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
	<channel>
		<title>해운대감리교회</title>
		<link>http://hudmc.org</link>
		<description>사랑하고 축복합니다 !</description>
		
				<item>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4]]></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hokyung.kr"> 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이수정]]></author>
			<pubDate>Tue, 02 Jun 2026 06:49: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관계이신 하나님, 관계에로 부르시는 하나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3]]></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1:1-2:4a</strong>
<strong>1</strong>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strong>2</strong>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strong>3</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strong>4</strong>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strong>5</strong>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strong>6</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strong>7</strong>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8</strong>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strong>9</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10</strong>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11</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strong>12</strong>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13</strong>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strong>14</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strong>15</strong>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16</strong>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strong>17</strong>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strong>18</strong>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19</strong>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strong>20</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strong>21</strong>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22</strong>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strong>23</strong>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strong>24</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25</strong>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strong>26</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strong>27</strong>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strong>28</strong>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strong>29</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strong>30</strong>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strong>31</strong>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strong>1</strong>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strong>2</strong>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strong>3</strong>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strong>4</strong>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8
<strong>1</strong>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 | 운지요
○ 주의 영광이 하늘을 | 덮었나이다
<strong>2</strong>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의 위엄을 찬양 | 합니다
○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 하심입니다
<strong>3</strong>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 하늘과
○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 내가 보오니
<strong>4</strong>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 | 하시며
○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 돌보십니까
<strong>5</strong>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 하시고
○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 | 우셨나이다
<strong>6</strong>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 하시고
○ 만물을 그의 발 아래 | 두셨습니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고후 13:11-13</strong>
<strong>11</strong>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strong>12</strong>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strong>13</strong>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28:16-20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6</strong>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strong>17</strong>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strong>18</strong>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strong>19</strong>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strong>20</strong>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28:19절 묵상하십시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베푸는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까?

② 고후 13:13절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누구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습니까?

③ 창 1:1-5절 묵상하십시오. 태초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각각 어떠한 분이십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관계이신 하나님, 관계에로 부르시는 하나님</h2>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주이자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Τριάδος, Trinitas) 교리는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제정되었는데, 이 교리의 기본 내용은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위격은 신성에서 동일하고 지위에서 동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동.서방 교회가 모두 관심을 기울였던 신학 쟁점에 속합니다. 일반적으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은 세 위격(hypostases)의 독특한 개별성을 강조하면서도 성자와 성령이 모두 성부로부터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세 위격의 단일성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의 단일성, 특히 계시와 구속에서의 단일성에서 출발하고, 세 위격의 관계를 셋 사이의 상호교제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이 견해를 대표하는 신학자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을 넘어 이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독일 태생으로 미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고 목사이기도 했던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조직신학’에서 자신의 신학 방법을 상관관계(correlation)로 제시했습니다.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대답’ 즉 ‘인간의 실존적 물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신학적(복음적) 대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유장환 역 ｢조직신학 1｣(한들출판사) 81-93쪽

그의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단지 삼위일체 교리 안에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탐구적 이성이 묻는 물음에 계시로서 대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관상하게 됩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창조의 한 장면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을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창 1:1-5</strong></p>
성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며, 로고스인 성자가 창조의 능력으로 함께 계십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각자 따로 일하시는 장면이 아닙니다. 영원부터 서로 안에 거하시며 서로를 통해 존재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인 교제 즉 ‘페리코레시스’가 창조사역 안에 구현되는 장면입니다. 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체계화한 개념인데, 고전 헬라어로 ‘페리(περι)’는 ‘둘레에’라는 의미이고, ‘코레시스(χώρησις)’는 ‘공간을 내어주다’ 혹은 ‘춤을 추다’라는 의미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의 안에 완전히 머물면서 상호내주를 통해 존재하고 활동하는 역동성을 가리킵니다. 창 1:26절에 언급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복수형은 바로 이 성삼위 하나님간의 대화이자 관계적 결단입니다. 그리고 매 창조 때마다 반복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감격적인 선언은 성 삼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확인되는 기쁨의 선언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고후 13:11</strong></p>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작별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면서 간곡하게 당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당부가 “기뻐하라”입니다. 그들이 기쁨을 잃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당부는 “온전하게 되라”입니다. 그릇된 행실에서 벗어나서 성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당부는 “위로를 받으라”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위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당부는 “마음을 같이 하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과 하나의 복음을 통해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속지 말고 서로 화목하라는 당부입니다. 다섯 번째 당부는 “평안하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은혜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고, 그랬기 때문에 평안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그들 신앙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신앙의 기초를 세우지 못한 채 그들은 하염없이 하나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축복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의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후 13:13</strong></p>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카리스 χάρις)’는 역사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ἀγάπη)’은 영원 전부터 계시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고, 성령의 ‘교통하심(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끄심을 의미합니다. 이 때의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사귐'이 아닙니다. 서로 공유하고, 참여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공유와 참여와 연합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갈라지고, 기뻐하지 못하고, 평안을 잃었음을 알기 때문에 이 삼위적 축복으로 마무리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만이 그 모든 결핍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를 정리해 지켜내려 했던 신앙의 선배들의 노력 속에는, 후세의 신앙을 확고하게 삼위일체하나님 안으로 이끌려는 열망이 가득 배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머리가 아니라 전 존재로 마주 대할 때, 놀라운 변화가 나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제자들을 통해 보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 마 28:16, 17a</strong></p>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뵌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래서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는데, 거기서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 받으실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고 주님께 경배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경배하는 제자들만이 아닌 다른 반응을 보이는 제자들도 소개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 마 28:17b</strong></p>
여기서 ‘의심’을 의미하는 헬라어 ‘디스타조(διστάζω)’는 ‘두 곳에 동시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한 발은 믿음 위에, 다른 발은 불신 위에 놓은 분열된 실존의 초상입니다. 불신앙까지는 아니지만, 망설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도 알고, 죽음을 딛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알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분열된 실존을 끌어안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라는 마태의 표현 속에서 안타깝게 감지됩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연약함은 우리의 내면에도 잠재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때때로 믿음으로 승리하지만, 때때로 의심하며 넘어지기도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제1비가를 이런 절규로 시작합니다.

누구라고,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겠는가, 천사들의 질서로부터? 이제 어느 한 천사 느닷없이 나를 안아준다 해도, 나는 사라지고 말리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안문영 옮김 ｢두이노의 비가｣ 9쪽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변 절벽의 두이노 성 위에서, 대서양의 폭풍 소리를 들으며 써 내려간 이 절규는 응답 없는 관계 앞에서 울부짖는 인간의 고독을 담고 있습니다. 릴케는 이곳에서 1911년 10월22일부터 1912년 5월9일까지 손님으로 머무는 동안 ‘제1비가’와 ‘제2비가’를 완성했습니다. 죽음과 고독에 쌓인 인간의 부정적 실존과 자연과 더불어 존재계를 대표하는 천사들이 각각 일인칭으로 묘사 되고, 서로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외로움만이 가득 묻어납니다. 그에 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안에 존재하며 기도 마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로 초대 받은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입니까?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마 28:18</strong></p>
일부 제자들의 의심을 아신 주님은 먼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 것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친밀감을 갖게 하시려는 배려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신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막 광야의 금식을 마치셨을 때, 사탄이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이끌고 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했던 유혹 기억하십니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그 때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신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셨다’는 말씀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영광을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 마 28:19a</strong></p>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그러므로’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신 성자께 성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므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 28:19b-20</strong></p>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교제 즉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안에 실제로 잠기는 사건입니다. 단순한 종교적 결단이나 입교식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성도는 성부의 사랑, 성자의 은혜, 성령의 코이노니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상호내주 안에 성도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 과정을 ‘좋은 전염(Good Infecti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자가 우리의 인성을 취하셔서 인간이 됨으로써, 인간이 성자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제자들이 의심과 망설임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더 이상 삼위일체 하나님 밖을 배회하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신앙의 기초를 세워야 했습니다. 비록 아직은 성령께서 강림하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연약할 수밖에 없었고,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볼 수 있는 영적시선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는 ‘육안(肉眼)’이나 ‘지성(知性)’으로 보는 것 외에 본질적으로 다른 시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육안이나 지성의 행위가 중단될 때, 비로소 발휘되기 시작하는 ‘영적 시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은총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정지련 ｢조직신학｣(KMC) 185쪽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온전하게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기도나 성경지식 만으로는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중시했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 체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에 참여해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모셔들일 때, 그 공경의 행위를 통해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리가 아닌 실제로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적 영적 전율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경이로움입니다. 오늘 응송의 시인이 경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있었습니다(시 8:1). 주께서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관상하며(시 8:3). 저 광활한 우주 앞에서 자신의 작음을 봅니다. 시인은 묻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 시 8:4</strong></p>
이 물음은 지적 탐구가 아닙니다. 경이로움에서 터져나오는 전율이고 경탄입니다. 이 경이로움이 바로 삼위일체 신앙의 출발점이고 감정적, 영적 관문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먼저 이해하고 경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삼위일체 신앙이 계시됩니다. 삼위일체는 이해하면 끝나는 교리가 아니라, 체험하고 느낄수록 더 깊어지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단자(單子)가 아니셨습니다. 창조 때, 성부 하나님은 말씀하셨고(창 1:3), 성령님은 수면 위를 운행하셨으며(창 1:2), 로고스인 성자는 창조의 능력으로 함께 계시다가(요 1:1-3; 골 1:16-17; 잠 8:30), “하나님 아버지께는 당신이 낳으신 독생자가 늘 있었습니다. 성자이신 그분은 지혜(חָכְמָה, Hokmah)라고도 불리십니다. 이 지혜는 세상을 창조하신 뒤 하나님께서 즐거움으로 삼으셨던 바로 그 지혜이십니다.”(오리게네스-원리론)

지금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요 1:14).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영원부터 서로 안에 거하시며 서로를 통해 역동적으로 교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역시 벅찬 관계 안으로 초청 받아 함께 서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자 예수님은 부활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성령님은 코이노니아를 통해 우리를 삼위일체의 은총 안으로 초대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삼위일체 하나님 신비를 교리와 지식만으로 알려하지 않는가?

②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나의 존재도 견고히 세워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06:50: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5.31]]></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strong>
인류를 향한 구원의 은총이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원천에서부터 출발된 것임을 깨달아 자신의 내면적 두려움과 저항을 이겨내고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거듭남과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사랑이듯,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사랑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strong>②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2주차 녹색 실천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 있는 생활용품을 사용하지 맙시다.
⋅한 줄 기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깨끗하여 창조 세계를 보전하게 하소서.”
⋅우리가 사용하는 세정제나 화장품 속 미세 플라스틱은 결국 바다로 흘러가 만물을 오염시킵니다. 천연 수세미나 고체 비누 등 친환경 제품을 선택하여 깨끗한 물과 바다를 보전합시다.

