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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해운대감리교회</title>
		<link>http://hudmc.org</link>
		<description>사랑하고 축복합니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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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4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6]]></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4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출 3:1-15</strong>
<strong>1</strong>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strong>2</strong>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strong>3</strong>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strong>4</strong>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strong>5</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strong>6</strong>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 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strong>7</strong>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strong>8</strong>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strong>9</strong>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strong>10</strong>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strong>11</strong>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strong>12</strong>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strong>13</strong>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strong>14</strong>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strong>15</strong>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5
<strong>1</strong>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 불러라
○ 그 장하신 일들을 만민에게 | 알게 하여라
<strong>2</strong> 그분께 노래불러라, 수금 타며 노래 | 불러라
○ 놀라운 그 일들을 말할지어다
<strong>3</strong>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라
○ 여호와를 찾는 마음에 | 기쁨 있어라.
<strong>4</strong> 여호와를 찾아라, 그의 힘을 | 빌려라
○ 그의 얼굴을 항상 | 구할지어다
<strong>5</strong>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 | 하여라
○ 그 입으로 내리신 판단을 | 명심하여라
<strong>6</strong> 그분이 바로 여호와 우리 | 하나님
○ 그의 판단이 온 | 땅에 있도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12:9-21</strong>
<strong>9</strong>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strong>10</strong>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strong>11</strong>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strong>12</strong>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strong>13</strong>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strong>14</strong>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strong>15</strong>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strong>16</strong>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strong>17</strong>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strong>18</strong>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strong>19</strong>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strong>20</strong>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strong>21</strong>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6:21-28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1</strong>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strong>22</strong>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strong>23</strong>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strong>24</strong>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strong>25</strong>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strong>26</strong>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strong>27</strong>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strong>28</strong>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16:23절 묵상하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출 3:11절 묵상하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께 한 대답에서 모세의 어떤 내적 상태를 느낄 수 있습니까?

③ 롬 12:9-11절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 안에서만 볼 때, ‘하나님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h2>
오늘 복음서는 지난 주 복음서의 내용과 당황스러울만큼 뚜렷한 대조를 보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시라고 고백함으로써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예수님께 칭찬을 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는 고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고 “그리 마시라”고 항변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며 예수님께 책망을 듣는 모습을 봅니다. 왜 마태는 이런 대립적인 베드로의 모습을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해 두었던 것일까요?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도 그렇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그 안에 본질적으로 이런 대립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사람으로서 고난 당하고 죽임까지 당하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대립적인 요소인데, 이 신비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베드로는 어떤 때는 칭찬을 들었다가 또 어떤 때는 꾸중을 듣고 맙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딱한 모습은 오늘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당연히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가 반역자에게 내리던 가장 수치스럽고 잔혹한 처형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처형 당한 구원자’ 이것은 그 시대 상식으로는 도무지 삼킬 수 없는 모순(矛盾)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바로 그 모순 한복판에서 시작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마 16:21</strong></p>
여기서 ‘이 때로부터’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바로 그 순간부터를 의미합니다. 이 때로부터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시며, 닥쳐올 그 길을 향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그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드로의 반론이 튀어나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마 16:22</strong></p>
여기서 ‘항변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꾸짖다, 책망하다’라는 의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실 때 쓰시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던 그 입술이, 이제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안다는 듯 스승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의 안타까움과 사랑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심이 곧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이 서릿발 같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strong></p>
“내 뒤로 물러가라(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이 말씀을 저주로만 들으면 절반만 들은 것입니다. ‘내 뒤로’ 그 자리는 제자의 자리입니다. 제자란 본래 스승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지, 앞에서 길을 막고 이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스승을 앞질러 있을 뿐 아니라, 스승의 운명을 자기가 설계하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제자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겸손히 뒤에서 따르는 제자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사람의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게 뭐겠습니까? 25절과 26절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고, ‘온 천하를 얻고자 하는 집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집착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마 16:25</strong></p>
‘사람의 일’은 결국 목숨을 잃게 하고, ‘하나님의 일’은 결국 목숨을 찾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단순한 삶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이 걸린 사안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걱정하는 베드로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사탄이라며 다그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은 좀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생명을 가리키는 두 낱말이 있습니다. ‘프쉬케(ψυχή)’와 ‘조에(ζωή)’입니다. ‘프쉬케’가 숨쉬며 늙어 가는 육체에 속한 목숨이라면, ‘조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참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절묘하게도 ‘프쉬케’를 두 번 쓰시면서 그 무게를 뒤집으십니다. “누구든지 제 ‘육체의 목숨(프쉬케)’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프쉬케’를 잃는 자는 참 생명을 찾으리라.” 움켜쥐면 빠져나가고, 내려놓으면 채워진다는 이 역설이 오늘 말씀의 심장이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기 위해 바로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 16:24</strong></p>
“자기를 부인하라” 여기 쓰인 동사 ‘아파르네사스토(ἀπαρνησάσθω)’에는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훗날 새벽 닭이 울기 전, 이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데(마 26:71-75; 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18, 25-27), 각 복음서에서 그 때 사용된 동사가 바로 이 ‘아파르네오마이(ἀπαρνέομαι)’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할 때,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불행하게도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마는 역설을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봅니다. 자기를 비워내지 않으면 주님을 밀어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학과 다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의 다른 말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주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범죄자가 자기가 처형당할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사형장까지 걸어갈 때 쓰는 표현입니다. 유다의 대반란 때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했던 제자들(행 5:37)은 이 십자가의 의미를 생생하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 의미를 도리어 가장 값진 것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당신 제자들 역시 당신처럼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바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배교하지 않는 한 죽임 당하던 시대에, 그들에게 순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죽음에 몸으로 동참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잇대어지는 가장 값진 신앙이고 영성이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순교의 대열에 서서 거룩하고 의연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박해가 사라지고, 순교할 상황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나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고, ‘삶으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저마다 십자가를 지는’ 이른바 ‘하얀 순교’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메마른 사막에서 거짓 자아와 싸움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잇대어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인해 ‘청빈과 정결과 순명(順命)’의 삶을 살아냈고, 그러한 수덕(修德)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서방의 두 영성가가 잊을 수 없는 언어로 새겨 두었습니다.

먼저 ‘십자가의 성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을 한 폭의 산으로 그리고, 그 정상으로 오르는 오솔길 위에 오직 한 단어를 새겼습니다. ‘나다(nada)’ 즉 ‘아무것도 아님’입니다. 그는 “매사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신의 생활을 그리스도의 삶에 맞추어 나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흠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십자가의 성 요한/최민순 옮김 ｢가르멜의 산길｣(바오로딸) 60-75쪽</p>
얼핏 체념처럼 들리지만, 그가 가리키는 ‘나다(nada)’는 텅 빈 허무가 아니라 넘치는 충만입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 신비주의 최고의 정신으로 불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그리스도인의 ‘비움’에 대해 ‘버리고 떠나 있음(Abgeschiedenheit)’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했습니다. 여기서 ‘버리고 떠나 있음’이란, 세상 만물과 그 결과에서, 심지어 내가 머릿속에 그린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념’마저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버림’을 ‘영적 가난’이라고도 부른바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되게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참된 가난은 갖고 있는 것을 단순히 버릴 뿐 아니라, 단적으로 어떤 것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버린다. 참다운 가난은 오로지 하나님께 대한 의지만 가질 따름이지,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베어/이부현 옮김 ｢독일 신비주의 최고의 정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안티쿠스) 168-170쪽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가난은 ‘비어있음’인데, 이 비어 있는 존재는 항상 신적 생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마 16:26</strong></p>
그렇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참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세상을 다 얻지는 못해도 참 생명을 얻는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염려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라고 꾸짖으실 만큼 단호하셨던 것입니다. 이 베드로를 향한 단호함은 미움이 아니라, 그를 참 생명으로 이끄시려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마 16:27</strong></p>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긴박감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이 긴박감 안에서 살았습니다. “주님 오늘 오십니까?” 하고 물으며 종말적 긴장감 안에서 살았기에 그들은 단 한 순간도 그리스도인 아닌 날이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출 3:4-5</strong></p>
혈기 왕성한 40세에 미디안 광야에 들어와 어느덧 80세 노인이 되어버린 모세입니다. 그는 이제 이집트 왕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히브리들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는 초라한 살인 용의자요, 도망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살인자가 되어 찾아온 미디안은 철저하게 모세의 꿈과 미래를 빼앗았고, 그는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렇게 회한이 가득한 황혼을 맞이하는 그를 하나님께서 찾으실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동안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를 잊어버리지 않으셨고, 어느 날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는 하나님 음성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모세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출 3:5</strong></p>
하지만 모세에게 그곳은 거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양 떼를 몰고 오가던 흔하디흔한 광야였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숨어있던 유배지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소명이 임하자, 그 평범한 광야가 거룩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거룩함은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 여부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타지 않는 떨기나무야말로 오늘 말씀의 그림입니다. 불에 타면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 우리 또한 자기를 비워 죽되 사그라지지 않고, 비움 속에서 하나님의 불꽃을 담아내는 존재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인들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롬 12:9</strong>
<strong>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롬 12:21</strong></p>
선과 악이 공존하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우리의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주님을 그리스도시라 고백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우리로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가 선 모든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땅인 줄 알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삶을 살아가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유한성과 무의미성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에 합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땅의 욕망에 겨워 ‘사람의 일’에 집착해 살아오지 않았는가?

