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한석문 담임목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12:1-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너로큰민족을이루고네게복을주어네이름을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 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응송 | 시 12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에게서로다
서신 | 롬 4:1-5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 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복음 | 요 3:1-17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 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묵상 나눔
참 믿음을 찾아 ‘떠나는’ 영성
참 믿음을 찾아 ‘떠나는’ 영성
오늘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각각 사순절 여정에 들어선 교회와 그리 스도인들이 가야하는 길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사순절 여 정이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하는 인생의 축소판인 동시에 신앙적 삶 의 본질을 보여주는 여정이라 하겠습니다. 사순절 여정이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가야하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것은, 사순절 여정 속에서 유혹이라든 지, 율법과 믿음의 관계라든지 등등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가 흔하게 맞닥뜨리는 실존적인 혹은 신앙적인 갈등들이 치열하게 부딪쳐 오는 까닭 이고, 사순절이 신앙적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여정이라는 것은 그러한 실 존적이거나 신앙적인 갈등들을 끝내 극복하고 마침내 도달해야 할 신앙적 삶의 완성을 사순절의 말씀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의 말씀들도 그렇습니다. 먼저 구약 성경에 나오는 ‘길 떠나는 아브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신앙의 출발 선상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아브 람으로 하여금 분지의 도시적 삶을 청산하고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도록 불러내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고(에 클레시아), 좁고 험한 믿음의 길로 초대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됩 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시는 이야기는 창세기에 몇 번이나 걸쳐 서 나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만남의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그토록 중 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만남 그 자체도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그 만남 들을 통해 아브라함의 생의 지향이 바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 첫 만남의 이야기가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있게 된 동기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는지를 당시 아브람이 처해있던 상황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 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창 11:10 이하에 보면 노아의 첫 아들 인 셈의 후손이 열거되는데, 그 셈의 후손의 끝자락에 ‘데라’가 자리하고 있고, 데라의 세 아들이 바로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입니다. 본디 데라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데라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그리고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하란’이 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11장 말미의 이 이야기를 통해 서 아브람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달 을 신으로 섬기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의 이주를 시작한 ‘처음’ 사람은 사실은 ‘아브람’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데라’였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난 이유가 성경에 명확하게 언급되 어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령하시는 걸 보면 동일한 하나님의 명령을 이미 그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 가 익숙해 있던 고향을 버리고 떠날 땐, 그 동안 살아온 낡은 삶의 관행을 떠나 하나님께서 주신 새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그의 내 심 속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고향을 떠나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창 11:31)라며, 그의 목표가 처 음부터 ‘하란’이 아닌 ‘가나안’이었음을 정확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 데라는 원래의 목표인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205살이 될 때까지 그 만 하란에 머무르고 맙니다. 그가 처음 목표로 세웠던 가나안에 가지 못하 고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건, 그 사정이 어떠했든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목표에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멈춰버린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 이르는 긴 여행 중에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 이야기와 미처 다 순종하지 못한 가나 안 이주에 관한 아쉬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 고 언제부턴가 아브람은 아버지가 미처 이루지 못한 가나안 이주의 꿈을 이루려고 마음먹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께서 “너는 너 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는 명령과 함께 한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명령과 약속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 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가나안 이주를 끝마친 이후에도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약속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약속들을 유심히 보십 시오. 약속의 핵심이, ‘큰 민족’이라든지 ‘복(福)’이라든지 ‘땅’이라든지 하 는 외형적인 가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데라와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목적이 바로 그런 것들을 얻는 것에 있었다는 의심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합니다. 더구나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고 있는 창 11:30에서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고 언급한 이후에, 창세기 12장이 시 작되기가 무섭게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데라와 아브람의 ‘떠남’의 이유가 풍요와 다산(多産)에 대한 기대였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창세기 저자가 오늘 말씀 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창세기 저 자는 ‘큰 민족’이니 ‘복’이니 ‘땅’이니 하는 사족(蛇足)이 아닌 ‘말씀’과 ‘약 속’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어줍니다. 아브람이 떠난 것은 후손이나 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떠남’에 있어 아브람은 고민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란을 떠날 때는 이미 그곳에서 삶의 기반을 잡은 상황이었습니다. “하란에서 모 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이라는 5절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구나 아버지 데라의 무덤도 하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런 현실적인 삶의 토대를 포기하고, 일흔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불확실한 미 래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러니까 그는 ‘말씀을 따라’ 미래의 불확실성을 향해 떠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고 순종의 표상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떠났다’ 혹은 ‘옮겨갔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떠남의 자유로움’과 ‘ 붙들고 있음의 옹색함’ 사이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결단해 야 했습니다. 