에 있었고, 여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갈증 속에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갈증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그 갈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갈됩니다. 광야 히브리들의 갈증은 표면적으로는 ‘물의 갈증’이었지만, 실제 질문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의 갈증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표면적으로는 ‘물’을 문제 삼았지만, 내면 깊은 곳에 존재의 갈증‘이 타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문제를 ‘살아가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다’는 것에서 찾습니다. 쉐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쓰지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결핍과 갈증 속에 있고, 절망이라는 깊은 병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결핍과 갈증의 원인을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진 것’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돈이나 성공이나 사랑을 붙잡으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인간의 깊은 갈증을 완전히 채워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마치 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른 사람처럼 끊임없는 갈망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핍과 갈증의 자리에서 모든 인간은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을 깨닫는 순간을 경험하는데, 그것을 실존주의 철학은 ‘실존적 각성’, ‘존재의 깨어남’이라고 부르고, 실존주의 신학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관심사(Ultimate Concern)’인 ‘존재자체(being-itself)’인 신(神)과의 만남에서 찾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존재의 깨어남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한 마디가 여인의 숨겨진 존재를 드러나게 했습니다. 여인은 그때 처음으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봅니다. 지금껏 다섯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사막보다 더한 갈증이 자신을 타들어가게 했었습니다. 그 혼란의 정곡(正鵠)을 직시하게 하신 예수님께 여인은 경외감을 느끼며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껏 그토록 길어올려도 갈증만 더하게 했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가 마을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 요 4:29</strong></p>
이 여인이 갈증의 자리에서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향해 자라가는 과정을 보십시오. 처음에 여인은 예수님을, 율법을 어기고 사마리아 여자인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타락한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도 그녀는 우물물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갈증은 그녀를 대화에 몰입하게 했고, 주님 말씀이 그녀 안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되었을 때(요 4:14), 그녀를 해갈(解渴)의 감격을 넘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야곱의 우물가에 떨어진 씨앗이었고, 점차 말씀에 뿌리를 내리면서 예수님을 선지자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요 4:29). 사람의 눈을 피해 고립된 삶을 살던 여인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갈증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 혹은 때때로 겪는 고난과 힘겨움을 우리는, 나의 내면에 영적 씨앗이 심어지는 자리, 주님께서 나를 찾아와 부르시는 소명의 자리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간을 통과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롬 5:3, 4</strong></p>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공허함으로 사방에서 벽을 느끼고, 해결되지 않는 환난과 고난이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러나 매일 겪는 갈증이나 때때로 겪는 환난은 오히려 우리 삶의 에너지가 되고,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되어 우리를 차근차근 자라게 합니다. 광야의 갈증도, 우물가의 갈증도, 인간 존재의 갈증도 결국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며, 그 갈증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샘물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만찬 식탁에서 우리는 갈증의 종결을 경험합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들의 목마름은,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 터져나온 물(출 17:6)로 해갈되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목마름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해갈되었습니다.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을 맛보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열렸을 때,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교부들은 말했습니다. ‘그 물과 피는 교회의 성례’라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찬의 자리에서 광야의 물보다 깊은 물, 우물의 물보다 생명 깊은 물을 마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빵과 잔을 받으며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목마름은 주님 안에서만 해갈됩니다.” 나무가 자기 자리에서, 시간을 통과하며 뿌리를 땅속으로 내리고 하늘을 향해 자라가듯, 우리 역시 사순절 광야에서, 말씀의 우물에서, 성찬의 식탁에서 뜨겁게 예수님을 만나고, 예배와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아름드리 신앙의 나무로 자라가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그리스도 밖에서 해갈을 얻으려 몸부림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예배와 말씀과 기도 안에 머물며 참된 해갈을 경험하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6 Mar 2026 04:54: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3.15]]></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09]]></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2026 웨슬리 아카데미</strong>
∙공학자가 본 창세기 연구 노트
1강, 고대근동과 창세기의 이해 개요
강사 : 김병수 권사(공학박사)

<strong>② 사순절 영성세미나</strong>
⋅일시 : 3월 16일(월) 저녁-3월18일(수) 저녁까지
새벽 5:00, 저녁 7:30 ▶웨슬리 채플
⋅강사 : 한석문 목사, 주제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 9:17)
⋅새 가족 세미나 ‘제1과-4과’를 대신합니다.
⋅저녁시간은 7시10분부터 찬양으로 영성세미나가 시작됩니다.