② 참다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4 Sep 2026 22:25: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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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교회소식 2026.09.06]]></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오늘부터 재개합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strong>② 2026 해운대교회 장학생</strong>
바 울 장학생 : 김성찬 김유나
베드로 장학생 : 김규민 김예준 서예흔
교회외 장학생 : 임유리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5주차 녹색 실천
⋅창조절에 관련된 성경말씀을 묵상합시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시 19:1)
⋅한 줄 기도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임을 깨닫고, 그 아름다움과 아픔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창조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세계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돌아보고, 우리가 창조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성찰하는 시간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4 Sep 2026 22:11: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8.30]]></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1]]></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9월 첫 주부터 재개합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strong>② 쌍샘자연교회 탐방</strong>
지난 24일(월) 잘 다녀왔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참여하신 분들과 식사와 차(茶), 그리고 운전으로 섬겨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탐방목적은 이후 우리교회가 감당해야 할 마을선교를 앞두고 본 받을 교회를 돌아본 것입니다. 쌍샘자연교회는 2008년 녹색교회로 지정되었고, 20여년 전부터 마을공동체로서 ‘도서관(봄눈)’, ‘서점(돌베개)’, 산촌유학, 자연학교 등 대안교육, 찻방, 노아 공방 등을 통해 이웃과 함께하며, ‘자연, 문화, 영성’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에 두고 녹색선교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4주차 녹색 실천
⋅필요한 물품을 제로 웨이스트샵에서 구매해 봅시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빌 2:4)
⋅한 줄 기도 “편리함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쓰레기를 줄이는 거룩한 소비로 지구를 돌보게 하소서.”
⋅포장재와 쓰레기를 줄이는 제로웨이스트 소비는 지구와 미래 세대를 향한 실천적 사랑입니다. 용기를 가져가 내용물만 담아오고 친환경 물품을 이용하는 작은 노력이 지구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8 Aug 2026 21:06: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2주 시험하는 요셉, 시험하시는 주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80]]></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2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45:1-15</strong>
<strong>1</strong>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strong>2</strong>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strong>3</strong>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strong>4</strong>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strong>5</strong>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strong>6</strong>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strong>7</strong>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strong>8</strong>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strong>9</strong>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strong>10</strong>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strong>11</strong>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strong>12</strong>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strong>13</strong>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strong>14</strong>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strong>15</strong>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33편, 67편
<strong>1</strong> 형제들 모두 모여 함께 | 사는 일
○ 어찌 그리 선하고 | 아름다운고
<strong>2</strong> 아론의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 기름이
○ 수염을 타고 흘러 옷깃까지 | 내림 같도다
<strong>3</strong>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 같도다
○ 굽이굽이 내리는 | 이슬같구나
<strong>4</strong> 그곳은 주께서 복을 | 내린 곳
○ 그 복은 | 영생이로다
<strong>5</strong>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 하시며
○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 | 하게 하소서
<strong>6</strong>  세상이 당신의 길을 알게 | 하시고
○ 만방이 당신의 구원을 | 알게 하소서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11:1-2a, 29-32</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strong>2</strong>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strong>29</strong>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strong>30</strong>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strong>31</strong>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strong>32</strong>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5:21-28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1</strong>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strong>22</strong>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strong>23</strong>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strong>24</strong>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strong>25</strong>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strong>26</strong>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strong>27</strong>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strong>28</strong>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45:1-2절 묵상하십시오. 요셉의 오랜 침묵은 언제 무너집니까?(창44:30-34 참조)

② 마 15:23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침묵은 여인을 향한 거절입니까? 아니면 그녀의 믿음이 드러나기까지의 여백입니까?

③ 롬 11:30-31절 묵상하십시오. “너희(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그들(유대인)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시험하는 요셉, 시험하시는 주님</h2>
서방 수도전통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도는 수도 규칙 제58장에서 ‘형제들의 입회 절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 수도생활을 하고자 처음으로 찾아오면 그에게 쉽게 입회를 허락하지 말고 그의 정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볼 것이다. 만일 그 찾아온 사람이 항구히 문을 두드리고 자기가 당하는 푸대접과 입회의 어려움을 4, 5일까지 인내로이 참아 견디며 그의 청원이 꾸준해 보이거든 그에게 입회를 허락하고 며칠 동안 객실에 있게 할 것이다. 그곳에서 묵상하게 하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지, 하나님의 일과 순명과 모욕을 잘 견뎌내는지 살펴야 한다. 베네딕도/이형우 역주 ｢수도 규칙｣(분도출판사) 209-211쪽

하나님께 나아오기 위해 찾아온 사람을 4, 5일 동안 밖에 세워두는 대목의 라틴어 핵심 표현은 “누가 수도생활을 하고자 처음으로 찾아오면(Si venerit quis ad conversationem)”으로 시작하며, “쉽게 들이지 말라(non ei facilis tribuatur ingressus)”는 구절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지를 살피라(si revera Deum quaerit)”라는 유명한 문장이 이 시험의 목적을 밝혀 줍니다. 이 문장을 요약하면 “쉽게 들이지 말라.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진실로(revera)’ 하나님을 찾는지 보기 위함이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구약성서에서,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다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대상(隊商)들에게 팔아버리는 비정한 장면을 보았습니다(창 37:12-36).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애굽에 팔려가 모진 시간들을 견딘 끝에(창 39:1-40:23), 바로의 꿈을 해석해줌으로써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보게 되고(창 41:1-43), 이후 그의 꿈대로 일곱 해 동안 흉년이 온 세상을 휩쓸면서(창 41:54-57) 기근을 견디지 못한 그의 형들이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오는 장면도 보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온 형들은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한 눈에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창 42:8). 이때 요셉이 형들에게 식량을 주어야 하는지의 여부는 그들의 변화 즉 회개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자기의 형들을 시험하며 살피게 됩니다(창 42:9-44:34). 그가 살피는 이유는 단 하나 “형들이 ‘진실로(revera)’ 변하였는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선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이라며 몰아세워 봅니다(창 42:9–14). 무죄를 스스로 변호하게 함으로써, 형들이 자기 처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족의 진실을 얼마나 정직하게 털어놓는지를 봅니다. 형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는 중에 “우리는 열둘이었으나 하나는 없어졌다”( 창42:13)라며 요셉의 부재를 털어놓습니다. 또 요셉은 형들을 사흘간 가두어두었다가 시므온만 인질로 잡아둔 채 형들을 풀어줘서 그들의 형제애를 시험해 봅니다(창 42:15–24). 이 압박 속에서 형들은 서로에게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다”(창 42:21)라며 옛 죄를 후회합니다. 또 요셉은 자루에 곡식값을 몰래 되돌려 넣어, 형들의 양심을 시험해보기도 합니다(창 42:25-28), 뿐만 아닙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라헬의 막내 아들인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한 요셉은, 잔치를 배설한 후에 형들을 나이순으로 앉히고, 베냐민에게 다른 형들보다 다섯 배 많은 몫을 줍니다. 옛날 채색옷과 같은 노골적 편애를 눈앞에 재현하여, 형들이 예전처럼 시기로 반응하는지를 살핀 것입니다. 다행히 형들은 베냐민을 질투하지 않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창 43:1-34). 하지만 요셉의 시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몰래 넣어 도둑으로 몰고, 베냐민만 종으로 잡아 두고 나머지는 평안히 돌아가라는 조건을 제시합니다(창 44:17). 이것이 마지막이자 가장 날카로운 시험이었습니다. 형들이 또 하나의 라헬의 아들인 베냐민을 버리고 자기들 목숨만 살자고 떠날 것인지를 살핀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절절히 아뢰고,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으로 남겠다고 간청합니다(창 44:33). 한때 요셉을 팔자고 앞장섰던 바로 그 유다가(창 37:26–27), 지금은 아우를 위해 제 자유를 내어놓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입술의 말이 아닙니다. 눈물 몇 방울이 아닙니다. 자기 미래를 통째로 건 결단입니다. 유다는 자기 자유를 담보로 내놓았습니다. 값을 치른 회개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돌이킴이 있고, 값을 치름이 있고,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유다는 ‘동생을 버리는 자’에서 ‘동생을 지키는 자’로 돌아섰습니다. 그 돌이킴이 실제로 자기 미래를 건 진정한 돌이킴이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회개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듯 여러 상황에 형들을 몰아넣고 살펴본 끝에 형들이 진심으로 변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시험과 확신이 오늘 구약 성서일과가 있게 된 배경입니다. 요셉은 값싼 화해를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혹독한 시험을 통해 형들을 살핍니다. 성급히 형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막아버리는 것임을 알았기에, 끝까지 형들을 시험하고 살피며, 회개의 진정성이 익을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통곡하는 요셉을 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 창 45:1-2</strong></p>
스무 해 동안 가슴에 감추고 있었던 상처가 한 번의 통곡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이 통곡은 단지 감정에 휩쓸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형들의 회개를 확인한 눈물입니다. 형들의 값을 치른 회개가 있었기에, 비로소 자신을 알릴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화해가 이루어지는 눈물이었습니다. 20세기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이것을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값비싼 은혜’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철천지원수다. 오늘날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총을 얻기 위한 것이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이요. 떨이로 팔아버린 사죄요. 떨이로 팔아버린 위로요. 떨이로 팔아버린 성례전이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의 참회가 없는 용서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 본회퍼/손규태.이신건 옮김 ｢나를 따르라-그리스도의 제자직｣(대한기독교서회) 33-35

