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3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신 6:1-9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 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 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 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응송 | 시 119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서신 | 히 9:11-14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 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 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복음 | 막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 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 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 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 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신 6:4-5을 묵상하십시오. 모세는 여호와를 어떻게 소개하며, 그 여 호와를 향한 우리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명령합니까?
② 막 12:32-34을 묵상하십시오. 지혜 있게 대답한 서기관에게 예수님 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며, 당신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③ 히 9:14을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매우 배타적인 하나님이시고, 보복과 질투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상(象)은 신약성경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배치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회사 속에는 이러한 하나님 모습에 거세게 반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초대교회 시대인 2세기에 살았던 마르키온(Marcion)입니다. 그는 2세기 초 폰토스 지역 시노페(Sinope)에서 감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약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열렬한 믿음과 사랑을, 구약의 여호와에 대해서는 불신과 증오를 가졌습니다. 그가 저술한 '반론'에서도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명백히 구분지어 대립시켰는데, 그는 구약의 하나님을 '악의 신'이라 부르고, 신약의 하나님을 '선의 신'이라 불렀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구약의 유일신 여호와의 배타성에 대한 마르키온의 비난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서 초대교회의 이단들 중에서 그는 단연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훗날 그는 영지주의자 케르도의 영향을 받아, 구약의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으로, 신약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순화해서 부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게 구약의 하나님은 배타적인 유일신일 뿐,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되지는 않았습니다. 현대신학자 중에서 그와 비슷한 신학을 전개한 사람이 바로 '파울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전능하고 전지해서 나의 주체성을 빼앗아버리고 만다. 나는 여기에 반항하고 그를 객체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반항은 실패로 돌아가고 절망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존재자들이 다 부자유하고 주체성도 잃은 존재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마르키온이나 틸리히의 이러한 주장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변적 신학자가 아닌 개혁자가 되기를 원했고,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가진 배타성을 '초월'해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그들의 바람과 희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성서일과는 각각의 말씀의 의미를 보충해주며 서로의 인용을 통해서 '배타적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진정한 '초월'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며 율법을 선포합니다. 이 율법의 선포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만을 사랑하라는 배타적인 측면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가하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시며 이스라엘의 유일신적 신앙고백의 일부를 글자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a)는 계명을 '더 큰 계명'(막 12:31b)으로 제시해 주십니다. 구약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 6:4, 5
십계명을 포함한 전 율법의 대강령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쉐마 본문'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쉐마 본문'이란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쉐마(עמשׁ)'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부분을 말하는데 '쉐마'는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오늘 말씀인 4절만 '쉐마 본문'이었는데, 점차 확대되어 9절까지 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쉐마'의 핵심은 4절과 5절이고, 여기서 모세는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5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입니다. 먼저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합니다. '예호와 에하드(דחא הוי)'라는 말은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심을 뜻하는데, 상대적인 단일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두려움이나 종교적 심성에서 기인한 다신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자연숭배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던 고대세계에서 이런 고차원적인 유일신론을 고백한 모세의 신관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세의 대답입니다. 모세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바브(בבל)'는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하는 인간의 내적, 정신적 본질을 가리키고, '성품'을 뜻하는 히브리어 '네페쉬(שׁפנ)'는 '영혼', '생명', '호흡' 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전 인격(全 人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힘'을 뜻하는 '메오드(דאמ)'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력을 포함한 모든 능력을 가리킵니다. 즉 모세의 명령은 너에게 있는 '지정의'와 '전 인격'과 '능력'을 다해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님 사랑은 '계약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 신 6:1, 2
그러니까 모세의 명령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은 하나님의 명령인 계명을 지키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쉐마 본문이 구약성경의 신학과 영성의 정점이 되고 있는데,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절대적 유일신론이고,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와 체결한 계약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구약성경에서 호세아나 예레미야 같은 예언서들과 시편에서도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유독 신명기에서 더욱 강력한 어조로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당연히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순종하고자 하고, '오직 유일한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이 율법이 악용되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때로 이 율법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부추겨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벽을 만들기도 했고, 율법에의 과도한 순종의 요구는 백성의 삶에 벗어나기 어려운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마르키온 같은 사람들은 이 구약의 하나님을 매우 배타적인 하나님이며, 보복과 질투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만 편애하시는 하나님이라며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도 배타적 종교라는 눈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정말 구약의 하나님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하나님이어서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당신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변함없으신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역사 속에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인간의 사적 의도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는 도구로 율법이 악용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지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안에 있는 배타적 요소를 모두 걷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분연하게 구분됩니다. 그 일을 누가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사람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시며,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됨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 막 12:28
우리는 이 서기관의 질문을 보면서 당시의 변질된 율법이 이 사람을 매우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떤 유대교 문헌에는 오늘 서기관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 기록되어 있고, 당시 유대교 당국이 내려줬던 대답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대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피를 흘리지 말 것,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 것, 안식일을 범하지 말 것" 이 대답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정말 종교스럽지 않으십니까? 미루어 볼 때 당시 유대교는 사랑을 중요한 계명으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복종은 강요되고 있었지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마음은 그들에 의해 외면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서의 서기관 역시 그런 배타적인 율법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은 것은 '진정한 신앙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중심은 율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계명 중의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참되고 진정한 신앙의 첫 자리엔 과연 어떤 가르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어떻습니까?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 막 12:29-30
우선 예수님의 이 대답에서 우리가 느끼는 건 신명기에서 느끼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신명기의 쉐마 본문을 그대로 복붙하듯이 대답해주십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서기관을 전혀 새로운 차원의 계명 이해로 이끌어주십니다.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 막 12:3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의 완성'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약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하시면서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에로 연결되게 하십니다. 더욱이 이웃 사랑을 '더 큰 계명'이라시며 이웃사랑을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두십니다. 물론 이 둘째 계명 역시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레 19:1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지만 이 말씀 역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웃의 기준을 '동포'로 한정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언급하심으로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별개가 아니며, 하나님 사랑에서부터 이웃사랑이 우러나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기 전에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고 세 번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나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꺼진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인간들 간의 사랑도 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실체가 바로 이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동화된 존재로서 이웃을 내 몸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입니다. 인문학자인 김용규 선생이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자 프란체스코'에 있는 짧은 우화 하나를 소개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옛날에 평생을 바쳐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애를 쓴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가기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밤낮없이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죽음의 날이 다가와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수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접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돌아와 모든 고행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의 시간이 와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접니다." 수도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떨어져 전보다 더 치열하게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백 살 노인이 되어 죽은 그는 다시금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또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수도자는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당신입니다. 주님, 당신이에요!" 그러자 즉시 문이 열려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만, 비로소 이웃 사랑도 완성이 될 수 있으며, 그때 비로소 구원도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구원도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오늘 서신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히 9:11-12
구원은 사랑을 통해 완성됩니다. 신앙도 사랑을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행위는 우리를 성소에 이르게 하시려고 당신의 피를 기꺼이 흘려주신 주님의 사랑을 마시는 것이며, 성찬의 살과 피로 주님과 하나가 될 때, 이웃을 사랑할 힘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서기관은 마침내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 막 12:33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막 12:34)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마음에서 잃을 때, 종교는 번번이 정도에서 벗어나 배타적이 되었고, 끝내 그 사랑을 회복하지 못한 종교는 타의에 의해 개혁에 직면하곤 했습니다. 2021년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오늘 복음서의 서기관처럼 물어야 하겠습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 사랑을 몰라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② 계명으로서의 사랑을 넘어 예수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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