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한석문 담임목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출 17:1-7
1 이스라엘자손의온회중이여호와의명령대로신광야에서떠나 그노정대로행하여르비딤에장막을쳤으나백성이마실물이없 는지라
2 백성이모세와다투어이르되우리에게물을주어마시게하라모 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 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백성이목이말라물을찾으매그들이모세에게대하여원 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 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 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 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호렙산에있는그반석위거기서네앞에서리니너는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 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 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응송 | 시편 95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서신 | 롬 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이는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이제우리가그의피로말미암아의롭다하심을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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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요 4:5-26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요 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이르되주여그런물을내게주사목마르지도않고또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 묵상 나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성경의 아름다운 장면은 우물을 배경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 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인 리브가를 만난 것도 우물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일이고,야곱이훗날자기아내가된라헬을만난것도우물가를배 경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치던 모세가 미디안 의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을 만난 것도 우물가를 배경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에서 대개 우물가는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떠는 장소로 그려지는데, 때때로는 거기서 뉘 집 경조사도 나누어지고, 길손이 들러 목을 축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화가 김홍도는 ‘우물가’라는 그림에 서가슴을풀어헤치고물을얻어마시는한사내와차마그모습을보지 못하고 두레박만 바라보는 두 여인의 눈길을 통해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 출해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실 때, ‘수가’라는 동네의 한 우물가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에 당도하셨을 때는 ‘여섯 시쯤'(요 4:5, 6) 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시간으로 여섯시는 오늘날의 낮 열두 시 로태양이작열하는시간입니다.먼길여행에예수님일행이매우출출하 고, 목마른 상태였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거리를 찾 아마을로들어갔고,예수님은목을축이시기위해우물가를찾아거기앉 아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온 걸 보면 이 여자도 뭔가 동네 사람 들의 눈을 피해야 할 속사정이 있는 듯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 을좀달라”하셨을때,여자의반응이그리달갑지않습니다.
이 여자가 원래 성격이 까칠하거나 자격지심이 많은 성격인지는 모르 겠지만, 사실 여인의 이러한 반응에는 당시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매우 경멸하는 시선으로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유대인들이 격동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유대인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이야기를 좀 더 깊은 데로 끌어가십니다.
여자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어디서당신이그생수를얻겠사옵나이까우리조상야곱이이우물 을우리에게주셨고또여기서자기와자기아들들과짐승이다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1, 12)하고 묻자, 예수님 역시 대화의 흐름을 빼앗기지 않은 채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을 다 하십니다.
여자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습니까? 생각이 많았을 겁니다. 대 개 신앙적인 입장에 서 계신 분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 리 좋은 것을 얻어도 참된 만족이 없고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영원 한 생수이신 예수님을 잘 믿어야 우리 내면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듯 참 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정답입니다.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지금 내가 기독교 신앙 의 정수를 경험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 다.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 내면을 좀 더 정직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기 독교 신앙으로 오래 살았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목마른 채로 살아갑니다. 영원한 생수는커녕 순간적인 해갈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가 전해주는 이 이야기에 심정적으로 긍정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마음 깊은 곳까지 명쾌하지는 않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본래 성 경 이야기가 공허하고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이 이야기를 좀 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영원한 생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 여자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더 이상 이곳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여인 은 이곳에 오는 게 죽는 것보다 싫었을 겁니다. 우물에 오는 게 싫었다기 보다는 우물에 와서 사람들 만나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 이 오는 시간을 피해 모두가 낮잠에 빠져든 한낮에 나온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뜬금없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고 하십니다. 여자가 당황했을 것입니다.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 4:17a) 라고 시치미를 뗍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 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귀를 의심하게 합니다.
다섯 명의 남자를 거쳐서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다니, 어쩌면 이 여자는 전형적인 팜므파탈(femme fatale) 즉 숙명적인 ‘요부(妖婦)’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여러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불쌍한 여인일 수 도 있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이 여자는 이웃들, 특히 여자들과 관계를 단절 하고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의 삶에서도 그랬고, 정신적으로도 그랬고, 영적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여자만이 아니라 정도 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개 현대인들이 이런 고립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최 근 우리나라는 우리의 전직 대통령이 안으로 문을 닫아버리고 몇몇 지지 자들 외에는 소통을 차단해 버린 단절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수가성의 이 여인은 겉으로는 아닌 듯, 당당한 듯,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노력 했겠지만 그러나 그 지독한 심리적인 고립감을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왔을까요? 그 동안 다섯 남자를 거쳐 왔듯이, 물건으로, 취미로, 사회적 업적으로 자기 의 외로움을 대신하려고 무진 노력을 해왔을 것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혼 자 물을 길으러 다녀야만 하는 안팎으로 고립되고 갇힌 현실은 현실이었 습니다. 이런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영화가 ‘겨울왕 국’입니다. 이 영화는 네덜란드의 한 동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 다. 공주로 태어난 두 자매가 있습니다. 언니는 손으로 대는 모든 것이 얼 음으로 변하는 마술에 걸렸습니다. 그걸 비밀로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결 국 발각이 되자 자기 왕국에서 도망가 산속에서 얼음으로 된 궁을 짓고 삽니다. 그 사이에 그녀의 왕국도 겨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마술에 걸린 그녀를 힘으로 제거하려고 할수록 그녀는 얼음의 세계로 더 깊이 도망갑니다. 이 영화의 공주와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 는 똑같이 고립된 인간 실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인은 자기의 현실을 꿰뚫어 본 예수님을 향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 라며 감탄하지만 그러나 이내 화제를 돌립니다.
