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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해운대감리교회</title>
		<link>http://hudmc.org</link>
		<description>사랑하고 축복합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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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교회소식 2026.10.25]]></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903]]></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교육부 교사 모집</strong>
2027년 교육부(유치부, 아동부, 청소년부)를 섬겨주실 선생님들을 모집합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역의 자리에 성도님들의 많은 지원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문의 및 신청은 남누리 전도사(010-8305-0223)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제42회 부산동지방 찬양제</strong>
올해 찬양제는 장비 문제로 유튜브 송출이 없습니다. 매해 유튜브로 참여하시던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액자사진 이외에는 스냅사진이 없을 수 있으니 스냅사진은 각 교회 별로 챙겨달라고 합니다.

<strong>③ 2026 생태공감 세미나 |</strong> 생태적 회심과 녹색 영성에 이르는 길
⋅10월20일(화) 오후7시 ‘생태적 영성’ 한석문 목사(해운대교회)
⋅10월27일(화) 오후7시 ‘생태적 돌봄’ 정민철 이사장(위드의료복지협동조합)
⋅11월03일(화) 오후7시 ‘생태적 목회’ 안중덕 목사(샘터교회)
⋅11월10일(화) 오후7시 ‘청년과 지역공동체’ 채상병 대표(부산온배움터)
⋅장소 : 샘터감리교회(남구 조각공원로27번길 12, 2층 도서관 ☎051-611-3036)
⋅주최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주관 :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BNCC) 환경위원회/청년위원회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42주차 녹색 실천
⋅자전거를 이용합시다.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막 16:12)
⋅한 줄 기도 “지구를 살리는 일에 몸을일으켜 움직이게 하소서. 아멘.”
⋅자전거 이용을 늘려 온실 가스 배출을 줄입시다. 자동차 대신 걷기나 자전거를 이용합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3 Oct 2026 22:10: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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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21주 우리가 회복해야 할 형상]]></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902]]></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21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33:12-23</strong>
<strong>12</strong>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 즉 <strong>13</strong>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strong>14</strong>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strong>15</strong>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strong>16</strong>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strong>17</strong>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strong>18</strong>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strong>19</strong>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strong>20</strong>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strong>21</strong>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strong>22</strong>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strong>23</strong>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99
<strong>1</strong> 주께서 다스리시니 뭇백성은 | 떨리고
○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 흔들리도다
<strong>2</strong>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 위대해
○모든 민족보다 | 높으시도다
<strong>3</strong> 만백성이 그의 높고 두려운 | 이름을
○찬양하리니, 그분은 | 거룩하시다.
<strong>4</strong> 능력의 왕이여, 당신은 정의를 | 사랑해
○공의와 법을 견고하게 | 세우십니다
<strong>5</strong> 우리의 주 하나님을 찬양 | 하여라
○그분의 거룩하신 발 등상 아래 | 엎드리어라
<strong>6</strong>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 높이고
○그의 거룩한 성산에서 | 예배하여라

◉ 영광이 | 성부와 ○ 성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 | 아-멘

<strong>서신 | 살전 1:1-10</strong>
<strong>1</strong>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strong>2</strong>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strong>3</strong>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strong>4</strong>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strong>5</strong>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strong>6</strong>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strong>7</strong>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strong>8</strong>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strong>9</strong>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strong>10</strong>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22:15-22절입니다.
<strong>15</strong>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strong>16</strong>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strong>17</strong>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strong>18</strong>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strong>19</strong>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strong>20</strong>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strong>21</strong>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strong>22</strong>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출 33:13절 묵상하십시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라는 간청에서 드러나는 모세의 마음의 열망은 무엇입니까?
② 마 22:15절 묵상하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예수께 보내어 던진 질문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마음에 숨겨진 열망은 무엇입니까?

③ 살전 1:6-7절 묵상하십시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를 본받은 자’가 됨으로서 나타난 선교적인 열매는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우리가 회복해야 할 형상</h2>
사막 교부들에 따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상하고 경외함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보는 눈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창조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관상적 영성에 서투를 뿐 아니라, 자기 존재의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서툴기 이를데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우선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까이 그리고 가장 높은 곳보다도 더 높이” 초월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비잔틴 헤지카스트들에 따르면 ‘마음 깊은 곳’이란 존재의 핵심 또는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참잠하여 계신 곳이고, 그 하나님과의 교감을 통해 사고(思考)가 형성되는 곳입니다. 죠지 A. 말로니/이봉우 역 ｢현대인의 영성｣(분도출판사) 65쪽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개념적 지식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개방하심으로 주어지는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을 ‘부정신학(theologie negative)’이라 하는데, 이 부정신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합니다. 하나님 은총의 빛이 없으면 인간 지성은 결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신학의 특징이 잘 드러난 성서의 기록 중 하나가 오늘 구약성서에 있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출 33:18</strong></p>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를 원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얼굴은 ’파님(פָּנִים)‘인데, 흥미롭게도 늘 복수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한 눈에 담을 수 없으며, 다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이’라는 의미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교감과 은총에 의해 당신 얼굴을 뵈옵는다 할지라도 그러나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으며 깊이 또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는 매우 답답하고 막연하게 시작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 출 33:12b-13</strong></p>
니싸의 그레고리오스는 이런 상태를 ‘하나님이 계시는 어둠의 신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존 메이엔도르프/박노양 옮김 ｢헤지카즘의 신학자 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정교회출판사) 53쪽. 니싸의 그레고리오스의 ‘어둠의 신비’에 대한 메이엔도르프의 해설
하나님은 마치 어둠처럼 그 자신의 ‘이해불가성’으로 인해 모든 것과 분리된 ‘결코 볼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고대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시 18:11). 그러나 이 어둠은 ‘찬란한 어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어둠속에 숨어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음의 깊음’ 속에서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찾아 나설 때, 은총의 빛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마침내 당신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셨다’는 고백에서 시(詩)를 끝내지 않고, “그 앞에선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짙은 구름이 밀리고 우박이 쏟아지며 불길이 뻗어났다”(시 18:12 공동번역)는 고백으로 계속해서 시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오늘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보는 모세의 모습은 아직 여전히 하나님을 ‘알 수 없어 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출 33:16)라며 재차 질문을 던집니다. 한편으로 보면 정말 애가 타는 모습인데, 또 한편으로는 참 구도자의 모습을 보는 감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그는 지금 한 자연인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들을 이끌어 가나안땅으로 가는 중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부여받은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더욱 애를 태우는 것이고, 하나님 현존을 자신과 히브리들 모두가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찬찬히 보면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한 가지씩 요청할 때마다 정말 최선을 다해 대답해주십니다. 모세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라”(출 33:13)고 하면, 하나님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라고 대답해주십니다. 모세가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5)라고 말하고,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33:16)라고 말하면, 하나님은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이 팽팽한 대화를 보면서 우리는 은둔자 테오판이 필로칼리아에서 한 말을 떠올립니다.

완전한 기도가 되게 하려면 이성의 기도가 마음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마음의 장소를 발견하며’ 이성을 마음으로 끌어내려 결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마음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한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행하는 기도가 아니라 전인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직접 통교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영의 기도입니다. 발라암의 카리톤/엄성옥 역 ｢현대인을 위한 필로칼리아｣(은성) 29쪽

지금까지 모세는 ‘이성’으로 하나님과 대화해 왔습니다. 그의 요청은 이성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집요했습니다. 모세의 이 집요한 요청은 그의 불신앙이거나 혹은 하나님을 못미더워하는 의심이나 회의(懷疑)가 아닌, 영적 진보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으로 일치하는’ 신앙으로 진보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모세와 같기를 바랍니다. ‘막연하게 아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진보하기 위해, 우리 지성과 마음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이 기도의 백미는 18절 이하에서 황홀하게 드러납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모세가 요구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출 33:19</strong></p>
여기에서의 모든 방점은 여호와께 찍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거룩성과 속성을 드러내시고,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풀고, 여호와께서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 출 33:20-23</strong></p>
그들은 이미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바로가 신처럼 지배하고 있던 애굽에 열 개의 재앙이 임하는 걸 봤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을 했고, 하나님께 계명을 받고, 언약을 체결하기도 했으며, 만나와 물을 주시는 은총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경험했어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렸어도, 반석에서 물이 터졌어도, 십계명이 쓰인 돌 판을 받았어도, 그리고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어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모든 사건을 일으키신 분, 이미 그 이전에 아름다운 우주와 자신을 창조하신 궁극적이고 절대적이신 하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보여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시기 전에 세심하게 모세의 안전을 위한 처방부터 하십니다. 먼저 “너는 반석 위에 서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반석(하추르, הַצּוּ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피난처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시는데,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웨사므티카 וְשַׂמְתִּיךָָ)’ 돌보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이 목격했던 기적을 넘어, 자신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눈으로 보고, 그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께서 지나가신 후의 반영(反影)을 보여주심으로서, 그를 보호하시는 방법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말씀을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출 34:29)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나아간 사람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새겨진 것입니다. 형상의 회복은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다 그분 형상이 우리 안에 새겨지는 것을 동방 교부들은 ‘신화(테오시스 θέωσις)’라고 설명했습니다. 모세는 이 영적 상승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더욱 더 깊은 교제에로 나아갈 수 있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에네르기아’ 즉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맛보고 도달할 수 있는 실제적 현실 안에서 살았으며, 하나님은 그를 친구로 삼아 대화를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모세와 결이 다른 사람들을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 마 22:15, 16</strong></p>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신앙의 사람이 영적상승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 때, 얼마나 흉물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지를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다가 이내 그 섬뜩한 속내를 숨기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혀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던 집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념적으로 반정부적이며 반로마적이었고, 헤롯 당원들은 친정부적이고 친로마적이면서, 그 대가로 이득을 누리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성향으로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에 있어서만큼은 이해를 모아가는 모습들이 섬뜩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마음에 감추고 있던 비장한 질문 하나를 꺼내놓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 마 22:17</strong></p>
그들의 질문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대 땅에서 로마 황제 가이사의 통치 아래 있다는 표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과연 옳은 겁니까?”이 질문이 예수께 덫인 이유는,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그들이 쳐놓은 함정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한다고 말하면 반로마적인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릴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 친로마적인 사람들과 로마 정부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릴 것이 분명했습니다. 성경은 이때의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예수님이 알고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 마 22:18</strong></p>
사람을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인 물음 뒤에 감춰진 살의와 사악함을 슬프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은 그들의 계산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옵니다(마 22:19). 예수님께서 그 동전을 손에 들고 물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 마 22:20</strong></p>
이 질문이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세금에 관해’ 물어온 것을 단숨에 ‘존재에 관한 물음’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형상’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에이콘(εἰκών)’입니다. 오늘날 ‘아이콘(icon)’이라는 말의 뿌리가 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들고 계신 데나리온 한 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 가이사(Caesar)의 형상이 찍혀 있었고, 그 둘레에는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존엄한 티베리우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그들은 당연히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마 22:21a)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논리는 명료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마 22:21b</strong></p>
표면적으로 보면 함정을 빠져나가려는 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22:21c</strong></p>
이 말씀 안에 잠시 머물러 보겠습니다. 동전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그 동전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누구에게 돌려드려야 하겠습니까? 성경의 첫 페이지가 이미 답을 말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이 말씀에서의 ‘형상’ 또한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인 칠십인역에서는 똑같이 ‘에이콘(εἰκών)’입니다.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에이콘이 찍혔듯,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에이콘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너 자신을, 네 존재 전체를 창조주께 돌려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동전 한 닢의 소유권을 따지러 왔다가, 자기 존재의 소유권을 묻는 물음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것이었음에도, 그 형상이 심하게 훼손되어버린 상태에서 예수님께 교묘히 위선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하면 참 흉물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稱義)’에 멈추지 말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악한 생각들에 맞서 싸우는 ‘수행(프락티코스 Praktikos)’을 통해 ‘내적 평정(아파테이아 apatheia)’ 혹은 순수한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며, 마음 안에서의 순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와 일치에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살전 1:6)라며 칭찬합니다. ‘본받는 자’는 그리스어로 ‘미메테스(μιμητής)’ 즉 어떤 이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모방자를 뜻합니다. ‘형상의 회복’은 바로 이 ‘본받음’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고(살전 1:6),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섰으며(살전 1:9),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살전 1:3)라는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가, 이번에는 다른 이들이 본받을 형상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 봅니다. 가이사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데나리온에 황제의 얼굴을 새기듯,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른 형상을 새기려 합니다. 돈의 형상, 권력의 형상, 성공의 형상을 새기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에 새겨야 할 형상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밖에는 없습니다. 가을이 깊어 추수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결실된 열매들이 농부에 의해 곡간에 들여지듯, 우리도 하나님 형상의 열매를 튼실하게 맺어서 하나님 나라 곡간에 들여지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하나님을 알려하는 열망은 사라지고 관습만 남아있지 않은가?

