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1주 깊은 마음, 하나님을 아는 마음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18:5-9, 15, 31-33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 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6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7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 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 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 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응송 | 시 130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서신 | 엡 4:25-5:2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 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 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 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복음 | 요 6:41-51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 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 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 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6:49-51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② 삼하 18:33을 묵상하십시오.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대하는 아버지 다윗을 보며 우리 사랑은 어떠한 마음이어야 한다고 생각됩니까?
③ 엡 5:1, 2을 묵상하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랑은 어디 서부터 시작된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깊은 마음, 하나님을 아는 마음
다윗은 시 64:6에서 악인들의 '마음의 교활함'을 들여다보던 끝에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라며 한탄스런 고백을 남깁니다. 이 비탄시가, 다윗이 사울왕의 박해를 받을 때 쓴 것인지, 압살롬의 반란에 쫓길 때 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다윗이 자신을 대하는 적대자들의 '속뜻과 마음'을 헤아리며 그 교활함에 자신의 마음 역시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 다윗의 시편을 묵상하다가 '깊은 마음(deep Heart)'이라는 표현을 발굴했는데, 그의 표현을 인용해서 영국 성공회 신부인 칼리스토스 웨어(Kallistos Ware)는 '표면적 마음'과 '깊은 마음'을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표면적 마음'은 선과 악의 세력 사이에 투쟁이 상존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마음의 근저' 곧 '참 마음'이 아닙니다. 반면에 '깊은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며 신성의 내재(God's indwelling) 공간이요,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중심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표면적 마음'이 아닌 '깊은 마음'으로 살아가야만 하는데, 그럼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 즉 '신성한 본성에 참여'(벧후 1:4)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마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일제히 우리에게 '깊은 마음' 즉 '하나님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요 6:35)이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도 아버지시고,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분도 아버지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요 6:44) 그 이유와 목적을 아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살을 떼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이토록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마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아버지를 욕보이고(삼하 16:21, 22), 아버지를 죽이려 자객까지 보내려 한 아들(삼하 17:1-4, 12),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장수들이 전장으로 나갈 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며 자신을 반역한 아들을 선대해줄 것을 장수들에게 당부합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삼하 18:33)이라며 마음 아파 우는 아비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깊은 마음'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1, 2b) 성부 하나님께 사랑 받은 기억, 성자 예수님께 사랑 받은 기억, 이 따뜻한 기억이 우리의 '깊은 마음'의 출발지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 요 6:41, 42
여전히 육(肉)의 눈만을 뜨고 자신들의 이성적 사고체계와 경험해온 세계관 안에서만 예수님을 인식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는 생명의 떡'(요 6:35)이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요 6:38)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익숙함'이 때때로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님께 대한 모든 것 즉 '부모, 형제, 생활환경'을 다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그 영적 진의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육의 눈으로만 보려 했기에, 그들은 거룩한 떡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고, 그 떡에 대해 배고파할 줄도 몰랐습니다. 물론 그런 육적인 반응들이 꼭 그들의 탓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아직 "나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까닭은, 말씀하셔도 아직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말씀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수군거림을 멈추게 하십니다.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요 6:43, 44
여기에서 주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지 아니하시면, 그 누구도 성자 예수님께로 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에서 "그들이 지금껏 영적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성 암브로시우스는 '신앙론'에서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아들에게로 이끌어주시며, 아들은 나중에 아버지에게 나라를 바치신다. 이는 종속이 아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보여준다."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는 '삼위일체론'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우리를 이끄시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것에서 우리는 '마음'을 봅니다. 그 마음은 바로, 우리를 영적으로 배불리시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로 또 성자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그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첫째 힘은 '말씀'입니다.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요 6:45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치심을 받아야 하고, 말씀을 듣고 배우기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스스로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만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기에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께로 가지 않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차별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지 못해서 차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로 또 성자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둘째 힘은 '생명의 떡'입니다.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요 6:48
