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한석문 담임목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합 2:1-4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 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 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 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 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 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 | 롬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 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묵상 나눔
오직 믿음만으로 #2
2 오직 믿음만으로종교개혁의 원음을 찾아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16세기 종교개혁은 성직자 중심의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복음의 본질과 참 교회상을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루 터와 츠빙글리, 칼뱅 모두 로마가톨릭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과 법률 에 대항해서 ‘성서의 수위권’을 주장했고, 교황의 권위에 대항해서 ‘그리스 도의 수위권’을 내세웠으며,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인간의 노력과 업적에 대항해서 ‘은총과 신앙의 수위권’을 강조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정신 즉 ‘성경만으로,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의 신학이 탄생하 였고, 그것이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표준이 되었으며, 거기에 ‘ 교회의 존망’이 걸려있는 것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마침내 루터는 1517년 10월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 위에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를 적은 대 자보를 붙였습니다. 그것은 사소해보이지만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루터도 그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예 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진리에 서서 당시 황제와 함께 유럽의 실권을 쥐고 있던 ‘교황 체제’ 이를테면 ‘면죄부’ 와 ‘교황 무오설’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면죄부와 교황 무오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감히 공론화는 엄두도 내지지 못했습니다. 교황 체제의 권위에 대항한다는 건, 거의 자살행위나 마찬가 지였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에서 오늘날의 교회들도 선명한 개혁을 이 루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을 때마다 너나없이 목회자들은 루터의 개혁정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에 머물 뿐, 루터가 꿈꾸었던 개혁을 단호히 이어가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무엇 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고, 둘째는, 설사 안다 할지라도 개혁의 각론으로 들어가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걱정만 하고 있지 개혁을 위해 몸을 던지지는 못합니다. 정말 이런 흐름대로라면 오늘날 교회 내외적으로 비판 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개혁은 요원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 내면과 사 회에 똬리를 튼 고질적인 자기중심성이 극복되지 못하는 한 하나님 나라 는 여전히 요원하고 사람의 내면도 사회도 개혁과 거리가 먼 엉겅퀴 묵정 밭이 되고 마는 것 같습니다. 사정은 구약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말을 갑자기 내던진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 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하박국 1장과 2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과 이어 지는 하나님의 대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장은 하박국 선 지자의 기도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합 1:1-4절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이고, 이어지는 5-11절은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12-17절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이 다시 나오고 2장에서 하나님의 대답 이 이어지는데, ‘하박국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중 하나가 바로 ”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입니다. 하박국의 탄원은 아주 분명합니다. 몇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두 가지 문제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준동하는 악(惡)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무너져서 악인 이 의인을 등쳐먹는 현실을 보며 하박국 선지자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혹은 귀찮거나 혹은 어 쩔 수 없다는 생각에, 혹은 공연히 나섰다가는 손해 볼 수 있어서 문제를 덮거나 용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박국이 탄원하는 다른 하나의 문제는 상황이 이러함에도 하나님이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습 니다. 1:2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 니”라고 했고, 1:13절에서는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라고했 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탄원하고 호소합니다. 하박국의 이런 탄원과 호소는 유 다의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서 나왔습니다. 하박국이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 기는 BC 608-598년, 그러니까 여호야김의 재위 기간과 거의 일치합니다. 당시는 유다를 개혁해보려고 애를 썼던 요시야 왕이 죽고, 유다가 1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신흥제국 바벨론이 앗수 르를 굴복시키고 인근 지역을 정복해나갔습니다. 그들의 폭력 앞에서 유다는 그저 속수무책일 뿐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민들이 악 한 나라에 핍박을 당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그런 현실 은 불의(不義)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왜 그런 불의를 바라만 보 시느냐며 탄원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는 지금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여기 ‘묵시의 때’ 즉 ‘종말의 때’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때입니다. 그 때, 악은 완전히 제거되고 의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끝나는 때입니다. “그 묵시의 때가 속히 이른다!” 그것이 성루에 서서 새 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바라보던 하박국 선지자가 하 나님께로부터 받은 대답이고, 그가 받은 바 그 ‘대답’이 하박국 선지자가 그 시대 속에서 가진 영적 통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 속에서나 ‘깨어있는 사람’,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은 깨어있었으며, 대답을 기다리던 끝에 하나님의 묵시가 곧 임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겉으로는 더디게 보이지만 그러나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임 한다는 대답을 하나님께 직접 듣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도 하박국 선지자와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믿고 기다렸 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지체되고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교 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당황스러워했습니다.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그 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마치 예고하지 않는 때 들어오는 도적처럼 임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징조가 없는 것 같지 만, 재림이 계속해서 지연되는 것만 같지만 그러나 예기치 않은 순간, 예 수님의 그 ‘때’가 도래한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고단한 신앙생활을 지켜나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믿음도 궁극적으로는 바로 그 예수님의 때 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겁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 수님이 재림하지 않으셨다는 사실, 바로 그런 현실이 우리의 영적 긴장감 을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입으로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시시때때로 입으로는 고백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오신다는 주님을 맞을 준비는 안 합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중세의 종교 지도자들도 깊은 권태의 잠속에 빠져있었 던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엄중 합니다.