② 주를 본받는 자가 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7 Oct 2026 22:40: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10.18]]></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901]]></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교육부 교사 모집</strong>
2027년 교육부(유치부, 아동부, 청소년부)를 섬겨주실 선생님들을 모집합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역의 자리에 성도님들의 많은 지원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문의 및 신청은 남누리 전도사(010-8305-0223)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2026 생태공감 세미나 |</strong> 생태적 회심과 녹색 영성에 이르는 길
⋅10월20일(화) 오후7시 ‘생태적 영성’ 한석문 목사(해운대교회)
⋅10월27일(화) 오후7시 ‘생태적 돌봄’ 정민철 이사장(위드의료복지협동조합)
⋅11월03일(화) 오후7시 ‘생태적 목회’ 안중덕 목사(샘터교회)
⋅11월10일(화) 오후7시 ‘청년과 지역공동체’ 채상병 대표(부산온배움터)
⋅장소 : 샘터감리교회(남구 조각공원로27번길 12, 2층 도서관 ☎051-611-3036)
⋅주최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주관 :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BNCC) 환경위원회/청년위원회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41주차 녹색 실천
⋅개발로 파괴될 위험에 처한 국립공원에 방문해 봅시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2)
⋅한 줄 기도 “씨앗마다 종류대로 지으신 하나님, 우리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를 분별하는 지혜와 생명의 질서를 지키는 겸손을 주소서.“
⋅우리가 먹는 식용유, 간장, 가공식품 속에는 수입 유전자변형 콩과 옥수수가 표시 없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분표를 살피는 습관을 들이고 우리 땅에서 난 제철 농산물을 선택하며, 씨앗과 생명이 소수 기업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지켜지도록 관심을 가져 봅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6 Oct 2026 22:26: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20주 복음에 합당한 옷]]></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900]]></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20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32:1-14</strong>
<strong>1</strong>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strong>2</strong>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strong>3</strong>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strong>4</strong>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strong>5</strong>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strong>6</strong>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strong>7</strong>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strong>8</strong>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strong>9</strong>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strong>10</strong>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strong>11</strong>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strong>12</strong>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strong>13</strong>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strong>14</strong>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6
<strong>1</strong>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 선함과
○ 그 인자하심이 | 영원하시다
<strong>2</strong>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 말하며
○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선포 | 할 수 있으랴
<strong>3</strong> 정의를 지키는 | 자들과
○ 공의를 행하는 자는 | 복이 있도다
<strong>4</strong>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 은혜로
○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나를 | 기억하소서
<strong>5</strong> 내가 주께서 택하신 | 사람의
○ 형통함을 | 보게 하시며
<strong>6</strong> 주의 나라의 기쁨을 함께 | 나누어
○ 주의 유산을 자랑 | 하게 하소서

◉ 영광이 | 성부와 ○ 성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빌 4:1-9</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strong>2</strong>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strong>3</strong>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strong>4</strong>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strong>5</strong>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strong>6</strong>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strong>7</strong>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strong>8</strong>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strong>9</strong>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22:1-14절입니다.
<strong>1</strong>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strong>2</strong>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strong>3</strong>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strong>4</strong>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strong>5</strong>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strong>6</strong>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strong>7</strong>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strong>8</strong>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strong>9</strong>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strong>10</strong>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strong>11</strong>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strong>12</strong>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strong>13</strong>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strong>14</strong>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 묵상 | meditatio
① 마 22:14절 묵상하십시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② 출 32:1절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동기는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③ 빌 4:8절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말씀하는 성도가 입어야 할 예복은 어떤 것들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복음에 합당한 옷</h2>
조만식 선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이고 종교철학자인 다석(多夕) 유영모는 김교신(金敎臣)과 함석헌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16세에 믿음이 들어가 인격과 정신이 바로 선 후로 삶 속에서 예수를 산 정신과 힘으로 받아들인 그는 예수님을 단지 믿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예수를 이어 살려고 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 지는 삶을 살고자 했던 그는 동시대의 노동자 농민을 ‘오늘의 예수’라 하였고, 오늘의 예수인 ‘씨알()’이라 했습니다. 그는 신앙체험을 한 후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그 중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는 그의 오도송(悟道頌)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나는 실음 없고나, 인제부터 실음 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사 님이 나를 맡으셨네. 님이 나를 가지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거라곤 다버렸다 ... 새로 삶의 몸으로는 저 '말슴'을 모셔 입고,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가 나타나고, 모든 행동(行動), 선(線)을 그으니, 만유물질 늘어서 있다. 온 세상을 뒤져봐도 거죽에는 나 없으니. 위이무(位而無, 위치만 있고 존재가 없는 상태), 탈사아(脫私我 사사로운 자아에서 벗어남) 되어 반작! 빛. 요한 1장 4절. 님을 대한 낯으로요. 말슴體(본)한 빛이로다. 님 뵈옵잔 낯이오, 말슴 읽을 몸이라. 사랑하실 낯이오, 뜻을 받들 몸이라. 아멘. 박재순 ｢다석 유영모｣(홍성사) 285-289쪽

믿음에 들어간 다석은 욕심과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명예욕이나 일 욕심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 자기를 비워냄으로써 몸과 말씀과 우주가 하나로 통하게 되었고 빛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다석의 신앙체험은 거짓 자아가 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아로 해방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님이 나를 차지하셨다’는 고백도 어려울 뿐 아니라, ‘님의 말씀으로 옷 입고 그리스도의 생명(요 1:4)으로 사는 것’ 또한 영적 여정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묵상하다 보면, 성서 속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시름없는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던가 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 마 22:1</strong></p>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가 지난 두 주 동안 연속해서 살펴본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 그리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 21:33-46)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께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마 21:28) 했을 때, 처음에는 “싫소이다” 했지만, 그 후에 뉘우치고 갔던(마 21:29)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그렇듯이 세리들과 창녀들도 비록 처음에는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뉘우친 후에는 너희보다 더 하나님께 순종했으므로,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하신 말씀,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과 아들을 돌로 치고 죽인 자들로서, 자기들을 지목해 풍자하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 21:33-39)를 들은 후에도 여전히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예수를 붙잡아 죽이려 들던(마 21:45) 그들을 보며 주님은 오늘 복음서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마 22:2</strong></p>
끝내 회개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이 천국의 잔치자리에 초대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마지막으로 어떤 통첩(通牒)을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25:6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칫날을 모든 사람의 몸에서 ‘수의(壽衣)’를 벗기시는 날로,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날로, 자기 백성을 수치에서 해방시켜주시는 날로 묘사합니다. 사도 요한은 계 19:9절에서 역사의 완성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사람들이 운명처럼 걸치고 있던 ‘수의’가 벗겨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사람들의 눈물이 닦아지고, 수치가 사라집니다. 거기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불화하던 이들이 형제자매의 사랑을 회복하고, 사람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회복합니다. 바로 그 잔치자리에 그 나라의 임금이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초청하시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 마 22:3-6</strong></p>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오기를 싫어했고, 어떤 이들은 임금의 초대를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오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그들이 임금의 초대를 원치 않아 거절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았다’는 것은, 임금의 초청에 관심이 없어서 마음조차 쓰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임금의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는 행동까지 불사합니다. 분노한 임금은 결국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립니다(마 22:7). 임금의 독백에서 실망과 분노가 가득 배어나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 마 22:8</strong></p>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때에 그가 자기 종들에게 말한다(τότε λέγει τοῖς δούλοις αὐτοῦ). 혼인 잔치는 준비되어 있다(ὁ μὲν γάμος ἕτοιμός ἐστιν). 그러나 청함을 받은 자들은 합당하지 않았다(οἱ δὲ κεκλημένοι οὐκ ἦσαν ἄξιοι)”.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곳은 ‘멘(μὲν)’과 ‘데(δὲ)라는 대조 구문입니다. 본래 ‘멘(μέν)’은 ‘참으로, 진실로’를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후대로 가면서는, 앞의 문장을 단단히 세워 주면서 동시에 뒤에 따라오는 문장을 기대하게 하게 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장에서 ‘멘(μέν)’이 나오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그 다음은?” 하고 귀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데(δέ)’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흔한 접속사인데 ‘그러나’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 앞 문장과 뒷문장을 구별하는 새 국면을 열어 줍니다. 이 단어를 오늘 말씀에 적용해 보면, 한쪽에는 ‘혼인 잔치’가 마련되어 있고, 다른 쪽에는 ‘청함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데(δέ)’ 즉 ‘그러나’가 있습니다. 뭔가 불안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준배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청함 받은 사람들이 합당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당함(악시오스 ἄξιος)’은 ‘걸맞은’이라는 의미로,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악시온 ἄξιον) 열매를 맺고”(마 3:8)라고 할 때,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합당한 자(악시오스 ἄξιός)’를 찾아내어 거기 머물라(마 10:11) 하실 때 쓰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합당함’은 주로 ‘복음을 맞아들이는 태도’로 쓰이던 단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처음에 초청받은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초청받은 선민(選民)인 이스라엘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초청장은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청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초청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걸맞지 않은 이런 모습은 사실 그들에게 어제 오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히브리 자손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 끝까지 굳건히 서있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이 지연되자 그들은 아론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 출 32:1a</strong></p>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새로운 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때 그들이 요구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이란 다름 아닌 ‘눈에 보이는 신’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애굽 생활을 통해 그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우상들만 접해왔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미덥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새로이 각성시켜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4)고 그토록 간곡하게 당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내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달라며 아론에게 떼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b)는 그들의 그 믿음을 저버린 한 마디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니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가나안으로 초청하신 하나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초청에 얼마나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는지가 그 표현 하나에서 드러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자유를 팽개치고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우상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더 안타까운 건,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그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먼 훗날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잔치(마 26:29; 막 14:25; 눅 22:18)에 초청하셨을 때도, 처음에 초청받았던 사람들은 끝내 ‘자기를 위하여’ 초청을 거절하고 예수를 살해(殺害)하고 맙니다. 다시 복음서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보면 임금은 다시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 마 22:9-10</strong></p>
처음에는 몇몇 귀인들을 지정해서 정중하게 초대장을 보내 초청했던 임금이, 두 번째 사람들을 초청할 때는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초청하라고 합니다. 네거리 길이란 지방으로 통하는 길이 시작되는 광장입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 초청받았던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에 의하면 이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눅 14:21)입니다. 그들은 먼저 초청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혐오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로 인해 잔치자리가 채워졌고, 마침내 잔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 마 22:11-12</strong></p>
손님들을 보러 잔치자리에 들어온 임금이 그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봅니다. 임금은 그에게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묻습니다. 성경은 그가 아무 말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은 자신도 잘못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임금이 이미 잔치자리 입구에 손님들이 입을 예복을 준비해놓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학자들은 왕하 10:22절에서, 예후가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책으로 예복 맡은 자에게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한 것에 근거를 두고 추론(推論)한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리에 걸 맞는 예복을 갖추어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모두 예복을 입었음에도, 혼자 자기 옷을 고집했다는 것은, 그가 임금이 제시하는 잔치 참여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참여해도 잔치음식을 즐길 수 있다고 스스로 자만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비유에서의 잔치 예복이란 하나님 나라 잔치(마 26:29; 막 14:25; 눅 22:18)에 합당한 옷으로 회개의 옷이고, 믿음의 옷이고, 거듭남의 옷입니다. 그리고 우리 내면이 입어야 할 겸손함과 온유함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복으로 갈아입는다는 의미는 지금까지 입고 있던 ‘자아(自我)’의 옷을 벗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 옷 즉 회개와 믿음과 거듭남 그리고 겸손과 온유함의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예복을 갖춰 입은 사람만이 잔치의 중심에 설 수 있듯이, 믿음과 거듭남과 겸손함과 온유함의 옷을 입은 사람만이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당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 빌 4:1</strong></p>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읽어보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고 말하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고 당부합니다. 그렇게 흔들림 없이 ‘주 안에’ 굳게 서서 같은 마음을 품고, 항상 기뻐하는 이들에게 바울을 통해 주시는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빌 4:7</strong></p>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주신 예복을 갖추어 입고, 주 안에 굳게 선 그리스도인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주신 예복을 거절하고, 내 옷을 고집하며, 내 생각대로 살며 복음의 주변만 서성이는 사람일까요? 그렇게 산 사람들의 결말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 마 22:13</strong></p>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보십시오. 그리고 선택은 여러분이 하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마 22:14</strong></p>
우리 모두는 분명히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네거리 길’에서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잔치자리에 왔다는 사실에만 만족하면 안 됩니다. 초대받은 자로서의 예복을 갖추어 입어야 합니다. 스위스의 신학자로서 칼 바르트와 함께 변증신학 운동을 주도했던 에밀 브루너(Emil Brunner)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셨고, 인간은 듣고 이해하고 믿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참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알도록 만드셨고, ‘나’라는 인간 존재는 ‘너’라는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그리고 ‘말씀 안에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죠지 A. 말로니/이봉우역 ｢현대인의 영성-신비가의 숨｣(분도출판사) 108쪽

그랬기에 다석 유영모 선생님도 자신의 ‘새로 삶의 몸’에 대해 ‘말슴’을 모셔 입고 사는 존재라 했고, 요 1:4절의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한 말씀을 빛으로 여겨 모든 삶의 자리에서 ‘예수를 이어’ 살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경 곳곳에서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합니다(갈 3:27, 롬 13:14, 엡 4:24).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예수를 이어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 안에 굳게 선 사람’이 입어야 할 예복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초청에는 응했지만 여전히 내 옷을 고집하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고 주(主) 안에 견고하게 서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0 Oct 2026 21:42: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9주 광야로 이끄시는 하나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99]]></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9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20:1-4, 7-9, 12-20</strong>
<strong>1</strong>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strong>2</strong>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strong>3</strong>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strong>4</strong>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strong>7</strong>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strong>8</strong>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strong>9</strong>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strong>12</strong>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strong>13</strong> ○살인하지 말라 <strong>14</strong> ○간음하지 말라 <strong>15</strong> ○도둑질하지 말라 <strong>16</strong>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strong>17</strong>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strong>18</strong>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strong>19</strong>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strong>20</strong>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9
<strong>1</strong>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 | 하여서
○ 마음에 기쁨을 | 안겨 주시며
<strong>2</strong> 여호와의 계명은 순수 | 하여서
○ 사람의 눈을 | 밝혀 주신다
<strong>3</strong> 여호와의 말씀은 티 없이 | 맑아서
○ 영원토록 흔들리지 | 아니하오며
<strong>4</strong> 주의 법령은 | 참되어
○ 한결같이 | 의롭습니다.
<strong>5</strong> 주의 종이 그 교훈으로 깨우침을 | 받았고,
○ 교훈을 지킴으로, 상을 | 받았습니다.
<strong>6</strong> 나의 반석이시요 구속자이신 | 하나님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 들게 하소서

◉ 영광이 | 성부와 ○ 성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빌 3:4b-14</strong>
<strong>4</strong>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strong>5</strong>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strong>6</strong>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strong>7</strong>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strong>8</strong>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strong>9</strong>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strong>10</strong>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strong>11</strong>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strong>12</strong>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strong>13</strong>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strong>14</strong>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21:33-46절입니다.
<strong>33</strong>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strong>34</strong>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strong>35</strong>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strong>36</strong>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strong>37</strong>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strong>38</strong>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strong>39</strong>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strong>40</strong>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strong>41</strong>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strong>42</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strong>43</strong>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strong>44</strong>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strong>45</strong>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strong>46</strong>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출 20:3절 묵상하십시오. 하나님 외에 주로 많은 시간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② 마 21:38절 묵상하십시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소작인들로 묘사되는 예루살렘의 성직자들은 무슨 목적으로 예수를 죽였을까요?