<strong>③ 2026 웨슬리 아카데미 |</strong>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제3강 로마서 정리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신앙생활의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22:19: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5.31]]></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1]]></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br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br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br />•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 <br />•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br />•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br />•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br />•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22:18: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절 보내어, 창조하사, 새롭게 하시나이다]]></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40]]></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절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2:1-21</strong>
<strong>1</strong>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strong>2</strong>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strong>3</strong>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strong>4</strong>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strong>5</strong>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strong>6</strong>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strong>7</strong>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strong>8</strong>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strong>9</strong>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strong>10</strong>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strong>11</strong>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strong>12</strong>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strong>13</strong>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strong>14</strong>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strong>15</strong>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strong>16</strong>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strong>17</strong>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strong>18</strong>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strong>19</strong>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strong>20</strong>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strong>21</strong>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4

<strong>1</strong>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 | 은지요
○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 가득합니다
<strong>2</strong>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 있 - 고
○ 그 속에는 크고 작은 동물들이 | 무수합니다
<strong>3</strong>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 | 라보며
○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 기다립니다.
<strong>4</strong>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아 | 먹으며
○ 주께서 손을 펴신즉 좋은 것으로 | 만족합니다
<strong>5</strong>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 | 하시며
○ 지면을 새롭게 | 하시나이다
<strong>6</strong>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 | 할지며
○ 여호와는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 즐겁습니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고전 12:3-13</strong>
<strong>3</strong>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strong>4</strong>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strong>5</strong>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strong>6</strong>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strong>7</strong>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8</strong>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strong>9</strong>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strong>10</strong>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strong>11</strong>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strong>12</strong>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strong>13</strong>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7:37-39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37</strong>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strong>38</strong>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strong>39</strong>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행 2:4절 묵상하십시오.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을 때, 제자들의 언어는 무엇을 따라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까?

② 요 7:38-39절 묵상하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신 말씀은 무엇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까?

③ 고전 12:3, 7-8절 묵상하십시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는 언어 중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보내어, 창조하사, 새롭게 하시나이다</h2>
50일간의 부활시기를 걸어온 끝에 승천주일을 지나, 오늘 마침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부활의 절정은 승천(昇天)이었고,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강림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이때부터 제자들은 ‘땅’에 매여있던 시선을 들어 새로운 이상(理想)을 가슴에 품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이상이란 곧 ‘아버지의 약속’이었고, ‘위로부터의 능력으로’ 입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직 살의가 남아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눅 24:53) 기다렸습니다. 성령강림은 바로 이 때, 유대인들의 여름추수 절기에 해당되는 오순절날, 약속을 기다리던 제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렇게 ‘약속하신대로’,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진 성령강림은 예수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성령강림을 통해 절정의 완성을 이룬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강림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성령강림 이후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성령의 피조물’이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과 교회,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인은 불가분리(不可分離)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령강림이 그저 교회의 사건으로만 그 의미가 축소된다면, 자칫 새 창조로서의 성령강림의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서 봉독 후에 함께 부른 응송의 고백을 떠올려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 시 104:30</strong></p>
성령강림 하면 우리는 으레 ‘불꽃같은 혀, 강한 바람 소리, 방언으로 말하는 제자들’ 등 마가의 다락방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이 노래하는 성령강림은 마가의 다락방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다 생물들이 헤엄치고, 공중에는 새들이 날아오르고, 들풀이 자라는 창조세계 전체를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104:12-25). 교회는 왜 오순절의 응송으로 시편 104편을 선택했을까요? 성령강림절은 교회가 탄생한 날일 뿐 아니라, 새 창조를 이루신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이라는 단어로 쓰인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영(Spirit), 바람(wind), 숨결(breath)’이라는 의미입니다. 창 1: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 할 때, 그 ‘하나님의 영’이 바로 시 104:30절의 ‘주의 영’이고, 행 2:2절에서 언급되는 ‘급하고 강한 바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창세기의 ‘하나님의 영(창조의 영)’과 시편의 ‘주의 영’, 그리고 사도행전의 ‘성령’을 같은 단어로 연결하고 있는데, 위르겐 몰트만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구원하는 영이다. 그러나 창조의 사역은 아버지에게 귀속되며 ‘아버지의 영’은 창조의 영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과 창조적이며 생동시키는 하나님의 영은 일치한다. 그러므로 마음 속의 믿음과 사랑의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경험은 자연히 교회의 한계를 넘어 성령을 자연 속에서, 식물 속에서, 동물 속에서, 땅의 생태계 속에서 재발견하도록 한다.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생명의 영-총체적 성령론｣(대한기독교서회) 28-30쪽

몰트만의 이 고백처럼, 성령은 단지 구원의 영이 아니라 창조의 힘이며, 성령의 경험은 교회를 넘어 모든 창조 세계에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뼈대입니다. 따라서 오늘 응송의 시인의 고백인 ‘보내어’, ‘창조하사’,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주제로 오늘 성령강림절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시인은 “주의 영을 보내어”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 역시 성령강림이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적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행 2:1-4</strong></p>
성령강림에 대한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한데, 누가의 이 증언 중에서 몇몇 단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건으로서의 성령강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홀연히’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아프노(ἄφνω)’인데 ‘갑자기, 예고 없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곳은 단 세 군데입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에 쓰러졌을 때(행 9:3), 바울과 실라가 갇힌 빌립보 감옥에 지진이 났을 때(행 16:26), 그리고 바로 오늘 말씀의 오순절 장면에서 입니다. 이 세 곳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계획하거나 준비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홀연히, 갑자기, 예고 없이 개입해 오신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했지만, 그러나 그 기도가 성령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령을 받을 준비였을 뿐이고, 성령은 그곳에 홀연히, 갑자기, 예고 없이 오셨습니다.

두 번째 주목해 볼 단어는 ‘하늘로부터(에크 투 우라누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방향’에 대한 진술인데, ‘위에서 아래로’. ‘하늘에서 땅으로’입니다. 즉 성령강림은 인간 내면에서 솟아오른 종교적 감정이나 체험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건입니다. 출처가 하나님이시고, 이미 예수님께서 요 15:2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파견할 πέμψω) 보혜사“라고 약속하셨던 것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세 번째 주목해 볼 단어는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입니다. 여기서 ‘받고’에 해당하는 ‘에플레스데산(ἐπλήσθησαν)’은 수동태입니다. ‘그들이 채워졌다’라는 의미입니다. 문법이 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채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채워지는 자’였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라고 부릅니다. 유대인 저술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쓰는 것을 피하면서, 수동태 문장 뒤에 하나님을 행위자로 남겨두는 방식입니다. 누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이 수동태를 선택했습니다.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능동태가 나옵니다.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순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채워진 후에야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채움이 먼저였고, 말함은 그 결과였습니다. 성령이 먼저 오셨고, 제자들의 반응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 중에도 성령강림을 마치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낼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더 뜨겁게 기도하면 성령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문법은 조용하지만 매우 분명하게 그 착각을 바로 잡아줍니다. 성령은 ‘홀연히(아프노 ἄφνω)’ 오십니다. 성령은 ‘하늘로부터(‘에크 투 우라누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오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채워지는 것(에플레스데산 ἐπλήσθησαν)’입니다. 이집트 사막의 교부 아르세니우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제의 궁정에서 살던 아르세니우스가 어느 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끄소서.” 그러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르세니우스, 떠나라, 침묵을 지켜라, 그리고 항상 기도하라.” 헨리 나우웬/이봉우 ｢마음의 길｣(분도출판사) 12쪽

아르세니우스가 사막으로 간 것은 성령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음성이 그를 불렀고, 그는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기도와 순종은 성령을 생산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를 채우도록 마음을 여는 자세입니다. 다락방의 제자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성령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홀연히 오셔서 그들을 채우신 것이었습니다. 성령강림은 내 열심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신 분이십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의 고백을 다시 보십시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이 고백을 통해 두 번째 묵상할 말씀은 ”창조하사“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요 7:37</strong></p>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배경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초막절(Sukkot)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기억하며 임시 초막을 짓고 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에는 매우 특별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매일 아침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붓는 ‘물 붓기 의식’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의식이고,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아 시대에 하나님의 영이 풍성하게 부어지기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기다림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의식이 절정에 달한 마지막 날, 제사장이 물을 붓던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더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겁니다. 초막절의 웅장한 의식 속에서의 예수님의 이 외침에는 하나님의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인간 만이 목말라 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목말라 하시는 사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요 7:38</strong></p>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주셨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코일리아(κοιλία)’입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서 생명이 잉태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어떤 번역본은 이것을 ‘내면 깊은 곳(innermost being)’으로 옮겼습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홀연히 임하셔서 나를 채우실 때, 일어나는 변화는 표면의 변화가 아닙니다. ‘코일리아(κοιλία)’ 즉 ‘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부터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채우시면, 그분은 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생수는 식수가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미 사용된(요 4:10) 이 표현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이것을 직접 해설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요 7:39a</strong></p>
이 한 절이 요한복음의 성령신학을 압축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광 즉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에 강림하십니다. 오순절은 그래서 파스카 신비의 완결입니다. 지금 그 자리에 서서 예수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성령강림의 목적은 성령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알게 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강림의 목적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자리를 성령께서 채우셔서 변화를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변화를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새롭게 하시나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채우셔서 새롭게 하시면 어떤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날까요? 첫 번째 변화는 나의 고백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 변화를 가장 단순하고도 심오하게 표현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전 12:3</strong></p>
“예수는 주이시다(퀴리오스 예수스 Κύριος Ἰησοῦς).” 이 고백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입니다. 단 두 단어이지만, 그러나 이 두 마디를 진심으로 하려면 성령이 나를 채우셔서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퀴리오스(Κύριος)’ 즉 ‘주님’은 당시 로마 황제의 칭호였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주님이시다.”가 아니라 “예수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존재 전체가 변화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이미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 내면을 채우셔서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새롭게 하시면 일어나는 또 하나의 변화는 공동체적 변화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다양성 속에서 일치에로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개인 안에서 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또 창조 세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전 12:4-7</strong></p>
성령은 획일화하지 않으십니다. 다양함을 허무시지 않으십니다. 다양함을 하나로 새롭게 하십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님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성찬례 안에는 ‘성령 임재의 기도’가 있습니다. 집례자가 “불같은 성령께서 오셔서 이 감사의 식탁이 성별되게 하시고 이 떡과 포도주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하면, 회중들은 “창조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합니다. 이 때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은총 안에서 주님의 살과 피가 현재화 하고, 성도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매개로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전통 안에 있는 교회들은 ‘친교’ 즉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는 용어를 쓸 때, 항상 성찬 공동체 안에서의 성령의 현존을 지칭했습니다. 그 친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였고, 인간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는 ‘성령의 친교’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우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교였습니다. 이렇게 성찬 코이노니아 안에서 실현되는 아주 특별한 ‘하나 됨’은 성령님의 탁월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 대축일 비잔틴 성가에서 반복되는 고백 중 하나가 ‘바벨의 혼돈’이 불의 혀로 강림하신 성령을 통해 ‘일치’와 ‘조화’를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예전에 임하셨을 때는 언어를 혼돈시켜 백성들이 서로 본열되더니, 이제 불의 혀를 나눠주심으로 우리를 일치케 하셨나니 거룩하신 성령을 찬양하나이다. 성령강림 대축일 콘타키온 : 그리스어 ‘콘타키온(Kontakion)’은 ‘두루마리를 감는 막대’라는 뜻으로 비잔틴 전례에서 사용하는 아주 오래된 찬양 형식입니다. 옛날에는 찬양시를 두루마리에 감아 두었는데, 거기서 나온 이름입니다. 축일의 신학과 영성을 짧고 아름답게 시와 노래로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 고백 앞에 섰습니다. 첫째, 성령은 ‘보내진 분’이십니다. 내 열심이 만들어낸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강하게 파견하신 분이시고, 홀연히,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둘째, 성령은 ‘창조하시는 분’ 이십니다. 내 머리에 지식을 쌓아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강이 흐를 때, 우리 입에서 가장 짧고 가장 깊은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십니다(퀴리오스 예수스 Κύριος Ἰησοῦς).” 셋째, 성령은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바벨에서 분열된 인간의 언어를, 오순절 불의 혀로 하나로 모으신 성령님이, 오늘 성찬의 식탁에서도 우리를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즉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친교’로 불러 모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창조적이며 생동시키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창조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한계를 넘어 생태계의 동식물과 더불어 살아야 할 모든 생명에게로 확대됩니다. 그러므로 이후로 우리의 모든 삶이 ‘보내어’, ‘창조하사’,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 안에서 살아지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성령님을 내 열심이나 분위기로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았는가?

