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8주 거룩한 욕망(慾望)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민 11:24-29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 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26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 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응송 | 시 124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짐으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서신 | 약 5:13-20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 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 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 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 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복음 | 막 9:38-50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 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 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 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 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 으니라 |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 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9:38을 묵상하십시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라는 요한의 표현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② 민 11:27-29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모세의 말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③약 5:13-16을 묵상하십시오. 야고보가 기도에로 초청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거룩한 욕망(慾望)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섬김의 지혜를 일깨워주시는 가르침이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계속 연결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고 하셨습니다. 땅의 사람들에게 있어 '첫자리'의 의미가 높은 자리, 군림하는 자리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첫 자리의 의미는 가장 낮은 자리, 섬기는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모범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라고 말씀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뿐 아니라(요 13:4-5),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완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조금 결이 다릅니다. 지난주의 말씀이 '믿음의 형제들' 간의 겸손과 섬김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비록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을 지라도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 막 9:40
바로 이 말씀에 예수님 가르침의 요체가 요약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신앙이란 것이 우리 내면에 성숙하게 뿌리내리지 못하면 사람을 구분해 갈라놓거나 대립을 조장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경쟁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에게도 그런 본능이 내제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 막 9:38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에게 있는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모두 악령의 악한 영향력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악령을 쫓아내면 사람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악령을 쫓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악령보다 더 유력한 영(靈)의 이름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의 이름으로 악령을 향해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면 악령이 쫓겨나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행위를 중지시키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공동체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막 9:38 공동번역) 배타성과 차별이 배여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요한의 이 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요한은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금(禁)한 자기들의 행위가 타당한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요한의 이 물음 역시 지난 주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 즉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라고 말씀하신 것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라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로 표상된 누군가를 영접하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라고 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금(禁)한 자기들의 행위가 과연 타당하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의 행위가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듯싶습니다.요한의 말에 담긴 또 하나의 질문은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님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낯선 사람의 행위가 예수님의 눈에는 정당한가의 문제입니다. 사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채 몇 시간 전에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아이'(막 9:14-18)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쓰라린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신들조차 하지 못한 그 일을 주님을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해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치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로 인한 제자들의 시기와 질투의 감정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는 요한의 표현에서 고스란히 감지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 이름이 자기들 전유물이듯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사역 또한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들의 시기심과 질투가 배타적인 감정과 차별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유작(遺作)인 '에티카'에서 한 말입니다.
경쟁심(aemulatio 질투, 시기)이란 우리와 유사한 다른 사람이 우리가 표상하는 어떤 것에 대해 욕망을 가졌을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리와 유사한 다른 사람'은 그저 단순한 '타인(他人)'이 아닙니다.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똑같이 욕망하는 일종의 경쟁자입니다. 어쩌면 지금껏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따르고 닮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욕망하는 대상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진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그들이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서열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의심은 매우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그들이 보았습니다. 이때 감추어져 있던 그들의 욕망이 배타적인 감정과 차별로 나타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런 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욕망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으로 숙성되지 못하고, 자칫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야 할 대상이 아닌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때, 나 아닌 타인에 대해 배타적 감정을 갖게 되고 시기와 질투로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매우 끔찍하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확장시키기 위해 타인과의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코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말아야 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 막 9:39-40
언뜻 들으면 주님의 이 말씀은 다소 정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마치 자신들만 진리의 소유지인양 교만하게 행동하지 말고,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부입니다. '금하지 말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너그러움과 포용성을 봅니다. 하지만 이 너그러움과 포용성은 단지 좋은 인격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집념이라는 점에서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이 많은 백성을 저 혼자서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민 11:14) 라며 무거운 짐을 함께 감당할 지도자를 구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노인 중에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회막에서 함께 서라"(민 11:16)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 11:17) 실제로 그들이 모세를 도와 백성의 짐을 함께 지려면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풍성한 영'이 그들에게도 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 민 11:24-25
