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한석문 담임목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고전 2:1-1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 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 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 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응송 | 시 12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행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요한이그세례를반포한후에갈릴리에서시작하여온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두루다니시며선한일을행하시고마귀에게눌린 모든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대하여모든선지자도증언하되그를믿는사람들이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복음 | 마 5:13-20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 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 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묵상 나눔
참된 율법, 참된 금식, 참된 믿음
참된 율법, 참된 금식, 참된 믿음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가슴에 명심하고 살던 사자성어가 하나 있습니 다. 논어 술이편 1장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인데, ‘성인의 말을 풀어 설명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지어내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 서삼경을 비롯한 경전을 인용하는 것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해야 할 일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사서삼경을 풀어 설명은 했지만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내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러한 행동을 선비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상가이고 교육자였던 공자 역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독창적인 사상을 독립된 저작으로 짓지는 않았는데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바로 그러한 자세를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현 후 제5주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에 있어서도 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이사야 시대에 종교인들은 금식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악용할 때 가 많았습니다. 금식은 회개와 성결을 목적으로 제정된 것임에도 그들은 금식을 빌미로 ‘자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기보다는, 자기들이 행한 금식을 내세워 서 자기들의 독창적인 사상을 주장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바로그점을경고하시는것입니다.그런가하면오늘서신서의말씀 에서 사도 바울은 혹시라도 자신이 그런 과(過)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 로 조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철학적 수사에 익숙한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당대의 최고 지 식인이었던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자기의 풍부한 지식에 서 우러난 지혜의 말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유혹을 받았을까요? 그러 나그는그유혹에대해분명히선을긋습니다.자신이말을하거나설교 를 할 때에 자기 지혜에서 나온 그럴듯한 언어로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고 오로지 성령의 능력에서 우러난 말씀만을 그대로 증언하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인간의 판단이나 지식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지혜만을 말하려는 그의 노력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복음서에서의 주님마저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오래 전 성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정 중하다는것입니다.천지가없어지기전에는율법의점하나획하나도없 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 교인들이 종종 율법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율법은 사람 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고, 더불어 살게 하기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 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라의 백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 성’이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 러 예수님시대가 되었을 때, 언제부터인지 율법은 본래의 하나님의 뜻으로 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고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고 예속시키는 무거운 짐 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 조문을 금과옥조로 여기면 서율법조문을근거로사람을의인과죄인으로나누고,거룩한것과속된 것을 나눴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 들의말씀을폐하러온줄로생각하지말라”시며”폐하러온것이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이 처음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에게주신율법의점하나획하나까지소중히여기시고율법에담긴하 나님의 처음 속뜻을 깨우쳐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 러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좀 더 세심하게 이해하려 면 당시 예수님이 처해있던 상황을 잘 살펴야 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대교의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갈 4:4에서의 사도 바 울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 래’에 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율법 의 규정을 따라 할례를 받으셨고,(눅 2:21) 뿐만 아니라 정결예식도 받으 셨습니다.(눅 2:22)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초기 기독교공동체 역시 유대교의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유대교 안 에서 하나의 파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았 습니다. 적어도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 러온것이아니요완전하게하려함이라”하신예수님의말씀이모두이 해가 가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나서신 이후 예수님께 서 보이신 모습입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율법을 ‘폐기하려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막 2:23 이 하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먹습니다. 그걸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제 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구약시대 다윗과 관련했던 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 뿐만 아니라 주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기도 하셨고(마 12:9-13),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있던 여인을 고쳐주기도 하셨고(눅 13:11),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서른 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주기도 하셨습니다.(요 5:2-9)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분 이 아니고 율법을 파괴하는 분처럼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율 법을폐하러온것이아니요완전하게하려함이라”하신예수님말씀과, 그럼에도 실제 행위에서는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처럼 비치던 예수님의 이 ‘말씀’과 ‘행위’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여기에서 우 리가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이 처음 율법을 주시던 하나님의 속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준수하면서 마치 거기에 종교적 승패가 걸린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실제 그 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형식과 껍데기만 존재했고, 율법에 담아주신 하나님 의속뜻은관심밖으로밀려나있었습니다.그런데사실그런행태는예수 님 때만의 현상이 아니었습니다.이미 오래 전 그러니까 구약시대부터 관행 으로 굳어져오던 현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 던 ‘대 속죄일 금식’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대 속죄일(Yom Kippur)’ 은 신년 축제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로부터 열흘 째 되는 날 이었는데, 하나님께 지은 죄는 물론이고 이웃들과 불화하거나 갈등을 빚었 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며 용서를 구하는 날입니다. 해가 지 기 전에 ‘콜 니드레(Kol Nidre)’라는 전통노래를 부르며 대 속죄일이 시작 되는데, 그날 사람들은 금식을 하며 자기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드러냈습 니다. 그러다 유대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 금식일을 더 제정했습 니다. 바벨론의 1차 침공일, 예루살렘이 파괴된 날, 성전이 파괴된 날, 아 히감의아들총독그달리야가살해당한날등등그들이정한금식일은내 개 나라의 패망을 아프게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날을 기억하자는 뜻에는 하나님을 거역한 삶이 얼마나 쓰라린 결과를 낳는지 자각하자는 뜻이 절절하게 녹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금식의 참 정신은 사라지고 제도만 남 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금식일에 자기들은 오락을 즐기면서, 일꾼들에 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켰습니다.(사 58:3b)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깔고 앉아있기는 하지만(사 58:5), 이웃들 간의 논쟁과 다툼을 멈추지 않았고, 약한 자들을 주먹으로 치기도 했습니다.(사 58:4)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사 58:3a) 하며 생색을 내기에 바빴습니다. 그것이 당시에 이사야 선지자가 본 금식의 실상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금식입니까? 본과 말이 뒤집힌 것
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에게 왜곡된 금식의 관행을 중단하라며 하나 님의 마음을 대신 전해줍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는 것은 이 말씀이 이사야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그가 하나님의 속마음을 풀어서 전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풀어서 전해주는 하나님 말씀의 속뜻은 참된 금식은 폼 잡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풀어주 고,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그들이 진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는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우 리도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금식은 하나님께서 어떻 게 보실까요?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려 참된 금식을 실천하는 이들 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참 뜻을 헤아리고 거기 걸맞은 실천을 기울이는 자녀들은 이미 그 내면에 하나님의 빛이 비쳐들 어 마음으로부터 온 존재로 하나님의 치유가 급속히 퍼질 것이기 때문입 니다. 그러면 그러한 삶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서선서에서 사도 바 울은 말씀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빛, 그것만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가능하 게 하는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18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대도폐 유인 의’ 하고 ‘혜지출 유대위’ 한다. 이게 참 의미 깊은 말씀입니다. ‘대도(大 道)가 무너지니까 그 결과로 인의(仁義) 즉 어짊과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람의 지혜가 대단한 취급을 받게 되니까 그 결과로 거짓이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율법의 참 정신’을 깨달아 사 는 것이나, ‘금식의 참 정신’을 깨달아 사는 것은 우리의 어짊이나 올바름 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지혜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우리가착한행실을배우기위해자꾸인간적인지혜를더하려하 는 것은 ‘대도(大道)’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결단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빛을 향해 서 있고,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심장을 관통하 고 있으며, 성령의 돌보심과 능력이 나를 감싸고 있다면, 우리는 참 믿음 의 사람이 될 것이고, 거기에서 진정한 실천이 우러날 것이고, 우리는 잃 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서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십니다. ‘그분에 관한 무엇’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안에 임재하셔서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후로 저와 여 러분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 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율법이 완전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