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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2주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10-23 10:29
조회
755
성령강림 후 제22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욥 42:1-6, 10-17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 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 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 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 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응송 | 시 3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히 7:23-28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 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복음 | 막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 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 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 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 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51을 묵상하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맹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② 욥 4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보게 하고 욥 자신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긴 질문 끝에 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히 7: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향한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길은 삶의 은유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걸을 때도 있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걸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고 생명이심을 믿는 까닭에 그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길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살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삶의 희망을 열어주신 곳은 갈릴리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은 그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영을 위한 여정이었고, 죽음을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걸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주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소풍을 가듯 흥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날은 가까이 다가오는 데,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길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주님의 수난 예고 전후에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나오는 벳새다의 맹인 이야기(막 8:22-26)는 어쩌면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앞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막 9:14-29)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에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를 때,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각각 달라 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모두 제자들이 잘못 이해한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직후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마가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형태 입니다.
여기에서 신영복 선생이 말한 '입장의 동일함'이란 표현을 '처지의 동일함'이라고 표현하면 말의 의미가 더 명료해 집니다. 갑이 을의 처지가 되어보고, 가해자가 피해자의 처지가 되어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눈뜸을 경험합니다. 복음이 전해주는 성육신이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처지가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으면서 욥은 마침내 자기 처지가 아닌, 인류 전체의 처지를 들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비평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 비평을 신학에 적용해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우리도 가끔 욥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대장부답게 허리를 동이고 일어서서 대답해 보라시면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욥 38:4, 5)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욥 38:8)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집요하고 풍부했으며, 욥은 갈수록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길고 긴 질문의 터널 끝에서 욥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끝으로 욥은 마침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백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신앙의 눈을 뜨고 말씀을 깨닫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욥 42:1-6, 10-17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 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 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 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 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응송 | 시 3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히 7:23-28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 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복음 | 막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 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 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 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 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51을 묵상하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맹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② 욥 42: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을 보게 하고 욥 자신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긴 질문 끝에 욥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③ 히 7:2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향한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길은 삶의 은유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걸을 때도 있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걸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고 생명이심을 믿는 까닭에 그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길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살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삶의 희망을 열어주신 곳은 갈릴리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은 그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영을 위한 여정이었고, 죽음을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걸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주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소풍을 가듯 흥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날은 가까이 다가오는 데,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길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있기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주님의 수난 예고 전후에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나오는 벳새다의 맹인 이야기(막 8:22-26)는 어쩌면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앞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막 9:14-29)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에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를 때,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각각 달라 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모두 제자들이 잘못 이해한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직후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마가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막 10:47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며 그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다고 마가는 전합니다.(막 10:48) 병자가 이토록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다윗의 자손 칭호를 사용하면서 주님께 부르짖은 것에는 그만한 전승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솔로몬 전승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는 메시아가 지혜와 가르치는 권위 뿐 아니라 귀신들에 대한 지배권도 갖추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솔로몬의 유훈서 20장 1절에는 한 남자가 왕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솔로몬 왕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한 여인이 하닷 왕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바디매오는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 자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출신지를 따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던 것에 비해(막10:47), 바디매오는 정확하게 구약성경의 예언을 따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메시아를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것입니다. 메시아 앞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정확한 태도를 소경인 그가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막 10:49) 그러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막 10:50) 그리고 51절과 52절을 보면 그와 예수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이어집니다.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막 10:51-52
그리고 주님의 선언이 떨어집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a) 그리고 마가는 이후의 상황을 담담하게 소개합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b) 이 사건은 맹인에게 세 가지의 치유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께 믿음을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의 대가로 눈을 뜬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는 거지가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따름으로 인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섭니다. 본회퍼 목사에 따르면 신앙이란, 우리의 의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먼저 눈을 뜨는 과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의 영적 실존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구원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바디매오의 내면이 믿음에 의해 밝아졌을 때, 그 내적 밝음으로 인해 외적 밝음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우리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눈뜰 때, 비로소 그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역사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향해 먼저 눈뜰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굳이 맹인이 아니라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눈이라도 빛이 없으면 어두움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습니다. 나의 내면에 빛이 없으면 비록 눈을 뜨고 있어도 어두움에 지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눈을 뜨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밝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가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가을은 우리에게 황홀함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내면이 아직 어둡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의 진실 안에서 사람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세속의 편견으로 사람의 외모만 볼지도 모릅니다. 창조의 진실 안에서 자연을 바라보지 못하고, 투기의 탐욕으로 땅을 바라볼 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빛을 잃어 어두우면 설사 눈을 뜨고 본다 해도 그저 표면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례하게 구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며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9:41)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눈을 가졌다고 해서 이 눈으로 보는 것이 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뜨기 이전에 먼저 내면의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향해 눈뜬 사람만이 주님 외의 그 무엇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내 안에 모신 밝음으로 자연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소경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눈을 떴습니다. 그가 믿음의 시선을 떠서 주님을 보았을 때, 주님은 그의 육신의 눈도 뜨게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을 뜬 그는 이후로 어떻게 합니까?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막 10:52b
그는 밝아진 눈으로 세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면까지 밝아져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욥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던 사람입니다. 흠이 없이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이 하루아침에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때, 예기치 않았던 불행이 그를 덮쳤습니다. 재산은 다 사라지고, 자식들도 다 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온 몸이 악성종기로 덮였습니다. 벗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자기의 고통을 토로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가 자신을 향해 그만 내뱉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말도 합니다.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6) 재난이 닥쳐오기 전에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나 이웃을 향해서나 완벽에 가까운 신실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을 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껏 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그는 그 칭송들에 걸맞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고통 받는 자리에 서고 보니, 현실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통에 찬 세상의 일부였습니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욥 24:1) 라며, 의인이 악인보다 더 절망스러운 현실에 대해, 일순간 혼란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이런 성찰을 나누어주었습니다.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형태 입니다.
여기에서 신영복 선생이 말한 '입장의 동일함'이란 표현을 '처지의 동일함'이라고 표현하면 말의 의미가 더 명료해 집니다. 갑이 을의 처지가 되어보고, 가해자가 피해자의 처지가 되어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눈뜸을 경험합니다. 복음이 전해주는 성육신이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처지가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으면서 욥은 마침내 자기 처지가 아닌, 인류 전체의 처지를 들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비평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 비평을 신학에 적용해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우리도 가끔 욥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대장부답게 허리를 동이고 일어서서 대답해 보라시면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욥 38:4, 5)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욥 38:8)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집요하고 풍부했으며, 욥은 갈수록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길고 긴 질문의 터널 끝에서 욥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끝으로 욥은 마침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 욥 42:5, 6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욥이 새로운 무엇에 눈떴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난을 감내하면서 비로소 형제들이 직면한 고난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그 고난의 역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함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시련은 그의 내면 전체를 뒤바꿔놓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도 형제들도 그에게 막연한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에게 더 이상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지금 하나님을 '눈으로 뵙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침내 영의 눈을 뜬 것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성공회의 젊은 신부였던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소에서 그동안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변화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지만,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마침내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골육지친처럼 대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백합니다.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히 7:24, 25
내 마음의 빛이신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주님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귀로 들어 아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은 많지만 경외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은 많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눈을 감았던 상태에서 믿음의 눈을 뜨고, 듣기만 했던 신앙에서 이제는 보는 신앙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이 새로이 보이기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종속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신앙의 눈을 뜨고 말씀을 깨닫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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