하나님께서는 17절에서 말씀하신대로 모세에게 임하게 하셨던 영(靈)을 칠십 장로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는 예언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영을 거두어들이시면 예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 민 11:26
여기 나오는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는 백성의 장로 칠십 인에 뽑히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자 그들도 진영에서 예언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이 일은 자칫 이스라엘 진영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모세가 기명(記名 민 11:27)하지 않은 사람이 이스라엘 진영에서 예언을 하기 시작했을 때, 아직 국가로서 채 자리를 잡지 못한 이스라엘 전체가 무질서와 혼란으로 빨려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말합니다.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 민 11:27-28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오늘 복음서의 상황과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한 낯선 사람이 단지 자기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막 9:38)라고 말하는 요한과, 하나님의 영이 임해 진중에서 예언을 했던 엘닷과 메닷이 단지 처음부터 기명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라고 말하는 여호수아는 표면적으로는 공동체의 질서를 내세우고 있지만, 감추어진 내면은 경쟁심과 질투에 점령되어 있고, 그렇게 미혹된 마음으로 질서를 빙자한 차별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시간을 거슬러 창조시점으로 가보지요. 태고에 사람은 '초자아(超自我 superego)' 상태를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초자아'란 '죄가 없는 자아(自我)'를 뜻합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에 의하면 그는 도덕적으로 완결된 사람입니다. 그런 초자아를 가진 '첫 사람'은 에덴동산에 자기를 통제하는 자가 없었음에도, 창조질서 안에서 자연 그 자체로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보이는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고 하셨습니다. 통제하는 자를 세우지 않고 스스로 지키게 하신 것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사람 역시 '스스로 있는 자'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하지만 뱀이 찾아와 사람의 욕망을 깨웠습니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창 3:5)는 뱀의 유혹은 사람의 욕망을 자극해 일어나게 했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상상은, 볼 수 있는 힘을 획득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욕망을 충동했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을 충동했고, 선악을 알게 된다는 상상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 내가 선과 악을 심판하려는 욕망을 충동했습니다. 이렇게 유혹에 성공한 악마는 이후로도 집요하게 사람의 마음을 부추겨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애(自己愛)적 세계에 빠져 하나님께 순명하는 자아가 아닌, 하나님을 욕망하는 자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욕망이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요한이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의 마음을 충동해서 미묘한 경쟁심리에 빠져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매우 사랑하신 용사이고,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을 이끌었던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마음에 경쟁심이 일어나니 타인의 사역에 시기와 질투로 반응하는 겁니다. 이럴 때 지도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모세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 민 11:29a
지도자로서 모세의 영적 통찰력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호수아의 단 한 마디 말에서 그가 욕망에 빠져있음을 정확하게 보아냅니다. 하지만 모세의 말을 자세히 보십시오. 시기에 빠진 여호수아의 속내를 탓하지 않고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즉 "나를 위해 네가 시기하고 있구나"라며 그의 속내를 두둔해 줍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의 내면에 감춰진 온유함과 지혜로움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입니다.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민 11:29b
그는 비록 자신이 기명(記名)해서 하나님께 전해드리지는 않았지만, 진영 내에서 행하는 엘닷과 메닷의 예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선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감히 자기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지 않습니다. 경쟁심에 마음 빼앗겨 시기와 차별을 범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중재해서 선지자가 된 사람도, 자기의 중재 없이 선지자가 된 사람도,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예언되는 것이라면 모두가 동등한 선지자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칫 스스로의 경쟁심에 갇혀서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가두려고 한다면 먼저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영을 지배하려 드는 것이고, 다음은, 형제들을 섬지는 자가 아닌 지배하는 자가 되려는 것이겠습니다. 서신서에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 약 5:13-15
여기, 사도 야고보가 나열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고난당하는 자, 병든 자, 죄를 범한 자, 이들은 당시 사회적 정서 안에서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따돌림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할 자격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의 기도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을 야고보는 믿고 알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씀을 듣고 그들 모두가 얼마나 마음의 위로를 받았을까요? 그런데 야고보는 그들에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하고,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시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장로와 초기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세움 받은 장로는 그 의미와 사역과 성격에 있어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제도화 된 교회에서 장로와 병든 자, 특히나 죄를 범한 자는 어쩔 수 없이 이질적인 사이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라는 것은 서로를 차별하지 말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더욱이 그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약 5:16
누군가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자기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라 위험합니다. 더구나 이질적인 상태 앞에서의 고백은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의 최고 선(善)을 요구합니다. 시인이고, 심층심리 분석가인 '윤 정' 선생이 '자끄 라깡 왜! 예수 사랑을 욕망하는가?'에서 "선악과 사건 이후로 세상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차고,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넘실거린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받고 싶은 욕망의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인간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받는다고 상상을 한다."라고 지적하며, 우리의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거룩한 욕망' 즉 '사랑하고 싶은 욕망'으로 바꾸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사랑할 욕망'의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몸을 사랑으로 보았기에 '내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여전히 세상은 사람을 욕망을 실현할 대상으로 보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자기 욕망을 채워줄 대상으로 볼 때가 많습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 우리는 경쟁심에 빠지기도 하고, 시기와 차별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해야만 합니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거룩한 욕망' 즉 '사랑할 욕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신앙과 형제애를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형제애로서 열매 맺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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