<strong>③ 예배순서 변경 안내</strong>
⋅말씀과 성찬의 연결성을 위해 ‘환영 및 소식’ 순서를 ‘성찬의 예배’ 뒤로 옯겼습니다. 교우들은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주보 제본</strong>
주보 제본이 완성되었습니다. 주보를 제출하신 분들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3 Mar 2026 22:41: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3.8]]></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08]]></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부모님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 <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strong>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strong><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6 Mar 2026 22:44: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3.08]]></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06]]></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사순절 안내</strong>
☞사순절 달력을 활용하여 말씀 묵상 및 경건 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부활절에 가져오시 면 부산 YWCA를 통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사순절 달력과 저금통은 게시대 위에 있습니다.
∙ 사순절 영성세미나
⋅일시 : 3월 16일(월) 저녁-3월18일(수) 저녁까지
새벽 5:00, 저녁 7:30 ▶웨슬리 채플
⋅강사 : 한석문 목사, 주제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 9:17)
⋅새 가족 세미나 ‘제1과-4과’를 대신합니다.
⋅저녁시간은 7시10분부터 찬양으로 영성세미나가 시작됩니다.

<strong>② 속장 모임</strong>
⋅11시 예배 후 ▶웨슬리채플에서 있습니다.
⋅안건은 4월26일 운동회 점심식사 준비 협의입니다.

<strong>③ 주보 제본</strong>
주보 제본이 완성되었습니다. 주보를 제출하신 분들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2026 웨슬리 아카데미</strong>
∙제2강 “교사/부모 세미나” ▶8일(주일) 오후예배, 웨슬리채플
강사 : 이연승 권사(경성대유아교육과교수)
∙제3강 “공학자가 본 창세기 연구 노트(고대근동과 창세기의 이해)”
강사 : 김병수 권사(공학박사)
∙제4강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제5강 “복음을 노래한 신학자 마르틴 루터” ▶강사 : 오선지 교수(신학박사)]]></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6 Mar 2026 22:43: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사순절 제2주 사순절의 영성, 떠남]]></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05]]></link>
			<description><![CDATA[<strong>사순절 제2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12:1-4</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strong>2</strong>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strong>3</strong>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 라 하신지라 <strong>4</strong>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strong>응송 | 시 121</strong>
<strong>1</strong>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 들리라
○ 나의 도움이 | 어디서 올까
<strong>2</strong>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 로 - 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 | 하게 하시며
<strong>3</strong>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 | 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 아니하시며
<strong>4</strong>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 되시나 - 니
<strong>5</strong>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 | 하 - 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 | 하리로-다
<strong>6</strong>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 하시며
○또 네 영혼을지키 | 시리로 - 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롬 4:1-5</strong>
<strong>1</strong>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strong>2</strong>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strong>3</strong>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 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strong>4</strong>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 거니와 <strong>5</strong>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strong>복음서 | 요 3:1-17</strong>
<strong>1</strong>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strong>2</strong>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 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 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strong>3</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strong>4</strong>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strong>5</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 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strong>6</strong>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strong>7</strong>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strong>8</strong>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strong>9</strong>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strong>10</strong>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strong>11</strong>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 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strong>12</strong>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strong>13</strong>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strong>14</strong>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strong>15</strong>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strong>16</strong>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17</strong>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12:4절 묵상하십시오. 고형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브람 이 궁극적으로 따라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② 롬 4:1-3절 묵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③ 요 3:3, 16-17절 묵상하십시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사순절의 영성, 떠남</h2>
사순절 여정을 떠나온지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24절기로는 경칩이 다가오는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사는 부산에 비가 촉촉하게 내렸습니다. 차갑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비였지만, 조용히 그러나 깊이 땅으로 스며드는 봄비였습니다. 겨우내 메말랐던 땅이 그 비를 머금고 천천히 숨을 쉬고, 보이지 않던 뿌리들은 젖은 땅속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와 벌레들도 긴 어둠을 깨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는 계절입니다. 서양에서는 중세까지 ‘봄’을 ‘lenten’ 또는 ‘lent’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순절(Lent)’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 봄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사순절은 영혼의 겨울을 끝내는 계절입니다. 그러려면 메마른 우리 마음에도 은혜의 봄비가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다른 동식물들처럼 자연의 생명으로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연의 생명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한 영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영적 생명은 내 힘으로 피워낼 수 없습니다. 마른 땅이 스스로 꽃을 피워낼 수 없듯이, 우리 존재도 스스로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꽃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필요하듯이, 우리 존재에도 은혜의 단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의 핵심은 ‘떠남’입니다. 이 떠남은 우리가 무엇을 더 하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스며들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자신의 고백록인 ‘칠층산’에서 그 새 차원의 생명을 ‘광선이 수정에 투사되어 수정이 새로운 특질을 갖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의 영혼은 투명한 수정이 암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광선이 투명한 속을 비출 때, 수정은 광선에 의해 변화되어 빛이 몰입한 것처럼 보이는 고차원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자연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떤 의미로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안에서 빛날 때 변화한다. 토머스 머튼/정진석 옮김 ｢칠층산｣(바오로딸) 359쪽

