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1주 영혼의 가난, 마음의 순결, 성령을 향한 순종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욥 38:1-7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 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 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 리를 질렀느니라
응송 | 시 104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 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서신 | 히 5:1-10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 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 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 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 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 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 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 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 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 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 느니라
복음 | 막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 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 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 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 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 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 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 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42-44을 묵상하십시오. 이방의 집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다른 점은 어떤 모습에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② 욥 38:2을 묵상하십시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 구라고 생각하십니까?
③ 히 5: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 이 '들으심을 얻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영혼의 가난, 마음의 순결, 성령을 향한 순종
윌리엄 세논이 쓴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작품'에 보면 토마스 머튼은, 미국 사회주의 철학자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말한 '자유의 세 가지 방식'에서 실마리를 얻어서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가난, 순결, 그리고 순종(순명)의 삶으로 묘사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첫째, '거짓된 욕망들과 환상적인 자기 추구로 가득 찬 나의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즉 소비사회가 대중매체의 힘을 이용해 나에게 강요하는 거짓 필요들에 매여 있는 상태로부터 나를 풀어놓아주는 '영혼의 가난'이 곧 자유입니다. 또 자유는 대중적 의견이 진실을 향한 나의 시야를 가리려 할 때, 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그런 순결한 마음은 나로 하여금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위조된 가치관들을 향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자유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가치들을 확고하게 하고, 내적 회복을 도와 '성령께 순종'을 낳게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영혼의 가난'과 '마음의 순결'과 '성령을 향한 순종'이 있다면, 우리는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혼의 가난'도 '마음의 순결'도 '성령을 향한 순종'도 없다면, 우리는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잃고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제자들 모습에서 바로 그러한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지금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걷고 계십니다. 이 길 끝에는 죽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주님은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와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죽임까지 당함으로 세상에 평화를 주듯, 너희 또한 나의 희생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 겸손히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름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지 않고 흘려보내고 맙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묻기도 두려워했다(막 9:32)고 마가는 전해줍니다. 이렇게 '주님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엉뚱한 반응, 그리고 제자도에 관한 담화'로 이어지는 이 패턴은 성경에서 여러 번 목격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지난 성령강림 후 제17주 말씀에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막 9:33)고 물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때 제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막 9:33)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라며 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의 당부가 무색해져버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막 10:35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주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다른 제자들은 보지 못한 변형되신 예수님 모습(마 17:1-8)을 그들은 베드로와 함께 체험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 위에 내리는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음성을 베드로와 함께 들었기에(마 17:5), 그들은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막 3:17)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들은 감추어진 신비를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자신들이 더 없는 사랑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으며, 주님 또한 자신들을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우월감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모르시지 않음에도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주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10:36)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다 아는 그 말을 꺼냅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 막 10:36, 37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한다는 말이 이들을 보면 참 맞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하신 주님의 당부는 이내 망각해버리고, 그들은 자기들 마음속의 숨은 욕망을 청탁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서열 정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는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권력에의 본능에 더 집착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영혼의 가난'이라든지 '마음의 순결'이라든지 '성령을 향한 순종' 같은 덕목이 그만 무색해져버리고 맙니다. 이들의 이 요구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에서 "그들이 목표는 보면서도 길을 보지 못했다"고 진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십니다.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 막 10:38a
이 꾸지람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없는 나라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지상 왕국을 한 번도 선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또 하나는 때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난과 피를 흘려야 할 때이지, 높은 자리를 탐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주님의 좌우편'이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욕에만 불타 있는 제자들의 영적 어두움에 실망하신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막 10:38b