② 나와 공동체와 창조세계의 새로움을 위해 성령님을 의지하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24 May 2026 21:54: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5.24]]></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9]]></link>
			<description><![CDATA[<p class="p1"><span class="s1">1.<b>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1">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span></p>
<p class="p2"><span class="s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span><span class="s3">영육간 강건을 위해!</span></p>
<p class="p1"><span class="s1">2.<b>네팔 호스텔 하○○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span></p>
<p class="p1"><span class="s1">3.<b>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 </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5">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span></p>
<p class="p1"><span class="s1">4.<b>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span></p>
<p class="p1"><span class="s1">5.<b>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2 May 2026 22:43: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5.24]]></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8]]></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은 웨슬리회심 288주년 기념주일입니다.</strong>
1738년 5월24일 당시 영국 성공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의 회심은 한 사람의 영적 변화가 얼마나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가져다주는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감리교회가 한 성직자의 진지한 영적 각성(회심, 悔心)에서 출발한 교회였음을 자각하고 우리 또한 회개와 회심을 통해 진정한 영적 부흥을 일굴 수 있기를 바랍니다.

<strong>② 부산동지방 웨슬리 연합성회 감사</strong>
준비과정부터 시작해서 주차, 안내, 다과 등을 큰 헌신으로 감당하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③ 2026 웨슬리 아카데미</strong>
⋅제4강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신앙생활의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해운대교회 2026년 녹색교회 선정</strong>
우리교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후정의위원회,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녹색교회 네트워크로부터 ‘2026년 올해의 녹색교회’로 선정되어, 지난 19일(화) 서울연동교회에서 환경주일 연합예배와 함께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녹색교회란 예배, 교육, 봉사, 선교 등 교회의 전반에서 기후정의 실천과 창조세계 보전에 앞장서 온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동안, 교회내 일회용품 근절(종이컵 없애고 개인컵, 텀블러 휴대하기), 환경세미나(녹색교회 탄소중립 Workshop) 개최, 사순절 달력을 통한 생태회복 노력 등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해, 작지만 생태적 활동을 꾸준히 감당해 온 것이 인정되어 녹색교회로 선정된 것입니다. 이후로 생태정의와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녹색선교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2 May 2026 22:42: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활절 제7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7]]></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7주 | 승천주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1:6-14</strong>
<strong>6</strong>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strong>7</strong>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strong>8</strong>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strong>9</strong>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strong>10</strong>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strong>11</strong>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strong>12</strong>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strong>13</strong>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strong>14</strong>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68
<strong>1</strong>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 | 지 - 며
○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 도망하리라
<strong>2</strong>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듯이 불길에 초가 | 녹듯이
○ 악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 사라져간다
<strong>3</strong> 그러나 착한 사람들은 | 즐겁고
○ 흥겨워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기뻐하리라
<strong>4</strong>  세상의 왕국들아, 하나님을 찬송 | 하여라
○ 수금을 타며 주님을 | 찬양하여라.
<strong>5</strong> 너희의 하나님은 그의 능력과 | 위엄이
○ 이스라엘 위에 있고 구름 | 속에 있도다
<strong>6</strong>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 | 나이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백성에게 힘을 | 주시나이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서신서 | 벧전 4:12-14, 5:6-11
<strong>12</strong>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strong>13</strong>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strong>14</strong>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strong>6</strong>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strong>7</strong>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strong>8</strong>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strong>9</strong>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strong>10</strong>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strong>11</strong>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17:1-11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strong>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strong>2</strong>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strong>3</strong>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strong>4</strong>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strong>5</strong>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strong>6</strong>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strong>7</strong>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strong>8</strong>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strong>9</strong>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strong>10</strong>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strong>11</strong>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벧전 5:10절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잠깐 고난을 당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요 17:11절 묵상하십시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③ 행 1:11절 묵상하십시오.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 시선을 어디에 두라는 말씀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h2>
15세기에 그려진 ‘예수 승천’이라는 이콘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이콘은 사도들에 의해 증언된 그리스도의 승천을 재현하고 있습니다(막 16:19-20; 눅 24:51-52; 행 1:9-11).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승천은 구원의 완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 예수 승천 이콘은 이 세상과 다음 세상 즉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돌라에 또는 님부스-신성한 빛과 영광, 하늘을 상징 휩싸여 승천하시는데, 이 만돌라는 하늘의 구름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자칫 우리는 이 이콘이 보여주는 상승하시는 듯한 이미지로 인해, 주님의 승천을 지상사역을 끝내고 다른 공간으로 떠나시는 과정 안에 계시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즉 지상의 사역과 천상의 사역을 분리시켜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이콘에서 지상의 영역과 천상의 영역은 심오하고 내적인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행 1:9절에서 누가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며, 마치 주님께서 제자들로부터 분리되어 올려져버린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의 그 증언은 마 28:20절의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신 말씀의 조명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아직은 지상과 천상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겠지만, 지상과 천상의 영역은 서로 꿰뚫고 있고, 주님은 사랑으로서 여전히 존재하십니다.

예수님 아래로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은 천사들인데, 사람들을 향하며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라고 증언합니다. 천사의 수가 두 명인 것은 유대 법적 체계에서 증인의 요건으로 두 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3:1). 승천하시는 주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시선으로서 주님의 승천과 함께 합니다. 이 시선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이면서 동시에 깨어있음으로써(마 24:41-44)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준비하는 신앙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장긍선 ｢이콘-신비의 미｣(기쁜소식) 198-203쪽

이콘 속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도 왼손에 두루마리를 쥐고 계십니다. 이것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여전히 제자들 가운데 존재해 계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무지는 어두움입니다. 주님이 안 보이더라도 말씀은 빛이며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요 1:9). 따라서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의 그리스인들은 시선을 말씀에 둠으로써 빛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당신께서 승천하신 후에 지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성부께 기도하시는데, 기도 안에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라시며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의 것인 이 땅의 남겨진 양떼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되는 것 뿐 아니라, 한 몸인 교회를 이루어 성부와 성자 안에 있는 것, 그것보다 더 희망적인 현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애당초 예수님의 탄생 즉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 하신’ 사랑의 행위였고, 그 사랑이 죽음으로, 부활로, 승천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벧전 5:10)라고 소개합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사랑의 열망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아 하나의 교회를 이룬 사람들’ 우리가 이 정체성에 걸맞게 주님의 영광스러운 생명에 결합된 존재로 살아갈 때, 참되고 영원한 행복은 우리 안에 깃드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벧전 3:15)에게 바로 이 현실(벧전 3:18-22)을 보여주라고 당부했었는데, 예수 승천주일은 바로 이 현실에 우리 시선을 두고, 땅에서 하늘의 소망으로 살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 그것은 ‘땅의 소망’을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소망의 차원이 다른 만큼 발을 땅에 딛고 있지만 그러나 시선을 하늘에 두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찾고 모색하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 벧전 4:12, 13a</strong></p>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을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묘사합니다. ‘연단(페이라스몬 πειρασμόν)’은 성도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trial)’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시험(퓌로세이 πυρώσει)’은 ‘타는 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타는 불’은 70인역(LXX)에서 소돔 성과 바벨론 성을 멸망시킬 때의 심판의 불이었는데, 사도 베드로가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감당할 시련이 소돔 성이나 바벨론 성을 심판할 때의 불만큼이나 맹렬하고 뜨거울 것임을 주지시키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편지의 초반부터 이런 고난이 여러 형태로 찾아올 것임을 언급 했었습니다. 그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고난은 일상에서 겪는 가난과 죽음 그리고 박해도 포함되었습니다. 의심과 적대감, 모욕과 가혹한 살인 등의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번져나갈 기미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도 베드로의 편지 안에서 보여지는 것은, 그가 이 고난들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벧전 1:6절에서는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벧전 3:14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말씀이 이어지는데, 오늘 말씀에서도 베드로는 고난이 주는 순기능과 유익에 대해 말씀합니다.

먼저 베드로는 ‘불시험’이 찾아올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시련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불같은 시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서, 그 고난을 통해 믿음과 인격이 단련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이겨낼 힘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a)고 베드로는 당부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대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가 국교로 지정된 나라나, 북한이나 중국처럼 공식적인 선교가 금지되어 있는 나라 외에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전서를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것으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영성은 오늘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도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사람은 여전히 의심과 적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감리회 내에서도 성장주의에 저항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목회자는 여전히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낯설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 벧전 5:6</strong></p>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해야 할 때는 바로 ‘불 시험이 맹렬하게 닥쳐오는 때’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로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 종종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출 3:19, 신 9:26, 렘 21:5).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로 겸손히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가 찼을 때, 그를 다시 높이신다고 단언합니다. 베드로는 또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 벧전 5:7</strong></p>
염려를 다 주께 맡기는 행동은 믿음의 행동이지만, 동시에 겸손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자신의 염려를 주께 맡기듯이, 겸손의 사람이 자신의 염려를 주께 맡깁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믿을 수도 없고, 믿지 못하면 맡길 수도 없습니다. 염려를 다 주께 맡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베드로는 확신합니다. 베드로는 또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 벧전 5:8, 9</strong></p>
헬라어로 ‘근신하라(넾사태 Νήψατε)’는 말씀은 ‘마음의 중심을 잡으라’는 의미이고, ‘깨어라(그레고레사태 γρηγορήσατε)’는 ‘잠에서 깨어 영적 경각심을 갖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는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이 때, 우리 역시 마음의 중심을 굳게 잡고, 깨어 있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의 시선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 성부와 함께 계시는 하늘에 시선을 두고 마음의 중심을 굳게 잡을 때, 그 삶의 결과를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벧전 5:10</strong></p>
우리는 오늘 복음서에서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시선을 고정하고(요 17:1a), 아버지의 때에 온 마음을 고정할 뿐 아니라(요 17:1b),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마음에 품고 사셨던(요 17:4) 성자 예수님의 고백을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요 17:4, 5</strong></p>
장 바니에는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에서, 예수의 삶을 ‘고통과 초라함 속으로 내려가신 예수’라고 표현하며 그 분의 생애를 이렇게 그렸습니다.