떠남이 자유롭고 신선한 것은 떠남과 동시에 일어나는 새로 운 지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붙들고 있음이 지속되는 한 출발은 영원히 오 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지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떠남은 새벽공기처럼 신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떠남’이 다 신선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아 브라함이 길을 떠나는 장면 속에서 주목해 봐야 할 건 ‘떠남 그 자체’라기 보다는 말씀과 약속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미래 를 걸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의 ‘ 말씀’과 약속’을 향해 열려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 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아브람의 이 ‘떠남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다루었습 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을 기록할 때, 그는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인들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이 모세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 기에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런 생각은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 러한 ‘율법 중심의 신앙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 또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신앙관에서 떠나 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들이 왜 ‘율법 중심의 신앙 관’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꺼내든 겁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근거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창 15:6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유대인들과의 신학 논쟁에서 핵심적인 사안이었 고,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 의 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브라함도 ‘율법 실천’이 아닌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약속을 받았고,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는 특권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세나 여호수아가 아닌, 율법 이전 세대 사 람인 아브람을 예로 들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후손이 될 수 있는 언 약을 받았습니다. 이 언약을 받는 것에 있어 필요한 건 율법이 아니라 ‘오 직 믿음’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가나안 땅에 온 것도 그의 믿음이었고,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 의 약속을 받아들인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전적으 로 믿고 따랐습니다. 심지어 창 22장에는 백세에 낳은 아들인 이삭을 하 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려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그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숱한 실패와 깨어짐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 다. 하나님은 자기를 향해 아무 계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 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체결해 주신 언약은 거래가 아닌 조건 없는 사랑이 었습니다. 그것을 안 아브라함은 자기 역시 하나님께 그 어느 것도 아끼거 나 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꾼과 자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똑같이 용돈을 받더라도 일꾼은 그것이 보수로 여겨지는데, 자녀에게는 그것이 사 랑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받고 있는 햇빛과 공기와 물은 여러분 노동의 대가로 하나님께 받은 보수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받 고 있는 햇빛과 공기와 물은 여러분 노동의 대가로 하나님께 받은 보수입 니까? 아니면 엄마의 젖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주시 는 사랑의 결정체입니까? 보수라고 여겨지면 여러분은 일꾼인 것이고, 사 랑으로 여겨지면 여러분은 자녀인 겁니다. 일꾼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 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조건 없이 다 드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처럼 말입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롬 4:5)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그 마음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 믿음입니다.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고, 나름으로 교회에 헌신한 사 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런 저런 법과 규칙에는 익숙하지만 그 영혼 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서신서의 말씀 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 지 않은 상황에서 율법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낡은 신앙에서 떠나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온전한 관계부터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서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 중에 니고데모 만큼 자기 확신이 분명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 선생 이었고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반듯한 삶을 살아 왔고, 율법은 그의 삶을 반듯하게 이끌어 준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데 어느 밤중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우리는 그의 부드럽고 세련된 인사말 속에서 지금껏 그가 살아온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문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상대를 배려 하는 예의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세련된 인사말 속에 서 뭔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도 함께 느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우리 가 그의 이 말 속에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껏 자기가 기대고 살 아온 율법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입니다. 예수 님은 니고데모의 이 공허함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은 니고데모가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전개되 는 말씀을 읽어보면 니고데모와 예수님 간에 ‘거듭남’에 대한 대화가 뜨겁 게 이어집니다. 거대한 영적 지각 변동에 휩싸인 니고데모의 내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충격 속에 서 있는 그를 향해 주님은 계속 말씀을 이어가십 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니고데모에게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토록 니고데모에게 복음을 찬찬히 설명해 주시는 걸 까요? 그가 묵은 관념으로서의 율법에서 떠나 심장이 살아있는 그리스도 인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지 않은 채 습관과 체면에 따라 박제화 된 종교인에 머무르지 않고, 물과 성 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순절의 여정을 걸으면 서 우리는 지금 내가 부름 받은 길이 어떤 길이며 어디를 향한 길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떠남의 자유로움’과 ‘붙들고 있음의 옹색함’ 사이에서 ‘ 떠남의 자유로움’을 선택하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떠남의 영성’에서 중요한 사실은 ‘떠남 그 자체’라기보다는, 말씀과 약속으로 대변되는 새로 운 가치관에 자기 모든 것을 집중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낡고 완고해진 자 아로부터 떠날 수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생동감 있고 풋풋해진 참 자아 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있어 떠남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고, 말씀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밝히는 믿음이었습니다. 니고네모는 자신의 현 재를 떠남으로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 의 사랑을 뜨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지금 여기 에서 낡은 종교의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믿음을 얻기 위해 말씀 묵상과 성찰 그리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믿음의 순례를 떠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