사순절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새 차원의 생명인 부활을 향해 순례하는 영적 계절이라 하겠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순례의 길로 소명을 받은 수행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순례를 위해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갔는데, 토머스 머튼은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사막으로 떠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세계로 인도되어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토머스 머튼/오무수 옮김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분도출판사) 18쪽

하지만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갈 수 없기에 교회는 전통 안에 수련의 시간인 사순절을 두어서, 이 시기만이라도 성령의 새로운 세계로 인도되어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도록 한 것이고, 그럼으로써 ‘보이는 세계’ 안에서 살아온 삶의 관성에서 떠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감촉하며 살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도 길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은 말씀을 따라 떠나는 아브람의 이야기이고, 복음서는 구도의 길을 떠난 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 12:1</strong></p>
이 아브람 서사(敍事)를 잘 이해하려면, 그가 태어나고 자란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을 보면 그의 아버지 데라의 이동 경로가 소개됩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 11:31). 고고학적 탐사 기록에 의하면 아브람은 여기 언급된 ‘우르(Ur)’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우르’는 페르시아 서쪽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 사이에 소재해 있었는데,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 성읍이었습니다. 헬라어로 ‘강 사이의 땅’이란 의미인 고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우르와 하란을 포함한 전 지역이었는데, 오늘날 이라크와 이란의 남서부 지방에 해당합니다. 이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이라 불릴 만큼 토지가 비옥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이 부유했었습니다. 당연히 아브람도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저자는 11장 말미에서 우리 시선을 끌만한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2).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죽음을 기점으로 우주의 시작, 인류의 시작, 죄의 시작을 다룬 창세기 1-11장까지 기록한 ‘원역사’를 끝내고, 이어지는 12장에서 아브람의 떠남으로 시작되는 ‘족장사의 출발지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하나님 구속사’의 서막이 열리는 것인데,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아브람이 나고 자란 고향 우르를 ‘떠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우르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상거래 과정에서 우상이 유입되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우상 제조자와 우상 숭배자가 즐비하던 그곳에서 아브람의 아버지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였고(수 24:2), 따라서 아브람 역시 우상의 영향 하에서 자랐습니다. 그 낡은 관습으로부터 떠나야만 새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기에 아버지 데라의 죽음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남’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떠남은 단순한 이동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지난하게 이어진 죄의 관성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이었고, 오래된, 익숙한, 편안함에 길들여진 우상의 땅에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떠남은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 역시 떠남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시내산 기슭의 수도원에서 40년간 독거하며 은수자로 지낸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여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그중 첫 단계가 ‘세상과 결별의 단계’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옛 본성인 불신앙과 육신의 정념들을 떨쳐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염려와 이기심에서 떠나야 하고, 말씀에 순종한 후 찾아오는 허영심에서도 떠나야 합니다. 서방교회 전통의 존 번연(John Bunyan) 역시 ‘천로역정’에서 안전하고 익숙한 집에서 떠남으로부터 기독교도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떠남’은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민과 결단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회귀본능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이 낯설어서이기도 하고, 옛 삶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때 아브람을 떠올려야 합니다. 아브람은 그 땅이 비록 오랜 시간 자신에게 익숙함과 편안함을 준 땅이었지만, 그러나 말씀을 따라 그 땅을 떠났습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그렇게 ‘떠남’을 이룬 사람에게, 그 다음 단계로서 ‘수덕생활의 단계’를 소개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덕(德)으로서 ‘순종과 참회’, ‘죽음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애통’을 통해 옛 성품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단순과 겸손과 분별의 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완덕의 단계’로 나아가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을 ‘헤지키아(hesychia)’ 즉 ‘고요와 적정(寂靜)’에로 이끌고,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인 기도에로 이끌고, 마침내 믿음, 소망, 사랑을 이루게 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최대형 옮김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은성출판사) 15-56쪽 참조
여기까지 도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명령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른 약속 즉 언약(言約)도 주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 창 12:2-3</strong></p>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 약속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한 다음에도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약속을 믿고 자신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 창 12:4-5</strong></p>
창세기 저자는 이때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 떠났다고 증언해줍니다. 어느덧 칠십오 세가 된 적지 않은 나이에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 그리고 ‘아버지 데라의 무덤’을 떠나는 아브람을 보십시오. 그 떠남으로 인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 떠남으로 인해 ‘순종의 표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떠남으로 인해 훗날의 히브리들에게 그는 출애굽의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 말씀을 따라 떠나는 출애굽,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따라가야 할 영적 표상입니다. 말씀을 따라 나선 아브라함의 떠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오르는 모습에서 절정을 이룹니다(창 22:1-14).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람의 이 떠남에 대해 그것은 ‘믿음의 결과’였다고 소개해 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람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람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 롬 4:1-3</strong></p>