오늘날 값싼 은혜가 한국 교회를 덮고 있습니다. 참회가 없는 사죄,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 십자가와 뒤따름이 없는 은혜가 싸구려 신앙의 주범입니다. 이런 싸구려 은혜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오해되다 보니, 세례를 통해 구원 받은 것에 안주해서, 이후 신앙의 여정에서 요청되는 회개와 성화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표면적이고 교리적인 종교인,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4). 예수님은 “회개하거든”이라고 분명한 조건을 명시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언약적 용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솔라흐(סָלַח)’도 대개 ‘돌이킴’을 의미하는 ‘슈브(שׁוּב)’를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회개 없이 죄를 없던 일로 선언하는 것은 오히려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신학적 경고가 단어에서도 드러납니다. 값비싼 은혜는 사람을 돌이키게 해줍니다. 삶을 바꾸게 하고, 값을 치르게 해줍니다. 그래서 값비싼 은혜란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습니다. 유다의 회개가 값비쌌기 때문에, 요셉의 눈물도 값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요셉의 중요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 창 45:4</strong></p>
요셉은 형들을 껴안으면서도, 그들의 죄는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힌 후에, 그 위에 하나님의 더 크신 뜻이 있었음을 비로소 밝힙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창 45:5</strong></p>
때때로 죄가 선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가룟 유다의 탐욕으로 인한 예수님의 수난이 인류에게 십자가의 은총을 가져다주었듯이,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인한 요셉의 수난이 몰아닥친 기근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선용된 사례입니다. 우리 교회도 사적 욕망에 미혹된 사람들에 의해 성전 건축이 하염없이 지연되는 힘겨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방해가 하나님의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획을 역전시켜 건축이 속도를 내게 하셨고, 순수한 뜻을 가진 교우들에 의해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사 사무소와 시공사를 선정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감격해 하는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어긋난 계획마저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선용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하십니다. 그때 한 가나안 여인이 부르짖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 마 15:22</strong></p>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마태는 이때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 15:23)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래 침묵하시는 장면은 드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갈수록 더 냉정하게 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마 15:24</strong></p>
그런데 우리가 더 놀라는 건 여인이 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여인은 절까지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 15:25)라고 도무지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라시며 한층 더 모욕적으로 몰아부치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마 15:27</strong></p>
여인의 이 슬기로움은 예수님 말씀에 악의가 없음을 믿어준 것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었고, 예수님도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이때의 예수님이 보이신 침묵과 모욕적인 반응을 냉담으로 읽으면 참 뜻을 놓칩니다. 이방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침묵은 차별이나 거절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을 더욱 숙성되게 이끌어주시는 여백이었습니다. 여인은 슬기롭게도 예수님의 침묵과 냉담을 견디며, 예수님의 긍휼하심 안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침묵과 모욕을 멈추시고, 여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마 15:28</strong></p>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코 값싸지 않습니다. 요셉의 시험도, 예수님의 침묵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참된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진실한 회개가 필요하고, 성숙한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인내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 역시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 롬 11:31 새번역</strong></p>
지금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죄를 눈감아 주시고 간과해 주시는 무분별한 관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롬 11:32)이라고 말합니다. ‘가두어두심’은 헬라어로 ‘쉬네클레이센(συνἐκλεισεν)’인데, ‘완전히 봉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불순종에 감금되고 봉쇄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벗어날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감금하신 것일까요? 그들의 화인맞은 양심(딤전 4:2)이 각성되어,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감금되어 있는 저마다의 불순종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오래된 서적(書籍)’에서 그러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라 고백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25-26쪽</p>
우리의 내면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쉽게 펼쳐 보일 수 없는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요셉의 형들에게도 그런 페이지가 있었습니다. 스무 해가 넘도록 덮어 두었던 페이지, 동생을 구덩이에 던지고, 상인에게 팔아넘기고, 피 묻은 옷을 아버지 앞에 내밀며 거짓으로 울던 검은 페이지입니다. 우리는 그 검은 페이지에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회개하게 하신 다음 회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바울은 이 신비를 묵상하다가 마침내 이렇게 찬미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 롬 11:33</strong></p>
다 설명할 수 없는 지혜 앞에서 인간의 말을 중단하고 무릎 꿇는 자리, 이것을 사막의 수도자들은 ‘관상적 믿음’이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관상하며, 죄를 죄로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만찬 식탁은 회개하며 나아오는 자리입니다. 성만찬 식탁은 진실로 예수님을 찾는 자리입니다. 회개하며 나아오는 자녀에게 이 식탁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환대와 기쁨의 식탁이 됩니다. 이 식탁에서 주님의 환대와 은혜를 맛보고, 어둠이 아닌 빛의 페이지를 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회개 없는 값싼 은혜에 중독되어 있지 않은가?

② 회개를 통해 용서와 자비를 경험하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1 Aug 2026 22:09: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8.23]]></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8]]></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장학생 선발 공고 |</strong> 교회내 장학생, 교회 외 장학생
⋅장학생 추천 서류 접수 마감: 2026. 8. 23(일)
⋅장학생 면접 및 심의: 2026. 8. 30(일)
⋅선발 결과 발표 및 장학금 지급: 2026. 9. 6(일)

<strong>② 쌍샘자연교회 탐방</strong>
2026년 우리교회 목회계획대로 ‘티베리아 선교위원회’를 통한 마을선교(마을 전체를 선교지 삼아, 북(Book) 카페, 마을 도서관 등으로 이웃을 섬기는 선교) 시작을 앞두고 쌍샘자연교회를 탐방합니다. 쌍샘자연교회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생태공동체, 마을공동체로서 ‘도서관 (봄눈)’, ‘서점 (돌베개)’, 산촌유학, 자연학교 등 대안교육, 찻방, 노아 공방을 통해 이웃과 함께하며, ‘자연, 문화, 영성’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에 두고 녹색선교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24일(월) 아침 7시 출발합니다.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4주차 녹색 실천
⋅재생 에너지 전환에 대한 책을 읽읍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한 줄 기도 “창조세계의 아픔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해 행동 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와 위험한 에너지를 넘어,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생태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관련 서적을 읽으며 지혜를 모으는 것은 창조세계를 지키는 거룩한 실천이자 생태적 연대의 시작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1 Aug 2026 21:58: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7]]></link>
			<description><![CDATA[<p>매번 똑같은 보험사만 쓰다가 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에서 전격 비교 후 더 저렴한 곳으로 가입했습니다.</p>
<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nakdo.kr"> 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김민정]]></author>
			<pubDate>Wed, 19 Aug 2026 11:03: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8.16]]></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5]]></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8월 ‘가족 초청 영화제’ 후 계속됩니다.

<strong>② 교육부 여름 행사 감사</strong>
유치부 여름성경학교(창조세계 탐험), 청년부 여름수련회(코스타 부산), 아동부 여름 캠프(성서유니온 올자람)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안전하고 은혜롭게 마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준비 과정부터 마칠 때까지 헌신하고 수고하신 전도사님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③ 부산동지방 성경골든벨 대회</strong>
22일(토) 오후1시 ▶부산 온누리교회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3주차 녹색 실천
⋅디지털 기기에서 절전모드와 다크모드를 사용합시다.
⋅낮도 주님의 것이요, 밤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달과 해를 제자리에 두셨습니다.(시 74:16)
⋅한 줄 기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피며 일상 속 작은 빛 하나도 아끼는 절제의 마음을 주소서.”
⋅화면을 켜두는 순간에도 전력이 소비되고 데이터센터는 탄소를 배출합니다. 디지털 기기의 절전모드와 다크모드 사용은 눈의 피로를 줄일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현대적 절제 실천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5 Aug 2026 11:59: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다이렉트자동차보험비교]]></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4]]></link>
			<description><![CDATA[<p> </p>
<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usjsc.kr"> 다이렉트자동차보험비교</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Mon, 10 Aug 2026 01:39: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11주 가까이 있는 시련, 가까이 계신 주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3]]></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11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37:1-4, 12-28</strong>
<strong>1</strong>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strong>2</strong>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strong>3</strong>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strong>4</strong>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strong>12</strong>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strong>13</strong>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strong>14</strong>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strong>15</strong>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strong>16</strong>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strong>17</strong>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strong>18</strong>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strong>19</strong>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strong>20</strong>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strong>21</strong>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strong>22</strong>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strong>23</strong>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strong>24</strong>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strong>25</strong>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strong>26</strong>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strong>27</strong>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strong>28</strong>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span class="name">요셉</span>을 데리고 <span class="area">애굽</span>으로 갔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5:1-6, 16-22
<strong>1</strong>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 불러라
○ 그 장하신 일들을 만민에게 | 알게 하여라
<strong>2</strong> 그분이 바로 여호와 우리 | 하나님
○ 그의 판단이 온 | 땅에 있도다
<strong>3</strong>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 | 셨도다
○ 요셉이 종으로 | 팔려갔도다
<strong>4</strong> 요셉의 발에 차꼬를 | 채우고
○ 몸에는 쇠사슬을 | 매어놓았다
<strong>5</strong>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응할 | 때까지
○ 말씀이 그를 | 단련했도다
<strong>6</strong>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의 사슬을 풀어 | 주었고
○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의 몸이 | 되게 하였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10:5-15</strong>
<strong>5</strong>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strong>6</strong>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strong>7</strong>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strong>8</strong>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strong>9</strong>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strong>10</strong>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strong>11</strong>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strong>12</strong>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strong>13</strong>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strong>14</strong>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strong>15</strong>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strong>마 14:22-33절</strong>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2</strong>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strong>23</strong>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strong>24</strong>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strong>25</strong>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strong>26</strong>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strong>27</strong>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strong>28</strong>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strong>29</strong>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strong>30</strong>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strong>31</strong>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strong>32</strong>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strong>33</strong>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창 37:23-24절 묵상하십시오. 요셉을 구덩이에 던진 자들은 낯선 원수입니까, 아니면 누구입니까?

②마 14:27절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밝히신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③롬 10:8절 묵상하십시오. 위협받는 이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디에 있다고 말씀합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가까이 있는 시련 가까이 계신 주님</h2>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é Noël Théophile Girard)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을 비교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와 양상을 분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화는 집단 폭력의 희생물을 죄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완전히 잘못이고, 환상이며 그러므로 거짓이다. 신화는 항상 속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화 자신도 속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서는 희생물을 무고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고 믿을만하며, 그러므로 참이다. 르네 지라르/김진식 옮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14-15쪽

성경은 폭력을 저지른 자들의 편이 아니라, 폭력을 당해서 땅에 묻힌 자, 팔려 간 자, 즉 희생양의 편에 서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요셉과 형들을 대표적 사례로 언급하며 요셉 이야기에서 폭력을 일으키는 것은 ‘열 형제의 질투’라고 단정합니다. 위의 책 140쪽

