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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눈은 봄으로,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9-04 11:48
조회
822
성령강림 후 제15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잠 22:1-2, 8-9, 22-23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 이니라 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응송 | 시 12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서신 | 약 2:1-10, 14-17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 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 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 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 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 나니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 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 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복음 | 막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 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7:34을 묵상하십시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참된 열림 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② 약 2:1-4을 묵상하십시오. 오늘 성서일과 안에서 볼 때, 서로 차별 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행동입니까?
③ 잠 22:9을 묵상하십시오.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가져다주는 사람의 시선을 잠언 기자는 어떠한 '눈'이라고 표현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과 데가볼리를 통과해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을 때, 벌어졌던 사건 하나를 보여줍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께 귀 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막 7:31-32).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의 행동이 평소 같지 않습니다.
그의 회복은 위로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눅 11:20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손가락(다크튈로 데우 δακτὑλῳ θεοῡ)'이라고 하셨는데, 양 귀와 혀에 닿는 예수님의 손가락에서 환자는 자기 영혼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따뜻한 위로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탄식'이란 안타까움에서 우러난 신음소리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보며 주님은 탄식과 신음소리를 토해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탄식소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정말 마음 아파하고, 그의 처지가 가슴으로 느껴져서 탄식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도로 들어주십니다. 탄식이란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 탄식은 내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탄식의 출발점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롬 8:26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연약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몰라 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이때, 성령님의 심정과 통해서 같은 호흡으로 탄식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바로 이 탄식이 있은 후에 주님은 '에바다(εφφαθα)'라고 외치십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엡파타(eppattah)' 즉 '열려라'라는 의미이고, '해방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페타(petah)'에서 온 동사입니다. '육신의 귀와 혀'만이 아닌 '감각 전체'가 해방되어 하나님을 향해, 진리를 향해 열리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불쌍한 사람의 실존이 잔혹한 매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넘어 진리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경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한 '에바다' 즉 '열림'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 열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이 열림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보십시오.
마 13:16-17을 보면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예수님께서 배에 앉으셔서, 해변에 서 있던 무리들에게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 끝에 하신 말씀인데, 이사야 선지자 때의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서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겨져있어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했지만(마 13:14-15), 지금 너희는 눈이 보는 그것을 보기에 복되고, 귀가 듣는 그것을 듣기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눈이 보는 그것을 마음으로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눈이 보는 그것을 마음도 함께 보는 사람이 있는데, 눈은 참으로 볼 때 복이 있고, 귀는 참으로 들을 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고 참으로 듣는다는 것,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뜻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당신을 계시하시던 때, 이미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 6) 여기에서 '그 때'란 이사야의 입장에서는 미래적 사건으로서 '메시아가 오셨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 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란다는 것은, 육체적인 상태와 더불어 영적 상태에 중대한 진전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병자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그들의 반응은 무척 달랐을 것입니다. 마가는 이때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에 귀를 닫은 까닭에 신앙의 시선도 닫혀 있지 않은가?
② 말씀을 경청함으로 신앙의 시선, 선한 눈을 갖게 되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잠 22:1-2, 8-9, 22-23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 이니라 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응송 | 시 12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서신 | 약 2:1-10, 14-17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 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 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 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 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 나니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 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 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복음 | 막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 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7:34을 묵상하십시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참된 열림 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② 약 2:1-4을 묵상하십시오. 오늘 성서일과 안에서 볼 때, 서로 차별 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행동입니까?
③ 잠 22:9을 묵상하십시오.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가져다주는 사람의 시선을 잠언 기자는 어떠한 '눈'이라고 표현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눈은 봄으로,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과 데가볼리를 통과해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을 때, 벌어졌던 사건 하나를 보여줍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께 귀 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막 7:31-32).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의 행동이 평소 같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 막 7:33-34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런 유형의 사람을 헬라어는 '모길랄로스(μογιλάλος)'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말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기질적 요인이든 환경적 요인이든 어떤 연유로 갖게 된 장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은 이 사람의 장애에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주님은 군중들로부터 그를 따로 불러내셔서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발라주십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사람은 예수님 손가락을 통해 감히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지게 된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자신을 드러내셔서 '만질 수 없는 분'이셨던 하나님께서 '만질 수 있는 지체'를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 손가락을 이 사람 귀에 넣고 또 손가락으로 혀를 만지심으로써 그는 신비 속에서 인성을 감촉하며, 신성과 조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와의 감각기관을 통한 만남에 나서신 것이고, 그의 닫힌 정신세계 안으로 뛰어드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소통하는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은 바라셨을 것입니다.