③ 빌 3:5-8절 묵상하십시오. 5절과 6절에서의 바울에게 소중한 것과 7절과 8절에서의 바울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광야로 이끄시는 하나님</h2>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광야(廣野)는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손아귀에 놓인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물이 메마르고 황폐한 자연 환경은 항상 사람에게 적대적인 저주의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는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환경이 황폐했던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였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인간이 어떤 생산수단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생존의 희망도 가질 수 없었기에 그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수많은 은둔자들이 생겨났던 까닭도 그것이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까지 성전을 떠나 멀리 광야로 나간 까닭도 그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의 아들(le Fils de l’ Homme)은 40일 동안 악마의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간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스위스의 예배학자인 폰 알멘(JJ. von Allmen)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그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또 나중에 수많은 독수도승(獨修道僧)과 은수도승(隱修道僧)을 광야로 이끌어간 것은 세상으로부터 도피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가장 어렵고 힘든 그곳에서 하나님의 승리와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후 광야로 불러나신 것도(마 1:35; 눅 4:42; 5:16),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할 곳으로 가시기 위한 것이었다. J.-J. von Allmen, dans le vocabulaire biblique,, Delachaux et Niestlé, Neuchâtel, 1954, p.203 - 존 메이엔도르프/박노양 옮김 ｢헤지카즘의 신학자 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정교회출판사) 13-14쪽에서 재인용</p>
그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처음 창조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자라게 하셨던’(창 2:9)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는 황폐한 광야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어 내신 후 하신 말씀 또한 매우 새롭게 다가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출 20:2</strong></p>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문명과 풍부한 식량이 있는 이집트가 아닌 황폐하고 삭막한 광야에서 히브리들이 하나님을 새로이 경험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새 창조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우선 당신의 이름부터 소개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라!”, “아니 예호와!, הוהי ינא” 이 소개는 구약성경의 신학적 수사학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시는데,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존재라고 하신 것에서는 그들을 이끌어내신 목적이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당신 이름을 ‘여호와(הוהי)’ 즉 히브리어 문법의 미래형으로 “나는 존재할 것이다”라고 소개하신 것에서는,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까지 앞으로 너희가 걸어가는 여정과, 새로이 만들어갈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함께 존재하실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막 교부들에게 ‘영적 인식’이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앎)’이었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영적 인식의 단계를 자연학과 신학으로 구분했습니다. ‘창조된 피조물에 대한 인식’인 ‘자연학’을 통해 ‘창조되지 않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허성석 역주.해제 ｢그노스티코스｣(분도출판사) 6쪽

왜 그런 인식의 단계까지 밟아가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야 할까요? 우리 존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어졌기 때문이고, 그분이 나와 내 삶속에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고, 그분을 앎으로서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김교신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하고, 이상적 생활과 이상사회를 건설하는데 유익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는 신앙적인 측면보다 이상적인 인간과 사회를 추구하는 유교적 신념으로 기독교를 선택했습니다. 산상수훈이 공자의 가르침보다 훌륭한 도덕이라고 느끼면서, 마치 쇳가루가 자석에 이끌리듯이 기독교 신앙에 매료되었고,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일점일획 온전히 실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유교에서 말하는 어떤 인간의 가능성, 선함, 작은 용기조차도 자신에게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자기 수양으로써 완전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전적으로 불가능함을 알게 되면서부터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롬 7:24)라는 바울의 외침은 어느덧 김교신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 속에서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는 십자가 신앙을 붙들게 됩니다. 전인수 ｢김교신 평전-세속 성자, 일상에서 영원을 일구다｣(서로북스) 47-49쪽

오늘 구약성경 바로 직전의 상황을 보면,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크나큰 나팔소리, 그리고 옹기 가마 같은 연기와 불 가운데서 히브리들 가운데 강림하신 여호와께서(출 19:16-18),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는데, 놀랍게도 그 율법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언약(言約, covenant)의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처음에 모세가 율법을 히브리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3) 라고 한 소리로 화답합니다. 이 때 모세는 히브리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서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출 24:5), 피를 가져다가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게 합니다(출 24:6). 그리고 언약서를 가져다 백성에게 낭독하자 그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하고 다시 한 번 화답합니다(출 24:7). 모세가 이번에는 그 피를 백성을 향해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하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 즉 모세오경의 계약법전과 신명기법전, 정결법전, 제사법전 등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율법의 영원한 종지(宗旨) 즉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라고 당신을 소개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출 20:3</strong></p>
십계명은 본래 ‘열 마디 말씀’이라고 불렸듯이 아주 짧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단언적(斷言的)이면서 꼭 필요한 말씀들로만 압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되는 계명이 바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 첫 번째 계명은 이후에 선포되는 나머지 아홉 계명의 초석이 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십계명이 보증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기초가 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 수사비평학자인 제임스 마일렌버그(James Muilenburg)는 “제1 계명은 제2- 제10 계명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계명이며, 모세오경의 핵심이고 구약성경 전체의 중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중요한 계명을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시작하시는 것일까요? 심지어 두 번째 계명에서는 당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이라고 까지 묘사하십니다. 이런 표현은 다른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라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실제로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 말씀이 있고 난 이후에도 여호와는 600-700년 동안 줄곧 이스라엘의 부족신으로서, 고대근동의 다곤이나 체모스 같은 신들과 싸우는 신이었습니다. BC 8-6 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는 히브리들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역사와 인류를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임이 선포되기 시작합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이 특별한 시기를 ‘차축시대(Achsenzeit/The Axial Age)’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김용규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IVP) 818쪽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수레바퀴가 움직인 시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창조주를 알고 그분께로 돌아가,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안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신들의 인도를 받으면 사람다울 수 없는 것일까요?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다른 신들’을 지칭하실 때, ‘신(神)’이라 하시지 않고 ‘우상’이라고 부르신 사실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 출 20:4</strong></p>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질투하신 대상은 ‘신(神)’이 아닌 ‘우상(偶像)’이었습니다. 우상이란 신 아닌 것을 신처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고대 근동 안에서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섬긴 건, 우상 자체가 아닌 ‘우상이 주는 어떤 대가(代價)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 안에서 보면 풍요(豊饒)와 다산(多産)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을 창조하시고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떠나 물질을 탐(貪)한 나머지, 물질의 세계에 예속되어 산 것이고, 그러면서 서서히 하나님 형상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도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아닌, 선악과를 탐하다가 타락해버린 아담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숨결이 없는 다른 동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초라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은 질투하실 뿐 아니라 보복하시는 하나님(나훔 1:2)이라고 까지 경고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에 따르면 그렇게 사는 것은 ‘그 분의 숭고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므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연약함’ 조철수 ｢유대교와 예수｣(길) 64쪽
입니다. 사람이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질 때’(마 5:48)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인데, 당신의 자녀들이 ‘보이는 우상’인 돈과 권력에 예속되어 살아가는 것을 보실 때, 아버지께서 어떻게 질투하지 않으실 수 있겠으며, 어떻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예루살렘의 고위 성직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포도원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 마 21:33-39</strong></p>
이 비유는 사 5:1-7절의 ‘포도원의 노래’를 예수님께서 재인용하신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인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열매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들을 죽이거나 때리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시자 그마저 성 밖으로 끌고가 죽일 것에 대한 풍자(諷刺)입니다. 왜 주님은 이 비유가 풍자하는 대상인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 성직자들을 향해, 이토록 듣기에도 거북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요? 그들이 율법학자이고 성직자들임에도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신 첫 계명을 슬며시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시편 118:22-23절을 들려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마 21:42</strong></p>
시편 118편의 시인이 고백했고, 예수님께서 인용하셨고, 훗날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재인용했던(행 4:10-11) 이 말씀은 구약시대로 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속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The Rejected Stone)’은 쓸모없다고 여겨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모퉁이의 머릿돌(The Cornerstone)’은 ‘으뜸돌’로서 두 벽이 만나는 모퉁이에서 양쪽을 이어주고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매우 중요한 돌입니다. 돈과 권력의 우상에 사로잡힌 종교 지도자들은 생명의 주님을 쓸모 없다며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머릿돌이 되게 하셔서 우리들의 생명을 지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의 머릿돌이신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렇게 판결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 마 21:43</strong></p>
선민(選民)이고, 존경 받는 성직자였음에도 하나님을 버리고 돈과 권력의 우상을 탐한 결과로 불행하고 비참한 판결을 받고 만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 등장하는 바울도 그들과 같은 신분과 신앙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빌 3:5-6</strong></p>
여기까지는 자신의 신분과 신앙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외적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외적 조건은 돈과 권력으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나’ 라고 말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빌 3:7-9</strong></p>
그는 훌륭한 외적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은 후 자기가 자랑하던 외적 조건을 배설물로 여겨 버립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배설물(스퀴발라 σκύβαλα)’은 개에게 던지는 쓰레기를 뜻하는 거친 표현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탐하던 것들을 그가 쓰레기로 여겨 던져 버린 이유는 생명의 머릿돌이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고도 ‘나는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목말라 하며,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 되기 위해 달려간다’(빌 3:12)는 바울에게서 우리는 ‘광야의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황폐한 광야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들을 섬기지 않는 생명의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끌어내신 것은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광야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광야는 내 마음 속의 우상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곳입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하나님 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마음을 채우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0 Oct 2026 21:34: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10.11]]></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98]]></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오늘 오후예배 |</strong> 몸으로 드리는 예배
지하: 김현석장로, 김유상집사
1층: 교회학교 교사들
2-3층: 남선교회,여선교회
4층: 남선교회,청장년회
5층: 청년부,청소년부

<strong>② 2026 생태공감 세미나 |</strong> 생태적 회심과 녹색 영성에 이르는 길
⋅10월20일(화) 오후7시 ‘생태적 영성’ 한석문 목사(해운대교회)
⋅10월27일(화) 오후7시 ‘생태적 돌봄’ 정민철 이사장(위드의료복지협동조합)
⋅11월03일(화) 오후7시 ‘생태적 목회’ 안중덕 목사(샘터교회)
⋅11월10일(화) 오후7시 ‘청년과 지역공동체’ 채상병 대표(부산온배움터)
⋅장소 : 샘터감리교회(남구 조각공원로27번길 12, 2층 도서관 ☎051-611-3036)
⋅주최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주관 :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BNCC) 환경위원회/청년위원회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40주차 녹색 실천
⋅GMO식품에 대해 알아봅시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2)
⋅한 줄 기도 “씨앗마다 종류대로 지으신 하나님, 우리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를 분별하는 지혜와 생명의 질서를 지키는 겸손을 주소서.“
⋅우리가 먹는 식용유, 간장, 가공식품 속에는 수입 유전자변형 콩과 옥수수가 표시 없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분표를 살피는 습관을 들이고 우리 땅에서 난 제철 농산물을 선택하며, 씨앗과 생명이 소수 기업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지켜지도록 관심을 가져 봅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0 Oct 2026 21:12: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10.4]]></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95]]></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세계성찬주일</strong>
세계성찬주일은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위원회가 50년간의 긴 신학적 노력과 협의의 결과로 세계 교회의 표준이 되는 성만찬 예식서로서 리마 예식서 (BEM | 세례 Baptism, 성찬 Eucharist and 사역 Ministry)이라는 문서로 발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찬례는 이 리마 예식서와 존 웨슬리께서 1784년 북미감리교도들을 위해 만든 ‘감리교 주일성찬예배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strong>② 오늘 오후예배 |</strong> 2026 종교개혁주일 세미나
⋅주제 : 복음을 노래한 신학자 마르틴 루터
⋅강사 : 오선지 교수(목원대학교 신학대학)

<strong>③ 다음 주 오후예배</strong>
몸으로 드리는 예배로 드립니다.

<strong>④ 제42회 부산동지방 찬양제</strong>
⋅10월25일(주일) 오후2시30분(정관 온누리교회)
⋅찬양대원 외에 교우들의 많은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들 환영합니다.
⋅미자립교회와 교회학교 지원을 위해 ‘광고’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trong>⓹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9주차 녹색 실천
⋅반려견에게 식물성 사료를제공합시다.
⋅의인은 집짐승의 생명도 돌보아 주지만,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해도 잔인하다.(잠 12:10)
⋅한 줄 기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물을 사랑으로 돌보며,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게 하소서.”
⋅반려동물의 먹거리도 창조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려견의 건강을 살피며 식물성 원료의 사료와 간식을 선택해 보고,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생명과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봅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2 Oct 2026 22:19: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8주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94]]></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8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17:1-7</strong>
<strong>1</strong>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strong>2</strong>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strong>3</strong>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strong>4</strong>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strong>5</strong>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가라 <strong>6</strong>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strong>7</strong>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78
<strong>1</strong> 내 백성아, 나의 가르침을 | 들어라
○ 내 입의 말에 귀를 | 기울이거라
<strong>2</strong>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 말하며
○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 드러내리라
<strong>3</strong> 이는 우리가 들어서 | 아는 바
○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 전해준 바라
<strong>4</strong> 여호와의 영예와 능력과 위대한 | 일들을
○ 우리가 그들의 자손에게 | 전해주리라
<strong>5</strong> 바다를 갈라 그들을 건네 | 주셨고
○ 바닷물을 강둑처럼 | 서게 하셨다
<strong>6</strong>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 | 빛으로
○ 그들을 밤낮으로 | 인도하셨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빌 2:1-13</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strong>2</strong>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strong>3</strong>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strong>4</strong>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strong>5</strong>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strong>6</strong>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strong>7</strong>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strong>8</strong>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strong>9</strong>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strong>10</strong>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strong>11</strong>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strong>12</strong>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strong>13</strong>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21:23-32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3</strong>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strong>24</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strong>25</strong>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strong>26</strong>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strong>27</strong>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strong>28</strong>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strong>29</strong>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strong>30</strong>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strong>31</strong>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strong>32</strong>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21:28-31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② 출 17:7절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를 시험한 물음을 보며, 그들의 불평과 원망의 궁극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여겨집니까?