한 소년이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은 이십에 팔려 애굽으로 끌려 내려갑니다. ‘무리’가 ‘한 사람’을 밀어낸 것입니다.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두 가지 원인을 귀띰해 줍니다. 하나는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고(창 37:2), 다른 하나는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해서 그에게만 채색옷을 입힌 것에 대한 형들의 시기 때문입니다(창 37:3). 이 이야기를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우리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살만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아버지의 편애(偏愛)를 독차지 하고 있는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덮어주지 않고 고자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들이 내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더이다”(창 37:7)라는 황당한 꿈 이야기까지 하니, 가뜩이나 의리도 없는 데다, 눈치마저 없는 이런 동생을 어떻게 형들이 좋아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이 이 이야기를 ‘밀어낸’ 형들의 시선이 아니라 ‘밀려난’ 요셉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요셉에 대한 섣부른 편견을 갖기 전에 그의 형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지금까지 어떤 짓을 저질러 왔는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과거 그들 중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여동생 디나가 하몰의 아들인 추장 세겜에게 겁탈을 당하자(창 34:1-2), 칼을 가지고 가서 세겜만 죽인 것이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남자들을 다 죽이고, 양과 소와 나귀와 재물을 노략질하고 자녀와 아내들까지 빼앗아왔으면서도(창 34:25-29),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반복됩니다. 요셉은 그들이 세겜에서 한 짓과 같은 짓들을 훗날에도 계속 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고, 묵과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세겜 사건 이후 그들의 행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죄가 현재도 반복되고 있다고 단정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마저 그렇게 쉽게 죽이려 하고(창 37:18, 끝내 애굽의 상인에게 팔아넘겨 버리는 것을 보면(창 37:25-28), 현재 그들에게서 과거의 죄가 회개되지 않은 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죄에 대해 남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굽으로 팔려가 주인의 회계 일을 맡았을 때(창 39:4-6a),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성적으로 유혹했을 때(창 39:6b-12),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6) 라며 마음을 지켜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야곱이 그를 부르더니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창 37:14)라며 심부름을 보냅니다. 형들의 안부를 살피러 간 요셉은 천진난만하게 형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멀리서 그를 알아본 형들이 ‘죽이기를’ 꾀하며(창 37:18)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야,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아무 구덩이에나 처넣고는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보자 | 창 37:19-20 공동번역</strong></p>
우리는 흔히 폭력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만 상상합니다. 세상의 압력, 시대의 격랑, 낯선 적대, 그러나 성경이 가장 아프게 증언하는 폭력은 언제나 안에서 저질러졌습니다. 아벨은 형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역모를 겪었고, 주님은 한 상에서 떡을 적셔먹던 제자에 의해 팔렸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 계보의 첫 장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우리가 인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이성부(Reasonable Part)와 정념부(Irascible Part)와 욕망부(Concupiscible Part)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이런 삼중 구분은 ‘그리스 철학전통’ 특히 플라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바그리우스 인간학의 주요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이성부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 하나님을 닮은 곳이며, 하나님처럼 ‘비물질적’이고 ‘비육체적’입니다. 이 이성이 정화되고 정돈되면 매우 인격적인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인격에 도달한 존재를 ‘이성의 능력을 부여받은 혼(psyche logike)’이라 부르고,창조주인 신적 로고스(logos)와 관계시켜 ‘로고스의 씨앗들(logoi)’이라 불렀습니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남성현 옮김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실천학｣(새 물결 플러스 ) 34쪽
하지만 이 ‘이성부’도 공격을 받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인간이 직면하는 여덟 가지 악(惡) 중에서 교만이 공격하는 부분이 바로 이 이성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념부는 ‘마음과 관련된 유혹’ 즉 슬픔, 분노, 아케디아가 공격하는 부분이며, 욕망부는 ‘물질과 관련된 유혹’인 탐욕(貪慾)이 공격하는 부분입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허성석 역주.해제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34-35쪽
오늘 구약성경에서 요셉의 형들은 정념부와 욕망부 이 두 가지 유혹에 동시에 빠져서 요셉을 바라보며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고 음모를 꾸밉니다. 잔인하고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들을 보며 마음을 악에게 내어준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우리는 소름 끼치게 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넣은 채, 그 곁에 앉아 태연하게 음식을 먹습니다(창 37:25). 그리고 애굽으로 가는 대상(隊商)들이 오자 은 이십을 받고 동생을 팔아버립니다. 참으로 비정한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이 요셉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압니다. 여러 해가 흐른 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자기를 팔았던 형들 앞에서 울며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고난을 이야기할 때마다 서둘러 45장으로 건너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서일과가 우리 앞에 펼쳐 놓은 말씀은 45장이 아닙니다. 아직 37장입니다. 요셉은 버림 받은 마음의 상처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은 이십에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들의 마음을 지배했던 미움과 시기와 욕망이 얼마나 큰 고통과 비극을 몰고왔는지 보십시오. 요셉은 이때부터 형들에게 버림 받은 상처를 가슴에 끌어안고 청소년 시절을 살아야 했고, 어머니 라헬은 자식과 생이별을 당한 채로, 끝내 요셉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자기 아들들을 믿지 못해서 막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려고 할 때,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 하느냐”(창 44:29)라며 그 동안 감추고 있던 의심을 본능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누가 이 비극적인 가정사를 책임질 것입니까? 오늘 구약성경은 우리를 바로 그 미완의 자리,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자리에 세워 둡니다. 정화되지 않은 미움과 시기와 욕망이 교회와 사회, 이웃과 형제에게 얼마나 치유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기는지를 우리는 저들을 통해 절감합니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십계명은 어떤 ‘행위’를 금하기보다는 어떤 ‘욕망’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는 말씀에서 ‘탐내다’라는 동사는 ‘사악한 욕망’이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욕망이 인간 집단 가운데 경쟁적 갈등을 조장하기에, 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모든 공동체의 조화와 생존은 항상 위협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십계명이 제일 마지막 계명을 ‘네 이웃의 재산을 욕망하지 말라’에 할애한 이유 역시 모든 폭력의 원인이 ‘욕망’에 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19-22쪽

그러면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야 할까요? 오늘 응송은 요셉의 당시 고통을 노래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 시 105:18-19</strong></p>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이 한 절이 폭력의 시간을 견디는 신앙의 자세를 압축합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침묵으로 기다렸으며, 그 때에 말씀이 그를 단련했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창세기 강해에서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도 자기 무죄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소리쳐 폭로하지도 않았고, 그 죄를 서둘러 없던 일로 삼키지도 않았습니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기도’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기도하게 하소서</p>
<p style="padding-left:40px;">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p>
굽이치는 바다를 지나온 영혼이 마침내 마른 나뭇가지 위에 홀로 앉아 있는 그 정결한 고독, 그것은 원한으로 들끓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은 신앙의 자세입니다. 폭력의 구덩이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한 마음’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요셉이 구덩이에 내던져져 있었다면,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풍랑이 이는 바다에 처해집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마 14:22-24</strong></p>
그때 물 위를 걸어 다가오시는 형체를 보고 제자들은 “유령이라”하며 무서워하여 소리를 지릅니다(마 14:26). 두려움은 종종 우리에게 헛것을 보게 합니다. 다가오시는 그분이 구원자이셨음에도, 겁에 질린 눈에는 유령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짧은 한 마디를 던지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 마 14:27</strong></p>
여기 ‘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인데, 문자 그대로 옮기면 “나다”, “내가 여기 있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닙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밝히실 때 하셨던 그 말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와 같은 소개입니다. 두려움에 헛것을 보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내가 여기 있다”라며 주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거센 물결과 유령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임재를 우리는 어디서 붙듭니까?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대답해 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strong></p>
위협받는 사람은 대개 멀리서 답을 찾습니다. 주님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 하거나(롬 10:6), 무저갱으로 내려가 모셔 올리려 안간힘을 씁니다(롬 10:7). 그러나 바울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이미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고. 구원의 능력은 그렇게 우리 가까이에 계시니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들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롬 10:9-10</strong></p>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롬 10:13</strong></p>
요셉이 구덩이에서 붙든 것도, 제자들이 풍랑에서 붙든 것도 결국 하나입니다. 멀리 있지 않은 그 이름을 부르고,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서너 발자국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듭니다(마 14:30). 그러나 보십시오.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치자, 주님은 ‘즉시(유데오스 εὐθέως)’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습니다(마 14:31). 가라앉는 순간과 붙드시는 순간 사이에 아무 시차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이랬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마 14:32-33</strong></p>
아직 우리는 구덩이 속에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풍랑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믿음이 아닌 큰 믿음으로 보면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들으며 바람이 그친 바다를 내려다 보며, 우리 주님과 함께 행복한 미래로 노저어 가기를 축복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마음 속 시기와 미움과 욕망이 공동체에 폭력이 되고 있지 않는가?

② 말씀 안에서 가까이 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풍랑을 견뎌내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08 Aug 2026 21:18: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8.09]]></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8월 ‘가족 초청 영화제’ 후 계속됩니다.

<strong>② 유치부 여름성경학교 |</strong> 창조세계 탐험
8일(토)-9일(주일) ▶오전 10시20분-오후 12시20분

<strong>③ 청년부 여름수련회</strong>
11일(화)-13일(목) ▶코스타 부산

<strong>④ 아동부 여름 캠프 |</strong> 성서유니온 올자람
13일(목)-15일(토) ▶영덕 성서유니온 캠프장

<strong>⑤ 부산동지방 성경골든벨 대회</strong>
22일(토) 오후1시 ▶부산 온누리교회

<strong>⑥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2주차 녹색 실천
⋅휴가철에 비행기, 자가용 대신, 기차, 버스를 이용합시다.
⋅한 줄 기도 “더 빠르게 가는 길보다 지구와 이웃을 살리는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는 지혜를 주소서.”(렘 6:16)
⋅휴가철 이동에 사용하는 자가용과 비행기는 수많은 탄소를 배출합니다.기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느리고 생태적인 걸음은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을 줄이고, 주변의 피조물을 돌아보는 참된 휴식을 선사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7 Aug 2026 21:45: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자동차보험비교]]></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70]]></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sambowoonsu.co.kr"> 다이렉트자동차보험비교견적사이트</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이수정]]></author>
			<pubDate>Wed, 05 Aug 2026 13:36: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8.02]]></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9]]></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청소년부 여름수련회</strong>
4일(월)-5일(수) 평화캠프 2박 3일