때가 되매 예수는 더욱 더 나약함의 옷을 입고, 고통과 초라함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셨다. 예루살렘에서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예수는 어디로 숨거나 갈릴리로 피하지 않으셨다. 온유하면서 죄 없는 그분은 악의 세력에 스스로 포박당하시고, 험상궂은 병사들이 끄는 대로 끌려가셨다. 부드럽게 용서하는 사랑,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조용한 권면, 나약하게만 보이는 비폭력, 꼴찌자리를 차지하라는 가르침은 단단한 권력 체제에 의하여 난폭하게 밀쳐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 서로 마주하는 양극이 있다. 예수는 사람들 가슴속에 있는 어둠, 죄, 악을 드러내신다. 사람들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에게 고함을 지르고, 자기네 악을 감추면서 오히려 그것들을 그분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렇게 그분을 자기네 악을 대신하여 죽는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장 바니에/이현주 옮김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나무생각) 186쪽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이 일을 이루셨다는 고백입니다. 주님도 당신께 다가온 시련으로 인해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순일하게 하고, 마침내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감당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문득 제자들을 바라보십니다. 당신이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시면 제자들은 당신 없는 세상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마음에 걸리신 주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 요 17:9 새 번역</strong></p>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요 17:11b 새 번역</strong></p>
‘아버지의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소이 에이신(σοί εἰσιν)’에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달라는 주님의 기도에서 남겨질 제자들을 향한 절박한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은 곧 제자들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 행 1:6</strong></p>
제자들은 이미 주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타임라인이 당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완전히(아포 ἀπο)’ 회복되는 시점,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가 ‘이 때’입니까?”라고 묻는 것인데,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 행 1:7</strong></p>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신 채, 먼저 ‘때와 시기’에 대한 제자들의 시각부터 조정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에스겔 36-37장, 암 9:11절 등에서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은 성서적이며, 적절하다고 여기신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때’라는 단어로서, 제자들이 ‘크로노스(χρόνους)’ 즉 달력의 시간, 측정 가능한 물리적 시간으로 물어왔기 때문에, 주님은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다”라며, 시간 개념부터 ‘카이로스(καιρούς)’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은 다름아닌 ‘성령이 임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행 1:8</strong></p>
바로 이 ‘성령이 임하시는 시간’ 이 시간은 ‘아버지의 시간’, ‘아버지의 권한 안에 있는 시간’인데, 이 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중요한 전환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는 증인’으로 대답해 주십니다. 칼 바르트의 언어를 빌리면, 이것은 ‘이스라엘 회복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회복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만 바라보았는데, 주님은 땅 끝까지 바라보고 계시고, 제자들은 물리적 시간 안에서 사고하는데, 주님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고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임재하심 안에서 주님과의 시선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겠습니다. 해마다 승천주일이 되면 교회는 이렇게 기도해 왔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우리의 성장이 촉진되며, 또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이 올라가신 그곳으로 우리의 희망도 따르오니,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에 용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게 하소서. S. 치프리아니/오영민 옮김 ｢말씀과 전례｣(성바오로출판사) 329쪽

우리도 이 기도를 드리며, 승천하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두고, 우리 희망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우리 영적 시선이 막연하게 흐트러져있지 않은가?

② 예수 그리스도께만 시선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6 May 2026 22:14: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활절 제6주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6]]></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6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17:22-31</strong>
<strong>22</strong>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strong>23</strong>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strong>24</strong>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strong>25</strong>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strong>26</strong>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strong>27</strong>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strong>28</strong>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strong>29</strong>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strong>30</strong>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strong>31</strong>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66
<strong>1</strong>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 | 지 - 며
○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 도망하리라
<strong>2</strong>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듯이 불길에 초가 | 녹듯이
○ 악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 사라져간다
<strong>3</strong> 그러나 착한 사람들은 | 즐겁고
○ 흥겨워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기뻐하리라
<strong>4</strong>  세상의 왕국들아, 하나님을 찬송 | 하여라
○ 수금을 타며 주님을 | 찬양하여라.
<strong>5</strong> 너희의 하나님은 그의 능력과 | 위엄이
○ 이스라엘 위에 있고 구름 | 속에 있도다
<strong>6</strong>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 | 나이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백성에게 힘을 | 주시나이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벧전 3:15-22</strong>
<strong>15</strong>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strong>16</strong>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strong>17</strong>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strong>18</strong>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strong>19</strong>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strong>20</strong>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strong>21</strong>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strong>22</strong>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14:16-21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6</strong>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strong>17</strong>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strong>18</strong>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strong>19</strong>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strong>20</strong>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strong>21</strong>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벧전 3:18-19절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무엇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까?

② 행 17:24-28절, 그리고 28-29절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과 우상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③ 요 14:16, 17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는 17절의 설명과, 그리스어 설명으로 볼 때 어떤 분이십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h2>
오늘은 부활절 제6주이며 동시에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시대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나온 부활시기 동안 성서일과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시선을 주님께 두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부활절 제2주 복음에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게 하셨고(요 20:20), 부활절 제3주 복음에서는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눈을 열어 당신을 보게 하셨습니다(눅 24:30). 부활절 제4주 복음에서 주님은 거짓 목자와 참 목자 사이에서 참 목자를 분별할 수 있는 ‘시선’을 가르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제5주 복음에서는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요 14:9)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거듭거듭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신 까닭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에서는 그 두려움의 정체를 ‘고아됨’이라고 정의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로 ‘고아 된 심정’이 되어버린 제자들의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표현에서, 우리 육신의 부모님의 마음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p>
<p style="padding-left:40px;">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34쪽</p>
시장에 간 엄마를 빈 방에서 혼자 기다리던 어린시절 ‘어둡고 무서워 훌쩍거리던’ 경험을 담고 있는 시인데, 이 시는 어머니의 죽음을 직접 다루지 않지만, 어머니의 부재(不在) 자체가 이미 세상 전체가 낯설어지는 공포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고아됨’의 원형적 감각입니다. 기형도 시인은 29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 걱정’이 담긴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그가 죽은 해에 나온 유일한 시집이고 보면, 그는 어머니의 귀환을 기다리던 그 빈 방을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고아된 심정’을 당신께서 승천하신 이후로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게서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요 14:18</strong></p>
헬라어 원문에서 ‘고아’는 ‘오르파노스 ὀρφανός)’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부모 없는 아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 보호자를 잃은 자,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때 제자 공동체는 실제로 그러한 처지에 처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떠나셨고, 로마의 압제는 계속되었으며, 회당으로부터 추방된 그들에게 세상은 광야처럼 황량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희망은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요 14:18 공동번역)는 이 약속 안에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복음 전체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승천하신 이후로 어떻게 제자들에게로 다시 오시겠다는 것일까요?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요 14:16</strong></p>
‘보혜사’를 의미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곁에 불러 세운 자, 변호인, 중보자, 위로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또 다른’이라는 표현은 앞서 보내졌던 보혜사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함의(含意)합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 현존의 연속입니다. 떠남처럼 보이는 표면적 현실이 사실은 보다 궁극적인 오심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생명의 영-총체적 성령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과 성령은 서로 병행하여 있거나 앞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탄생할 때, 성령은 아들의 탄생을 동반하며 아들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낸다.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생명의 영-총체적 성령론｣(대한기독교서회) 121쪽

보혜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대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는 방식이며,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부재를 메운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가 공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통찰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보혜사의 몸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또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더 가까이 ‘우리 모두와 함께’ 또 ‘우리 속에’ 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거듭거듭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요 14:17b</strong></p>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요 14:19b-20</strong></p>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관계를 보게 됩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자와 함께 하시고, 성자 위에 머물며 성자를 통하여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령에 의해 구원사를 펼치시는데, 바로 그 사실을 주님은 ‘보혜사’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며, 당신 승천 후에 또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고아된 심정’으로 외로움에 빠져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일찍이 사도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에 서서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 행 17:27–28</strong></p>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한 시기는 AD 49–50년경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하의 로마 제국 시대입니다. 당시 아테네는 정치적 수도로서의 영광은 고린도에 넘겨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헬레니즘 문명의 정신적 수도였습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Lyceum), 스토아의 주랑(Stoa Poikilē), 에피큐로스의 정원(Kepos) 등 네 학파의 전통이 살아 숨쉬던 도시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신들의 도시’라 불릴 만큼 신전과 제단이 난무하기도 했었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 특히 ‘알지 못하는 신(ἀγνώστῳ θεῷ)’에게 바친 제단을 보고 격분해서 아레오바고에 서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아레오파고스(Ἄρειος πάγος)’는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고대 아테네의 최고 법정이자 종교와 교육을 감독하는 기관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불경죄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은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이 아레오바고 언덕에 선 것은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과 의식적으로 겹치게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정죄가 아닌 인정(認定)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 행 17:22b 새 번역</strong></p>
당시 아테네 사람들 내면에 넘쳐나던 종교적 자부심을 인정해준 것입니다. 그들은 아테네 거리마다 아름다운 조각과 건축물을 세웠는데, 그 조각들과 건축물들의 정신적 모태는 신화(神話)였습니다. 신들의 우두머리는 제우스이고, 그의 아내이자 누이이면서 여신 중의 우두머리인 신의 이름은 헤라입니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 곡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여신인 데메테르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신들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신들의 제단이 아테네 거리에 놓여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한 채 예배하던 그 신(神)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겠다며(행 17:23) 설교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며,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 행 17:24-27 새번역</strong></p>
사실 여기까지는 아테네 사람들이나 바울이나 서로 크게 이견이 없습니다. 만물의 근원을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로서의 이데아(Idea)라고 했던 플라톤의 주장이나, 세상은 자연 질서 안에서 조화롭게 구성되고 유지된다고 본 스토아학파의 사상이나, 세상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성찰한 사람이라면 바울의 주장은 크게 이상할 것 없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그 이면(裏面)의 현상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돌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형상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신들을 향해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이라고 단호하게 지적합니다(행 17:28-29). 결국 앞에서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며 칭찬했던 것은 사실은 칭찬이라기보다는 그들 안에 만연한 우상숭배적 경향을 꼬집어 지적한 것입니다. 그들은 왜 그토록 우상숭배에 몰입했을까요? 여러가지 이유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도무지 채워지지 않은 내면의 공허함과 그 공허함에서 비롯되는 막연한 두려움 즉 ‘고아된 심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사실은 뿌리 없는 내면의 집단적 광기이고, 아버지 없는 자의 배회(徘徊)일 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에서, 탕자와 형 모두를 ‘고아의 영’을 가진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탕자는 집을 떠나 방황했고, 형은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집을 마음으로 떠나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종교적 열심은 어쩌면 그 형과 닮아 있습니다. 신전(神殿)은 있었지만 아버지는 없는 공허한 열심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현존재(Dasein)를 ‘세계-내-존재’로 규정하면서, 근원적불안(Angst)이 인간 존재의 근본 기조임을 밝힙니다. 그에게 있어서 불안은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 앞에서 느끼는 고향 상실의 감각입니다. 아테네의 수많은 신전들은 이 고향상실의 감각을 극복해보려는 치열한 문화적 몸부림이었지만, 그러나 그 어느 신(神)도 근원적 귀향을 제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오는 고아된 심정을 주님께서 아시기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가까이 오신 까닭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행 17:27a)이라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b)라고 선언합니다. 영적 영적 어둠 속에서 고아된 심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육신의 부모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 행 17:28</strong></p>
이 세 겹의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인간의 삶 전체가 그를 힘입어 사는 것이고, 인간의 움직임 전체가 그를 통하여 기동하고,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선언입니다. 지금 바울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라며 제우스 신을 찬미했던 헬라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와, 역시 제우스를 향해 “우리는 그의 소생이라”라고 고백한 ‘클레안테스의 찬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수사적 기교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 시인들이 의도하지 않게 증언했던 시어(詩語)를 복음 안으로 끌어들여서 진리에의 고백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제우스를 찬양하던 시적 언어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미하는 언어로 세례(洗禮)를 받는 순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기막힌 진리를 삶으로 먼저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방황하고 떠돌던 그의 영혼은 고백록 1장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만드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안식이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수십 년 동안 눈물로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어머니의 기다림이 곧 하나님의 기다림이었음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어버이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어머니 안에서 본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 벧전 3:15, 16</strong></p>
이 서신의 목적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이 지역은 교회가 융성했던 만큼 로마의 박해도 극심했던 곳입니다. 실제로 이 편지가 쓰였던 다음 해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정말 두려운 상황이 다가올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일’이고, 다음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위기일수록 두려울수록 내 삶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나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희망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되, 답변을 할 때는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까? 내가 가진 소망의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또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부활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바로 이 보혜사 성령의 현존하심입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고 있지 않은가?