③ 빌 2:8절 묵상하십시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과도 구별되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h2>
해변을 달구던 폭염이 조금은 꺾인 가운데 추석 연휴도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명절 때마다 찾아오는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 품 같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추억들은 지나온 어리고 젊은 날들의 내 삶을 소환해 냅니다. 김미옥 시인은 ‘어머니의 마당’에서 이맘 때 즈음이면 찾아드는 생각을 고백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꽃 좋아하면
눈물이 많다더라
그러면서도
봉숭아 함박꽃 난초 접시꽃
흐드러지게 심으셨던
어머니
볕 좋은 날이면
콩대 꺾어 말리시고
붉은 고추 따다 널어두고
풀기 빳빳한 햇살 아래
가을 대추도 가득 널어 말리시며
잡풀 하나 없이 다듬느라
저문 날을 보내시던
고향집 마당이 생각난다</p>
처녀 땐 몰랐겠지요. 자기도 나이 들고 자식들 낳아 기르다 보니 어머니가 흘렸던 눈물들이 가슴에서 저미고, 콩대 꺾어 말리고, 붉은 고추 널어두고 잡풀하나 없이 다듬느라 날 저물도록 일만 하시던 어머니의 마당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대개 젊은 마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모님의 수고를 떠올리며 고마워하는 마음보다는 짜증부리거나 불평을 늘어놓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 때는 철이 없어 그랬지 싶지만, 사실은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한몫 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철없음과 자기중심성은 우리의 젊은 날만 소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서일과에 등장하는 히브리들이나 복음서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 역시 자기중심성에 견고하게 매여 있음으로 인해 성서 곳곳에서 흑역사가 소환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성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대제사장과 원로들이 문제를 삼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 마 21:23</strong></p>
원문에는 ‘이런 일’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모든 일, 즉 성전 정화 사건과, 병 고침,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들을 그들이 문제 삼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는 예수님의 그런 행동이 자기들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도 질문으로 응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 마 21:25a</strong></p>
그들은 서로 의논합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마 21:25b-26)라며 경우의 수를 계산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세속에 물들고 차가워진 가슴에 ‘요한의 세례’라든지, 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불편하고 진부한 이야기이고, 그러다 보니 권력의 손익을 계산하기에만 바쁩니다. ‘가슴’은 굳었고 ‘계산’만 남았습니다. 성직자임에도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 그리고 ‘천국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를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 마 21:28-29</strong></p>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 가겠나이다”라고 말은 잘했지만, 그러나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맏아들의 모습이 꼭 너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 가겠나이다”라고 말은 잘했지만, 그러나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맏아들의 모습이 꼭 너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알아들었다면 듣기 거북스러웠을 텐데,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비유를 이어가십니다. 맏아들에게 실망한 아버지가 이번에는 둘째 아들을 찾아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이때 둘째 아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 마 21:30</strong></p>
이 장면을 헬라어 어원을 통해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마태가 여기서 사용한 ‘뉘우치고’라는 단어는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마음 전체가 단호하게 돌아서는 회심’ 즉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는 결이 사뭇 다릅니다.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의 의미는 ‘마음이 쓰이다’에 가깝습니다. 거창한 회심이 아니라, 무언가 마음에 걸려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그런 뉘우침입니다. 놀랍게도 마태는 이 단어를 한 번 더 씁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뒤 “뉘우쳐”(마 27:3) 은전을 도로 가져갈 때입니다. 같은 뉘우침인데 한 사람은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들어갔고, 한 사람은 뉘우치고 자기 길로 갔습니다. 둘 다 단호하게 회심하지는 못한 상태로, 그저 마음 불편해만 하다가 뉘우친 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옳은 쪽으로 결단하고 포도원으로 갔고, 한 사람은 그른 쪽으로 결단하고 목을 매고 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뉘우침 후에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느냐입니다.

젊은시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확신하면서도 좀처럼 진리를 향해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굴복하는 것이 정욕에 굴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 쪽으로 마음이 끌리면서도, 옛 의지가 그를 유혹하고 결박하며 ‘정말 우리를 버릴 셈이냐’고 속삭일 때마다, 그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터무니 없이 미루며 옛 의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최예자 옮김 ｢현대인을 위한 어거스틴의 고백록｣(묵상하는 사람들) 203쪽

가려 하지만, 가지 못하는 마음, 한 사람 안에서 옛 의지와 새 의지가 첨예하게 다투던 그 지점이 오늘 비유에서의 ‘싫소이다’와 ‘뉘우치고’의 분기점입니다. 역시 같은 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갈등하고 있을 때, 뜻밖에 이웃집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가 연이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Pick it up and read), 어서 읽어라(Pick it up and read)”.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이 롬 13: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구절을 마저 읽기도 전에 빛이 그의 마음 속으로 밀려들었고, 의심의 어두운 그림자는 깨끗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위의 책 220쪽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게 무엇일까요? 자기의 길을 가다가도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 뉘우치고 다시 포도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헤아려 주께서 가라하시는 곳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피를 쏟으신 예수님 쪽으로 우리 삶의 방향을 돌리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사람이란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라고 대답 잘한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싫소이다” 하였다가 뉘우치고 돌아선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마 21:31b</strong></p>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근거가 이어지는 말씀에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 마 21:32</strong></p>
여기서 요한이 ‘의의 도(ἐν ὁδῷ δικαιοσύνης)’로 왔다는 건, 회개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돌이킬 수 있는 길을 세리와 창녀 뿐 아니라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도 동일하게 일러주었다는 말씀입니다(마 3:1-12; 막 1:1-8; 눅 3:1-9, 15-17; 요 1:19-23). 그런데 세리와 창녀는 믿고 뉘우쳤지만, 너희는 믿지도 뉘우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란, 회개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회개하고 돌아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리와 창녀가 처음부터 의로웠던 건 아닙니다. 그들도 처음은 둘째 아들처럼 “싫소이다”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메시지에 마음이 걸렸고, 그 걸림을 외면하지 않고 돌아섰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맏아들을 자처한 이들은, 평생 “예”라고 말하면서도 단 한 번도 마음을 다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구약성경에서 보았듯이 출애굽해서 신 광야로 나온 지 둘째 달 십오일 되던 때, 먹을거리가 떨어진 히브리들은 모세와 아론을 찾아가서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한다”(출 16:3)라며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비참했던 노예생활을 망각하고, 오히려 노예 시절을 미화하고 이상화하며 자신들이 얻은 자유를 무색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성경에 보면 그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 출 17:1, 2</strong></p>
르비딤이라는 곳은 신 광야에서 서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와디 페이란(Wadi Feiran)’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와디 페이란’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로 평소에는 물이 넉넉했던 곳인데, 이때는 가뭄으로 말라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아시스인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는지라” 극심한 목마름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힘들기는 모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모세를 찾아가 다툼을 벌이고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며 요구합니다. 사람이 변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들을 보며 알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는 ‘불멸의 다이아몬드’에서 히브리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런 현상을 ‘중독(中毒)’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을 하든 아니하든 간에, 우리는 모두 기존 질서와 과거를 사랑하며 심지어 그것들에 중독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김준우 옮김 ｢불멸의 다이아몬드｣(한국기독교연구소) 13쪽

이 중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과거를 고집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며 사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들의 불평이 그저 단순한 불평이 아닌 ‘불신앙’이었고, 그들의 불신앙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므리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다음 말씀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 출 17:7</strong></p>
목마름을 호소하는 건 죄가 아닙니다.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원망에 유독 무겁게 반응하십니다. 그 까닭이 이 사건에 붙은 두 이름에 새겨져 있습니다. 모세는 그곳을 ‘맛사(מַסָּה)’와 ‘므리바(מְרִיבָה)’라 불렀습니다. 맛사는 ‘시험함’, 므리바는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들의 목마름은 단순한 갈증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출 17:7)를 따지는 시험이자 다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갈증이 신앙의 물음으로 열릴 수도 있었던 그 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쪽이 아니라 ‘시험’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과거와 기존 질서에 중독되어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미래를 불신앙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그 은혜를 궁극적으로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해져 가고, 나의 내면이 거칠고 사나워져 가는 것은 내가 속한 환경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사실은 내 중심에 내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 빌 2:3 공동번역</strong></p>
‘무슨 일에나’ 라고 했습니다. 가정에서의 일이나 직장의 일이나 혹은 교회의 일이나 일의 동기가 야심이나 허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자태임을 바울은 힘주어 말씀합니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아와 부모님 앞에 설 때, 부모님이 느끼시는 여러분의 얼굴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배여 있습니다. 부모님께 어떤 얼굴을 보여드렸습니까?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이 배인 얼굴입니까? 겸손과 삶의 보람이 배여 있는 얼굴입니까? 그간의 삶이 배인 내 얼굴이 예수님을 닮은 얼굴이 되려면 예수님의 어떤 얼굴이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 2:8b</strong></p>
신앙인이 도달해야 할 영적 성숙의 목표가 어느 지점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자기권력 지키자고 타인을 공격한 예루살렘 종교인들과 잠시도 인내하지 못하고 원망을 쏟아냈던 히브리들은, 우리가 닮아야 할 표상이 아닙니다. 추석에 고향에 돌아와 그런 사람들을 닮은 얼굴을 부모님께 보여드린다면 큰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녹록치 않은 세상에서 살다가 고향에 와 부모님을 뵙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 중에서도 예수님 닮은 겸손함과 온유함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인다운 품격이 온 자태에 배여 있는 그대로 부모님을 뵙는다면 그것이 가장 큰 효도이겠습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이기적이고 완고한 마음으로 야망에 허영에 젖어있지 않은가?

②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얼굴을 부모님께 보여드렸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27 Sep 2026 17:30: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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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7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답게]]></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93]]></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7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16:2-15</strong>
<strong>2</strong>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strong>3</strong>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strong>4</strong>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strong>5</strong>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strong>6</strong>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strong>7</strong>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strong>8</strong>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strong>9</strong>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strong>10</strong>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strong>11</strong>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strong>12</strong>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strong>13</strong>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strong>14</strong>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strong>15</strong>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5
<strong>1</strong>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 불러라
○ 그 장하신 일들을 만민에게 | 알게 하여라
<strong>2</strong> 그분께 노래불러라, 수금 타며 노래 | 불러라
○ 놀라운 그 일들을 | 말할지어다
<strong>3</strong>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 | 하여라
○ 여호와를 찾는 마음에 | 기쁨 있어라.
<strong>4</strong> 여호와를 찾아라, 그의 힘을 | 빌려라
○ 그의 얼굴을 항상 | 구할지어다
<strong>5</strong>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 | 하여라
○ 그 입으로 내리신 판단을 | 명심하여라
<strong>6</strong> 그분이 바로 여호와 우리 | 하나님
○ 그의 판단이 온 | 땅에 있도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빌 1:21-30</strong>
<strong>21</strong>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strong>22</strong>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strong>23</strong>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strong>24</strong>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strong>25</strong>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strong>26</strong>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strong>27</strong>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strong>28</strong>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strong>29</strong>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30</strong>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20:1-16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strong>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strong>2</strong>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strong>3</strong>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strong>4</strong>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strong>5</strong>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strong>6</strong>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strong>7</strong>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strong>8</strong>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strong>9</strong> 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strong>10</strong>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strong>11</strong>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strong>12</strong>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strong>13</strong>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strong>14</strong>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strong>15</strong>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strong>16</strong>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출 16:4절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나를 ‘일용할 만큼’만, ‘날마다’ 거두게 하신 데에는 어떤 훈련의 뜻이 담겨 있습니까?