<strong>③ 청년부 여름수련회</strong>
11일(화)-13일(목) 코스타 부산

<strong>④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31주차 녹색 실천
⋅여름철 냉방기 온도를 26도로 유지합시다.
⋅한 줄 기도 “편안함을 내려놓고, 피조세계와 함께 시원한 주님의 그늘을 나누게 하소서.”
⋅무더운 여름철, 지나친 냉방은 에너지를 과다 소비하고 과도한 실외기 열기로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합니다. 적정 냉방 온도 26도를 유지하는 작은 절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태계의 온도균형을 지키는 소중한 첫걸음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31 Jul 2026 22:10:4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자동차보험료비교견적사이트]]></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7]]></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height:0px;width: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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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Mon, 27 Jul 2026 09:55: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9주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6]]></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9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29:16-27</strong>
<strong>16</strong>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strong>17</strong>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strong>18</strong>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strong>19</strong>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strong>20</strong>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strong>21</strong>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strong>22</strong>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strong>23</strong>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strong>24</strong>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strong>25</strong>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strong>26</strong>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strong>27</strong>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05
<strong>1</strong>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 불러라
○ 그 장하신 일들을 만민에게 | 알게 하여라
<strong>2</strong> 그분이 바로 여호와 우리 | 하나님
○ 그의 판단이 온 | 땅에 있도다
<strong>3</strong> 그는,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 | 하신다
○ 자손 수천 대를 두고 명하신 말씀을 | 기억하신다
<strong>4</strong> 그것은 곧 아브라함과 맺으신 | 언약과
○ 이삭에게 | 하신 맹세요,
<strong>5</strong> 야곱에게 세워 주신 | 율례요,
○ 이스라엘이 지킬 영원한 | 언약이로다
<strong>6</strong>  이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 주노니
○ 대대로 물려줄 너희 | 유산이로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8:26-39</strong>
<strong>26</strong>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strong>27</strong>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strong>28</strong>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strong>29</strong>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strong>30</strong>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strong>31</strong>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strong>32</strong>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strong>33</strong>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strong>34</strong>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strong>35</strong>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strong>36</strong>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strong>37</strong>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strong>38</strong>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strong>39</strong>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3:31-33, 44-52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31</strong>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strong>32</strong>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strong>33</strong>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strong>44</strong>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strong>45</strong>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strong>46</strong>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strong>47</strong>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strong>48</strong>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strong>49</strong>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strong>50</strong>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strong>51</strong>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strong>52</strong>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29:31, 35절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레아에게서 보신 것은 무엇이며, 그녀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무엇입니까?

② 롬 8:32, 36절 묵상하십시오. 사도들이 기꺼이 죽임을 당하고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마 13:44절 묵상하십시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그가 보화를 얻기 위해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여호와께서 레아가 사랑받지 못함을 ‘보시고’</h2>

북유럽 회화(繪畫)의 아버지라 불리는 얀 반 에이크가 1434년에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한 부부가 손을 맞잡고 서 있는 실내 정경입니다. 남자는 검은 옷을 입고 손을 들어 올렸고, 여자는 초록빛 두꺼운 옷자락을 배 앞으로 모아 쥐고 있습니다. 화면의 모든 것이 이 두 사람을 향해 정돈되어 있습니다. 샹들리에의 촛불도, 창가의 오렌지도, 발치의 작은 개도 이들을 위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진짜 비밀은 두 사람 사이, 뒤쪽 벽에 걸린 손바닥만 한 볼록거울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부부의 뒷모습 너머로 두 사람이 더 서 있습니다. 그림의 정면에서는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화가는 거울 위에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곧은 거울은 눈앞의 것만 비춥니다. 그러나 볼록거울은 굽어 있기 때문에 곧은 거울이 안 보여주는 대상을 보게 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얀 반 에이크의 볼록렌즈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야곱과 라헬의 혼인 이야기입니다. 화면의 모든 것이 두 사람을 향해 정돈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보고,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고, 야곱이 라헬을 위해 칠 년을 섬기고, 그 칠 년을 며칠같이 여깁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프레임의 가장자리,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고 마는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더 서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레아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 창 29:16, 17</strong></p>
한 문장 안에서 두 자매가 비교됩니다. 한 사람은 시력이 약하고, 한 사람은 곱고 아리땁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야곱의 시선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레아를 지나쳐 라헬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잠시 멈춰서 레아를 중심에 놓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아(לֵאָה)’라는 이름은 ‘지치다’, ‘슬프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라아(לאה)’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시력이 약하고”라고 표현된 히브리어 ‘라코트(רַכּוֹת)’에 대해 ‘총기가 결여된 눈, 흐릿하고 광채 없는 눈’ 등으로 해석하는 주석가들도 있지만(국제성서주석 324쪽), 대부분 한국어와 영어 번역들은 사뭇 다른 감각으로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 그리고 KJV 성경은 ‘부드러운 눈(tender eyes)’으로 번역했고, NIV, RSV 성경에서는 ‘허약한 눈 weak eyes)’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눈 lovely eyes’(NJB, NAB)’, ‘예쁜 눈 pretty eyes’(NLT)을 가졌다고 번역한 성경들도 있습니다. 레아도 충분히 아름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전승 가운데는 이 눈을 전혀 다르게 읽는 해석이 전해집니다. 그 눈은 결함이 있는 눈이 아니라 울어서 약해진 눈이라는 것입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Bava Batra, 미드라쉬 라바 창세기편 등). 어쩌면 그녀는 어려서부터 동생의 그늘에 가려져 왔고, 남몰래 울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기도의 흔적일 수 있겠습니다. 혼인의 밤이 왔습니다. 라반은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저녁에 라헬이 아닌 레아를 야곱에게로 들여보내는 겁니다. 아버지는 딸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고, 딸은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은 신방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그녀가 저항했는지, 울었는지, 무슨 말이라도 했는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창 29:23)라고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옵니다. 야곱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과 마주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 창 29:25</strong></p>
원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아침이 왔다. 보라 그녀는 레아라!(바예히 바보케르 베힌네-히 레아 וַיְהִי בַבֹּקֶר וְהִנֵּה־הִוא לֵאָה)”. 여기서 ‘힌네(הִנֵּה)’는 놀랐을 때 쓰는 감탄사입니다. 창세기 저자가 야곱의 경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놀라운 균형감각을 봅니다. 야곱이 누구였습니까? 형의 옷을 입고, 염소 가죽을 두른 채, 눈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어둠을 이용해 속였던 사람입니다. 그때 이삭이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창 27:22). 그런데 지금은 어둠 속에서 야곱이 속습니다. 어둠을 이용해 얻은 것을 어둠으로 잃습니다. 이때 라반이 뼈 아픈 말을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 창 29:26</strong></p>
“그쪽 지방에서는 둘째가 첫째보다 앞설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우리 지방에서는 둘째가 결코 첫째를 앞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혼식 날 라반의 손으로 이루어진 라헬과 레아의 바꿔치기는 야곱이 저질렀던 과거의 행실을 꾸짖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속이는 자는 누구나 언젠가 반드시 속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바라볼 사람은 야곱이 아닙니다. 그 아침 침상에서 눈을 뜬 레아입니다. 야곱이 “레아라!” 하고 외치는데, 그나마 성경에서 야곱이 레아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준 것이었음에도, 그 외침에는 신혼의 첫 밤을 함께 보낸 애틋함도 사랑스러움도 전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노여움이 가득 담긴 외침입니다. 곧은 거울로 라헬만 바라보고 있었던 야곱에게 뜻밖의 얼굴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이야기의 끝에 하나의 반전을 보여줍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 창 29: 31</strong></p>
“여호와께서 보시고(바야르 아도나이 וַיַּרְא יְהוָה)” 이 말씀 안에 잠시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처음부터 보고 계셨습니다. 밤마다 울어 눈이 상하던 레아의 어린 시절에도, 라반이 레아를 치우려고 계략을 꾸미던 혼인 날에도, 야곱이 어둠 때문에 레아를 보지 못하던 그 밤에도,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사랑 받지 못하는 아내이던 그 때에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정확하게 무엇을 보셨는지 말해줍니다. ‘사랑받지 못함’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함에 머뭅니다. 단테는 ‘신곡’ 연옥편 스물일곱째 노래에서, 지상 낙원에 오르기 직전의 새벽 꿈에 레아를 등장시킵니다. 여기서 그녀는 꽃목걸이를 만들려고 가냘픈 손으로 꽃을 따며 헤매고 있는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즐길 수 있게끔 몸을 꾸미지만 이런 말을 합니다.

내 동생 라헬이 온종일 거울 앞에 앉아 떠나려 하지 않는답니다. 동생은 자기의 아름다운 눈에 황홀해 있습니다만, 나는 오로지 이 손으로 몸을 단장하려 합니다. 동생은 보는 것에서, 나는 움직이는 것에서 만족을 느낀답니다. 단테/허인 옮김 ｢신곡｣(동서문화사) 525쪽

