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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9주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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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10-02 12:11
조회
894
성령강림 후 제19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욥 2:1-10
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 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 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 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 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응송 | 시 26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서신 | 히 1:1-4, 2:5-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 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 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 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 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 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 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 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복음 | 막 10:2-12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 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 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 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8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창조 때, 즉 율법 이전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떠했다고 말씀하십니까?
② 욥 2:5을 묵상하십시오.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라 고 할 때, 사탄이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히 2:11을 묵상하십시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형제라 불리어 진 이유는 어떠한 까닭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오늘 복음서는 사랑의 수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보다 원초적이고 보편화된 인간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역시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4:12에서 이렇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은 사랑의 수위성에 관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기 힘이나 결단이나 능력으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인데, 심지어 자기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조차도 완성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성되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이미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해진다고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떠나있는 사람들이라고 감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떠보기 위해 던지는 질문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더 이상 사랑을 실천할 능력을 상실해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얼른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물음 속에는 어떤 함정이 음흉하게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런 시험을 당하셨다면, 제자 된 우리들은 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시험과 함정의 위험을 겪게 될까요? 사실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를 창 2:18 말씀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 말씀은 남녀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생물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셨고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소명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즉 남편에게 있어 아내는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는 그런 소유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곁에 있게 하신 또 다른 아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목적'이란 게 뭡니까? 그것은 '생명의 재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들어 주심으로서 생명이 계속해서 재창조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는 창 3:20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실제로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라는 뜻의 '하야(hajah)'라는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자는 '생명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자는 창조의 섭리를 따라 반드시 여자 즉 아내와 결합됨으로서만 생명의 신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창조의 섭리를 따라 반드시 여자 즉 아내와 결합되어야만 생명의 신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따라서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아내를 버린다는 건, 그건 '생명의 어머니'로서의 여자에 대한 폭력이고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폭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안다 하는 바리새인들이 심지어 예수를 시험하려는 의도까지 담아서 그렇게 폭력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곳이 '요단강 건너편' 즉 '베레아' 지역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지역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어떤 인물입니까?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고, 세례 요한이 그의 불의한 행동을 비판하자 목을 베어 처형해버린 인물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 이 지역은 적어도 자기 아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두 가지 덫을 두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려도 된다' 하시면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만약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 하시면, 아내를 버린 헤롯 안티파스의 심기를 건드려서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쳐 놓은 이 덫에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우선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 섞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기들이 가장 권위를 두는 모세의 율법에서 스스로 찾도록 하십니다. 그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들의 이 대답은 신24:1에 근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인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었을 경우에'는 이혼증서를 써 주어 내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인에게서 수치되는 일' 그게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시 비교적 엄격했던 샴마이(Shammai) 학파에서는 '여인의 음행(淫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힐렐(Hillel) 학파에서는 보다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아내에게서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어떤 점이라도 발견되면 아내를 버릴 사유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의 음식을 태웠을 경우에도 이혼 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 남자들은 힐렐 학파의 견해를 선호했습니다. 가뜩이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인을 남자의 소유물 정도로 간주해서 남자가 자유롭게 여인의 신분을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처음 이 법률을 공포했을 때는 그런 가부장적 권위 따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힘없는 여인들이 보호받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뜻이 묻어납니다.