② 내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가 깨달아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6 May 2026 22:04: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5.17]]></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5]]></link>
			<description><![CDATA[<p class="p1"><span class="s1">1.<b>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1"> •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span></p>
<p class="p2"><span class="s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span><span class="s3">영육간 강건을 위해!</span></p>
<p class="p1"><span class="s1">2.<b>네팔 호스텔 하○○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span></p>
<p class="p1"><span class="s1">3.<b>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 </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5">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span></p>
<p class="p1"><span class="s1">4.<b>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span></p>
<p class="p1"><span class="s1">5.<b>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b></span></p>
<p class="p2"><span class="s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span class="s4">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6 May 2026 21:47: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5.17]]></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4]]></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청년주일</strong>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들이 아름다운 생의 지향을 갖추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땅의 지혜가 아닌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해운대교회 2026년 녹색교회 선정</strong>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후정의위원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2006년부터 매년 녹색교회를 선정해 왔습니다. 녹색교회란 예배, 교육, 봉사, 선교 등 교회의 전반에서 기후정의 실천과 창조세계 보전에 앞장서 온 교회를 의미합니다. 우리교회가 녹색교회로 선정된 것은 그 동안, 교회내 일회용품 근절(종이컵 없애고 개인컵, 텀블러 휴대하기), EM 배양 및 나눔을 통한 생태회복 실천,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등과 함께 환경세미나(녹색교회 탄소중립 Workshop) 개최, 사순절 달력을 통한 생태회복 노력 등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해, 작지만 생태적 활동을 꾸준히 감당해 온 것이 인정되어서입니다. 이후로 생태정의와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녹색선교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녹색교회 시상식은 19일(화)오후2시, 연동교회에서 있습니다.

<strong>③ 2026 웨슬리 아카데미</strong>
⋅제4강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오늘부터 시작합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경청하시고 신앙생활의 큰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부산동지방 웨슬리 연합성회</strong>
⋅18일(월)-20일(수) 오전 10:30 | 저녁 7:30 ▶해운대교회
⋅강사 : 정지련 목사(前 안산부곡교회 담임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6 May 2026 21:46:0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5.10]]></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3]]></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strong>
자녀를 낳아 길러주신 모든 부모님들께서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일치와 가족, 이웃, 교우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 아름답고 행복하고 완성된 중년과 노년의 시기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적인 인간적 미덕이나 문화적 관습을 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입니다(출 20:12).

<strong>② 부산동지방 웨슬리 연합성회</strong>
⋅18일(월)-20일(수) 오전 10:30 | 저녁 7:30 ▶해운대교회
⋅강사 : 정지련 목사(前 안산부곡교회 담임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
담임목사가 추천해서 모시는 강사님입니다. 교우들께서 미리 시간을 내어 참여하시면 은혜로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strong>③ 2026 웨슬리 아카데미</strong>
∙제4강 “정치학자의 로마서 산책” ▶강사 : 강문구 권사(정치학 박사)
다음 주부터 시작합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경청하시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새 가족 환영 및 점심식사</strong>
3부 예배 후에 새 가족 환영식 및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3층 엠마오 식탁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새 가족 김희만성도(남선교),황정혜집사(드보라),이명임성도(드보라),정석영집사(남선교),서 미집사(에스더)]]></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8 May 2026 23:05: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활절 제5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2]]></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5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7:55-60</strong>
<strong>55</strong>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strong>56</strong>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strong>57</strong>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strong>58</strong>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strong>59</strong>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strong>60</strong>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31
<strong>1</strong>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 마시고
○ 주의 공의로 나를 | 건져주소서
<strong>2</strong> 귀 기울여 들어 주시고, 빨리 건져 | 주소서
○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 산성 되소서
<strong>3</strong> 사람들의 비방소리 들려 | 오 - 며
○ 이 목숨 없애려고 | 음모합니다.
<strong>4</strong> 주님, 나는 당신만을 믿사 | 옵니다
○ 당신만이 내 하나님이시라 | 고백합니다
<strong>5</strong> 나의 앞날을 당신의 손에 맡 | 기오니
○ 악을 쓰는 원수들의 손에서 이 몸을 | 건져 주소서
<strong>6</strong> 나는 당신의 종이오니 웃는 얼굴을 보여 | 주소서
○ 한결같은 사랑으로 이 몸을 | 구원하소서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벧전 2:2-10</strong>
<strong>2</strong>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strong>3</strong>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strong>4</strong>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strong>5</strong>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strong>6</strong>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strong>7</strong>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strong>8</strong>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strong>9</strong>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10</strong>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14:1-14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strong>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strong>2</strong>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strong>3</strong>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strong>4</strong>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strong>5</strong>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strong>6</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strong>7</strong>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strong>8</strong>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strong>9</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strong>10</strong>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strong>11</strong>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strong>12</strong>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strong>13</strong>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strong>14</strong>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요 14:6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러러 보아내야 하는 복음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② 행 7:55-56을 묵상하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본 것(55절)과 고백한 것(56절)은 무엇입니까?

③ 벧전 2:2-5을 묵상하십시오.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h2>
지난주일 우리교회는 명랑운동회를 가졌었습니다. 어린아이들부터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 뛰노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팀은 나누어져 있었지만 마음 만큼은 하나였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그렇게 경이롭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봄이 경이롭고, 숲이 눈부신 것은 파릇한 새잎이 돋아나기 때문이듯, 새싹 같은 아이들이 있어서 세상이 참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어린이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동심(童心)을 잃지 않고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가꾸어 가는 주체로서 자라도록 도와야 하겠고, 더불어 어른들 역시 어린이들과 함께 동심을 회복해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가꾸어 가야 하겠습니다. 동심의 회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머리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심이 회복되는 자리는 예배의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매 달 첫 주일예배를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 드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예배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성별과 나이의 장벽을 뛰어넘어 성전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드리는 예배였습니다(행 2:46).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즉 인종과 신분, 성별의 차별이 없는 하나의 몸이었고(갈 3:28),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주님 은혜 안에서(엡 2:14-16), 노인과 젊은이, 자녀들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던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70년대를 지나며, 서구사회가 근대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공교육의 학교 시스템을 교회로 이식하면서, 부모는 예배당으로, 자녀는 연령별 부속실로 흩어져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리는 부모의 신앙적 삶이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아이들을 예배에서 격리한 학교식 모델은 신앙을 단순한 정보 차원으로 격하시켰고, 아이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앙교육의 핵심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인 ‘성서’와, 선포된 말씀인 ‘설교’, 그리고 보는 말씀인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성서)과 선포된 말씀(설교), 그리고 보는 말씀인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의 온세대 예배는 이후로도 소중하게 자리 잡아야만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함께 한 자리에서 예배하며 동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동심이 가장 맑고 사랑스럽게 드러나는 곳이 눈망울입니다. 그리고 이 눈망울이 동심을 잃지 않고 순수한 인격체로 자라게 하는 관건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있겠습니다. 돌아보면 부활절 이후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관되게 요청하신 것이 시선의 변화였습니다. 부활절 제2주 복음에서 주님은 문을 잠근 채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시며, 부활하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잔혹한 수난과 죽음을 ‘보고’ 절망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며’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부활절 제3주 복음에서 주님은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다가가셔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 성경에 쓰인 당신에 관한 기사들을 설명해주셨습니다(눅 24:27). 그리고 주막에서 떡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그것을 쪼개 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중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보게’ 하셨습니다(눅 24:30).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슬픔에 빠져 가던 길을 돌이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되어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갑니다(눅 24:33). 부활절 제4주 복음에서 거짓 목자와 참 목자를 분별할 수 있는 ‘시선’을 회복시켜 주신 주님은, 부활절 제5주인 오늘 복음서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요 14:1a</strong></p>
주님의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그 전에 하신 말씀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13장에서 당신께서 팔리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고(요 13:21), 뿐만 아니라 어디론가 가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요 13:33).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a)라고 묻자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b)라고 대답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팔리시고, 떠나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 마음을 근심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서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당부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중심지이고, 존재의 가장 심층적인 곳인 이 ‘마음(καρδία)’에서 근심이 걷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은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 대한 처방으로 그들의 시선을 조정해 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 요 14:2</strong></p>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당신께서 가실 곳이 ‘내 아버지 집’이라고 명토박아 말씀하십니다. 사면초가에 빠진 탕자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절박하게 되뇌였던 바로 그 ‘내 아버지 집’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꿈에도 못 잊고 기다리시는 바로 그 ‘내 아버지 집’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명쾌하고 분명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 14:3</strong></p>
하지만 여전히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선이 육의 세계, 표면적 세계에 갇혀있으니 마음마저 두려움과 근심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 14:4)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을 어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걸어가야 할 물질적인 공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길'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길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 밖에서'만 길을 찾고, 보려 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이 가장 안쓰럽게 드러난 것이 바로 도마의 물음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 요 14:5</strong></p>
왜 이런 패턴의 대화가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찾아지는 ‘길’을 그리스도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 믿음의 눈을 떠야 보이는 길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생명의 길, 존재의 길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길을 모르겠다는 도마를 향해 마침내 주님께서 해 주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 14:6</strong></p>
주님의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강하게 나타나는 아주 독특한 그리스도론입니다. 대개 우리는 ‘길’을 목적지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길’은 진리로 이끄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 자신’ 즉 ‘당신 존재자체’가 우리 신앙의 목적지인 아버지께 이끄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존재 자체로 성사(聖事 sacraments)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알면 성부 하나님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요 14:7</strong></p>
바로 그런 이유로 지난 이천 년 동안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살기를 원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을 알며,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자기 존재를 담아온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에서 12사도 외에 일곱 명의 지도자를 세웠는데, 그중 한 인물이 스데반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지금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누명을 쓴 채, 재판을 받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자신을 변론해보라고 말하자 스데반은 사도행전 7:2절 이하에서 긴 설교를 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애굽생활과 광야, 그리고 모세 이야기를 거쳐 이스라엘 왕조까지 거론합니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이 결국 예수마저 죽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하면서도 그를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행 7:54).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사건전개가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인데, 이때 스데반의 모습을 누가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 행 7:55, 56</strong></p>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그의 시선은 오직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시선의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육의 시선, 표면적 시선만을 뜨고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하는 것과, 영의 눈을 뜨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하는 것은 얼마나 다릅니까? 똑같이 두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시선의 차이와 마음의 차이가 이토록 다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행 7:57-60</strong></p>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렸던 기도입니다. 주님과 시선이 같은 사람, 주님과 마음이 같은 사람, 주님과 기도가 같은 사람, 그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가 하루아침에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요? 스데반이 순교에 이르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그는 많은 시간 시선과 마음을 그리스도께 두는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으로 양육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영혼이 자란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 벧전 2:2-3</strong></p>
베드로가 이렇게 당부하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그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그 맑고 순박한 신앙의 시선으로 인해, 그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 어린이와 어른들 모두에게 이런 시선의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은 동심을 잃지 않고 순수한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어른들도 동심을 회복해 순수한 시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 요 14:12</strong></p>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나도 하다가,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 우편에 서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의 이상입니다. 이 행복을 보고 사는 사람은 스데반처럼 살 것이고, 이 행복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근심에 정복된 채 정처 없는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하늘은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입니다. 그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진짜 생명이 마침내 실체를 나타냈다는 의미입니다. 스데반이 본 이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그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스데반이 보았던 그 하늘과, 스데반이 보았던 그 주님을 본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삽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을 근심에 버려두지 말고, 매일매일 신령한 젖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성령의 은총이 ‘마음’으로 임하시도록 해서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 속에 가슴 벅찬 파스카 신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시선을 땅에 두고 마음을 근심으로 채우고 있지 않은가?