한 번 욕망에 마음을 빼앗긴 그들은 예수님 질문의 무게를 달아보지도 않은 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막 10:39a) 주님께서 마시는 잔을 자기들도 마시고, 주님께서 받는 세례를 자기들도 받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시는 잔'이 무엇입니까? 희랍어로 '잔(포테리온 ποτήρον)'은 종종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피맺힌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우리는 이 짧은 기도에서 '잔'을 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의 무거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잔을 마시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받는 세례'는 무엇입니까? '세례(밮티스마 βαπτισμα)' 역시 괴로움과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눅 12:50에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시면서,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곧 자신이 받을 세례임을 시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겁도 없이 그 세례를 받겠다고 합니다. 욕망에 부푼 영혼은 이들처럼 성찰을 거부하게 마련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묘사대로라면 지금 제자들은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점차 마음으로부터 자유를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창 3:6)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꼭 그랬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욕망에 부푼 대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들의 대답을 진실하게 받아주시고 장차 이들이 순교하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 막 10:39-40
실제로 이들은 주님 말씀대로 순교의 영광을 얻습니다. 야고보는 AD 44년,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12 사도 중 최초의 순교를 함으로서 주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하는 영광을 얻고, 요한은 밧모 섬으로 추방되어(계 1:9) 육체적 고난을 당함으로서 예수님께서 남겨놓으신 잔을 마셨습니다.(행 4:3;5:18, 33, 40) 이들의 사명은 비록 실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고난의 잔과 세례에 참여함으로서 자신들이 입으로 한 말을 책임집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 막 10:41
차마 겉으로 표현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야고보와 요한과 동일한 욕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 모두를 불러 앉혀놓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겸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막 10:42-45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르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권력과 지배에 바탕을 둔 세상은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킵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선택권을 박탈합니다. 질서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불신(不信)과 냉소(冷笑)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세상을 인류 앞에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섬김을 기본으로 하는 세상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 운동의 특색을 '지배의 포기'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차별과 분리를 야기한 모든 요인이 제거되어 모두가 형제자매의 우애로서 살아가는 세상,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꿈꾼 세상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치를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세상의 단초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주려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변해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일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이 세상에서는 바보스럽게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학벌과 경제적 안락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제시하는 길은 매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높아짐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한 우리는 점차 마음과 영혼의 자유로부터 멀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도달한 사람은 그 자리를 빼앗길까 두렵고, 아직 높은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안달합니다. 요한 카시아누스의 '여덟 가지 악덕에 관하여'를 보면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교만의 마귀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마귀들보다 더 사납고 악한 마귀입니다. 그 마귀는 우선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을 공격하며 거룩함의 산에 거의 도착한 사람들을 파괴합니다. 교만은 영혼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타락하게 합니다. 교만은 영혼을 완전히 어둡게 하고 완전한 파멸로 이끕니다."
이 교만의 어리석음에 대해 노자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서면 오래 서 있을 수 가 없다."(도덕경 24)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십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 욥 38:2-3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사실 이것은 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보았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길에서 누가 더 크냐의 문제로 다투었던 제자들(막 9:33), 그리고 욥기에서 지난하게 욥과 다투었던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그리고 엘리후, 그리고 우리들까지 무지한 말과 생각의 어두움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욥에게 묻는 하나님의 질문을 우리 역시 냉정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임한 고난을 내심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찾아와 토론할 때도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욥 13:22-24에서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하며, 자신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촉구했고, 욥 31:35에서는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하면서 자신이 받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과 직접 담판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욥의 이 도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의 이 끈질긴 도발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대신 70여개 항이 넘는 질문을 시작하십니다.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 욥 38:4-6
하나님의 이 물음 안에는 당신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신 창조자'시라는 선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는 물음에는 "그때 너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라는 지적이 엄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땅과 바다와 거기 서식하는 동물과 식물에 대해 물으시는데, 38:1에서 시작된 질문이 무려 39:30까지 계속되며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라며 욥을 압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모두 그친 후에 욥의 반응은 이랬습니다.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 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욥 40:4, 5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혜의 비천함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서신서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말씀합니다.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 히 5:7-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이 있는 겸손하신 분이셨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으며, 그럼으로써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온전함에서 나오는 자유함을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거짓된 욕망에 휘둘리고, 부풀려진 자아에 지배당하며, 어느 틈에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상실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혼의 가난'과 '마음의 순결'과 '성령을 향한 순종'으로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거짓된 욕망과 부풀려진 자아로 자유를 잃고 있지 않은가?
② 가난과 순결과 순종의 영성으로 내적 자유를 얻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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