당시 사람들은 완악한 마음으로 이혼장도 없이 아내를 버리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내를 쉽게 버리는 그 완악한 일을 못하도록 그들에게 율법을 만들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생각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태초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던 당시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근거해 질문해 오는 바리새인들에게 새삼 창세기의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일까요? 모세의 율법이 만들어 지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아직은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지 않을 그 때,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던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8절 안에서만 연거푸 두 번 '한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처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자기 갈빗대로 만든 여자가 다가올 때 아담은 감격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아담의 이 고백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그의 이 감격스러운 고백이 단지 자기와 다른 이성을 만난 기쁨이 아니라 자기와 동일한 존재를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여자는 마치 갈빗대가 내 존재의 일부인 것처럼, 비록 남자와 이성(異性)이지만, 동시에 남자와 더불어 한 존재를 이루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또 다른 나'를 만난 감격 속에서 아담은, 마치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라고 고백하신 것처럼(요 10:38 ; 14:10, 11 ; 17:21, 23), 자기 아내를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며 찬미합니다. 우리가 남녀평등을 이야기 하지만 아담의 이 표현은 평등이라는 표현마저 속물스럽게 느껴질 만큼 여자의 존재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표현입니다. 주님은 9절에서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 사이에 금이 생겨났을 때, 법 이전에 하나님께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법전을 들이대면서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묻는 바리새인을 창세기의 현장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빗대를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부부에게도 위기는 왔습니다. 그 위기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성격 차이에서 온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위기는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왔습니다. 유혹하는 자에게 마음을 미혹 당했을 때, 그래서 마음이 완악해져버리고 말았을 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던 순일한 관계가 그만 "당신이 나에게 주신 저 여자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이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시험해 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라고 완곡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토록 완악해진 마음은 결코 율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성경에서 욥이라는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 욥을 주의해 보라시며 그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아마도 그는 범인들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신앙과 인격을 소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사탄이 그를 휘감았을 때, 끝내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본질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던 율법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랑까지 하실 만큼 정직한 인격도 사탄의 시험 앞에서는 갈대처럼 흔들리고, 심지어 마음의 완악함을 숨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이 고민은 우리를 서신서의 말씀으로 안내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다 한 근원에서 낳았다'는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가 '한 하나님께' 뿌리를 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가 창세기 때 울려 퍼졌던 한 남자의 고백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태초의 남자와 여자가 그러했듯이 신랑이신 주님과 나의 관계 역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일치될 때, 비로소 거기에서 참된 사랑이 꽃을 피우고, 비로소 거기에서 참된 생명이 꽃피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실 때, 간절한 마음을 담이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한 근원(根源)에서 난, 주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서 이 성찬에 참여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창세기에서 꽃 피었던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감격스럽게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았는가?
②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살아가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욥 2:1-10
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 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 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 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 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응송 | 시 26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서신 | 히 1:1-4, 2:5-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 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 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 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 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 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 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 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복음 | 막 10:2-12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 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 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 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0:8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창조 때, 즉 율법 이전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떠했다고 말씀하십니까?
② 욥 2:5을 묵상하십시오.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라 고 할 때, 사탄이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③ 히 2:11을 묵상하십시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형제라 불리어 진 이유는 어떠한 까닭입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성된다
오늘 복음서는 사랑의 수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보다 원초적이고 보편화된 인간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역시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4:12에서 이렇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은 사랑의 수위성에 관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기 힘이나 결단이나 능력으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인데, 심지어 자기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조차도 완성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성되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이미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해진다고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떠나있는 사람들이라고 감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떠보기 위해 던지는 질문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더 이상 사랑을 실천할 능력을 상실해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막 10:2