단테가 여기에서 레아를 ‘꽃을 따는 여인’으로, 라헬을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여인으로’ 묘사한 것에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영적 전통이 레아를 ‘실천적 삶(vita activa)’의 표상으로, 라헬을 ‘관상적 삶(vita contemplativa)’의 표상으로 여겨온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세의 신비신학은 레아의 실천적 영성을, 라헬의 관상적 영성으로 가는 과정으로 배치해서 라헬을 더 높은 서열에 두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적 전통마저도 레아가 라헬에 의해 차별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셈법은 조금 다릅니다. 구약성경이 비쳐주는 볼록렌즈를 조금 더 따라가다 보면 ‘사랑 받지 못한 여인 레아’가 아닌, ‘메시아의 길을 여는 여인 레아’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시자(창 29:31), 레아가 네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들이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지은 후에 그녀가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창 29:32). 둘째 아들의 이름 ‘시므온’은 ‘들으심’이란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창 29:33) 라며 그녀는 감격해 합니다. 셋째는 레위입니다.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창 29:34)라며 기대를 드러냅니다. 첫째부터 셋째 아들을 낳기까지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남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넷째 아들을 낳으면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레아의 입에서 남편에 대한 언급이 사라집니다. 다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29:35) 라고 선언하며 아기의 이름을 ‘유다’라고 짓습니다. ‘유다(יְהוּדָה)’는 ‘찬양하다’라는 의미의 ‘야다(ידה)’에서 온 어원입니다. 이 넷째의 이름에서 우리는 그녀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에게 사랑받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찬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역사의 거울은 레아의 자손을 중심으로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줄기에서 다윗이 나오고, 그 계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보십시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 1:2). 마태가 기록한 이 족보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사의 거울에 ‘라헬의 아들 요셉’은 보이지 않습니다. ‘레아의 아들 유다’가 중심입니다. 야곱이 십사 년 동안 몸으로 헌신해 쟁취한 라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렀던(창 29:31) 레아의 아들 유다가 구원사의 거울에 등장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음미하게 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롬 8:27</strong></p>
레아의 연약함을 보시는 하나님, 사랑 받지 못한 그녀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도우시니 그녀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이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새 차원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때부터 레아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리,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자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낮은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존재였지만, 하나님께는 보이는 존재였고,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서 ‘보화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오늘 복음서 안에서 보면 레아에게 일어난 이 변화가 야곱에게, 그리고 그 가문에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 마 13:44</strong></p>
이 비유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가 찾으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노력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마 13:45)는 진주를 구하러 다니다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지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발견했습니다. 그 발견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보화가 묻힌 밭을 삽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여덟째 권에서 자신의 회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두 의지가 자신의 영혼을 갈라놓고, 나쁜 습관이 자신의 영혼을 붙잡고 있는 것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딴 사람의 쇠사슬이 아닌, 쇠사슬이 된 자기 의지에 묶여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그 쇠사슬에서 놓여날까 두려워하며 꿈결처럼, 달콤하게 매여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성 염 역주 ｢고백록｣(경세원) 284-286쪽
그런 그가 쇠사슬을 끊어낸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난데 없이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벌떡 일어나 읽은 성경말씀(마 19:21)이 그에게 확신과 기쁨을 주었을 때, 그는 쇠사슬을 끊어낼 수 있었습니다. 위의 책 304-306쪽
후대의 신학자들은 그의 이 고백을 요약해 ‘이기는 기쁨(delectatio victrix)’이라 불렀습니다. 기쁨과 확신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쁜 습관의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구약성경으로 돌아와서 야곱을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 창 29:20</strong></p>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십사 년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어가는 보화는 자기의 노동을 지불한 라헬이 아닌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습니다. 그 무관심 속에서 그녀는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였고, 거울의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보화가 된 것은, 그녀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과 자비가 그녀에게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주셨을 때, 그녀에게서 유다가 태어났고, 그 후손들 속에 다윗이 있었고, 우리 주님이 계셨습니다. 레아처럼 사랑 받지 못한 서러움이 있으십니까? 그 서러움 때문에 울어서 눈이 약해지셨습니까?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십니까? 하나님의 시선이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그 시선이 우리가 사야 할 보화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사야 할 보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롬 8:32</strong></p>
사도 바울이 종일토록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으면서도(롬 8:36), 그러나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을 수 있었던 힘은(롬 8:37),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시선이 지금은 우리를 향하고 계십니다. 레아의 사랑 받지 못함을 보아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약함과 외로움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 내어진 분의 희생을 우리는 성찬 식탁에서 뜨겁게 만납니다. 부디 주님께 발견되고, 주님이 나와 연합을 이루시는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내 약함과 외로움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자리로 여기고 있는가?

②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과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살아가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26 Jul 2026 21:32: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7.26]]></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5]]></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안기성청년필리핀 단기 선교</strong>
교우들의 기도와 후원 가운데 잘 다녀왔습니다. 함께해 주신 무든 성도님께 감사드립니다.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 30주차 녹색 실천</strong>
⋅가까운 생협에서 지역 농산물을 구입합시다.(사 65:21)
⋅한 줄 기도 “가까운 곳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땅과 이웃을 살리는 소비를 하게 하소서.”
⋅수입 농산물은 장거리 운송 과정에서 많은 탄소를 배출하지만, 우리 땅의 소출은 지구를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생협에서 지역 농산물을 구입하는 것은, 땅을 살리고 이웃 농부들이 땀 흘려 키운 열매를 함께 나누는 뜻깊은 생태적 연대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24 Jul 2026 21:03: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8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4]]></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8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28:10-19a</strong>
<strong>10</strong>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strong>11</strong>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strong>12</strong>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strong>13</strong>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strong>14</strong>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strong>15</strong>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strong>16</strong>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strong>17</strong>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strong>18</strong>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strong>19</strong>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39

<strong>1 </strong>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 가오며
○ 주의 앞에서 어디로 | 피하리이까
<strong>2</strong>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 계시며
○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 계시니이다
<strong>3</strong>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 아시며
○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 아시옵소서
<strong>4</strong>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 보시고
○ 나를 영원한 길로 | 인도하소서
<strong>5</strong>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 되어도
○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 못할 것이며
<strong>6</strong> 밤이 낮과 같이 | 비추니
○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ㅣ 같음입니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8:12-26</strong>
<strong>12</strong>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strong>13</strong>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strong>14</strong>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strong>15</strong>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strong>16</strong>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strong>17</strong>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strong>18</strong>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strong>19</strong>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strong>20</strong>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strong>21</strong>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strong>22</strong>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strong>23</strong>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strong>24</strong>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strong>25</strong>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strong>26</strong>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3:24-30, 36-43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24</strong>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strong>25</strong>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strong>26</strong>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strong>27</strong>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strong>28</strong>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strong>29</strong>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strong>30</strong>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strong>36</strong>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strong>37</strong>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strong>38</strong>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strong>39</strong>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strong>40</strong>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strong>41</strong>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strong>42</strong>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strong>43</strong>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창 28:11-16절 묵상하십시오. 외로움에 잠들었던 ‘한 곳’에 대해 잠에서 깬 야곱이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② 롬 8:22-25절 묵상하십시오. 피조물의 탄식이 ‘해산의 고통’에 비유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③ 마 13:29, 30절 묵상하십시오.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가만 두라’ 하신 주인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h2>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은 조용한 독백의 언어로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듯 애틋한 서정을 담고 있어서 가슴에 오래 남는 시입니다. 타향에서 시인은 외로움과 침잠된 분위기에 싸여 있는데, 그런 그의 내면을 그리운 대상과 연결해 주는 매개체는 ‘별’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p>
별을 헤며 부르는 사랑, 쓸쓸함, 동경, 시, 어머니는 그가 그리워하는 가장 밀착된 모티브이고, 그 중 ‘어머니’는 그의 고독과 그리움의 극한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타향에 있고 어머니는 고향 북간도에 있습니다. 이 거리감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별인데, 시인이 있는 타향에도 고향 어머니에게도 이 별이 동시에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현재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했습니다. 그 상실감이 흙으로 덮어 버린 자신의 이름에서 잘 드러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p>
<p style="padding-left:40px;">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더클래식) 45쪽</p>
어쩌면 자기 이름자를 쓰고 흙으로 덮어버린 이 상실감이 윤동주의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야곱도 지금 별 아래 누웠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그가 속인 아버지였고, 형 에서는 그를 죽이려는 형이었으며, 어머니 리브가는 다시 볼 기약이 없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부를 수 있었던 모든 이름들과 척을 지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해 저문 사막에 누워 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낯선 땅에서 잠드는 그 밤에,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가슴에 느껴집니다. 돌베개를 베고 누운 야곱의 내면의 소리들은 온통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우러난 한숨이고 장탄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저자는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하늘은 그가 기도할 때, 말씀묵상할 때가 아닌 외로움과 복잡한 심경으로 침잠되어 있던 그 순간, 그 사막에서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 창 28:10-11</strong></p>
창세기 저자는 하란으로 가던 야곱이 ‘한 곳’에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 이 ‘한 곳’이 17절과 19절에서도 야곱에 의해 언급하는데,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전(베트 엘로힘 בֵּית אֱלֹהִים)’이라고 고백되고, 19절에서는 ‘베트엘(בֵּית־אֵל)’이라는 지명(地名)으로 명명됩니다. 하지만 야곱에 의해 ‘하나님의 전(베트 엘로힘 בֵּית אֱלֹהִים)’이라고 고백되고, ‘하나님의 집(베트엘 בֵּית־אֵל)’이라는 유서 깊은 지명까지 얻는 이 장소가 아직은 그저 ‘한 곳(함마콤 המָקוֹם)’이라고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함마콤(המָקוֹם)’은 ‘이름 없는 곳’, ‘아무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 없는 곳, 아무 곳’은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고른 자리가 아닙니다. 해가 져서, 더는 갈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머무른 자리입니다. 이곳이 브엘세바에서 85km 쯤 되니까 야곱은 살기 위해 최대 멀리 달려왔고 지금은 고단함과 외로움이 범벅이 되어 이곳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 보십시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 창 28:12-13a</strong></p>
야곱은 꿈에도 이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던 곳(창 12:8), 아버지 이삭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던 곳(창 26:25)에 계시는 하나님만 생각했지, 고향에서 85km나 떨어진 이 외진 곳까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기를 만나주실 줄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거룩한 곳에 있을 때만 만나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해가 져버린 곳, 더 갈 수 없어 쓰러진 곳, 탄식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그 ‘한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떠돌던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불어주신 하나님(출 3:3-4), 야곱이 외로움과 두려움 가운데 잠들던 그 ‘한 곳’에서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과 외로움과 후회와 소외 속에서 침잠되어 있는 순간에도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그럼으로써 모세간 선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되었듯이(출 3:5), 야곱이 잠들던 그 ‘아무 곳’이 하나님의 전이 되었듯이(창 28:17), 지금 이 ‘한 곳’ 우리가 서 있는 땅도 거룩하게 성별해 주십니다. 야곱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습니다(창 28:12). 이 ‘사닥다리(술람 סֻלָּם)’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우리에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벨에서 사람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창 11:4)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창 28:12)입니다. 그러나 방향이 다릅니다. 바벨의 성과 탑은 아래에서 위로 벽돌을 구워 스스로 쌓아올린 인간의 야망이고 교만입니다. 하지만 벧엘의 사다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시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만나주신 은총의 사다리입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쌓지 않았습니다. 단지 돌 하나를 베고 탄식하며 잠들었을 뿐입니다. 그 잠든 야곱의 머리맡으로 하늘이 내려온 것입니다. 서방 수도전통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도는 수도 규칙 제7장에서 이 사다리를 ‘겸손의 사다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만일 겸손의 최고 정상에 이르기를 원하고 또 현세 생활의 겸손을 통해 오르게 될 천상적 들어 높임에 속히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야곱이 꿈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던 그 사다리를 우리의 향상하는 행동으로써 세워야 하겠다. 내리고 오른다는 것은 분명히 교만으로써 내려가고 겸손으로써 올라간다는 것으로 밖에 우리는 달리 알아들을 수 없다. 베네딕도/이형우 역주 ｢수도 규칙｣(분도출판사) 85-87쪽

