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2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잠 9:1-6
1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응송 | 시 111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서신 | 엡 5:15-21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복음 | 요 6:51-58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 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6:53을 묵상하십시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 지 아니하면' 우리 안에 궁극적으로 무엇이 없게 됩니까?
② 요 6:54, 56을 묵상하십시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 주 어지는 존재의 새 차원은 무엇입니까?
③ 잠 9:1-6을 묵상하십시오. 지혜가 어리석은 자와 지혜 없는 자를 잔칫상 으로 초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죄의 쓰라린 산물인 영적 죽음 혹은 영혼의 죽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후에 즉시 발생했습니다.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는, 불순종이 행해진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아담의 영혼은 사망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를 계속 읽어보면, 아담의 육체는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었으며, 이후로도 그는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더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삼십 세까지 살았습니다(창 5:5).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죄가 몰고 온 것은 '영적(靈的) 죽음' 혹은 '정신적 죽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뜻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고, 그 '하나님과의 분리'를 그리스도교 전통은 죽음으로 여겨왔습니다. 빛에서 멀어지면 어둠에 묻히듯이,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죽음에 묻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습니다. 따라서 참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영적 죽음' 혹은 '영혼의 죽음'인 것입니다. 이집트의 성 마카리오스는 '진정한 죽음은 내면에 있어서, 인간은 내면에서 죽어간다'고 가르쳤는데, 인간이 악과 거짓의 원조인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게 된 그 순간부터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엡 6:12)이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탄의 포로가 된 인간은 온갖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감으로써 비록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실상 죽은 자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영적 죽음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인지, 사도 바울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엡 1:14)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흑암'이라고 단순히 말하지 않고 '흑암의 권세'라고 말함으로써, 어둠의 세계를 장악한 어떤 권세가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의 내면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영혼이 어둠에 던져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렵기만 한데, 어둠 속의 어떤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두렵고 참혹한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마 8:22절과 눅 9:60절에서 예수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그냥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이신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상황은 극도의 소외의 상태 즉 죽음의 절망적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주님은 그 두려움과 절망을 한꺼번에 걷어내는 매우 희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 요 6:51a
하나님께서는 새로이 잉태되어 태어난 아기를 위해 아기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듯 하나님은 출애굽해서 광야로 갓 나온 히브리들을 위해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음식인 만나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세례 받음으로써 신앙의 길로 갓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들의 영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음식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이 이 음식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영생' 즉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적, 수평적으로 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직적, 의미적으로 깊이 있게 산다는 뜻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영원히 산다는 뜻인데, 카이로스의 시간이란 '영원이면서 순간'이요, '순간이면서 영원'인 '참 생명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게 된 배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주님을 따라왔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 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자신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자신들에게도 떡을 주실 것(요 6:31)을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떡을 내려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참 떡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라시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 6:32, 33) 하시고, 마침내 오늘 복음서에 이르러서는,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단지 음식에 대해서만 '육체적, 생물학적'으로 굶주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완성'에 대해서도 굶주려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사람은 떡을 먹고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으로 사는 것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 요 6:51b
만약 우리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돌아왔을까요? 아니면 떡을 주시지 않고 비현실적인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었다 즉 논쟁을 벌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이 벌인 논쟁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요 6:52) 그렇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연히 혼란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님은 그들에게 더 기가 막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요 6:53
주님은 이제 '떡을 먹는다'는 표현을 넘어 '살을 먹는다'는 표현과 '피를 마신다'는 표현까지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첫 번째 말씀하신 '떡을 먹는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님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에 필요한 예전적인 태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두 번째 말씀, 즉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뿐 아니라 피까지 주시는 신앙의 신비의 정점(頂點)을 말씀하는 것과 더불어 당신의 그 결연한 희생제사에 우리 모두를 참여시키시려는 의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단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무지함을 넘어 주님의 희생 제사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려는 실체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에 대해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려면 레위기와 신명기의 관점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 17:11에서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선언하고, 레 17:14에서는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했고, 신 12:23에서는 "피는 생명"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게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감리회 장로님이신 이창우 박사께서 '바디 바이블(Body Bible)'이라는 책에서 이 레위기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해서 자신의 묵상을 소개한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을 피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몸의 5리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액체 속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것은 오직 피라고 하십니다. 