얼른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물음 속에는 어떤 함정이 음흉하게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런 시험을 당하셨다면, 제자 된 우리들은 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시험과 함정의 위험을 겪게 될까요? 사실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를 창 2:18 말씀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 말씀은 남녀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생물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셨고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소명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즉 남편에게 있어 아내는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는 그런 소유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곁에 있게 하신 또 다른 아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목적'이란 게 뭡니까? 그것은 '생명의 재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들어 주심으로서 생명이 계속해서 재창조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는 창 3:20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실제로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라는 뜻의 '하야(hajah)'라는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자는 '생명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자는 창조의 섭리를 따라 반드시 여자 즉 아내와 결합됨으로서만 생명의 신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창조의 섭리를 따라 반드시 여자 즉 아내와 결합되어야만 생명의 신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따라서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아내를 버린다는 건, 그건 '생명의 어머니'로서의 여자에 대한 폭력이고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폭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안다 하는 바리새인들이 심지어 예수를 시험하려는 의도까지 담아서 그렇게 폭력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곳이 '요단강 건너편' 즉 '베레아' 지역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지역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어떤 인물입니까?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고, 세례 요한이 그의 불의한 행동을 비판하자 목을 베어 처형해버린 인물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 이 지역은 적어도 자기 아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두 가지 덫을 두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려도 된다' 하시면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만약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 하시면, 아내를 버린 헤롯 안티파스의 심기를 건드려서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쳐 놓은 이 덫에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 막 10:3
우선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 섞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기들이 가장 권위를 두는 모세의 율법에서 스스로 찾도록 하십니다. 그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 막 10:4
그들의 이 대답은 신24:1에 근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인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었을 경우에'는 이혼증서를 써 주어 내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인에게서 수치되는 일' 그게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시 비교적 엄격했던 샴마이(Shammai) 학파에서는 '여인의 음행(淫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힐렐(Hillel) 학파에서는 보다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아내에게서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어떤 점이라도 발견되면 아내를 버릴 사유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의 음식을 태웠을 경우에도 이혼 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 남자들은 힐렐 학파의 견해를 선호했습니다. 가뜩이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인을 남자의 소유물 정도로 간주해서 남자가 자유롭게 여인의 신분을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처음 이 법률을 공포했을 때는 그런 가부장적 권위 따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힘없는 여인들이 보호받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뜻이 묻어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 막 10:5
당시 사람들은 완악한 마음으로 이혼장도 없이 아내를 버리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내를 쉽게 버리는 그 완악한 일을 못하도록 그들에게 율법을 만들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생각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막 10:6-9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태초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던 당시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근거해 질문해 오는 바리새인들에게 새삼 창세기의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일까요? 모세의 율법이 만들어 지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아직은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지 않을 그 때,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던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8절 안에서만 연거푸 두 번 '한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처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자기 갈빗대로 만든 여자가 다가올 때 아담은 감격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아담의 이 고백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그의 이 감격스러운 고백이 단지 자기와 다른 이성을 만난 기쁨이 아니라 자기와 동일한 존재를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여자는 마치 갈빗대가 내 존재의 일부인 것처럼, 비록 남자와 이성(異性)이지만, 동시에 남자와 더불어 한 존재를 이루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또 다른 나'를 만난 감격 속에서 아담은, 마치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라고 고백하신 것처럼(요 10:38 ; 14:10, 11 ; 17:21, 23), 자기 아내를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며 찬미합니다. 우리가 남녀평등을 이야기 하지만 아담의 이 표현은 평등이라는 표현마저 속물스럽게 느껴질 만큼 여자의 존재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표현입니다. 주님은 9절에서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 사이에 금이 생겨났을 때, 법 이전에 하나님께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법전을 들이대면서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묻는 바리새인을 창세기의 현장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빗대를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부부에게도 위기는 왔습니다. 그 위기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성격 차이에서 온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위기는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왔습니다. 유혹하는 자에게 마음을 미혹 당했을 때, 그래서 마음이 완악해져버리고 말았을 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던 순일한 관계가 그만 "당신이 나에게 주신 저 여자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이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시험해 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라고 완곡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토록 완악해진 마음은 결코 율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성경에서 욥이라는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 욥을 주의해 보라시며 그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욥 2:3
아마도 그는 범인들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신앙과 인격을 소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사탄이 그를 휘감았을 때, 끝내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본질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던 율법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랑까지 하실 만큼 정직한 인격도 사탄의 시험 앞에서는 갈대처럼 흔들리고, 심지어 마음의 완악함을 숨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이 고민은 우리를 서신서의 말씀으로 안내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히 2:11
이 말씀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다 한 근원에서 낳았다'는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가 '한 하나님께' 뿌리를 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가 창세기 때 울려 퍼졌던 한 남자의 고백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태초의 남자와 여자가 그러했듯이 신랑이신 주님과 나의 관계 역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일치될 때, 비로소 거기에서 참된 사랑이 꽃을 피우고, 비로소 거기에서 참된 생명이 꽃피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실 때, 간절한 마음을 담이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한 근원(根源)에서 난, 주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서 이 성찬에 참여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창세기에서 꽃 피었던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감격스럽게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았는가?
②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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