사다리는 우리의 일생이요, 그 두 기둥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며, 자기를 높이는 자는 그 사다리를 내려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의 가장 낮은 밤, 외롭고 두려운 밤에 가장 높은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 창 28:16-17</strong></p>
두려움이 사무치던 그 ‘한 곳’이 하늘의 문이었습니다. 신음 속에 잠들던 ‘아무 곳’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오늘 응송에서 우리가 바로 이 신비를 노래한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 시 139:11-12</strong></p>
흑암이 나를 덮었다고 탄식하는 그 밤도, 하나님 안에서 보면 낮과 같이 환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서신서에서 야곱이 겪었던 그 ‘한 곳’의 밤을 온 우주의 피조물에게로 확대합니다. 탄식하는 것은 야곱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 롬 8:22-23</strong></p>
여기에서 ‘함께 탄식하며(쉬스테나제이 συστενάζει)’와 ‘함께 고통을 겪고(쉬노디네이συνωδίνει)’는 원어에서 시간적 개념을 초월한 무시간적 시제를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피조세계를 새롭게 회복하시기까지 피조물은 원치 않는 쇠락과 썪어짐에 처해 있어서 탄식하고 고통스러워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탄식과 고통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고통이고 어둠입니다. 야곱의 어두운 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중요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롬 8:26</strong></p>
우리가 혼자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 깊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엔팅카노 ἐντυγχἀνω)’ 즉 중재하고 탄원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간구는 우리가 언어로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중재와 탄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함께 고통을 겪고(쉬노디네이 συνωδίνει)”는 문자적으로 무의미한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어떤 가치 있는 결실을 앞두고 소망 가운데 진통을 겪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해산하는 수고(갈 4:19b)’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 ‘해산하는 수고’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것(갈 4:19a)’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죽어가는 자의 고통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직전의 행복한 고통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탄식은 ‘끝의 소리’가 아니라 ‘시작의 소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 롬 8:24-25 새번역</strong></p>
소망은 본질상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목을 빼는 일이고, 그래서 소망의 다른 이름은 ‘참으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모든 고통을 가져오는 불의한 현실에는 눈을 감고 그저 참아야 하는 것일까요? 위르겐 몰트만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인식하는 소망을 오로지 하늘의 영원에만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는 이 땅의 미래도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을 가꾸어야 할 곳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은 것에 소망을 둔 그리스도인은 악을 생산하는 악들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한 갈등 안으로 들어가 맞서 저항하고 그 안에서 소망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몰트만/김균진옮김 ｢희망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 23-32쪽

즉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현재의 고난과 모순을 외면함으로써가 아니라 바로 그 고난 한 가운데서 불붙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소망을 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의 삶을 더욱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좋은 씨와 가라지의 씨가 한 밭에서 같이 자라는 광경을 비유로 보여주시면서 가라지로부터 마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십니다(마 13:24-26).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물어봅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마 13:27) 주인이 말합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 13:28a)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마 13:28b).그러자 주인의 반응이 이랬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마 13:29, 30</strong></p>
주인의 일단의 반응은 ‘가만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까 염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의 포기’가 아닌 ‘유예’였고, 심판 유예의 기간은 ‘추수 때까지’였습니다. 추수 때에는 거두어 가라지는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곡간에 넣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롬 8:13</strong></p>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들이듯이(마 13:30),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는(롬 8:13) 이 엄숙한 사실은 우리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삶의 열매를 따라 반드시 가라지처럼 불살라지거나 반드시 천국 곡간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사람은 고난을 겪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겪으며(롬 8:22),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합니다(롬 8:23), 윤동주 시인처럼 고국을 잃은 상실감에 흙으로 자신의 이름을 덮어버리고 싶은 극한의 심정에 빠져 있을 때도 있고, 가족과 척을 지고 고향에서 도망쳐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겪던 야곱과 같은 심정에 처해있을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내가 고통을 겪고 있는 ‘한 곳(함마콤 המָקוֹם)’이 ‘하나님의 전(베트 엘로힘 בֵּית אֱלֹהִי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야곱처럼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기도를 도와주십니다(롬 8:26). 이때 우리의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닙니다. ‘해산하는 수고(갈 4:19b)’로 대변되는 그 고통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것(갈 4:19a)’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을 겪는 동안 성령의 도우심 아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갈 4:19a). 그리스도의 형상은 우리가 도달할 무한한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풀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 마 13:43</strong></p>
그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오늘 서신서를 이 말씀으로 열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별 헤는 밤’의 시인은 흙에 부끄러운 이름을 묻어버리고 탄식하다가,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p>
우리도 시인처럼 탄식의 밤 끝에 봄을 심고, 야곱처럼 머리맡에 내려주신 사다리를 경험하며, 성령 안에서 고통이 해산의 수고가 되어, 마침내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벅찬 영광에 이르시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현재 나의 탄식은 절망의 언어인가, 해산의 수고의 언어인가?

② 유예된 심판과 장차의 영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23:31:0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령강림 후 제7주 들사람과 장막에 거주하는 사람]]></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3]]></link>
			<description><![CDATA[<strong>성령강림 후 제7주 (가해) 거룩한 독서</strong>
<strong>Lectio Divina</strong>

<strong>■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strong>
<strong>■ 읽기 | Lectio</strong>

<strong>구약 | 창 25:19-34</strong>
<strong>19</strong>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strong>20</strong>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strong>21</strong>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strong>22</strong>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strong>23</strong>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strong>24</strong>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strong>25</strong>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strong>26</strong>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strong>27</strong>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strong>28</strong>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strong>29</strong>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strong>30</strong>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strong>32</strong>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strong>33</strong>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strong>34</strong>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봉독 후 :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응송(Responsorial Psalm), 시 119
<strong>1</strong> 주의 말씀은 내 발에 | 등이요
○ 내 길에 | 빛이옵니다
<strong>2</strong> 주의 의로운 규례를 | 지키려,
○ 나는 맹세하고 | 다짐합니다.
<strong>3</strong> 내가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받아 | 주시고
○ 주의 규례를 내게 | 가르치소서
<strong>4</strong>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 안에 | 있으니
○ 당신의 법을 잊지 | 않으리이다
<strong>5</strong> 주의 훈계는 내 마음의 기 | 쁨이요
○ 그 훈계는 내 영원한 | 유산입니다
<strong>6</strong>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 | 하려고
○ 내 마음을 | 기울입니다

◉ 영광이 | 성부와 ○ 성 | 자와 | 성령께
처음과 같이 | 지금도 ○ 그리고 영 | 원히 | 아-멘

<strong>서신 | 롬 8:1-11</strong>
<strong>1</strong>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strong>2</strong>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strong>3</strong>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strong>4</strong>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strong>5</strong>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strong>6</strong>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strong>7</strong>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strong>8</strong>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strong>9</strong>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strong>10</strong>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strong>11</strong>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봉독 후 : 이것은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회 중 : 층계성가(Gradual) | 찬송 637장

복음 | 자리에서 일어섬

집례자: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회 중: 또한 주님의 종과도 함께 하소서

집례자: 복음서의 말씀은 마 13:1-9, 18-23절입니다.
주 께 영 광 돌 리 세

<strong>1</strong>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strong>2</strong>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strong>3</strong>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strong>4</strong>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strong>5</strong>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strong>6</strong>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strong>7</strong>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strong>8</strong>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strong>9</strong>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strong>18</strong>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strong>19</strong>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strong>20</strong>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strong>21</strong>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strong>22</strong>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strong>23</strong>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봉독 후에 ▼
집례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 중: 주 께 찬 양 드리 세

<strong>■ 묵상 | meditatio</strong>
① 마 13:22-23절 묵상하십시오. 내 마음 밭에서 지금 걷어내야 할 돌 하나, 뽑아내야 할 가시 하나는 무엇입니까?

② 롬 8:5-6절 묵상하십시오. 하루 중 나의 생각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어디입니까? 나의 마음의 지향은 지금 무엇을 향해 있습니까?

③ 창 25:27절 묵상하십시오. 에서는 ‘들사람’이었고 야곱은 ‘장막에 거주하는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strong>■ 기 도 | Oratio | 5-10분</strong>
<strong>■ 묵상 나눔</strong>

<h2>들사람과 장막에 거주하는 사람</h2>
영성 형성 혹은 영적 성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자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 감각에서 탈출해 마음 깊은 곳에서 친밀감이 자라고 존재의 뿌리를 하나님께 깊이 두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부터 거짓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분리 감각이 점차 감소되다가 소멸하며 마침내 하나님과의 일치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영적 전통에서는 ‘변형적 일치’라고 부르는데, 가히 ‘하나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룬 상태’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주도하는 이 일치의 힘은 형언할 수 없는 밝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하나님과의 일치 안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까닭에 하나님과 나는 여전히 둘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 자아를 소유하는 변형적 일치는 순간적인 체험으로 완성되지 않고, 평생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영성형성의 이러한 점진적인 측면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묵묵하고도 꾸준한 훈련을 요청합니다. 리처드 포스터에 따르면 깊이가 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고전적 훈련’이 필요한데, 그 고전적 훈련이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피상적인 삶을 떠나 깊이 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훈련이고, 영적 세계의 깊은 내부를 탐구하는 훈련이고, 그럼으로써 공허한 세상에 해답이 되는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영적훈련과 성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에서 도널드 코간(Donald Coggan)의 고백을 소개해 줍니다.