② 마 20:13-15절 묵상하십시오. 주인이 원망하는 품꾼을 “친구여”라 부른 까닭, 그리고 “네 눈이 악하냐”는 물음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③ 빌 1:21, 29절 묵상하십시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하며, 나아가 고난까지도 은혜로 받는 사람의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그리스도의 복음을‘받은’사람답게</h2>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길이고, 그 방법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모상(模像)대로 사람을 지으셨기에(창 1:26).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깨어진 우리 내면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원리론’에서 사람은 첫 창조 때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지만, 그러나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 형상은 유보되어 있기에, 모상의 품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교부학회 ｢교부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분도출판사) 61쪽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구약성경을 통해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을 출애굽시키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시면서, 먼저 유월절이 속한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쉬 호다쉼 רֹאשׁ חֳדָשִׁים)’로 삼게 하심으로써 새로운 시간 개념을 갖도록 하시고, 매 해 유월절마다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유월절(페사흐 פֶּסַח)’ 식사를 나누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사를 ‘글자와 지식’을 넘어 ‘몸으로’ 기억하며 선민(選民)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통과하는 중에 이집트 군대를 완전히 궤멸시키시고, 히브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살아남게 하셨습니다(출 14:27-28). 이것은 이집트 신들에 대한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였고, 이집트의 강한 군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들이 홍해에서 ‘본’ 그 밤은 신비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가깝게 경험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히브리들은 보았기에 경외했고, 그럼에도 다 볼 수는 없었기에 더욱 경외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구약성경은 그 경외심이 어디서 걸려 넘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출애굽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서서히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그들이 지금껏 살아온 이집트의 삶과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고대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의 넓은 경작지들이 있어서 농산물을 지중해 유역의 나라들에 팔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록 소수민족이긴 했지만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따라 광야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양식, 물, 잠자리 등 일상 전체가 막막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 출 16:3</strong></p>
무서운 말입니다. 비참하게 종살이하던 애굽을 ‘고기 가마 곁’으로 미화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해방’을 ‘고기보다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상황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횡단하던 광야는 신 광야, 수르 광야, 혹은 미디안 광야라고 불렸습니다. 전체적으로 시나이 반도라고 하는 이 광야를 횡단하는 일은 그 누구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광야를 무대로 유목생활 하던 부족들도, 한낮의 태양열도, 밤이면 찾아오는 추위도 그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협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출발부터 원망만 하다가는 이 광야에서 다 죽고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 출 16:4</strong></p>
여기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식을 ‘비같이’ 내리시는데, 백성들은 ‘일용할 만큼만’ 거두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셈’을 멈추는 훈련을 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사방에 ‘쌓인’ 만나를 ‘셈’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일용할 만큼만’ 거두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훈련이기도 하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떨까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며 매일매일 하늘을 바라보는 기도인지, 아니면 쌓을 곳이 없도록 더 쌓아지기를 구하며 그것의 성취여부에 따라 불평과 감사가 교차되는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 출 16:13-15a</strong></p>
아침에 보니까 진 둘레에 이슬이 맺혀 있었는데, 그 이슬이 마르고 나니까 지면 가득 작고 둥근 서리 같은 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 서로가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게 무엇이냐”라고 물은 그 물음이 바로 만나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만(מָן)'은 ‘무엇’이라는 뜻입니다. 만나는 요즘에도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에서 발견되는데, 그곳 사람들은 지금도 그걸 ‘만’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출 16:15b</strong></p>
만약 히브리들이 광야에서 40년을 한결같이 아침마다 내려주시는 만나를 거두며, 만나에 담긴 하나님의 은총을 가슴 가득 느꼈더라면 그들의 광야 생활은 하루하루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는 보면서도 그것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끝도 없이 반복되는 불평과 원망들로 삶을 채우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만 시험에 불합격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명을 제외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맙니다. 어리석어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도 우리는 은혜가 가득해야 할 저녁을 은혜가 아닌 셈으로 계산하며, 그 결과로 불평 가득한 저녁을 맞이하고 마는 사람들을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 마 20:8-10</strong></p>
해 저문 일터에서 주인이 품삯을 나누어주는데, 품삯을 나누어주는 기준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대개는 먼저 와서 일한 사람부터 품삯을 주는데, 주인은 맨 나중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품삯을 보니까, 주인은 늦게 온 품꾼들에게 매우 후하게 품삯을 주는 겁니다. 그냥 후한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사람들과,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일당을 계산해서 주는 겁니다. 당연히 아침부터 일했던 사람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 마 20:12</strong></p>
정확한 계산입니다. 이들의 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틀린 것이 있습니다. 은혜의 눈으로 보아야 할 장면을 계산의 눈으로 보고 만 것입니다. 계산으로 담을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 든 것이 틀린 것입니다. 주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 마 20:13</strong></p>
먼저 한 가지 표현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주인은 원망하는 품꾼을 ‘친구여’라고 부릅니다. 그리스어로 ‘헤타이로스(ἑταῖρος)’인데, 흥미롭게도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이 호칭을 늘 관계가 어긋나는 순간에 사용하셨습니다. 잔치 자리에 예복 없이 들어온 손님에게(마 22:12), 그리고 당신을 배신하러 온 가룟 유다에게(마 26:47-49) 주님께서는 “친구여”(마 26:50)라고 부르셨습니다. 다정한 부르심 같지만 사실은 슬픈 호칭입니다. 그 슬픔의 이유가 이어지는 말씀에 묻어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 마 20:14-15a</strong></p>
여기서 주님은 ‘내 뜻’이란 표현을 쓰십니다. 이 주님의 뜻을 모르거나 외면하면 우리는 그만 주님께 슬픈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뜻 안에 복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식은 ‘노력한 만큼 받는 사회’가 정의롭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정당한 상식을 넘어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셈법대로 갚으신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온전한 삯을 받겠습니까? 광야에서 원망만 일삼던 자들에게도, 오후 다섯 시에야 겨우 부름받은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차별 없이 일용할 만나를 주시고, 동등하게 온전한 한 데나리온을 주십니다. 셈으로는 손해이지만, 복음으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상식이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것, 그것이 복음이고 은혜입니다. 주인이 묻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5b</strong></p>
이 주인의 말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스스로가 ‘아침부터 일 한 품꾼’으로 여겨지면, 주인의 처사가 악하고 부당하게 느껴질 것이고, 스스로가 ‘저녁부터 일 한 품꾼’으로 여겨지면, 주인의 배려가 은혜와 감사로 다가올 것입니다. 다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녁에는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셨던 사람들은(출 16:8a), ‘여호와를 향하여’(출 16:8b) 끝도 없이 불평을 쉬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출 16:2,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모세 사이에 놀랍게도 아무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만큼의 만나를 거두게 하시고, 원망을 일삼던 자들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만큼의 만나를 거두게 하십니다(출 16:4). 하나님의 상식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상식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복음서의 결론에서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 20:16 공동번역</strong></p>
그리스도인이란 이 말씀에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상식은 확실하게 우리 상식과 다르며, 천국은 우리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상식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주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원망이나 일삼던 광야의 이스라엘 같은 사람들이고, 저녁 무렵 가까스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고 주님의 은총 때문에 삯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고,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내가 모세라도 된 듯이 행동하고, 아침부터 포도밭에 나와 수고한 내 능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나의 그 어떤 지혜도 헌신도 감히 주님께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총만 있을 뿐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빌 1:21</strong></p>
바울에게는 삶과 죽음 사이에 셈이 없었습니다. 살면 그리스도를 섬겨서 좋고,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 좋습니다. 어느 쪽도 손해가 아닙니다. 셈이 앞서는 사람에게 죽음은 모든 것을 잃는 손실이지만, 은혜가 먼저인 사람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며(롬 14:8),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조차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 빌 1:27</strong></p>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더 선명하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받은 사람다운” 이 표현 안에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받은 사람’ 답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받은 사람’ 답게 생활하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빌 1:29</strong></p>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은혜인 것은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까지도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알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 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은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여정이고,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서론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신 모상(模像)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당신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그 길을 그리스도 안에 마련해 두셨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소망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불평을 입에 달고 광야 길을 걸었던 저들과 같고, 지나간 헌신을 내세워 원망하는 품꾼들인 지도 모릅니다. 영성생활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여정인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구속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 상식이 주님과 같아질 때만 공동체가 거룩해지고, 우리 상식이 주님과 같아질 때만 선교가 가능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조정의 시기를 거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식에 순종하는 길과, 내 상식을 고집하며 불평하는 길입니다. 어느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 빌 1:27 공동번역</strong></p>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른 채 셈과 원망에 익숙하지 않은가?

②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생각에 공감하고 순종하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27 Sep 2026 17:20: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9.27]]></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9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추석 연휴</strong>
고향에 다녀오시는 분들이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점심식사와 오후예배는 가족과 함께입니다.

<strong>② 2026년 부산동지방 사경회 |</strong> with [어 성경이 읽어지네]
⋅날자 : 10월12일(월)-22일(목) ▶장소, ZOOM으로 진행
⋅강사 : 생터 성경 사역원 동부산지부 전문 강사
⋅회비 : 1만원(토스뱅크 1000-7118-3550 조상학)
⋅준비 : 성경방 워크북 신약(개별 구매)

<strong>③ 제42회 부산동지방 찬양제</strong>
⋅10월25일(주일) 오후2시30분(정관 온누리교회)
⋅찬양대원 외에 교우들의 많은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들 환영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단체사진 촬영을 위해 3부 예배 후 잠시 예배당에 남아주시기 바랍니다.
⋅미자립교회와 교회학교 지원을 위해 ‘광고’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8주차 녹색 실천
⋅하루에 한끼는 채식을 지향합시다.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한 줄 기도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으로 탄소발자국을 줄여, 뜨거워져 가는 지구의 온도를 낮출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자녀들을 위해!!”
⋅폭염의 근본적 원인인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데 ‘채식’은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역 농산물 이용은 탄소 배출을 줄이고 지역 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5 Sep 2026 20:26:5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9.20]]></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90]]></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추석 |</strong> 秋夕
9월 25일(금)은 추석입니다. 고향에 다녀오시는 분들이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하도록 기도해 주시고 행복한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추석 가정예배문은 주보대 위에 있습니다. 27일(주일) 점심식사는 가족과 함께입니다.

<strong>② 제42회 부산동지방 찬양제</strong>
10월25일(주일) 오후2시30분▶정관 온누리교회

<strong>③ 2026년 부산동지방 사경회 |</strong> with [어 성경이 읽어지네]
⋅날자 : 10월12일(월)-22일(목)
⋅장소 : 온라인 (ZOOM으로 진행)
⋅강사 : 생터 성경 사역원 동부산지부 전문 강사
⋅회비 : 1만원(토스뱅크 1000-7118-3550 조상학)
⋅준비 : 성경방 워크북 신약(개별 구매)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8주차 녹색 실천
⋅기후정의행동에 참여합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한 줄 기도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 기후위기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행동하는 용기를 주소서.”
⋅기후위기는 환경의 문제를 넘어 정의의 문제입니다. 기후위기에 적게 책임진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모든 이가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9 Sep 2026 19:54: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6주 ‘보게’ 하시는 하나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9]]></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6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14:19-31</strong>
<strong>19</strong>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strong>20</strong>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strong>21</strong>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strong>22</strong>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strong>23</strong>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strong>24</strong>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strong>25</strong>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strong>26</strong>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strong>27</strong>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strong>28</strong>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strong>29</strong>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strong>30</strong>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strong>31</strong>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3
<strong>1</strong> 주님은 자비하시고 은혜로 | 우시며
○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 풍부하시다
<strong>2</strong>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 않으며
○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 아니하시니
<strong>3</strong> 하늘이 땅에서 높음 | 같 - 이
○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 크심이로다
<strong>4</strong> 동이 서에서 먼 | 것 같이
○ 허물을 우리에게서 멀리 | 치우시도다
<strong>5</strong>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 여기듯
○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어여삐 | 여기시나니
<strong>6</strong> 이는 그가 우리의 됨됨이를 | 아시며
○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 아심이로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14:1-12</strong>
<strong>1</strong>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strong>2</strong>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strong>3</strong>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strong>4</strong>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strong>5</strong>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strong>6</strong>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strong>7</strong>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strong>8</strong>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strong>9</strong>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strong>10</strong>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strong>11</strong>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strong>12</strong>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8:21-35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1</strong>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strong>22</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strong>23</strong>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strong>24</strong>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strong>25</strong>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strong>26</strong>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strong>27</strong>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strong>28</strong>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strong>29</strong>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strong>30</strong>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strong>31</strong>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strong>32</strong>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strong>33</strong>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strong>34</strong>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strong>35</strong>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출 14:31절 묵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큰 능력을 본 이스라엘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② 마 18:32-33절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참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어느 때부터 가능해지는 것입니까?