이 생명의 떡은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 '아버지께 듣고 믿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내려 주시는 '보이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 떡을 받아먹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요 6:49-51
사실 참으로, 알아듣고 받아들여 믿기에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막연하고 이상적으로 여기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앞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 하신 말씀은 더욱 선명하게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일 아버지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알아듣게 하시고, 믿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생명의 떡 앞에서 냉랭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생명의 떡'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홀히 들은 결과, 성찬을 무시하거나 성찬을 통해 변화되기를 열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떡을 당신의 몸이라고 친히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당신의 피라고 친히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 마음이 태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상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명백히 드러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면 영생하리라는 것입니다. 비잔틴 신학자들이 성찬을 단순히 상징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성찬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성찬은 본질적으로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받아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별과 분배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 성찬 요소인 빵과 포도주는 신자들에게 숨겨지지만, 그 요소들 속에, 그 요소들과 함께, 그 요소들 밑에(in along, Under, with element)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봉헌하시는 구체적인 방법이 당신 살이 찢기는 희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희생제사이셨고, 십자가에서 맞이한 자발적인 희생적 죽음은 그 절정에 해당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왜 당신의 외아들에게 이토록 잔인한 희생을 부여하셨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당신 아들의 죽음이 대속적 가치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왜 스스로 이토록 잔인한 희생을 받아들이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당신이 죽어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아버지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자기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 다윗왕은 오열하며 이렇게 부르짖습니다.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 삼하 18:33
그런데 그 압살롬이 어떤 아들입니까? 자기 아버지를 욕보이고 세(勢)를 결집하자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한 아들입니다.(삼하 16:21, 22) 자기 아버지 죽이자고 자객을 보내려 했던 아들입니다.(삼하 17:1-4, 12) 그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아비의 마음은 자식과 달랐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요압 장군과 아비새와 잇대가 전장으로 나갈 때, 다윗이 그들을 불러놓고 당부하는 말이 뭡니까?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 삼하 18:5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는 아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남들은 다 아들의 패륜을 문제 삼아도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안전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원수가 된(롬 5:10) 우리 살리자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실이 오늘 우리가 도달해야 할 '깊은 마음'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1-2a)
바울 사도는 1절에서는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라고 말하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 받은 기억, 이 따뜻한 기억이 우리들의 '깊은 마음'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을 의미하는 원문의 '아가페타(ὰγαπητά)'는 '사랑함이 된'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의 '사랑함이 된' 존재란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요? 먼저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b)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랑 받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아버지께 사랑 받은 기억이 가슴에 간직된 사람은 아버지께 '사랑 받은 자녀답게' 행동합니다. 어머니께 사랑 받은 기억이 가슴에 간직된 사람은 어머니께 '사랑 받은 자녀답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닮으십시오."(엡 5:1 공동번역) 그런데 살아오면서 점점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나를 사랑해주신 행동보다, 묵묵히 사랑해주신 '마음'입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젠가부터 부모님의 마음이 더 마음에 남고, 하나님의 마음이 더 마음에 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받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마음' 즉 '깊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입니까?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고, 당신 아들까지 희생시켜서 우리를 살리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가장 먼저 아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속 사랑을 아셨기에 그 사랑의 마음을 따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고,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기꺼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십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 엡 5:2b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를 닮았을까요?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닮았을까요? 대개 우리의 사랑은 사랑하면서도 나에 대한 보호본능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할 때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성자 예수님의 사랑을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박효섭 목사님의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립니다.당신 때문에
나는 그만
당신이 되어요
당신 때문에
비로소 나는
내가 되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되고
사랑의
넘치는
기쁨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요
- 성삼위일체
아버지와 아들은 한 실체이므로 의지에서도 하나이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희생이라는 전대미문의 신비를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을 부여해주셨고, 당신의 영이 우리에게 불어오게 하셔서 우리 모두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기로운 제물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과 다른 마음을 지닌 채 종교인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하나님을 아는 깊은 마음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