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한석문 담임목사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9:1-4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 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행하던백성이큰빛을보고사망의그늘진땅에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즐거움과탈취물을나눌때의즐거움같이그들이주앞 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그들이무겁게멘멍에와그들의어깨의채찍과그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응송 | 시 27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서신 | 고전 1:10-18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형제들아글로에의집편으로너희에대한말이내게들리니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 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 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 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 | 마 4:12-23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길과이방의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자들 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 시니
■ 묵상 나눔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빛이 비치리라”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교과서를 읽으면서 가슴 설레 본 적 있으십니까? 제 일생에 교과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설렜던 경험은, 알퐁스 도데의 ‘별’과, 황순원의 ‘소나기’ 를 읽었을 때 딱 두 번이었습니다. 그 중 알퐁스 도데의 ‘별’은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어느 목동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단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목동은 뤼브롱산의 양치기로서 마을의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좋 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상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일은 아름다운 스떼 파네트 아가씨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달 치 식량이 오길 기다리던 어느 여름 날, 그날따라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서 식량이 매우 늦게 도착을 했는데, 오후 3시경이나 되어 노새의 방울소리 와 함께 식량을 싣고 나타난 사람은 목동이 그토록 좋아하는 스테파네트 아가씨였습니다. 목동의 눈은 그녀를 쳐다보기에 지칠 줄 몰랐습니다. 정 말이지그는이렇게가까이서그녀를본적이한번도 없었습니다.그런 데 지금 그 아가씨가 오직 자기를 위해 산에 와서 자기 앞에 있는 것입니 다. 목동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빈 광주리를 가지고 떠날 때, 노새 발굽에 채여 구르는 조약돌 이 하나씩 하나씩 그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목동은 그 조 약돌 소리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듣고 있었습니다. 해질 무렵까지 행 여 꿈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저녁 무렵, 목동은 비탈길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 고 이어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추위와 물에 젖어 떨면서 나타났습니다. 소 나기로 물이 불어난 소르그 강을 무리하게 건너려다가 빠져 죽을 뻔했다 고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가씨에게 7월은 밤이 짧으니 조금 만 참으면 된다고 안심을 시키면서 불을 지피고 먹을 것을 준비합니다. 그 러는 동안 곧 밤이 되었습니다.
목동은 아가씨를 우리 안에 들어가 쉬도록 하고, 자기는 문 앞에 나와 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양 우리의 창살문이 열리면서 아름다운 스떼파 네트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목동은 그녀의 어깨 위에 염소 모피를 씌워 주고 불을 더 지펴 놓았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목동은 아가씨를 위해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별들의 결혼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려고 할 때, 무엇인가 부드럽고 연한 것이 자기 어깨 위에
가볍게 얹히는 것을 느낍니다. 스테파네트 아가씨의 머리였습니다. 그 때 목동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별들 중 하나가, 가장 아름 답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잠들고 있 다”고…
오늘 주현 후 세 번째 주일의 성서일과는 마치 알퐁스 도데의 ‘별’ 이 야기처럼, 사람들을 찾아와 내려앉은 ‘빛’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빛’ 은 성탄 이후의 교회력을 따라 계속 이어져 오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세 상의 빛으로 태어나신 성탄절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동방으로부터 별을 따라와 경배했던 동방박사 이야기, 회개의 세례를 기다리는 죄인들 틈에 끼어 죄인처럼 세례를 기다리던 예수님의 모습과, 그들과 똑같이 회개의 의식에 참여하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분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향해 지난 주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내가 또 너를 이 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그리고 주님은 기꺼이 이방의 빛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셔서 죄인들 속에 끼어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 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성탄이후로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복 음의 선포’를 마치 암흑을 가르는 빛처럼 우리를 향해 비추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분'(딤전 6:16) 이시고, 사도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요일 1:5)이시고,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 1:9)이십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말씀은 바 로 이 빛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빛이 비치리라 예언했 던 바로 그 고장으로 예수님께서 가심으로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그 가 예언한 바로 그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금 막 성취되려는 찰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 이사야서도 함께 보게 될 것인데, 각각의 말씀을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 안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 니다.