② 시선을 예수님께 두어 마음이 은총으로 채워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02 May 2026 21:25: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도제목 26.5.3]]></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31]]></link>
			<description><![CDATA[<p class="p1"><strong>1.일본 고베 메구미 채플교회 류준숙 선교사</strong></p>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날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성령충만할 수 있도록!</p>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어머니께서 하나님을 힘써 더 알아가시고, 영육간 강건을 위해!</p>
<p class="p1"><strong>2.네팔 호스텔 하○○선교사</strong></p>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제자 훈련받을 영혼을 인도해 주셔서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다음 진행될 사역의 방향을 선하게 이끌어주시길!</p>
<p class="p1"><strong>3.네팔신학교 박형근 선교사</strong></p>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영어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시길!</p>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계속 나오지 않는 비자로 인해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도록!</p>
<p class="p1"><strong>4. 캄보디아 썸머라홍 김형민 선교사</strong></p>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섬겼던 썸머라홍 교회와 성도가 믿음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 사역의 길을 보여주실 때 순종하도록!</p>
<p class="p1"><strong>5. 파키스탄 키프로 소망공동체 백우현 선교사</strong></p>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네명의 선교사들이 맡겨준 여자호스텔 한나홈, 키프로 남자호스텔, 세인트 요나교회, 키프로 크리스찬 미들 스쿨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하고 섬기길!</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22:36: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5.03]]></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9]]></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strong>
우리 자녀들이 동심을 잃지 않고, 시선을 하늘에 두고 아름다운 꿈을 품고 자라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매월 첫주일 예배는 온세대가 함께 예배합니다. 온세대 예배는 단순히 같은 공간에서 예배하는 이벤트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하나 되고,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strong>② 해운대교회 명랑운동회</strong>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온 교우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준비와 진행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③ 새 가족 환영회</strong>
다음 주 11시 예배 혹은 오후예배 시간에 있습니다.

<strong>④ 강단과 목회 후원</strong>
기독교대한감리회 출판부(도서출판 KMC)에서 발행하는 ‘강단과 목회’ 후원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열 한 분의 젊은 목사님들이 강단과 목회를 구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22:34:4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활절 제4주 순애殉愛의 목자 예수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8]]></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4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2:42-47</strong>
<strong>42</strong>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strong>43</strong>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strong>44</strong>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strong>45</strong>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strong>46</strong>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strong>47</strong>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23
<strong>1</strong> 여호와는 나의 목자 | 시 – 니
○ 내게 부족함이 | 없으리로다
<strong>2</strong>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 | 이시며
○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 하시는도다
<strong>3</strong>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 위하여
○ 의의 길로 인도 | 하시는도다
<strong>4</strong>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 지라도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 하시나이다
<strong>5</strong>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 주시고
○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 넘치나이다
<strong>6</strong>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 | 르리니
○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 살리로-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벧전 2:19-25</strong>
<strong>19</strong>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strong>20</strong>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strong>21</strong>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strong>22</strong>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strong>23</strong>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strong>24</strong>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strong>25</strong>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10:1-10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strong>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strong>2</strong>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strong>3</strong>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strong>4</strong>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strong>5</strong>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strong>6</strong>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strong>7</strong>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strong>8</strong>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strong>9</strong>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strong>10</strong>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요 10:10절 묵상하십시오. 도둑이 온 이유와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② 벧전 2:24절 묵상하십시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당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행 2:42-47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양으로서의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순애殉愛의 목자 예수님</h2>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절 제4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교회력 가해, 나해, 다해 모두 착한 목자의 비유가 나오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선정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토록 착한 목자의 비유를 매 해 강조해서 기념하는 까닭은 착한 목자의 양무리를 훔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와 신학의 위기는 항상 거짓 선생들과 적그리스도의 등장, 그리고 이단들의 출연이었습니다. 그래서 2세기의 이레네우스 같은 선각자들은 바른 신앙을 정립해 영지주의 등의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단 반박에 평생을 바치기도 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단들의 미혹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예수님 안에 온전히 그 분의 착한 양으로서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 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착한 목자의 상(像)’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이 ‘착한 목자’로서의 예수님 설명은 이스라엘처럼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에게는 정서적으로 가장 이해가 빠른 설명이겠습니다. 목자는 수많은 낮과 밤들을 자기 양들과 함께 지낼 뿐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대화를 나눔으로서 단순한 양치기가 아닌 아버지로 인식됩니다. 목자에 대한 이런 정겨운 인식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때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응송에서의 시인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시편 23편에서 고백되는 목자의 사역은 자기 양떼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즉 죽음의 음산한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를 지나며, 그럼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의 예수님 말씀은 마치 시인의 그 고백에 대한 화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요 10:1-3</strong></p>
목자이신 당신의 사역을 말씀하시기 전에 주님은 먼저 도둑의 특징부터 말씀하십니다. 도둑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통일교나 신천지 등을 통해 보듯이 이단의 교주 즉 도둑은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양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도둑은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예수님 이후에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도 않았고, 성경을 따라 양떼를 돌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을 넘어 몰래 들어가 양들을 낚아채 억지로 끌고 갑니다. 양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피해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하고 어린 양들을 생각할 때, 안쓰럽고도 섬뜩한 장면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소개하시면서, 목자인 당신은 문으로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는 말씀을 통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최선을 다해 당신 양떼를 인도해 가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문지기가 목자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면 목자는 일일이 자기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나섭니다(요 10:4). 해마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양들이 태어나는데, 이때 팔레스티나의 들판에는 목자들이 한층 수가 늘어난 양떼의 어린 것들을 풀밭에 풀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이 시기부터는 여가(餘暇)를 완전히 접습니다. 정성스럽게 어린 양들을 안거나 목덜미와 어깨에 메고 다닙니다. 그런데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한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셔도,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요 10:6). 결국 이런 논쟁적인 성격을 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까닭에 그 다음 ‘문에 관한 비유’로 이어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 10:7-10</strong></p>
당당하게 문을 통과해 양 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 양들을 죽이고 멸하려고 하는, 도둑이며 강도인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비유로만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도둑이며 강도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요 10:8)라 하신 말씀을 근거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겨냥해 말씀하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필사본들은 ‘다’ 라는 표현을 아예 삭제해버린 것들도 있고, 또 어떤 사본은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표현을 삭제해서 그런 통속적인 오해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 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 즉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슬러 비열하고 집요하게 벌이고 있는 음모들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는 ‘눈이 먼’ 자들(요 9:39-41)이었고, 스스로 ‘안다’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무섭도록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눈 멀고 무지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폭력으로 없애려 했습니다. 예수를 쳐서 없애야 그의 양떼를 흩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 26: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슥 13:7절의 예언을 인용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참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자기 양을 지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는 양떼를 쳐서 흩어지게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양떼를 쳐서 흩어지게 하려는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 요 10:10a</strong></p>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유혹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했던 사탄은, 지금은 거짓 목자들을 이용해 양떼를 쳐서,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 양들을 지켜내려 그렇도록 애를 쓰시는 겁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 10:10b</strong></p>
거짓 목자들의 목적이 하나이듯이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적도 하나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오로지 양들이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희생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양떼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순절하신 것입니다. 1913년 간도에서 태어난 박계주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가 1938년 ‘매일신보’에 ‘순애보(殉愛譜)’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순애보는 ‘사랑에 순절(殉節)하는 인생의 기록’이라는 의미이고, 광복군이 조국을 위해 죽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위해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단어라고 합니다. 책에서 박계주 선생은 순애보를 ‘가장 높고 가장 깨끗한 사랑에 자기를 제공하여 남을 위해 사랑의 제물이 되는 다 같이 사랑에 순(殉)하는 순애(殉愛)의 사도들이며, 십자가의 사도들’로 규정합니다. 여기에서 ‘제공’, ‘제물’,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읽을 수 있는 개념들인데, 글 마디 행간마다에 뚝뚝 떨어지는 순애보의 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은유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순애보의 피를 뚝뚝 흘려주신 선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박계주는 예수님의 보혈만을 말하지 않고, 그 보혈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중 등장인물인 최문선은 자기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살인과 강간 미수 누명까지 덧씌우려 했던 이치한을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원수인 이치한이 병원으로 자기를 찾아왔을 때, 칼로 가슴을 찔러도 시원치 않을 마음이었지만, 원수를 향해 원망도 저주도 하지 않으셨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치한이 자기를 위기에서 건져준 이유를 물었을 때, 최문선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당신은 나와 만나기 전부터 나의 친굽니다. 모름즉이 우리는 한 피로 묶여져야 합니다. 피란 무엇입니까? 피는 사랑이요 희생입니다. 박계주/곽승미 엮음 ｢순애보｣(지식을 만드는 지식) 174쪽

또 작중 인물인 헤순은 자기 남편을 빼앗은 옥련과, 누명을 씌워 자기를 헌신짝처럼 버린 남편 철진이 자동차가 전복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제 피를 뽑아 두 사람에게 수혈시켜줍니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온 명히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언니, 난 기뻐요. 오늘에야 나는 내 원수들을 복수했어요. 위의 책 276-277쪽

최문선이 피에 대해 관념적인 정의를 내렸다면, 차헤순은 실천적이며 실제적으로 적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의 이런 고백과 실천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부터 흘러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선한 목자의 표상이라면, 이들의 희생적 사랑은 그 표상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표상을 우러러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행 2:42</strong></p>
여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에 전념하는 삶, 서로 교제하는 것에 전념하는 삶, 함께 떡을 떼는 것에 전념하는 삶,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삶입니다.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존자 베다는 사도행전 해설에서 이렇게 감격스럽게 해설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젖으면 지체 없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러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이며 같은 사랑의 열기가 곱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두 번 주어졌다는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마틴 엮음/이혜정 옮김 ｢교부들의 성경 주해 신약성경 Ⅶ 사도행전｣(분도출판사) 99쪽

이렇게 진정어린 신앙생활을 했더니 그 결과는 참으로 눈이 부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행 2:47</strong></p>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도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가르침을 듣는 것에 전념하고, 서로 교제하는 것에 전념하고, 함께 떡을 떼는 것에 전념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가운데, 예수님 안에 힘써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벧전 2:22-24</strong></p>
왜 주님은 죄도 없고, 거짓도 없으시면서,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감내하셨을까요? 우리를 향하신 순애보 때문입니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는 오로지 그 목적 하나 때문에 사랑으로 순절(殉節)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가장 높고 가장 깨끗한 사랑에 당신을 제공하셔서 사랑의 제물로서 순(殉)하신, 순애(殉愛)의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 순애보의 보혈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우리는 양의 문이신 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 안에 견고하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영적 차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생명 하나 살리려는 순애보로 세상 거짓과 타협하지 않으신 분, 때로는 지팡이로 나약하고 눈 어두운 나를 인도해 주시고, 때로는 막대기로 거짓 목자와 사나운 이리를 쫓아내시는 분, 음산하고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에서 내 이름을 불러 곁에 두시는 분, 그 분만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문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 받는 양으로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두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서 그 분의 양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순애보의 사도가 되어 우리 역시 사랑의 제물로 순(殉)하는 순애(殉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삶,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대결해 이기는 삶, 그리하여 세상에서도 칭송받는 삶을 우리 모두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거짓 목자의 미혹에 속아 음산한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가?