창세기 저자가 아브람을 ‘말씀을 따라간 사람’으로 보았다면, 사도 바울은 아브람을 ‘믿음을 따라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에 의해’, ‘말씀을 따라’ 길 떠나는 아브람의 서사는 우리로 하여금 참되고 진정한 신앙을 성찰하게 합니다. 믿음이 성숙되어 가는 그리스도인 여정에서 매 순간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떠남입니다.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고,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이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도 우리는 길을 찾아 나선 ‘니고데모’라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어느 밤중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요 3:1, 2</strong></p>
요한이 소개해주는 니고데모는 누가 보아도 훌륭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선생이었고 산헤드린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반듯한 삶을 살아왔고, 율법은 그의 삶을 반듯함으로 이끌어 준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의 인사말로 미루어 볼 때,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예수님의 첫 이적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는 거기 있었던 ‘많은 사람’(요 2:23) 가운데 하나였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을 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면 저 표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저 ‘랍비’로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낮이 아닌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에서 그는 아직 ‘복음의 빛 밖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자신의 세계를 떠나 예수께로 온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그가 끝까지 자기 세계를 고수하고 있었다면, 그는 사람에게 존경받는 스승일 수는 있어도,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참된 구원을 받는 은총을 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마음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정신세계를 전례 없는 격랑으로 몰고 갔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요 3:3</strong></p>
니고데모의 인사말에 대한 어떤 화답 없이 예수님은 그에게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거듭남이라는 화두(話頭)를 던져주십니다. 그가 충격 속에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하고 묻자,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 설명해 주신 후, 이번에는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요 3:10 공동번역)라고 핀잔하듯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진리를 찾아 자신의 세계를 떠나 예수님께 온 니고데모에게 그런 사족(蛇足)은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담론(談論)’에서 공부를 ‘구도(求道)’라고 소개하며, 구도에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되는데,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라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승인 니고데모는 구도의 떠남 속에서 참 스승인 예수님을 만나 진짜 공부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요 3:5-8</strong></p>
니고데모는 성경을 수없이 읽고 가르쳐왔지만 그러나 ‘거듭남’이라든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는 표현은 전혀 생소하고 낯선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믿음은 율법에 근거한 믿음이었고, 지성에 의해 정리된 관념(觀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념적 믿음은 하나의 경향으로 여기고 말기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면에서 깊은 부족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조건으로서 ‘율법적인 행함’을 물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인한 거듭남’ 즉 ‘존재’로 답변하십니다. 얼마나 다른 가르침입니까? 자신의 세계에서 떠나 거듭남에 이른 니고데모의 변화는, 그가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 속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장면에서(요 7:51), 그리고 조용히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는 절제된 모습에서 절정을 이룹니다(요 19:39). 떠남을 통해 일구어낸 이 결실이 너무 눈이 부시지 않습니까? 아브람은 우상의 땅을 떠났고, 니고데모는 자기 확신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은 익숙한 공간을 떠났고, 한 사람은 익숙한 세계관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은 안전함과 편안함을 떠나 말씀을 붙잡았고, 니고데모는 자기 세계관을 떠나 빛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빛은 거듭남으로 영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순절을 맞이해 광야로 순례 길을 떠나왔습니다. 우리는 이 떠남을 통해 무엇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며, 그 도달한 곳에서 어떤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걸까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은 우리 시선을 복음적으로 바꾸어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4-15</strong></p>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자가 들리는 사건은 ‘하늘의 일’(요 3:12)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떠남이 있기 전에 ‘하늘의 일’ 즉 ‘인자가 매달리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일을 주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요 3:16-17</strong></p>
이 말씀을 근거로 ‘떠남’을 재구성하면, ‘떠남의 근원’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들리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향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먼저 우리를 향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사랑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떠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떠남으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기에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도, 니고데모의 거듭남도, 결국 이 사랑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에 믿어지고, 그 믿음이 사무치게 내 존재의 중심을 흔들 때, 우리는 그때 생명의 길로 떠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해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 사랑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성찬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먹고 마시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를 위해 높이 들리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식탁에서부터 떠남이 시작됩니다. 그 떠남은 ‘사랑이 동기가 된 떠남’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먼 여행이 남아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을 뜻합니다. 공부는 인식과 성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신영복 ｢담론｣(돌베개) 20쪽

믿음은 인식과 성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는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성찬상에서 받아들인 주님의 살과 피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그리고 발에서 삶의 자리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은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떠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 내면에서 시작된 그 떠남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완성되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자신의 완고하고 낡은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

②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여 생명의 ‘떠남’을 이루었는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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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1 Mar 2026 20:03:3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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