③ 롬 14:3절 묵상하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보게’ 하시는 하나님</h2>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는 구원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계시는 전승들 안에서 찾아지는데, 교회의 전승 가운데서 최고의 권위는 당연히 성경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각 족장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고(창 12:1; 26:2-3; 28:10-13), 이후로도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경을 통해 당신 자신, 혹은 당신의 뜻을 계시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오직 ‘말씀의 방식’으로만 계시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상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셨는데, 지난 주일과 오늘 구약성경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지난 주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시면서, 유월절이 속한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쉬 호다쉼 רֹאשׁ חֳדָשִׁים)’로 삼아, 이 달부터 달 수(數)의 계산을 시작하라(출 12:2)고 명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월절(페사흐 פֶּסַח)’은 여호와께서 ‘히브리들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실행하실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하나님께서 굳이 이 절기를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으라 하신 것은, 매 해가 시작될 때마다 구원 사건이 가장 먼저 기억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히브리들에게 매 해 유월절마다 어린 양을 잡아 유월절 식사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새로운 시간 개념을 제정해 가르치시고, 그 구원의 사건을 유월절 식사를 통해 기념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사를 ‘글자와 지식’ 만이 아닌 ‘몸으로서’ 기억하며, 구원의 확신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체험하는 신앙의 길을 위(僞) 디오니시우스는 ‘부정신학(théologie négative)’이라 부르며, ‘무지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블라디미르 로스키/박노양 옮김 ｢동방교회의 신비신학｣(정교회출판사) 34쪽
오늘 구약성경도 그 연장입니다. 파라오는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열 가지 재앙(출 7:14-10:29;11:29) 앞에서 손 한 번 못 쓰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들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고, 경이로움 가운데 출애굽에 성공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 경이로움이 영적 긴장감 속에서 유지될 때,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작가이며 목사인 ‘피트 그리그(Pete Greig)’는 자신의 책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 1945년, 유대인들이 게슈타포를 피해 숨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독일 쾰른의 한 지하실 벽에서 발견된 낙서를 소개해 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태양이 비치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태양의 존재를 믿는다.
혼자일 때도 나는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피트 그리그/윤혜란 옮김｢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미션월드) 6쪽</p>
이런 믿음과, 그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내 마음을 감싸고 있을 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방자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소유한 파라오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열 가지 재앙(출 7:14-10:29;11:29) 앞에서 손 한 번 못 쓰고 패배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 경이로움 속에서 출애굽에 성공했음에도 히브리들은 상황이 변할 때마다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출 14:10-12). 파라오는 히브리들의 탈출 경로를 파악하고 있다가 탈출로가 차단된 곳으로 그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다시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표면적인 시선으로만 보면 이 상황은 분명 다시 히브리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이성적 설명’이 아닌 ‘몸의 체감’의 방법으로 히브리들을 신앙에로 이끄십니다. 히브리들은 비록 출애굽에 성공은 했지만, 표면적으로 보면 남자 장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까지 있는 나약한 집단이었습니다. 반면에 파라오의 군대와 무기는 세계 최강이어서 탈출한 노예들을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 출 14:19-20</strong></p>
신비하고 놀라운 ‘밤’의 한 장면입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구름기둥이 이집트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순간인데, 그러자 같은 밤임에도 한쪽은 ‘흑암’이었고, 다른 쪽은 ‘밝은 밤’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 장면을 보다 섬세하게 표현해줍니다. “구름은 저쪽 이집트 편에게는 ‘어둠(חֹשֶׁךְ 호쉐크)’을 주었고, 이쪽 이스라엘 편에게는 ‘밝은 밤(וַיָּאֶר אֶת־הַלַּיְלָה 바야에르 엩-하라일라)’을 주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신앙적 영감을 줍니다. 하나님은 히브리들에게서 밤을 아예 없애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밤 한가운데를 걸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어둠을 우회하지 않습니다. 어둠을 관통하며 주어지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을 통과하는 중에 이집트 군대를 완전히 궤멸시키셨고, 히브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살아남았습니다(출 14:27-28). 이것은 이집트 신들에 대한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였고, 이집트의 강한 군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히브리들이 통과한 어둠을 ‘부정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무척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때의 어둠을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적 어둠(θεῖος γνόφος)’이라고 표현했는데, 훗날 생 드니 신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블라디미르 로스키는 ‘신비한 무지의 어둠’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했습니다.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는 더 밝은 빛이 아니라 도리어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의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 눈에 어둠처럼 다가온 것인데, 마치 모세가 시내산의 신비한 무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동방교회의 신비신학 36-38쪽 참조</p>
그러니까 출애굽한 히브리들이 홍해에서 경험한 밤은 신비한 무지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가깝게 경험하는 은총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밤(어둠)’의 이중적 신비가 있습니다. 히브리들은 홍해에서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 능력을 '보았기에(출 14:31)’ 그 어둠은 ‘밝은 밤’이었습니다. 히브리들은 보았기에 경외했고, 그럼에도 다 볼 수는 없었기에 더욱 경외했습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해 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 출 14:31</strong></p>
‘봄’과 ‘경외’와 ‘믿음’ 회복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로 ‘말씀을 통해’ 경외심과 믿음을 형성하고 지탱해왔는데, 이 홍해의 사건을 통과하면서는 ‘말씀을 들음’을 넘어 ‘구원하시는 행동을 봄’으로써 잃었던 경외와 믿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봄’은 언제나 이렇게 무릎을 꿇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듣는 훈련’과 ‘보는 훈련’을 통한 영적 성숙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의 예배를 통해서는 ‘읽고’, ‘들음’에 매진하고, 성찬에 참여해서는 희생당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보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향한 경외감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추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베드로로 하여금 바로 그 경외감과 믿음에 직면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마 18:21</strong></p>
베드로가 이렇게 물은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주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네 형제가 너에게 대해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시면서, 그러나 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교회의 권면을 무시할 때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고도 하셨습니다. 형제와 교회의 권면을 받아들여 회개한 사람은 땅에서 용서를 받고 하늘에서도 풀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재빠르게 받아서 베드로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회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용서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시한 일곱 번이란 숫자는 당시 유대인 문화에서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외경인 집회서 19:13-17에 보면, 내게 죄를 범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권고하고 있고, 랍비들은 죄를 범한 이웃을 세 번 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암 1:3). 그러나 이 일곱 번이라는 관대한 숫자가 예수님에 의해 단번에 무시되고 맙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 마 18:22</strong></p>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용서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너에게는 용서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마 18:23-27</strong></p>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800달란트 정도였다고 하니, 만 달란트는 한 개인으로서는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그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준 임금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번에는 사람을 보게 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마 18:28-34</strong></p>
백 데나리온은 자기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소액(少額)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임금이 화를 낸 것은 빚의 액수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빚의 액수’가 아니라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베드로에게 해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용서를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서 그가 유혹받고 있음을 아신 것입니다. 용서란 그렇게 자기의 자아(ego)에서 나와지는 것이 아닌, ‘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가능한 것인데, 베드로는 마치 용서의 주체가 자기인 것처럼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어둠을 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한 채, 자기 주도의 용서를 언급한 것에서 이미, 그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어둠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어둠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다만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자기 내면의 어둠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용서해주신 주님의 빛을 ‘보게’ 해주심으로써 주님은 베드로의 영혼에도 빛이 깃들게 하십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 롬 14:3a</strong></p>
당시 로마교회 안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이슈 중에 ‘음식에 관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것은 신앙적 정결과 상관 없다고 믿는 사람들과, 율법이 금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고기 먹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그 누구든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해서 함부로 타인의 신앙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롬 14:3b</strong></p>
나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빛을 향해 서서, 나의 내면의 어둠을 바라보고 회개할 때,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심으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게 하시고(출 12:3-7), 그 파스카 사건을 기념하는 식사를 매 해 나누게 하신 것(출 12:8-10)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사를 지식만이 아닌, 몸으로 체감해 기억하며,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내면에 간직하고 어둠을 통과해 빛으로 나아가게 하시려는 세심하신 배려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관용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베드로에게 비유를 통해 ‘그가 먼저 하나님께 크나큰 용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보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타인의 신앙을 판단하는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 때문에 힘을 내고,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 때문에 용서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 때문에 나와 생각이 다른 형제를 받아들이는, 참된 그리스도인 됨이란 그러한 것이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으로 인해 참 그리스도인이시기를 축복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듣고, 보지 못한 까닭에 ‘자기중심적’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듣고, 보는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에 차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2 Sep 2026 21:35: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5주 참된 거룩을 이루는 교회]]></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8]]></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5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12:1-14</strong>
<strong>1</strong>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strong>2</strong>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strong>3</strong>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strong>4</strong>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strong>5</strong>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strong>6</strong>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strong>7</strong>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strong>8</strong>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strong>9</strong>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strong>10</strong>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strong>11</strong>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strong>12</strong>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strong>13</strong>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strong>14</strong>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49
<strong>1</strong>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를 | 찬양해
○ 성도들아, 모여서 그를 | 찬양하여라
<strong>2</strong>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 | 워하며
○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 즐거워하라
<strong>3</strong> 춤을 추며 그의 이름 찬양 | 하여라
○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 찬양하여라
<strong>4</strong>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 | 하시며
○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 하심이로다
<strong>5</strong> 성도들은 승리 잔치 | 벌여라
○ 잠자리에 들어서도 기뻐하며 | 노래하여라
<strong>6</strong>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 향한 찬양이 | 있으며
○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 칼이 있도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13:8-14</strong>
<strong>8</strong>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strong>9</strong>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strong>10</strong>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strong>11</strong>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strong>12</strong>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strong>13</strong>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strong>14</strong>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8:15-20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5</strong>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strong>16</strong>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strong>17</strong>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strong>18</strong>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strong>19</strong>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strong>20</strong>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출 12:2절 묵상하십시오. 유월절이 속한 ‘이 달’을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② 롬 13:11-14절 묵상하십시오. 자다가 깰 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음을 아는 성도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③ 마 18:15-18절 묵상하십시오. 죄를 범함 형제가 두세 증인의 말도,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참된 거룩을 이루는 교회</h2>
오늘은 우리교회가 달맞이로 이사온지 꼭 3년째가 되는 주일입니다. 2023년 성령강림 후 제15주 예배를 이 예배당에서 드렸는데, 오늘 2026년 성령강림 후 제15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처음 교회 이전을 결의하고 새 교회를 꿈꾸며 우리는 마치 화두(話頭)와도 같은 두 가지 질문 앞에 섰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거룩한 공동체로서 해운대교회는 어떠해야 할까?
사회적 집단으로서 해운대교회는 어떠해야 할까?</p>
이 질문은 새로 지어질 교회의 모습과 관련해서 성격상 모순되거나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다움과 거룩성이 담긴 예배당을 지으면, 이웃들에게는 문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웃들이 자유로이 다가올 수 있는 교회를 지으면, 교회다움과 거룩성을 표현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웨슬리홀을 먼저 주셔서 우리교회는 이웃이 머뭇거리지 않고 다가올 수 있는 선교적 공간을 확보하였고, 영감 넘치는 예배를 할 수 있는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놓고 우리를 이끌어 오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이끄심이 그러한 만큼 우리에게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변화’가 요청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대한 시기에 우리교회는 예기치 않은 파란(波瀾)을 겪었습니다. 새로운 소명 앞에 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며 기도하기 보다 사적(私的) 욕망이 먼저 작동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앞둔 주님께 시험하는 자가 다가와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라며 유혹했듯이, 사탄은 해운대교회의 전환기를 그냥 넘어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위험했던 시기를 슬기롭게 넘어왔고,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하는 동안 교회를 정화시키고 아름다운 성전이 건축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이전 3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는 3년 전의 질문 앞에 다시 한 번 서게 되었습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을 앞두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이때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힘은 바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매일 수도, 풀릴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6:19). 하지만 제도적 교회는 이때 당장이 아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열흘 뒤(부활로부터 오십 일째), 성령강림과 함께 탄생했습니다(행 2:1-47). 이렇게 탄생한 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창조부터 늘 있었지만, 오순절부터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깃들어오셨습니다(행 2:3-4). 이렇게 성령 강림과 함께 탄생한 공동체이기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사회의 다른 집단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기에 사회성을 띱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동체인 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인 집단인 교회의 특성을 직시해야만 교회가 걸어갈 길이 보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지난 430년 간 구태하게 이어온 노예들의 관성을 깨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 출 12:1-2</strong></p>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가장 먼저 하신 명령은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이 되게 하라”였습니다. 이 명령이 놀라운 것은 히브리들이 그동안 관습적으로 알고 있던 ‘달(月)’의 셈법 자체를 근본에서 깨뜨리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한 해는 통상 가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연 질서와 농경의 순환에 따른 시간 감각이었고, 계절의 리듬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구원의 사건’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부터 이스라엘의 시간은 해가 뜨고 지는 것,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것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그 밤’을 기준으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들여다보면 그 뜻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달’을 뜻하는 히브리어 ‘호데쉬(חֹדֶשׁ)’는 ‘새롭다’는 의미의 ‘하다쉬(חָדָשׁ)’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달의 시작’을 의미하는 말은 ‘로쉬 호다쉼(רֹאשׁ חֳדָשִׁים)’ 즉 ‘달들의 머리(head)’인데, 여기서 ‘머리’는 순서상 첫 번째가 아니라, 나머지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근원(根源)입니다. 그러니까 이 한 달이 다른 열한 달을 규정하는 머리가 됩니다. 즉 ‘구원의 기억’이 ‘일 년 전체를 지배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달력 조정’이 아니라 ‘시간의 창조적 재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빛이 있으라”(창 1:3)시며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 성서일과인 출애굽기 12장에서 지난 날 종살이의 혼돈과 흑암 가운데 신음해 온 히브리들에게 새로운 시간을 창조해 주십니다. 노예의 시간에서 자유인의 시간으로, 애굽의 달력에서 하나님의 달력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11권에서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창조한 영원자이시며, 모든 시간 이전에 게신 분이므로 시간이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 의미를 얻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흘러가면 그저 소모되는 시간이고, 낡아지는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시간은 날로 새롭게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우리의 시간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시선으로 보면, 빛 가운데서 알곡과 가라지가 걸러지는 시간이었고(마 13:24-30), 참 하나님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창조적 시간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3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건너왔지만, 신앙의 시간으로는 교회도 성도들도 새로워지는 ‘호데쉬(חֹדֶשׁ)’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새로운 시간 안에 있는 우리 교회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원형 예배당의 아름다움일까요? 천창(天窓)으로 쏟아지는 빛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오셔서 세우시는 예배당이고, 신실한 일꾼들의 정직한 땀이 배인 예배당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배당은 우리교회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제부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 예배당과 웨슬리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거룩한 영성 공동체로서의 해운대교회를 일구고, 부산과 해운대와 달맞이의 이웃들이 더 좋아하는 마을 공동체와 녹색교회를 일구어가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거룩한 영성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새 땅과 새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히브리들에게 유월절 의식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장차 그 의식을 반복하는 가운데,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를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첫 번째 의식은 어린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 출 12:3-7</strong></p>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해의 첫 달인 ‘아빕(אָבִיב)월 열흘’에 어린 양을 마련하라고 하셨습니다. ‘각 가족대로’ 어린 양을 취하라는 말씀은, 가족이 이제부터는 혈연공동체를 넘어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고, ‘라바이트 לַבָּיִת’ 즉 ‘그 식구를 위하여’라는 말씀은, 어린 양의 피가 ‘각 개인’의 구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4일 뒤인 ‘아빕 월 열 나흗날 저녁 때’ 양을 죽입니다. 그리고 양의 피를 양을 먹을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의 맏아들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군대를 일으키거나 반란을 꾀하도록 하시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사용하신 건, 구원이 사람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의 두 번째 의식은 식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식탁에서 나누는 ‘음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가 전해지게 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 출 12:8-10</strong></p>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게 하셨다면, ‘고기’는 먹음으로서 출애굽에 필요한 힘을 얻고, 훗날 유월절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해방의 은총을 되새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식사는 단순히 음식만을 나누는 식사가 아닌, 엄숙하고 의미 있는 영적 의식으로서의 식사이자, 이스라엘 신앙이 전승되는 교육의 식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유월절 식탁으로부터 유래된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을 부릅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그리고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희생을 노래로서 부르며, 우리 역시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희생의 은총을 기념하는 것은 ‘말씀을 귀로 듣고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때때로는 훨씬 깊고, 선명하며, 사실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6세기에 활동했던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성경의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을 ‘성만찬예배’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들(Divine Name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신중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서, 생각과 존재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분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을 침묵으로 공경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경의 계몽적인 광선에게로 들려올라갑니다.