그의 회복은 위로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눅 11:20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손가락(다크튈로 데우 δακτὑλῳ θεοῡ)'이라고 하셨는데, 양 귀와 혀에 닿는 예수님의 손가락에서 환자는 자기 영혼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따뜻한 위로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탄식'이란 안타까움에서 우러난 신음소리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보며 주님은 탄식과 신음소리를 토해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탄식소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정말 마음 아파하고, 그의 처지가 가슴으로 느껴져서 탄식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도로 들어주십니다. 탄식이란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 탄식은 내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탄식의 출발점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롬 8:26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연약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몰라 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이때, 성령님의 심정과 통해서 같은 호흡으로 탄식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바로 이 탄식이 있은 후에 주님은 '에바다(εφφαθα)'라고 외치십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엡파타(eppattah)' 즉 '열려라'라는 의미이고, '해방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페타(petah)'에서 온 동사입니다. '육신의 귀와 혀'만이 아닌 '감각 전체'가 해방되어 하나님을 향해, 진리를 향해 열리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불쌍한 사람의 실존이 잔혹한 매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넘어 진리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경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한 '에바다' 즉 '열림'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 열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이 열림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보십시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 막 7:35
이 사람은 오랫동안 듣지 못하고, 따라서 말도 어눌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귀도 입도 닫힌 채 살아가던 이 사람이 자기 내면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가락과 자기의 처지에 공감하고 탄식을 토해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격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 막 7:36
여기에서 '그들'이란 환자 본인뿐 아니라 그 이적을 목격한 모든 사람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은, 그들이 기적 자체에 시선을 빼앗겨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소인배의 시선이란 게 그렇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보이는 현상(現象)과 물상(物象)'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물상들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을 고친 기적에 열광하는 것이 아닌, 그 일을 하신 예수님께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를 말할 때,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겠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는다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단지 말씀만을 통해 주어졌다면, 신약성경에서는 말씀과 동시에 형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고, 그 말씀을 듣고 전달하는 사역은 선지자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볼 수 없는 분이 볼 수 있게 되었고, 표현될 수 없는 분이 표현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가 열리면서부터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말씀으로만 당신을 표현하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자의 위격으로 성육신 하셔서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요한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리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복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마 13:16-17을 보면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예수님께서 배에 앉으셔서, 해변에 서 있던 무리들에게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 끝에 하신 말씀인데, 이사야 선지자 때의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서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겨져있어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했지만(마 13:14-15), 지금 너희는 눈이 보는 그것을 보기에 복되고, 귀가 듣는 그것을 듣기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눈이 보는 그것을 마음으로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눈이 보는 그것을 마음도 함께 보는 사람이 있는데, 눈은 참으로 볼 때 복이 있고, 귀는 참으로 들을 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고 참으로 듣는다는 것,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뜻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당신을 계시하시던 때, 이미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 6) 여기에서 '그 때'란 이사야의 입장에서는 미래적 사건으로서 '메시아가 오셨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 때,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란다는 것은, 육체적인 상태와 더불어 영적 상태에 중대한 진전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병자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그들의 반응은 무척 달랐을 것입니다. 마가는 이때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 막 7:37
만약 이들이 놀란 이유가 장애인이 치유된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에게서 메시아를 보았기 때문이라면 그들의 시선은 얼마나 복된 것일까요? 기적 자체에 호기심을 보이고 놀라워하는 것과, 예수님을 놀라워하고 찬양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메시아적 구원 사건을 통해 숱한 눈과 귀들이 진리를 향해 열리고 있습니다. 부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여러분 마음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사람이 만든 전통과 '구전율'을 근거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부정한 자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짧지만 매우 단호했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막 7:14) 주님은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불순한 모습들이 단순히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인격의 가장 심층부인 '마음'까지 거슬러 내려가 그들의 마음이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심으로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이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변화는 바로 진리를 향해 열린 눈과 귀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잠언 기자는 말씀합니다.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 잠 22:1
우리가 시선을 두고 살아가야 할 우선순위를 분명히 정리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면 사람을 대하는 시선도 함께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단언합니다.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 잠 22:2
진정한 시선이란 그런 겁니다. 가난한 자를 보거나 부한 자를 보거나, 건강한 자를 보거나 병든 자를 보거나, 그들의 현실을 보며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그들 모두를 지으신 하나님을 보기에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그런 시선을 '선한 눈'이라고 말합니다.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 잠 22:9
'선한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들려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을 때, 그리고 성자의 위격으로 성육신 하셔서 볼 수 없는 분을 보이신 예수님을 향해 눈뜰 때 우리 눈은 선한 눈이 됩니다. 바로 그 눈을 갖기 위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향해 순일하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야고보가 말씀하는 공동체는 눈멀고 귀 먹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신앙에서 떠나 있었습니다.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약 2:3, 4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들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 귀를 열지 않고 '보이는 예수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다음 절에서 이렇게 당부합니다.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 약 2:5
여기에서 '들음'에 대한 권고가 더 절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때, 참되고 본 된 마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어둠속을 헤맬 때가 많습니다. 여전히 듣지 못하면서 말하고, '들음'이 결여된 내 말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거나 공동체 안에 숱한 상처들이 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더듬더듬이라도 주님의 말씀으로 말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에바다! 열려라!" 예수님을 향해 열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해 열려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시선을 열고, 예수님을 향해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 진정한 열림을 통해 여러분의 생명이 영원으로 잇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에 귀를 닫은 까닭에 신앙의 시선도 닫혀 있지 않은가?
② 말씀을 경청함으로 신앙의 시선, 선한 눈을 갖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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