다른 의미는 제쳐두고서 의사의 시각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다고 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몸의 구석구석 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피를 통해서 산소와 에너지를 공급받아야만 하는 의존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피를 끊는다는 것은 생명이 중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피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피로는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 받아 마시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를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실 때, 그 말씀은 '당신의 생명을 마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염두에 두고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요 6:54
여기에서 '살'은 영혼이 거하는 처소로서의 '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살을 먹으라'는 것은 '내 영혼을 소유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믿음의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분사로서의 '먹고', '마시고'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그가 이미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만찬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신학적 사고를 위해 중요합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의 가르침은 절정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주제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과 생명을 간직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의 성찬 제정사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라고 말씀함으로서, 성만찬이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여기에서 '먹고' '마신다'는 표현은 고스란히 그리스도의 실재성으로 연결됩니다. 즉 우리는 그 분을 받아먹음으로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며, 그럼으로써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 생명은 우리의 죽음을 이기고 우리 안에 계속됩니다.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서 통쾌하게 극복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새 몸을 입고 부활하심으로 당신의 희생당하신 몸을 완전히 되찾으셨듯이,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부활의 영광에까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성(聖) 이레네우스(St. Irenaeus)'는 자신의 책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에 떨어진 포도나무의 뿌리가 때가 되면 열매를 맺듯이 곡식의 낟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이 세상 만물을 장악하고 계신 하나님의 입김으로 번식하듯이, 그리하여 신의 예지에 의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의 제물이 되듯이, 우리의 몸은 성찬을 통해 양육된 후 지상에 떨어져 썩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부의 영광을 위해 부활시켜주시는 날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이야기입니까? 마지막 날 영광스럽게 부활해서 우리의 육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노정에 따라 실현시켜야 할 생명의 경이로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요 6:55
왜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입니까? 이 살을 통해 인간을 구원해서 하나님과 긴밀한 영적 관계를 갖게 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입니까? 이 피를 흘림으로 인간의 죄를 씻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 요 6:56-57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마침내 당신과 우리가 일치를 이루게 하셨고, 신성과 인성이 오묘하게 결합된 당신 자신을 우리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비천한 존재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살게 되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사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실현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 구원 방법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주님의 구원방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성찬에 참여하는 행위를 '잔치'라는 상징적인 장소를 통해 보여줍니다.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 잠 9:1-6
잠언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은 의인화 되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지혜'는 여선지자(잠 1:20-33)로, 창조자(잠 8:22-31)와 건축자(잠 9:1-6)로, 현숙한 여인(잠 31:10-31)으로 나타나는데, 오늘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9장에서는 의인화 된 지혜와 어리석음이 각각 건축자와 음녀로 대비되며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혜가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은 일곱 개의 기둥이 세워질 정도로 매우 큰 집이었습니다. 주석가들은 지혜가 세운 집의 일곱 가지 기둥을 일곱 가지 신적 속성(약 3:17) 혹은 일곱 교회(계 1:4 이하)를 나타낸다고 보기도 합니다. 지혜는 이 집을 완공한 후에, 성대한 축하 잔치를 벌였습니다. 히폴리투스나 오리게네스 같은 교부들은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라는 말씀을 통해 지혜가 벌인 잔치를 성만찬의 예표(豫表)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라고, 지혜가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부르는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어리석은 자'와 '지혜 없는 자'입니다.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포도주를 받아 마시지 않겠소?"(잠 9:5 공동번역)라고 부르는 이유는 놀랍게도, 어리석은 자가 생명을 얻고, 지혜 없는 자가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살인 떡과, 당신의 피인 포도주를 차린 성찬에 초대하시는 이유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성찬의 자리에 초대하시는 이유 역시 영적 지혜와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엡 5:15-17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해서 지혜롭게 사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지혜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시고, 지혜이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굶주림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배를 채워주는 빵의 결핍일까요? 사실은 빵의 결핍이 아닌 '예수님 결핍'인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영적 공허가, 그 결핍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처절하리만치 빵에 집착하도록 하는 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 요 6:56 공동번역
우리가 주님을 내 안에 모셔 들여서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시고, 내가 주님 안에서 살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빵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 자녀다운 참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을 머금은 존재로서 존귀하고 영광된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과 전혀 일치를 이루지 못한 '종교인'으로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영생'을 얻고, 친밀감을 이루고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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