‘생각과 존재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어찌 글자로 된 성경만을 통해 다 이해할 수 있겠으며, 목사의 거친 설교로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침묵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유월절 식탁으로부터 유래된 성만찬 식탁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 몸 안에 모시고, 그분을 느끼고, 관상함으로서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인식하려 했던 신앙을 넘어, 가슴으로 만나고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만나는 신앙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 롬 13:11</strong></p>
여기서 바울 사도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때’는 ‘호라 ὥρα’ 즉 ‘잠에서 깨어날 때’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이 ‘때’를 의식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때’를 모르면 사람은 방자해집니다. 사람이 탐심과 탐욕, 분노와 영적태만 등에 빠지는 것은 지금이 영적 시간으로 어느 때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는 새 땅에서, 새 시대를 살아갈 히브리들에게 이후로 반복되어 찾아오는 매해의 첫 달을 해방절로 지키며, 선민으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 건지, 가난하거나 연약한 형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또 자연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서 그들은 노예를 벗어나 조금씩 거룩한 선민(選民)이 되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롬 13:12</strong></p>
이 말씀은 우리를 두 번 째 소명으로 이끕니다. 부산과 해운대와 달맞이의 이웃들이 더 좋아하는 마을 공동체와 녹색교회를 일구라는 소명입니다. 우리가 쌍샘자연교회를 탐방하고 온 것은 바로 이 소명에 부응하는 시작이었습니다. 교회는 예배와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영성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이웃들과 더불어 울고웃는 사회적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우리끼리만 거룩한 건 반쪽짜리 거룩입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의 행실로서 이웃을 섬기는 삶이 이어질 때, 참되고 온전한 거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삶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당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롬 13:14</strong></p>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지 못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교회는 번번이 거룩을 상실했고, 빛이 되지 못하고 어둠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마 18:15-17</strong></p>
이 말씀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비유’(마 18:12-14) 바로 다음에 위치하고 있어서 ‘축출의 절차’가 아니라 ‘되찾음의 절차’이고, ‘처벌’이 아니라 ‘형제를 얻는 것’(마 18:15)에 목표를 둔 말씀입니다. 하지만 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교회의 권면을 무시할 때,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랑이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거룩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공의가 바로 세워져야 함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마 18:18</strong></p>
‘매다’, ‘풀다’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입니다. 회개를 통해 땅에서 먼저 풀린 사람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개합니까? 때의 소중함을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밤이 새어 낮이 가까웠음을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이전 3주년을 맞이해서 이 땅에서 드린 첫 주일 말씀을 회고하며 다시 한 번 우리가 가야할 길을 묵상해보았습니다. 함께 걸어갈 시간을 ‘호라 ὥρα’ 즉 ‘영적 시간’이 되게 하고, 바른 영성생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뿐 아니라, 빛의 행실로서 이웃을 섬기는 우리 해운대교회, 참되고 온전한 거룩이 이루어지는 해운대교회로 완성되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때를 분간하며 매 순간을 영적 시간으로 채워가고 있는가?

②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2 Sep 2026 21:28:5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9.13]]></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7]]></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오늘은 ‘성찬예배’에 관한 해설입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strong>② 2026 해운대교회 교육부 여름행사 사진전</strong>
지난 여름 교회학교에서 진행된 유치부/아동부 여름성경학교 및 청소년부, 청년부 수련회 사진전이, 교회 입구 1층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애쓰신 전도사님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 36주차 녹색 실천</strong>
⋅기후위기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한 줄 기도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입니다. 저들을 위로하시고, 고난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네팔 참사는 기후위기가 더 이상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삶과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임을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2 Sep 2026 21:16: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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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4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6]]></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4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3:1-15</strong>
<strong>1</strong>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strong>2</strong>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strong>3</strong>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strong>4</strong>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strong>5</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strong>6</strong>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 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strong>7</strong>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strong>8</strong>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strong>9</strong>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strong>10</strong>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strong>11</strong>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strong>12</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strong>13</strong>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strong>14</strong>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strong>15</strong>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5
<strong>1</strong>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 불러라
○ 그 장하신 일들을 만민에게 | 알게 하여라
<strong>2</strong> 그분께 노래불러라, 수금 타며 노래 | 불러라
○ 놀라운 그 일들을 말할지어다
<strong>3</strong>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라
○ 여호와를 찾는 마음에 | 기쁨 있어라.
<strong>4</strong> 여호와를 찾아라, 그의 힘을 | 빌려라
○ 그의 얼굴을 항상 | 구할지어다
<strong>5</strong>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 | 하여라
○ 그 입으로 내리신 판단을 | 명심하여라
<strong>6</strong> 그분이 바로 여호와 우리 | 하나님
○ 그의 판단이 온 | 땅에 있도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12:9-21</strong>
<strong>9</strong>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strong>10</strong>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strong>11</strong>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strong>12</strong>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strong>13</strong>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strong>14</strong>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strong>15</strong>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strong>16</strong>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strong>17</strong>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strong>18</strong>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strong>19</strong>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strong>20</strong>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strong>21</strong>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6:21-28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1</strong>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strong>22</strong>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strong>23</strong>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strong>24</strong>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strong>25</strong>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strong>26</strong>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strong>27</strong>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strong>28</strong>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16:23절 묵상하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출 3:11절 묵상하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께 한 대답에서 모세의 어떤 내적 상태를 느낄 수 있습니까?

③ 롬 12:9-11절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 안에서만 볼 때, ‘하나님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h2>
오늘 복음서는 지난 주 복음서의 내용과 당황스러울만큼 뚜렷한 대조를 보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시라고 고백함으로써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예수님께 칭찬을 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는 고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고 “그리 마시라”고 항변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며 예수님께 책망을 듣는 모습을 봅니다. 왜 마태는 이런 대립적인 베드로의 모습을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해 두었던 것일까요?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도 그렇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그 안에 본질적으로 이런 대립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사람으로서 고난 당하고 죽임까지 당하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대립적인 요소인데, 이 신비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베드로는 어떤 때는 칭찬을 들었다가 또 어떤 때는 꾸중을 듣고 맙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딱한 모습은 오늘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당연히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가 반역자에게 내리던 가장 수치스럽고 잔혹한 처형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처형 당한 구원자’ 이것은 그 시대 상식으로는 도무지 삼킬 수 없는 모순(矛盾)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바로 그 모순 한복판에서 시작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마 16:21</strong></p>
여기서 ‘이 때로부터’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바로 그 순간부터를 의미합니다. 이 때로부터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시며, 닥쳐올 그 길을 향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그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드로의 반론이 튀어나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마 16:22</strong></p>
여기서 ‘항변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꾸짖다, 책망하다’라는 의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실 때 쓰시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던 그 입술이, 이제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안다는 듯 스승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의 안타까움과 사랑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심이 곧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이 서릿발 같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strong></p>
“내 뒤로 물러가라(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이 말씀을 저주로만 들으면 절반만 들은 것입니다. ‘내 뒤로’ 그 자리는 제자의 자리입니다. 제자란 본래 스승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지, 앞에서 길을 막고 이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스승을 앞질러 있을 뿐 아니라, 스승의 운명을 자기가 설계하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제자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겸손히 뒤에서 따르는 제자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사람의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게 뭐겠습니까? 25절과 26절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고, ‘온 천하를 얻고자 하는 집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집착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마 16:25</strong></p>
‘사람의 일’은 결국 목숨을 잃게 하고, ‘하나님의 일’은 결국 목숨을 찾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단순한 삶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이 걸린 사안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걱정하는 베드로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사탄이라며 다그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은 좀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생명을 가리키는 두 낱말이 있습니다. ‘프쉬케(ψυχή)’와 ‘조에(ζωή)’입니다. ‘프쉬케’가 숨쉬며 늙어 가는 육체에 속한 목숨이라면, ‘조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참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절묘하게도 ‘프쉬케’를 두 번 쓰시면서 그 무게를 뒤집으십니다. “누구든지 제 ‘육체의 목숨(프쉬케)’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프쉬케’를 잃는 자는 참 생명을 찾으리라.” 움켜쥐면 빠져나가고, 내려놓으면 채워진다는 이 역설이 오늘 말씀의 심장이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기 위해 바로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 16:24</strong></p>
“자기를 부인하라” 여기 쓰인 동사 ‘아파르네사스토(ἀπαρνησάσθω)’에는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훗날 새벽 닭이 울기 전, 이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데(마 26:71-75; 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18, 25-27), 각 복음서에서 그 때 사용된 동사가 바로 이 ‘아파르네오마이(ἀπαρνέομαι)’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할 때,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불행하게도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마는 역설을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봅니다. 자기를 비워내지 않으면 주님을 밀어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학과 다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의 다른 말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주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범죄자가 자기가 처형당할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사형장까지 걸어갈 때 쓰는 표현입니다. 유다의 대반란 때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했던 제자들(행 5:37)은 이 십자가의 의미를 생생하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 의미를 도리어 가장 값진 것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당신 제자들 역시 당신처럼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바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배교하지 않는 한 죽임 당하던 시대에, 그들에게 순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죽음에 몸으로 동참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잇대어지는 가장 값진 신앙이고 영성이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순교의 대열에 서서 거룩하고 의연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박해가 사라지고, 순교할 상황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나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고, ‘삶으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저마다 십자가를 지는’ 이른바 ‘하얀 순교’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메마른 사막에서 거짓 자아와 싸움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잇대어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인해 ‘청빈과 정결과 순명(順命)’의 삶을 살아냈고, 그러한 수덕(修德)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서방의 두 영성가가 잊을 수 없는 언어로 새겨 두었습니다.

먼저 ‘십자가의 성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을 한 폭의 산으로 그리고, 그 정상으로 오르는 오솔길 위에 오직 한 단어를 새겼습니다. ‘나다(nada)’ 즉 ‘아무것도 아님’입니다. 그는 “매사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신의 생활을 그리스도의 삶에 맞추어 나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흠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십자가의 성 요한/최민순 옮김 ｢가르멜의 산길｣(바오로딸) 60-75쪽</p>
얼핏 체념처럼 들리지만, 그가 가리키는 ‘나다(nada)’는 텅 빈 허무가 아니라 넘치는 충만입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 신비주의 최고의 정신으로 불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그리스도인의 ‘비움’에 대해 ‘버리고 떠나 있음(Abgeschiedenheit)’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했습니다. 여기서 ‘버리고 떠나 있음’이란, 세상 만물과 그 결과에서, 심지어 내가 머릿속에 그린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념’마저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버림’을 ‘영적 가난’이라고도 부른바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되게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참된 가난은 갖고 있는 것을 단순히 버릴 뿐 아니라, 단적으로 어떤 것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버린다. 참다운 가난은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의지만 가질 따름이지,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베어/이부현 옮김 ｢독일 신비주의 최고의 정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안티쿠스) 168-170쪽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가난은 ‘비어있음’인데, 이 비어 있는 존재는 항상 신적 생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마 16:26</strong></p>
그렇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참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세상을 다 얻지는 못해도 참 생명을 얻는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염려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라고 꾸짖으실 만큼 단호하셨던 것입니다. 이 베드로를 향한 단호함은 미움이 아니라, 그를 참 생명으로 이끄시려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마 16:27</strong></p>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긴박감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이 긴박감 안에서 살았습니다. “주님 오늘 오십니까?” 하고 물으며 종말적 긴장감 안에서 살았기에 그들은 단 한 순간도 그리스도인 아닌 날이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출 3:4-5</strong></p>
혈기 왕성한 40세에 미디안 광야에 들어와 어느덧 80세 노인이 되어버린 모세입니다. 그는 이제 이집트 왕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히브리들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는 초라한 살인 용의자요, 도망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살인자가 되어 찾아온 미디안은 철저하게 모세의 꿈과 미래를 빼앗았고, 그는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렇게 회한이 가득한 황혼을 맞이하는 그를 하나님께서 찾으실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동안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를 잊어버리지 않으셨고, 어느 날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는 하나님 음성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모세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출 3:5</strong></p>
하지만 모세에게 그곳은 거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양 떼를 몰고 오가던 흔하디흔한 광야였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숨어있던 유배지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소명이 임하자, 그 평범한 광야가 거룩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거룩함은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 여부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타지 않는 떨기나무야말로 오늘 말씀의 그림입니다. 불에 타면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 우리 또한 자기를 비워 죽되 사그라지지 않고, 비움 속에서 하나님의 불꽃을 담아내는 존재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인들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롬 12:9</strong>
<strong>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롬 12:21</strong></p>
선과 악이 공존하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우리의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주님을 그리스도시라 고백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우리로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가 선 모든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땅인 줄 알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삶을 살아가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유한성과 무의미성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에 합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땅의 욕망에 겨워 ‘사람의 일’에 집착해 살아오지 않았는가?

② 참다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4 Sep 2026 22:25: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9.06]]></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오늘부터 재개합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strong>② 2026 해운대교회 장학생</strong>
바 울 장학생 : 김성찬 김유나
베드로 장학생 : 김규민 김예준 서예흔
교회외 장학생 : 임유리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5주차 녹색 실천
⋅창조절에 관련된 성경말씀을 묵상합시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시 19:1)
⋅한 줄 기도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임을 깨닫고, 그 아름다움과 아픔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창조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세계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돌아보고, 우리가 창조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성찰하는 시간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4 Sep 2026 22:11: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8.30]]></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1]]></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9월 첫 주부터 재개합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strong>② 쌍샘자연교회 탐방</strong>
지난 24일(월) 잘 다녀왔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참여하신 분들과 식사와 차(茶), 그리고 운전으로 섬겨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탐방목적은 이후 우리교회가 감당해야 할 마을선교를 앞두고 본 받을 교회를 돌아본 것입니다. 쌍샘자연교회는 2008년 녹색교회로 지정되었고, 20여년 전부터 마을공동체로서 ‘도서관(봄눈)’, ‘서점(돌베개)’, 산촌유학, 자연학교 등 대안교육, 찻방, 노아 공방 등을 통해 이웃과 함께하며, ‘자연, 문화, 영성’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에 두고 녹색선교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4주차 녹색 실천
⋅필요한 물품을 제로 웨이스트샵에서 구매해 봅시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빌 2:4)
⋅한 줄 기도 “편리함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쓰레기를 줄이는 거룩한 소비로 지구를 돌보게 하소서.”
⋅포장재와 쓰레기를 줄이는 제로웨이스트 소비는 지구와 미래 세대를 향한 실천적 사랑입니다. 용기를 가져가 내용물만 담아오고 친환경 물품을 이용하는 작은 노력이 지구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8 Aug 2026 21:06: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2주 시험하는 요셉, 시험하시는 주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0]]></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2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45:1-15</strong>
<strong>1</strong>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strong>2</strong>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strong>3</strong>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strong>4</strong>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strong>5</strong>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strong>6</strong>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strong>7</strong>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strong>8</strong>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strong>9</strong>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strong>10</strong>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strong>11</strong>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strong>12</strong>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strong>13</strong>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strong>14</strong>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strong>15</strong>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33편, 67편
<strong>1</strong> 형제들 모두 모여 함께 | 사는 일
○ 어찌 그리 선하고 | 아름다운고
<strong>2</strong> 아론의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 기름이
○ 수염을 타고 흘러 옷깃까지 | 내림 같도다
<strong>3</strong>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 같도다
○ 굽이굽이 내리는 | 이슬같구나
<strong>4</strong> 그곳은 주께서 복을 | 내린 곳
○ 그 복은 | 영생이로다
<strong>5</strong>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 하시며
○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 | 하게 하소서
<strong>6</strong>  세상이 당신의 길을 알게 | 하시고
○ 만방이 당신의 구원을 | 알게 하소서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11:1-2a, 29-32</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strong>2</strong>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strong>29</strong>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strong>30</strong>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strong>31</strong>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32</strong>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5:21-28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1</strong>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strong>22</strong>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strong>23</strong>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strong>24</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strong>25</strong>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strong>26</strong>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strong>27</strong>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strong>28</strong>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45:1-2절 묵상하십시오. 요셉의 오랜 침묵은 언제 무너집니까?(창44:30-34 참조)

② 마 15:23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침묵은 여인을 향한 거절입니까? 아니면 그녀의 믿음이 드러나기까지의 여백입니까?