나는 한 나그네로서의 영원을 향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형상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리처드 포스터/권달천, 황을호 옮김 ｢영적훈련과 성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생명의말씀사) 15-16쪽

그래서 우리교회도 지금 오후시간을 할애해서 예배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이런 영적 훈련이 왜 필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태중에서 싸우는 쌍둥이로 인해 고민에 잠긴 리브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창 25:22). 그런 리브가에게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 창 25:23</strong></p>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리브가의 태(胎) 안의 풍경과 우리가 지난주에 읽은 바울의 곤고함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두 국민이, 즉 두 민족이 리브가의 태중에서 싸움으로써 그녀에게 고민거리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이 두 법이 바울의 내면에서 싸움으로 바울의 곤고함이 되었습니다(롬 7:21-24). 사람의 내면은 이렇듯 전쟁터입니다. 훗날 에서와 야곱은 ‘장자의 명분’에 대한 태도로서 각각 ‘육의 길을 걸은 자’와 ‘영의 길을 걸은 자’로 평가되는데(창 25:31-34), 그런 면에서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야곱과 에서가 선택한 각각의 길에 대한 판결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롬 8:5, 6</strong></p>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땅은 ‘에서의 마음’과 같다 하겠습니다. 하루 종일 들판을 뛰어다니는 분주한 마음 밭에 말씀이 뿌리내릴 토양이 갖추어질리 만무합니다. 주님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마 3:23)라고 말씀하시는데,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란 곧 ‘영적 훈련을 받는 사람’을 뜻하고, 영적 깊이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더해지는 것이겠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 마 13:1-9</strong></p>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앉아계실 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마 13:1,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마 13:2)이라는 상황설정, 그리고 비유를 마치신 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서, 거기 있는 ‘큰 무리’가 모두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의 밭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토양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릴 수도 닫힐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비유에서 그 각각의 마음의 토양을 ‘네 종류의 밭’에 견주어 설명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의미를 풀어주십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 마 13:19-23</strong></p>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성찰하자면 ‘그러므로 마음을 가꾸라’는 것이겠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악에게 내주는 길 가의 땅처럼 단단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해 허약한 마음이다가 환난이나 시험이 왔을 때 이내 넘어져버리는 돌밭과 같은 마음으로 방치하지도 말고,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그런 마음이 되지도 말고, 어떤 씨앗이 떨어져도 충분히 결실할 수 있을 만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을 가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토머스 머튼의 고백처럼 일생동안 나는 초심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엄격한 말씀훈련과 침묵과 기도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뒤덮고 있는 돌을 걷어내는 작업이고, 가시와 엉겅퀴를 마음으로부터 뽑아내는 작업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중심성이 뽑혀 나갈 때, 우리 마음엔 비로소 말씀이 자라게 되고,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셔서 나와 소통하시는 매체인 성경을 우리는 정보나 지식의 차원이 아닌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 차려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 성육신할 때만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삶 속에 참된 변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것에 헌신했고, 불가타성경의 번역자이기도 한 히에로니무스가 자신의 ‘서간집(書簡集 Epistulae)’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에우스토키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가르침을 줍니다.

최선을 다해 성경을 읽고 모든 것을 배우시오. 그대의 손에 성경이 들린 채 잠드시오. 잠들 때는 거룩한 말씀이 그대의 머리속을 사로잡도록 하시오(편지 22, 17).

성경을 읽다가 잠들고, 잠들었을 때도 성경말씀이 머리속에 가득 차 있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는 또 성서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편지 52, 7).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할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편지 130, 20).

그는 또 ‘이사야 주해’ 서론에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성서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국교부학연구회 ｢교부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분도출판사) 23-26쪽

우리는 지난 주 사도 바울의 절규를 기억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내적 싸움을 겪으며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새로운 깨달음이란, 자기 내면의 싸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자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바울이 마침내 마음 가득 이렇게 감사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그리고 오늘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영적승리의 법칙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롬 8:1, 2</strong></p>
그는 지금껏 자기 내면의 한 축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그토록 곤고함으로 몰아넣어 왔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참된 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인지 로마서 8장에 들어오면서 부터 그는 ‘성령’ 혹은 ‘영’이라는 단어를 무려 21번이나 반복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 ‘계명’, ‘법’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성령’이나 ‘영’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롬 8:3-6</strong></p>
여기 ‘생각’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마(φρόνημα)’는 머릿속을 스쳐 가는 잠시 생각이 아니고, 우리 마음이 습관적으로 향하는 방향, 곧 ‘마음의 지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생각’이란 어쩌다 한 번 떠오르는 육적인 생각이 아니라, 마음의 나침반 자체가 육적으로 굳어져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그토록 곤고함에 시달리는 것 역시 어느 한 때의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나침판이 영적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조금씩이라도 애를 쓰고 있는데, 자기 안에 깃들인 ‘죄성(罪性)’이 워낙 완강히 버티고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만성적인 곤고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람 안에 깃들인 ‘죄성(罪性)’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려 가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에서입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 창 25:27</strong></p>
여기 ‘조용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탐(תָּם)'은 본래 ‘온전한’, ‘흠 없는’이라는 뜻으로, 욥을 소개할 때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욥 1:1). 그러니까 야곱이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건, 그의 소극적인 성격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온전하고 흠없는 내면에 대한 묘사인 것입니다. 들사람 에서의 삶이 끝없이 바깥을 향해 흩어지는 삶이라면, 장막에 거주하는 야곱은 내면이 흩어져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의 불행은 방 안에 고요히 머물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고 통찰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고요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밖으로 배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막 안에서, 고요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들로만 내달리던 에서의 삶이 어떤 결말에 이르렀는지 우리는 압니다. 하루 종일 들을 달리다가 심히 피곤하여 돌아온 그는, 한 그릇 팥죽 앞에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창 25:29-34). 그가 팔아먹은 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대를 이어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는 영적 가치였습니다. 훗날 히브리서 저자는 이때의 에서에 대해 혹평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 히브리서는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부릅니다. ‘망령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베벨로스(βέβηλος)’는 거룩한 경계 안팎을 아무렇게나 밟고 다니는 ‘속(俗)된’이라는 뜻입니다. 에서에게는 거룩함과 속됨 사이의 경계가 없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창 25:32)라는 한 마디가 요약해 주는 그는 ‘지금 당장’의 사람입니다. 갖고 싶으면 ‘지금’ 가져야 하고, 배고프면 ‘지금’ 채워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지금을 견디는 힘, 기다림의 근육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 근육은 들판에서 길러지지 않습니다. 장막에서, 고요와 묵상을 통해 길러집니다. 히브리서의 논평이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가 훗날 눈물을 흘리며 구하였으나 버림 받았다는 것입니다(히 12:16-17). 훈련 없이 흘려보낸 세월은 눈물로도 되사올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에서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고 우리에게도 엄히 경고합니다. 우리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신을 따르지 않게 되고(롬 8:9a),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롬 8:9b).

그러려면 우리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형상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던 도널드 코간의 고백처럼, 우리도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성경을 통해 참된 예배와 삶을 배워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합니다. 손에 성경이 들린 채로 잠들어야 합니다. 잠들 때는 거룩한 말씀이 내 머리속을 사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내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면 지혜가 우리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면 성경이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면 성경이 우리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혀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서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p style="padding-left:40px;"><strong>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 시 119:112</strong></p>
우리도 시인처럼 말씀에 마음 기울여 사는 까닭에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을 생명과 평안으로 채워주시고, 곤고함이 아닌 기쁨과 찬미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strong>■ 관상 | Contemplatio</strong>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strong>■ 실천 | Exercitatio</strong>
① 육신을 따르며 육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② 영(靈)을 따르며 영적 결실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23:15:2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5"><![CDATA[주일설교PDF]]></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7.19]]></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2]]></link>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안기성청년필리핀 단기 선교</strong>
우리교회 안기성 청년(부경대학교 CCC 순장 훈련 중)이 7일(화)-23일(목)까지 필리핀 다바오에서 단기선교 중입니다. 교우들께서 기도로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단기 선교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소서.
⋅복음과 사랑을 가득 안고 나아갑니다. 믿음과 담대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영육 간의 강건함 허락하시고, 주 안에서 성장하는 시간 되게 하소서.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함께 연합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시간되게 하소서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9주차 녹색 실천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닙시다.(삿 6:19)
⋅한 줄 기도 “한번ﾠ쓰고ﾠ버려지는ﾠ것이ﾠ없도록, 일상의ﾠ실천ﾠ습관을ﾠ만들 어ﾠ나가게ﾠ하소서.”
⋅잠깐의ﾠ편리함을ﾠ위해ﾠ사용되는ﾠ비닐봉지가ﾠ분해되기까지ﾠ최소 20년에서ﾠ최대 1000년의ﾠ시간이ﾠ걸립니다. 장바구니ﾠ휴대를ﾠ생활화합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8 Jul 2026 00:05: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소식 2026.07.1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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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strong>① 주일예배 해설</strong>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과 교우들께서 우리교회 주일예배 각 순서의 의의와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시간입니다. 교우들께서는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strong>② 안기성청년필리핀 단기 선교</strong>
우리교회 안기성 청년(부경대학교 CCC 순장 훈련 중)이 7일(화)-23일(목)까지 필리핀 다바오에서 단기선교 중입니다. 교우들께서 기도로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단기 선교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소서.
⋅복음과 사랑을 가득 안고 나아갑니다. 믿음과 담대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영육 간의 강건함 허락하시고, 주 안에서 성장하는 시간 되게 하소서.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함께 연합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시간되게 하소서

<strong>③ 녹색 그리스도인 52주 |</strong> 28주차 녹색 실천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태적 여행을 계획합시다.
⋅한 줄 기도 “쉼의 여정 속에서 창조세계를 깊이 만나며, 자연과 상생하는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여행의 매순간 오감을 통해 창조세계의 소중함을 느끼고, 물, 토양 오염을 줄이기 위한 친환경 여행 물품을 준비하며, 여행과정에서도 물과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 합시다. 여행지에서도 적정 실내온도를 지킵시다.]]></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21:28: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자동차보험비교]]></title>
			<link><![CDATA[http://hudmc.org/?kboard_content_redirect=1860]]></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height:0px;width:0px;">
<p><span style="letter-spacing:-100em;"><a href="https://sambowoonsu.co.kr"> 다이렉트자동차보험비교견적사이트</a></span></p>
</div>]]></description>
			<author><![CDATA[김소영]]></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0:39: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hudmc.org/?kboard_redirect=15"><![CDATA[선교]]></category>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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