우리는 이 엄중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긴박하게 영혼을 깨워 일으켜 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시간’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해야만 합니다. 하 나님의 시간은 단순히 숫자와 함께 흘러가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하나님 의 뜻이 순간순간 실현되는 ‘카이로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같은 깨어있 는 사람들의 탄원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고, 그 대답대로 이루시는 그 순 간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그 카이로스로 경험되는 시간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하박국의 때도 그 때였고, 예수님의 때도 그 때였고, 사 도들의 때도 그 때였고, 개혁자들의 때도 그 때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 리가 예배하고 있는 이 시간, 우리 역시 ‘묵시의 한 때’를 지나고 있습니 다. 물론 이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에게 그리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 그런 말은 그냥 철학적인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 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시간을 보십시오. 장구하게 느껴지는 시간 들 속에서 어떤 기억은 아득하지만, 어떤 기억은 살뜰합니다. 매일매일 만 나도 낯선 사람도 있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나도 어제오늘인 듯 살뜰한 사 람이 있습니다.
40년 50년 만에 만난 가족이 부둥켜안고 오열하며 우는 모습을 TV에 서 봅니다. 그만한 시간이 흘러갔으면 잊었어야지 부둥켜안고 울 일이 뭐 가 있습니까? 혈육이라는 차원에서는 시간의 의미가 그토록 달라지는 것 입니다. 천 년이라는 우리에게는 장구한 시간이 하나님께는 하루라는 사실 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예수님의 시간은 박제화 된 옛 일이지만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면, 그 분의 죽음 때문에 오열하며 몸부림치는 살아있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시간 경험으로 본다면 백년 혹은 천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는 결코 막연하 게 느낄 수 있는 시간만은 아닙니다. 2천년도 한 순간입니다. 지금도 주님 의 심장은 우리를 향해 뛰고 계시고, 십자가의 혈흔은 우리를 위해 흘러내 립니다. 물론 그러한 영적 긴장감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한결같이 이어지기 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여행도 해야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 시집가 고 장가가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박국이라고 왜 그렇지 않았 겠습니까? 성경은 하박국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새벽을 기다리는 파 수꾼처럼 묵시의 때를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라고 왜 살아야 할 일 상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왜 구원하지 않 습니까? 하나님, 왜 잠잠하십니까?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 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욥의 아내는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 로자기몸을긁고있는욥을향해”당신이그래도자기의온전함을굳게 지키느냐”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외쳤습니다.(욥 2:9)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마침내 눈으로 뵈옵는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지 않습니까? 그게 뭘까요? 믿음 아 닐까요? 하박국이 영적인 미로를 헤매다가 마침내 찾은 것이 바로 그것입 니다. ‘믿음’ 말입니다. 그가 뭐라고 외쳤던가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b) 여기서 믿음은 ‘묵시의 때’ 즉 ‘구원의 때’가 속 히 온다는 사실에 운명을 거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리켜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하박국이 말한 믿음입니다. 의인은바로이믿음때문에’묵시의때’즉’보이지않는구원의때’를 그 토록 기다리고 대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경험하게 하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로 삼게 합니다. 의인이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박국의 경험과 고백을 계승해서 ‘복음’에 대해 똑같이 설명합니다.
믿음이 자기 생명의 근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삶은 죄인으로 이미 죽은 삶이라는 겁니다.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후에 마틴 루터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하박국의 믿음에 대한 영적 통찰이 사도 바울을 거쳐 마틴 루터에 까지 계승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칭의 문제에서 로마가톨릭과 부딪쳤습 니다. 가톨릭교회는 ‘믿음’과 더불어 ‘선행’이 의의 토대라고 주장했고, 루 터는 ‘사람의 업적’을 빼고 ‘오직 믿음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가 인간 의 선행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선행’이 ‘하나님의 선 행’보다 결코 우선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루터는 하박국과 바울의 영적 시각을 정확하게 해석했습니다. 의로움의 주도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는 그 사실을 꿰뚫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묵시의 때’는 ‘인간의 시간’이 아 니라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 나님의 방법’을 의존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을 바라보는, 그것이 바 로 믿음인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 금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천양희 시인은 ‘외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삶을 통찰했습니다.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무소새는 둥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고소공포증도 폐쇄공포증도 없습니다.
공중이 저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놓아두시지요.
외길이 나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시지요.
새들에게 저마다 자기 길이 있듯이 사람도 저마다 자기 외길이 있습니 다. 우리가 단호하게 걸어야만 하는 그 ‘외길’이 무엇인지 하박국 선지자도 사도 바울도 마틴 루터도 우리에게 일관된 어조로 가르쳐 줍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롬 1:17
“오직 믿음만으로!!” 그 가슴 벅차고 거룩한 길 위에서 우리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