요한이 체포된 후에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북서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곳은 어부들의 마을이었지만, 다메섹에서 가 이사랴를 거쳐 애굽에 이르는 해변 무역도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엔 세관도 있었고, 로마군의 수비대도 주둔해 있었습니다. 예 수님께서 당시 어부였던 제자들과 세리 마태를 부르신 곳이 바로 이곳이 고,또백부장을향해”이스라엘중아무에게서도이만한믿음을보지못 하였노라”(마 8:10)고 칭찬하셨던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 서이것을찾아가신사실에대해마가나누가나요한과달리매우강조하 는어조로보도하고있는데,거기에는마태가주목했던두가지이유가있 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첫째, 마태는 가버나움이 옛적에 스불론과 납달 리 땅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앗수르 군대에 의해고통을받던스불론땅과납달리땅에후에는빛이비치리라고선포 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8:5-9:1)이 지금 가버나움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당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되받아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각각 읽은 이사 야의 예언과 마태의 선포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는 이사야가 예언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지금의 가버나움이 라고 말합니다.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게 주어졌던 땅,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곳에 살던 이들의 상황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라는 표현으로 요약했었습니다. 그랬었습니다. 가버나움은 흑암(黑暗)이 뒤덮은 땅이었고, 죽음이 그늘처럼 드리운 땅이었습니다. 마태는 항상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고(롬 5:20)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곳에 그 토록 흑암과 죽음의 그늘이 깊었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빛 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에 마태 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또 하나의 동기가 있습니다. 옛 스불론 땅이고 납달리 땅인 이 가버나움에는 아직도 할례 받 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할 때도, ‘이방인들의 지역’이요, ‘사망의 그늘진 땅’이었던 이곳 은 마태가 복음서를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이방인 지역’이고 ‘사망의 그늘진 땅’이었습니다. 마태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그곳으로 일부러 찾아 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신다”고, “그 분은 거기에서 사실 것”이라고, ” 그럼으로써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마 태는선포하고있는것입니다.새잎이돋아나는봄이든,잎이다진겨울 이든 햇살은 그늘진 곳으로 깃들어 밝음과 따뜻함을 더해줍니다. 톨스토이 가 태어난 곳이 ‘야스나야 폴랴나’라는 곳인데, 러시아어로 ‘숲속의 밝은 빈터’라는뜻이라고합니다.그늘진땅에서살아가는이들은늘그런따 뜻하고 밝은 장소를 그리워하겠습니다. 마태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습 니다. 마음이 그늘져 있다가도 예수님만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밝고 따 뜻해지는분말입니다.그런데이빛이비쳐오게하기위해서는먼저우리 가수행해야할일이있습니다.그일에대해서는예수님께서직접말씀하 십니다.
뉘우침과 동시에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해 서는 삶으로의 전환입니 다. 회개는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세워놓고 다른 이들을 주변화 시키던 삶 에서 떠나 형제를 중심에 세우고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 는 나의 가능성에 의지해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 사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이들에게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눠 먹으라고 말 했습니다.(눅 3:11) 세리들도 정한 것 이외에 더 거두지 말라 했고(눅 3:12), 군인들은 누군가를 강압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지 말라 했습니다(눅 3:14). 삭개오는 회개한다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 다. 그는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신 후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 나이다”(눅 19:8)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삭개오를 바라보시며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눅 19:9a)고 기뻐하셨습니다. 존 웨슬리는 돈 지갑이 회심하지 않으면 아직 참된 회개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회개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것, 자기 좋을 대로 살 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사는 것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 태는 어떠하십니까? 그 날 흑암에 앉은 백성을 향해,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을 향해 비추어왔던 그 밝은 빛이 여러분의 내면에도 비쳐들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여러분의 내면을 비추어 온통 마음이 평 화로 밝고 따뜻해지고 계십니까? 그래서 염려와 불안이 다 사라지고 더이상 미운 사람도 분노도 없는 내면의 천국이 이루어지고 계십니까? 그리 스도인이란 ‘당연히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항상 ‘그리스도 의빛’을볼수있어야합니다.부활하신예수님께서이미우리안에성령 을부어주셨고,우리가나누는성찬을통해주님의살과피가우리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혹은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이미 비쳐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의 일을 시키십니다.
어부가 과연 그물을 버릴 수 있을까?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어떻게?’라 는 물음이 슬며시 올라오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출애굽공동체의 사례로 말하자면 애굽의 끓는 가마솥을 버리고 광야를 택한 것입니다. 세베 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배와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좀 심하 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독립운동에 나섰던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아버지를 버려두고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기와 가족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혹은 조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 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특징은 ‘버려두고 떠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 니다. 아브람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는 곳으로 갔습니다.(창 12:1)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소 를 잡아 백성들에게 주고 스승을 따라 나섰습니다.(왕상 19:19-21) 익숙하 던곳을떠난다는건쉬운일이아닙니다.낯선것과의만남은언제나우리 마음에 동요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를 따라 나선다는 것은 불 편함을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서신서 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듣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고린도의 사람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배경 때문에 희랍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희랍철학에 능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 러다보니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서 토의하고 토론하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진리에 접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지성인 중의 지성인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 역시 화려한 수사와 언변으로 그들과 변론하려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자신에 대해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들고 만다는 것입니 다. 비록 미련해보일지라도 십자가에 깃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 으로만 앞으로는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선 것입니다. 자 기를 등지고 십자가를 향해 돌아선 것입니다. 그는 이미 돌아선 사람이지 만 그러나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향해 치열하게 돌아서고 있습니다. 우리 가 그래야 합니다. 아직 어둠 속에 남아계십니까? 빛을 향해 돌아서야 합 니다. 우리가 돌아서야 할 대상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 다. 회개하고 돌아서면 우리는 비로소 빛을 응시하게 됩니다. 돌아서야만 우리 내면으로 빛이 비쳐들게 됩니다.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인의 이 고백이 주현절을 지나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 여 러분의 어깨로 내려앉은 그리스도의 빛이, 여러분의 내면으로 비쳐든 그리 스도의 빛이 존재 전체를 밝게 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