③ 롬 11:30-31절 묵상하십시오. “너희(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그들(유대인)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시험하는 요셉, 시험하시는 주님</h2>
서방 수도전통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도는 수도 규칙 제58장에서 ‘형제들의 입회 절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 수도생활을 하고자 처음으로 찾아오면 그에게 쉽게 입회를 허락하지 말고 그의 정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볼 것이다. 만일 그 찾아온 사람이 항구히 문을 두드리고 자기가 당하는 푸대접과 입회의 어려움을 4, 5일까지 인내로이 참아 견디며 그의 청원이 꾸준해 보이거든 그에게 입회를 허락하고 며칠 동안 객실에 있게 할 것이다. 그곳에서 묵상하게 하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지, 하나님의 일과 순명과 모욕을 잘 견뎌내는지 살펴야 한다. 베네딕도/이형우 역주 ｢수도 규칙｣(분도출판사) 209-211쪽

하나님께 나아오기 위해 찾아온 사람을 4, 5일 동안 밖에 세워두는 대목의 라틴어 핵심 표현은 “누가 수도생활을 하고자 처음으로 찾아오면(Si venerit quis ad conversationem)”으로 시작하며, “쉽게 들이지 말라(non ei facilis tribuatur ingressus)”는 구절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지를 살피라(si revera Deum quaerit)”라는 유명한 문장이 이 시험의 목적을 밝혀 줍니다. 이 문장을 요약하면 “쉽게 들이지 말라.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진실로(revera)’ 하나님을 찾는지 보기 위함이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구약성서에서,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다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대상(隊商)들에게 팔아버리는 비정한 장면을 보았습니다(창 37:12-36).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애굽에 팔려가 모진 시간들을 견딘 끝에(창 39:1-40:23), 바로의 꿈을 해석해줌으로써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보게 되고(창 41:1-43), 이후 그의 꿈대로 일곱 해 동안 흉년이 온 세상을 휩쓸면서(창 41:54-57) 기근을 견디지 못한 그의 형들이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오는 장면도 보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온 형들은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한 눈에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창 42:8). 이때 요셉이 형들에게 식량을 주어야 하는지의 여부는 그들의 변화 즉 회개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자기의 형들을 시험하며 살피게 됩니다(창 42:9-44:34). 그가 살피는 이유는 단 하나 “형들이 ‘진실로(revera)’ 변하였는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선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이라며 몰아세워 봅니다(창 42:9–14). 무죄를 스스로 변호하게 함으로써, 형들이 자기 처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족의 진실을 얼마나 정직하게 털어놓는지를 봅니다. 형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는 중에 “우리는 열둘이었으나 하나는 없어졌다”( 창42:13)라며 요셉의 부재를 털어놓습니다. 또 요셉은 형들을 사흘간 가두어두었다가 시므온만 인질로 잡아둔 채 형들을 풀어줘서 그들의 형제애를 시험해 봅니다(창 42:15–24). 이 압박 속에서 형들은 서로에게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다”(창 42:21)라며 옛 죄를 후회합니다. 또 요셉은 자루에 곡식값을 몰래 되돌려 넣어, 형들의 양심을 시험해보기도 합니다(창 42:25-28), 뿐만 아닙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라헬의 막내 아들인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한 요셉은, 잔치를 배설한 후에 형들을 나이순으로 앉히고, 베냐민에게 다른 형들보다 다섯 배 많은 몫을 줍니다. 옛날 채색옷과 같은 노골적 편애를 눈앞에 재현하여, 형들이 예전처럼 시기로 반응하는지를 살핀 것입니다. 다행히 형들은 베냐민을 질투하지 않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창 43:1-34). 하지만 요셉의 시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몰래 넣어 도둑으로 몰고, 베냐민만 종으로 잡아 두고 나머지는 평안히 돌아가라는 조건을 제시합니다(창 44:17). 이것이 마지막이자 가장 날카로운 시험이었습니다. 형들이 또 하나의 라헬의 아들인 베냐민을 버리고 자기들 목숨만 살자고 떠날 것인지를 살핀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절절히 아뢰고,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으로 남겠다고 간청합니다(창 44:33). 한때 요셉을 팔자고 앞장섰던 바로 그 유다가(창 37:26–27), 지금은 아우를 위해 제 자유를 내어놓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입술의 말이 아닙니다. 눈물 몇 방울이 아닙니다. 자기 미래를 통째로 건 결단입니다. 유다는 자기 자유를 담보로 내놓았습니다. 값을 치른 회개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돌이킴이 있고, 값을 치름이 있고,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유다는 ‘동생을 버리는 자’에서 ‘동생을 지키는 자’로 돌아섰습니다. 그 돌이킴이 실제로 자기 미래를 건 진정한 돌이킴이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회개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듯 여러 상황에 형들을 몰아넣고 살펴본 끝에 형들이 진심으로 변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시험과 확신이 오늘 구약 성서일과가 있게 된 배경입니다. 요셉은 값싼 화해를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혹독한 시험을 통해 형들을 살핍니다. 성급히 형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막아버리는 것임을 알았기에, 끝까지 형들을 시험하고 살피며, 회개의 진정성이 익을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통곡하는 요셉을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 창 45:1-2</strong></p>
스무 해 동안 가슴에 감추고 있었던 상처가 한 번의 통곡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이 통곡은 단지 감정에 휩쓸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형들의 회개를 확인한 눈물입니다. 형들의 값을 치른 회개가 있었기에, 비로소 자신을 알릴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화해가 이루어지는 눈물이었습니다. 20세기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이것을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값비싼 은혜’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철천지원수다. 오늘날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총을 얻기 위한 것이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이요. 떨이로 팔아버린 사죄요. 떨이로 팔아버린 위로요. 떨이로 팔아버린 성례전이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의 참회가 없는 용서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 본회퍼/손규태.이신건 옮김 ｢나를 따르라-그리스도의 제자직｣(대한기독교서회) 33-35

오늘날 값싼 은혜가 한국 교회를 덮고 있습니다. 참회가 없는 사죄,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 십자가와 뒤따름이 없는 은혜가 싸구려 신앙의 주범입니다. 이런 싸구려 은혜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오해되다 보니, 세례를 통해 구원 받은 것에 안주해서, 이후 신앙의 여정에서 요청되는 회개와 성화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표면적이고 교리적인 종교인,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4). 예수님은 “회개하거든”이라고 분명한 조건을 명시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언약적 용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솔라흐(סָלַח)’도 대개 ‘돌이킴’을 의미하는 ‘슈브(שׁוּב)’를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회개 없이 죄를 없던 일로 선언하는 것은 오히려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신학적 경고가 단어에서도 드러납니다. 값비싼 은혜는 사람을 돌이키게 해줍니다. 삶을 바꾸게 하고, 값을 치르게 해줍니다. 그래서 값비싼 은혜란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습니다. 유다의 회개가 값비쌌기 때문에, 요셉의 눈물도 값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요셉의 중요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 창 45:4</strong></p>
요셉은 형들을 껴안으면서도, 그들의 죄는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힌 후에, 그 위에 하나님의 더 크신 뜻이 있었음을 비로소 밝힙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창 45:5</strong></p>
때때로 죄가 선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가룟 유다의 탐욕으로 인한 예수님의 수난이 인류에게 십자가의 은총을 가져다주었듯이,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인한 요셉의 수난이 몰아닥친 기근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선용된 사례입니다. 우리 교회도 사적 욕망에 미혹된 사람들에 의해 성전 건축이 하염없이 지연되는 힘겨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방해가 하나님의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획을 역전시켜 건축이 속도를 내게 하셨고, 순수한 뜻을 가진 교우들에 의해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사 사무소와 시공사를 선정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감격해 하는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어긋난 계획마저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선용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하십니다. 그때 한 가나안 여인이 부르짖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 마 15:22</strong></p>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마태는 이때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 15:23)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래 침묵하시는 장면은 드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갈수록 더 냉정하게 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마 15:24</strong></p>
그런데 우리가 더 놀라는 건 여인이 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여인은 절까지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 15:25)라고 도무지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라시며 한층 더 모욕적으로 몰아부치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마 15:27</strong></p>
여인의 이 슬기로움은 예수님 말씀에 악의가 없음을 믿어준 것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었고, 예수님도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이때의 예수님이 보이신 침묵과 모욕적인 반응을 냉담으로 읽으면 참 뜻을 놓칩니다. 이방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침묵은 차별이나 거절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을 더욱 숙성되게 이끌어주시는 여백이었습니다. 여인은 슬기롭게도 예수님의 침묵과 냉담을 견디며, 예수님의 긍휼하심 안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침묵과 모욕을 멈추시고, 여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마 15:28</strong></p>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코 값싸지 않습니다. 요셉의 시험도, 예수님의 침묵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참된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진실한 회개가 필요하고, 성숙한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인내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 역시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 롬 11:31 새번역</strong></p>
지금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죄를 눈감아 주시고 간과해 주시는 무분별한 관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롬 11:32)이라고 말합니다. ‘가두어두심’은 헬라어로 ‘쉬네클레이센(συνἐκλεισεν)’인데, ‘완전히 봉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불순종에 감금되고 봉쇄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벗어날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감금하신 것일까요? 그들의 화인맞은 양심(딤전 4:2)이 각성되어,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감금되어 있는 저마다의 불순종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오래된 서적(書籍)’에서 그러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라 고백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25-26쪽</p>
우리의 내면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쉽게 펼쳐 보일 수 없는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요셉의 형들에게도 그런 페이지가 있었습니다. 스무 해가 넘도록 덮어 두었던 페이지, 동생을 구덩이에 던지고, 상인에게 팔아넘기고, 피 묻은 옷을 아버지 앞에 내밀며 거짓으로 울던 검은 페이지입니다. 우리는 그 검은 페이지에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회개하게 하신 다음 회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바울은 이 신비를 묵상하다가 마침내 이렇게 찬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 롬 11:33</strong></p>
다 설명할 수 없는 지혜 앞에서 인간의 말을 중단하고 무릎 꿇는 자리, 이것을 사막의 수도자들은 ‘관상적 믿음’이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관상하며, 죄를 죄로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만찬 식탁은 회개하며 나아오는 자리입니다. 성만찬 식탁은 진실로 예수님을 찾는 자리입니다. 회개하며 나아오는 자녀에게 이 식탁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환대와 기쁨의 식탁이 됩니다. 이 식탁에서 주님의 환대와 은혜를 맛보고, 어둠이 아닌 빛의 페이지를 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회개 없는 값싼 은혜에 중독되어 있지 않은가?

② 회개를 통해 용서와 자비를 경험하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1 Aug 2026 22:09: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8.23]]></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8]]></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장학생 선발 공고 |</strong> 교회내 장학생, 교회 외 장학생
⋅장학생 추천 서류 접수 마감: 2026. 8. 23(일)
⋅장학생 면접 및 심의: 2026. 8. 30(일)
⋅선발 결과 발표 및 장학금 지급: 2026. 9. 6(일)

<strong>② 쌍샘자연교회 탐방</strong>
2026년 우리교회 목회계획대로 ‘티베리아 선교위원회’를 통한 마을선교(마을 전체를 선교지 삼아, 북(Book) 카페, 마을 도서관 등으로 이웃을 섬기는 선교) 시작을 앞두고 쌍샘자연교회를 탐방합니다. 쌍샘자연교회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생태공동체, 마을공동체로서 ‘도서관 (봄눈)’, ‘서점 (돌베개)’, 산촌유학, 자연학교 등 대안교육, 찻방, 노아 공방을 통해 이웃과 함께하며, ‘자연, 문화, 영성’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에 두고 녹색선교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24일(월) 아침 7시 출발합니다.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4주차 녹색 실천
⋅재생 에너지 전환에 대한 책을 읽읍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한 줄 기도 “창조세계의 아픔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해 행동 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와 위험한 에너지를 넘어,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생태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관련 서적을 읽으며 지혜를 모으는 것은 창조세계를 지키는 거룩한 실천이자 생태적 연대의 시작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1 Aug 2026 21:58: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7]]></link>
			<description><![CDATA[<p>매번 똑같은 보험사만 쓰다가 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에서 전격 비교 후 더 저렴한 곳으로 가입했습니다.</p>
<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nakdo.kr"> 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김민정]]></author>
			<pubDate>Wed, 19 Aug 2026 11:03: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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