② 참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생명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22:33: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4.26]]></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7]]></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저금통</strong>
오늘까지 받습니다.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② 해운대교회 명랑운동회</strong>
⋅10시에 교회에서 예배하고 출발합니다. (10시 예배만 합니다.) 11시20분까지 ☞ 양운중학교로 이동
⋅장소 : 양운중학교 강당

<strong>③ 차량관리대장 작성</strong>
원활한 주차관리를 위하여 교우들의 주차관리대장을 작성 중입니다.
남누리 전도사님(010-8305-0223)께 성함과 차량번호를 보내주시거나, 2층 주보대에 본인 성함과 차량번호, 전화번호를 기재해주시기 바랍니다.

<strong>④ 강단과 목회</strong>
기독교대한감리회 출판부(도서출판 KMC)에서 1986년 창간해 격월 발행하는 ‘강단과 목회’는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예배 및 설교 자료, 목회계획, 절기설교, 강해설교 등 목회 현장에 도움을 제공하는 목회전문지입니다. 그동안 담임목사가 소명감 속에서 집필 및 편집위원으로 활동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교역자들 중에는 그마저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본부 정책으로 가격을 ‘3년 99,000원’으로 낮추고 후원자를 모집합니다. 우리 지방의 젊은 교역자들을 위해 후원해주실 분들은 남누리 전도사님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25 Apr 2026 08:26: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활절 제3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인류의 희망]]></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6]]></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3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2:14a, 36-41</strong>
<strong>14</strong>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strong>36</strong>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strong>37</strong>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strong>38</strong>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strong>39</strong>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strong>40</strong>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strong>41</strong>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16:1-4, 12-19
<strong>1</strong> 주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 | 주시니
○ 내가 주님을 | 사랑합니다.
<strong>2</strong> 나에게 귀를 기울여 | 주시니
○ 내가 평생토록 기도 | 하겠습니다.
<strong>3</strong>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 은혜를
○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 있겠습니까?
<strong>4</strong>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 | 습니다.
○ 주님께 서원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 | 루겠습니다.
<strong>5</strong> 성도들의 죽음을 주님께서는 소중히 여기 | 십니다.
○ 주님, 진실로, 나는 주님의 | 종이옵니다.
<strong>6</strong> 당신 여종의 아들인 이 종을 결박에서 풀어주셨 | 습니다.
○ 내가 주님께 감사제사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 부르리이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벧전 1:17-23</strong>
<strong>17</strong>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strong>18</strong>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strong>19</strong>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strong>20</strong>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strong>21</strong>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strong>22</strong>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strong>23</strong>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 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눅 24:13-35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3</strong>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strong>14</strong>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strong>15</strong>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strong>16</strong>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strong>17</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strong>18</strong>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strong>19</strong>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strong>20</strong>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strong>21</strong>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strong>22</strong>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strong>23</strong>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strong>24</strong>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strong>25</strong>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strong>26</strong>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strong>27</strong>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strong>28</strong>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strong>29</strong>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strong>30</strong>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strong>31</strong>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strong>32</strong>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strong>33</strong>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strong>34</strong>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 지라 <strong>35</strong>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눅 24:31, 32절 묵상하십시오. 제자들이 눈이 밝아진 순간, 그리고 마음에 뜨거움을 느낀 순간은 각각 어느 때였습니까?

② 행 2:38절 묵상하십시오.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벧전 1:18-19절 묵상하십시오. 유대인들이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무엇으로 된 것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인류의 희망</h2>
지난 4월8일은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교수의 탄생 100주년이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포로가 되어 3년간 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그 시기 성경책을 읽으며 절망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무신론적 ‘희망의 철학’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희망의 신학’(1964)을 저술한 이후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1980), ‘희망의 윤리’(2010)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2024년 6월, 98세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독일 고백교회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그가 남긴 희망의 신학은 오늘 우리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신학 안에 내재되어 있는 희망은 결코 막연한 기대나 근거 없는 낙관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의한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는 비판적 도구요,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일구어내는 거룩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26년의 현실은 여전히 그가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절망의 징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계에는 중동전쟁의 먹구름이 어둡게 드리워 있고, 과도한 탄소배출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지구 생태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16일)은 세월호 참사 12주기였습니다. 벌써 봄이 열두 번이나 지났음에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유족들은 슬픔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부활절 연합예배 때는 이태원 참사 유족들과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참석해서, 고통을 호소하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당부했었습니다.

몰트만이 거의 한 세기 동안 역설한 희망의 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 교회, 신앙과 구원 및 미래의 희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부터 생성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비하(卑下)’를 실현하심으로서, 죄와 죽음에 빠진 인간과 함께 계셨습니다. 완전히 자기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타인 가운데에, 비인간 가운데에, 그 어떤 신적 본성도 끄집어낼 수 없는 무능 가운데에 있는 ‘케노시스(kenosis)’ 즉 ‘하나님의 자기 버리심’으로부터, ‘그로 인한 인류의 희망의 미래’가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J.몰트만/김균진옮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205-214쪽

오늘 복음서에 모든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마치 몰트만이 유대인 600만 학살의 상징인 아우슈비츠(Auschwitz)의 비극 앞에서 ‘하나님은 고난 당하실 수 없는 신’이라는 전통적 신관(神觀)의 붕괴를 보았듯이, 그들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관이 붕괴된 것에 침통해하는 모습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 눅 24:13-14</strong></p>
여기 누가가 언급하는 ‘그들 중 둘’은 9절에 있는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 중에서 ‘다른 이들 중 둘’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부활현장을 목격한 여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뒤로 하고 힘없이 ‘엠마오(Εμμαοῦς)’라 하는 촌으로 낙향하고 마는 것인데, 그들이 길을 걸으며 나눈 ‘이 모든 된 일’(눅 24:14)이란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일’을 의미합니다. 어둡고 절망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 눅 24:21</strong></p>
이 한 문장 안에서 두 제자의 기대와 절망이 안타깝게 교차합니다. ‘바랐노라(엘피조멘 ἠλπίζομεν)’라는 과거형 동사가 ‘이미 끝나버린 희망’을 보여줍니다. 어떤 메시아를 바랐기에 이토록 침통해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바란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였습니다. 여기서 ‘속량(뤼투르스다이 λυτροῦσθαι)’은 단순한 영적구원이 아니라 ‘정치적 해방’ 즉 ‘로마로부터의 민족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중에게 있어 예수라는 존재는 단지 병이나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런 차원을 넘어, 로마의 지배와 독재자 헤롯 가문의 폭압과 유대 종교권력자들이 지워준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게 하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문과 모멸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당하고 맙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메시아관은 ‘죽지 않으면서 승리하는 메시아’인데, 예수는 사형을 당했고, 그것도 로마 방식으로 처형되는 것을 보면서 두 제자는 ”우리가 완전히 잘못 믿었구나”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 받는 메시아’를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관에 적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서 희망의 몰락을 보고 맙니다. 즉 그들의 절망은 메시아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무너진 절망이었습니다. ‘계시의 부재’에서 오는 ‘영적 둔감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처방이 ‘성경을 풀어 주신 것’(눅 24:27)이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눅 24:15-16</strong></p>
문득 한 남자가 다가와 그들과 동행을 합니다(눅 24:15). 누가는 그 남자를 ‘부활하신 예수’라고 말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누가는 ‘눈이 가리어져서’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의 눈이 ‘붙잡혀 있었다(ἐκρατοῦντο)’란 의미입니다. 두 사람의 의식과 시각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가림에 의해 억제되어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왜 알아보지 못하게 가리셨을까요? 보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즉 성경을 풀어주시고, 떡을 떼어주실 때 눈이 열려 참으로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말씀이 먼저 가슴을 뜨겁게 하고, 떡을 떼어주실 때 비로소 예수를 바로 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이 가리어진 상태에서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선’(눅 24:17b) 그들에게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미련한 자들’(눅 24:25)이라고 꾸짖으시면서도 ‘그리스도는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반드시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눅 24:26)이라고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사 50:6 혹은 사 53:3-9절의 ‘고난당하는 어린 양’ 이야기와 슥 11:13절에 예언된 유다의 배신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낯선 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엠마오마을에 도착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더 가시려는 듯 하시자, 그들이 “날이 저물었으니 여기서 함께 묵자”(눅 24:29)며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지혜로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십니다. 제자들은 등불을 켜서 집안을 밝히고 기쁜 마음이 되어 식탁을 차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을 자세히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눅 24:30-31</strong></p>
예수님은 여기에서 더 이상 그들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떡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그것을 쪼개 나누어주셨을 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 즉 유월절 만찬을 상기시켜주시는 것이었고,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켜주시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지만, 이미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떼어주신 떡을 매개로 지금부터 주님은 그들 안에 계셨습니다. 누가가 말하고 싶어 했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떡을 떼어주실 때, 비로소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성찬식탁에서 떡과 잔을 나눌 때, 우리의 눈도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 밝아진 눈으로 내 주님을 알아보고, 동행의 감격으로 내면을 채워가는 우리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져서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려면 우리 마음도 주님을 향해 절박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라며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하며 묻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이때 베드로의 대답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 행 2:38</strong></p>
회개는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찔려하는 마음이 절실한 회개로 연결되고, 세례를 통해 다시 사는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시리아의 성聖 에프렘(AD 306-373)은 자신의 관상 시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낱낱이 꿰뚫어보는 분이시라,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사람의 결심도 미리 알아채시나이다. 그리하여 그가 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당신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시며, 그가 당신 앞에 엎드리기 전에, 당신은 손을 뻗어 그를 맞아주시나이다. 그가 채 눈물을 흘리기도 전에, 당신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가 제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당신은 그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나이다. 성 에프렘/박효섭 옮김 ｢성 에프렘의 시편기도｣(카리스마타코이노니아) 212쪽