자신이 불리할 때 순발력 있게 대화의 프레임을 예배로 바꾸는 걸 보면, 그간의 삶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본래부터 머리가 좋은 여 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려들지 않으십니다.
당시의 시대 속에서 이 말씀은 혁명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예루 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 산에 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즉 예배에서 장소의 문제는 본질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에서 본질은 뭡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비로소 이 여인의 그간의 방황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희미하게나마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배에 있 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의 대상’이 막연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예 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예배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의 대상이 막연했습니다. 예배의 대상이 막연하다보니까 장소 라든지 형식 등등 본질이 아닌 사족(蛇足)에 더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였고, 그녀의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오 경만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제한적으로 알았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열정적인 예배를 하면서도 내면은 한없이 공허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 배한다.” 이 차이는 작은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이 예배의 차이로 인해 그 녀는 도무지 목마름을 해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무르익 어 가던 중에 여인이 어느 순간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 가지 속내를 예수 님 앞에 꺼내놓습니다. 어쩌면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예수님께서 사마리 아까지 찾아오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체념적이고 막연한 말투이지만 그러나 여인에게는 강렬한 갈망이 있었 습니다. 신 18:15에 보면 모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 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의 이 말을 마음에 두고 메시아를 기다리듯 그 선지자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들은 그 메시아를 ‘타헤브(תהב)’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오실 분’, ‘회복시 키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다윗의 집에서 태어날 그 메시아는 아니 었지만,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그들은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기다려야 할 메시아는 ‘타 헤브(תהב)’가 아니라 ‘그리스도(Χριστός)’여야 한다며, 종교적 개념을 문제 삼아 그녀의 갈망을 무지르지 않으십니다. 여인을 체념으로부터 건져주시 는 주님의 사려 깊은 이 한 마디를 보십시오. “내가 그라”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인 이 말씀은 영어로 “I am…”입니다. 요한이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포도나무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문장들이 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 네 안에 갈망이 있었구 나!”, “너는 갈망이 있는 하나님의 딸이구나!”, “내가 바로 네가 기다리던 ‘ 타헤브’란다”라고 주님은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윤동주 시인은 ‘봄’이라는 시에서 봄을 맞이하는 각양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제국의 이빨 속에서도 그는 여러 모습의 봄맞이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기다림의 대상’이 틀렸다며 건조한 교리로 그녀를 타박하지 않 으셨습니다. 그녀의 기다림을 받아 주십니다. 그녀의 갈망을 인정해 주십 니다. 그리고 그녀의 갈망 속에 마치 봄날처럼 ‘당신 자신’을 꽃피워 주십 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그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목마르 고, 예배를 하면서도 목마름이 여전한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나의 메시아로 만나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달받기는 했지만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오늘 구약의 말씀을 보십시오.
참어려운상황입니다. 지금그들이처해있는광야는모든생명의원천 이 차단되어버린 아주 배타적인 장소의 전형입니다. 그래서 출 ,17:23을 보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었다”고 말하고,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했 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합니다. 아마 저나 여러분도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 다면 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복음서의 사마리아 여자나, 광야에서 불평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저의 여러분의 상태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의 목마름에 직면했을 때, 그물을 향한 갈망이 선용되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의 영적 에너 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마름이 해갈되는 과정에서 해갈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남은 광 야 길을 하나님과 더불어 걷기를 원하셨습니다. 영성이란 그렇게 하나님을 ‘ 알아가는’ 차원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차원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 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을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갈망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갈망 가운데서 하나님과 진실로 만나기 위한 순간순간의 자기 부정과 깨어남입니다. 우리 는 지금 내 안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다가서는 에 너지로 바꾸어가야 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결되지 않는 환난과 고난이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러나 매일 겪는 갈증이나, 때때로 겪는 환난은 오히려 우리 삶의 에너지가 되고, 인 내와 연단과 소망이 되어 우리를 차근차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자는 대화 끝에 자기를 멸시한 그 마 을로 다시 뛰어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하며 감격스러운 증언을 하고 다닙니다. 그 동안의 이 여인 내면을 괴롭히던 갈망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삶의 에너지 로 바뀌고, 그 에너지로 마을로 뛰어 들어가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목마름의 차원이 달라진 겁니다. 갈망의 차원이 달라진 겁니 다.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두 가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 다. 하나는 14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 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다른 하나는 26절입니다. “내가 그라” 이 두 구절이 가리키는 것 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