회개란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우리가 탕자의 회개를 통해서도 보았듯이,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사람의 결심을 아시는 주님은, 죄인이 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문을 열어주시고, 당신 앞에 엎드리기도 전에 손을 뻗어 맞아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보배로우신 피로서 그간의 우리의 헛된 행실들을 씻어주시고 깨끗한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벧전 1:18, 19</strong></p>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흠도 티도 없는 그리스도의 피를 내 안에 모시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서, 그분과의 벅찬 동행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벧전 1:22, 23</strong></p>
진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때, 비로소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마음에 어두움을 품고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약성경을 설명해주심으로서 마음의 뜨거움을 회복시켜주시고, 떡을 떼어주심으로 가리어졌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눅 24:33), 자기들이 떠나왔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길에서 있었던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주실 때, 자기들의 가리어졌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던 일을 증언합니다(눅 24:35).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몰트만에 따르면 그런 은혜를 입었다 해서 당장 억압적 현실이 무너지거나 전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엄연한 죽음이고, 부패는 역겨운 냄새를 풍깁니다. 죄악은 여전히 죄악으로 남아있으며, 고난은 간단한 해결책이 없는 버거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이런 현실이 아예 없는 피안의 세계나 유토피아(Utopia)를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또 하나의 다른 현실’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의 현실, 죽음이라는 현실 안에서,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를 때 주어지는 자유와 기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는 한계선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 속에서 깨어질 때, 신앙은 희망을 향해 열려질 수 있고, 또 당연히 열려지게 됩니다. 이 때 신앙은 담대한 확신이 되고, 인내가 되고, 열정이 됩니다.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희망의 신학-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의 근거와 의미에 대한 연구｣(대한기독교서회) 29쪽
몰트만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한국인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날을 ‘죽은 날’로 쓰지 말고 ‘부활한 날’로 쓰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신옥수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이해’, ｢기독교사상 통권 808호｣ 31쪽
우리도 그의 신학과 신앙처럼, 현재의 고난을 피하지 말고, 고난 위에 굳게 서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그 분의 부활에서 나의 부활을 보며, 희망의 신앙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매일 매순간 말씀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찬 식탁에서 눈이 밝아지는 경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영적 시선이 어두워 가까이 계신 주님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②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찬을 통해 눈이 밝아졌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21:50: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4.19]]></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5]]></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저금통</strong>
사순절 기간동안 모아주신 분유보내기 저금통은 4월 말 YWCA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출하지 않으신 분들은 다음 주일까지 가져와주시기 바랍니다.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② 해운대교회 명랑운동회</strong>
⋅날자 : 26일(주일) 오전 10:00 - 오후 4시
10시00분 ☞ 교회 집결 및 개회예배
11시20분 ☞ 양운중학교로 이동
⋅장소 : 양운중학교 강당

<strong>③ 속장, 인도자 모임</strong>
오늘 11시 3부예배 후 ☞웨슬리 채플

<strong>④ 원활한 주차관리를 위하여 교우들의 주차관리대장을 작성 중입니다.</strong>
남누리 전도사님(010-8305-0223)께 성함과 차량번호를 보내주시거나, 2층 주보대에 본인 성함과 차량번호, 전화번호를 기재해주시기 바랍니다.

<strong>⑤ 주는반석교회 봉헌예배</strong>
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 ‘영남선교대회 기념교회’입니다. 교우들의 기도와 참여 부탁드립니다. ☞ 25일(토) 오전11시 (해운대교회 출발: 오전 7시30분)]]></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23:34: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활절 제2주 도마의 부활절]]></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24]]></link>
			<description><![CDATA[<strong>부활절 제2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사도행전 | 행 2:14a, 22-32</strong>
<strong>14</strong>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strong>22</strong>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strong>23</strong>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strong>24</strong>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strong>25</strong>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strong>26</strong>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strong>27</strong>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strong>28</strong>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strong>29</strong>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strong>30</strong>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strong>31</strong>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strong>32</strong>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봉독 후 :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편 16편
<strong>1</strong>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 있도다
○ 나의 기업이 실로 | 아름답도다
<strong>2</strong>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 | 할지라
○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 교훈하도다
<strong>3</strong>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 모시고
○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 않으리로다
<strong>4</strong>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 기쁘고
○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 안전하리니
<strong>5</strong>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 | 하시며
○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 것임이로다
<strong>6</strong>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 | 시리니
○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 있습니 - 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서 | 벧전 1:3-9</strong>
<strong>3</strong>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strong>4</strong>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strong>5</strong>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strong>6</strong>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strong>7</strong>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strong>8</strong>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strong>9</strong>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복음서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요 20:19-31절입니다.
찬양대: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요 20:19-31</strong>
<strong>19</strong>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strong>20</strong>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strong>21</strong>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strong>22</strong>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strong>23</strong>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strong>24</strong>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strong>25</strong>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strong>26</strong>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strong>27</strong>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strong>28</strong>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strong>29</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strong>30</strong>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strong>31</strong>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요 20:27절 묵상하십시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신 주님께서 그 다음에 요청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② 행 2:31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보다 천년을 앞서 살았던 다윗이 미리 보고 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벧전 1:8, 9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30여 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가 칭찬한 것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도마의 부활절</h2>
바로크시대의 가장 혁명적인 화가로 알려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가 1601-1602년경에 그린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라는 유화(油畫) 작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도마의 행동을 통해, 인간의 의심과 믿음, 본성과 신앙 사이의 복잡한 심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화면의 3분의 2를 채운 짙은 어둠은 ‘믿지 않는 자의 세계’ 즉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인간의 완고한 내면의 색’입니다. 왼쪽 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이 쏟아집니다. 이 빛은 창백한 피부의 그리스도와 그의 흰 천을 가장 환하게 비춥니다.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후광(halo)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성, 즉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적 선택입니다. 도마의 손가락이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 속으로 실제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불편하고 충격적인 장면인데, 카라바조가 전하려 한 것이 바로 이 불편함입니다. 믿음의 부재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의심은 언제나 무언가를 찌르고 헤집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손을 붙잡아 상처 안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믿음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이 손이 말해줍니다. 도마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뒤로 두 제자의 이마가 그리스도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네 머리가 모여 만든 형상이 십자가를 닮아 있습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확인하는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가 나타난 것에서 카라바조의 신학적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티스토리 주립미술관 ‘부활절, 우리 손가락은 어디를 향하는가’에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성聖 도마주일로 지키는데, 오늘 복음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 두 가지 간절한 호소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손으로 만져보기를 원했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그리고 또 하나는 요한복음 저자가 자기가 쓴 책의 목적을 밝히고 있는 결론 부분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 31). 그러니까 성聖 도마주일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고,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그 신앙의 요구를 두 가지 상황 설정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드레 후 도마도 함께 있을 때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두 상황은 제자들을 둘러 싼 동일한 빠스카적 분위기로 인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요 20:19-22</strong></p>
지금 요한의 관심은 부활해서 찾아오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분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신이 들어가셨고, 이제는 제자들도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에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로서는 지금 그 ‘새로운 생명’이 눈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모여 있는 집의 문들을 모두 닫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아직 자신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부활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시자마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하시고, 당신의 상처입은 손과 옆구리도 보여주십니다. 이때 비로소 제자들은 기쁨을 회복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단지 기쁨만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세상으로 보냄 받아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의 인사를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숨을 내쉬어 성령도 주신 것입니다. 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진흙으로 빚으신 후,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셨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습니다(창 2:7). 그 사실을 깨달은 욥은 기막힌 고백을 남겼습니다. “어느 동물의 목숨이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있으며 어느 사람의 숨결이 주의 손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욥 2:7 공동번역). “나도 하나님의 콧김으로 생겨난 몸, 전능하신 분의 입김을 받아 숨쉬게 된 몸이오”(욥 33:4 공동번역). 시편의 고대 시인 역시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바로 그 입 기운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제자들은 기쁨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부활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 도마는 냉정하게 반응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요 20:25</strong></p>
이 한 마디 때문에 도마는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도마’라고 회자되는 불명예를 떠 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그렇게 함부로 평가되면 안 되는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안에서 그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사려 깊고 냉철한 제자로 그려집니다. 요 10:30절에 보면 사람들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하신 말씀을 트집 잡아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고 예수님께서 그 유대지방으로 또 가시려 하자 제자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도마 역시 유대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알고 있었고, 두렵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고자 합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도마가 다시 한 번 등장하는 것이 요한복음 14장에서입니다. 떠날 날이 가까웠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요 14:2)시며,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요 14:4)고 하십니다. 그러자 도마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이런 모습들 속에서 느껴지는 도마는, 무엇이든 대충 믿어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아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고, ‘아멘’에 이르기 위해 물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도마 식으로 재구성 하면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관찰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물음 없는 아멘은 맹목이다.” 의심과 성찰의 숲을 통과하지 않는 한, 그 어느 것도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정직함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적은 이런 정직한 회의(懷疑)가 아니라 무작정 관념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적당히 믿는 관념적 믿음은 정작 급진적 헌신이 필요할 때, 뒤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나서 여드레가 지난 후에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이번엔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서서 인사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 20:26</strong></p>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요 20:27</strong></p>
예수님은 왜 도마의 손목을 이끌어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을까요? 도마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온통 죽음의 그늘에 삼키어 버린 제자들이, 빨리 회복해야 할 것은 부활에의 확신이었습니다. 도마가 정말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 20:28</strong></p>
회의의 밤이 지나가고 부활의 빛이 그를 감쌉니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제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존재이고, 다시 하나님 곁으로 가신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이제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죽음에 삼키어 기쁨을 상실한 제자들, 두려움에 삼키어 평화를 잃은 제자들이 다시 기쁨을 회복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손으로 눈으로 주님을 확인하고 성령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제자들은 주님이 자기들 앞에 계셨기에 손으로 눈으로 확인했던 것인데, 오늘 우리는 주님이 앞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 20:29</strong></p>
이후로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할’ 우리들을 향해 주님은 “그래서 너희는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도마와 같은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가 훗날 박해와 환난 중에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벧전 1:8, 9</strong></p>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인 AD 60년경에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이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라고 칭찬하면서 그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거듭남과 산 소망의 삶을 살고 있었고(벧전 1:3), 시험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벧전 1:6). 베드로는 그들이 그 부활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간직된 유업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벧전 1:4).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부활이 우리 현세의 삶에 가져다 준 새로운 변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굳게 닫힌 문을 거침없이 통과하셔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의 현세적인 삶 속에서 거침없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의 현실 안에 현존하시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의 현실 안으로’ 즉 ‘예수님의 영적 차원 안으로’, ‘지금’, ‘여기’에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가슴 벅찬 현실을 ‘아이온(aeon)’이라고 합니다. 희랍어 ‘아이온’은 현세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시간 즉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영적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영적인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되다”고 주님은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증언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 행 2:25</strong></p>
시 16:8-11절에서의 다윗의 고백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다윗이 가리키는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은 예수님보다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다”는 고백과,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다”는 고백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30절에서 베드로는 다윗에 대해 “그는 선지자라”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 행 2:31</strong></p>
비록 예수님보다 천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었기에, 미리 보고 사랑할 수 있었고, 미리 믿고 요동하지 않았고, 미리 보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오늘 응송에서의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 시 16:9, 10</strong></p>
물론 베드로에 따르면 그는 죽어 장사되었고 묘에 묻혔습니다(행 2:29).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부활을 믿었고, 천년 전에 죽은 자신의 부활도 믿었습니다(시 16:10). 그랬기 때문에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그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 행 2:26-28</strong></p>
예수님보다 천년 앞서 살았던 다윗의 고백이나, 다윗보다 천년 후에 살았던 베드로의 고백이나, 베드로보다 이천년 뒤에 사는 우리의 고백이나, ‘각각의 현세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기쁨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금의 질병들과 고난들로 인해 잠깐씩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닫힌 문을 통과해 제자들에게 오셨듯이, 오늘도 고난과 회의의 밤을 통과해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주님은 과거의 제자들과 도마의 주님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 모두를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2천년 전의 도마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성찬의 식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 단단한 일치와 연대에로 이끌어줍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연합된 관계 안에서 믿음이 시작되고 부활이 완성됩니다. 주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본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역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만을 믿으며 땅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시간(aeon)과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3 Apr 2026 22:11: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channel>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