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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0주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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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7-3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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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
성령강림 후 제10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16:2-4, 9-15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 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 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 나 내가 시험하리라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 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 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 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응송 | 시 78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사람이 힘 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서신 | 엡 4:1-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 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 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 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 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 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 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복음 | 요 6:24-35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 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 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16:12, 요 6:32-3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리신 만나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② 요 6:35을 묵상하십시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리 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두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③ 엡 4:10-13을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셨다가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한국불교 근본경전 중의 하나인 '능엄경(楞嚴經)'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이에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달을 쳐다봄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고 달의 본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이 어찌 둥근 달만 잃은 것이겠는가? 손가락 또한 잃어버린 것이다."(능엄경 제2권)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스님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을 두고 생긴 사자성어가 '견지망월(見指忘月)'입니다. 본질은 외면한 채, 지엽말단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것을 두고 흔히 쓰는 말입니다. 손가락을 보고 달의 본체로 여기는 사람이 결국에는 둥근 달만 잃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마저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후로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견지망월(見指忘月)'에 빠지는 건 전적으로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이고, 그에 따른 결과도 스스로의 몫입니다. 뒤집어서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말도 있는데, '가리키는 손가락은 잊고 달을 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읽으며 느끼는 건 예수님은 후자를 권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주 복음서의 장면으로 잠시 돌아가 보면 유월절이 가까운 때(요 6:4),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몰려오는 걸 보시고 빌립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이렇게 물으실 때, 예수님은 군중을 바라보는 빌립의 마음이 당신과 같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대답은 예수님의 바람을 비켜갔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예수님은 영(靈)으로 가슴으로 대답하기를 바라셨는데, 빌립은 육(肉)으로 머리로 수치로 계량해서 대답합니다. 로버트 파빙은 '참된 양식'이란 책에서 '함께 빵을 나누고, 자신을 함께 공유하는 것' 이 두 개념이 식사의 참된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실 때, 예수님 마음은 단지 저들의 배만 불려주는 것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떡이란 그저 배나 불려주는 음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심리적이며 지적인, 나아가 영적인 양식이었습니다. 따라서 함께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곧 사회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대답과 무관하게 사람들을 잔디밭에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들의 원대로 주십니다.(요 6:11)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요 6:12)고 증언하고, 심지어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도 했습니다.(요 6:13) 그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은 "저 분이야 말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며,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 삼으려 합니다.(요 6:15)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오병이어 표적은, 오늘 구약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광야체험을 연상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광야에서 주려 죽는다며 원망하는(출 16:3) 히브리들을 배불리실 목적으로(출 16:8, 12) 해질 때는 메추라기를 몰아와서 고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 떡을 주셨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군중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워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까지 따라와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요 6:25)하고 묻습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방금 자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호기심과 배부르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얄팍한 감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내가 말을 발설하면 여러분은 이 모든 말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 말은 고유한 의미에서 볼 때,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이런 연유로 나도 여전히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의 원상이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영혼 가운데 태어난 사실'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지만, 고유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고, 그런 연유로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역시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생명은 떡만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내 존재 안에 모셔 들임으로써 지탱되고 완성되는 생명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생명의 차원이 가슴에서는 체감되지 않는 것일까요? 여전히 내가 '견지망월(見指忘月)'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어서일까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듯이, 어떤 이는 행위에서 답을 찾고, 어떤 이는 교리에서 답을 찾고, 어떤 이는 관념에 머물러 있는 거 아닐까요? 누구를 사랑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랑학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으면 그는 사랑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렇듯이 예수님을 공부해서 그분에 관해 다 알고 나면 예수님 생명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은 말씀으로만 존재하지 않으시고,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게 된 걸까요? 사랑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살과 피가 합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내가 살과 피로 섞이는 것 없이 그저 지식으로만 그 분을 알려 한다면,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그분 것이고, 내 생명을 내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로서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신앙의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시야가 매여 있지 않은가?
②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과 마음을 두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출 16:2-4, 9-15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 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 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 나 내가 시험하리라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 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 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 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응송 | 시 78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사람이 힘 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서신 | 엡 4:1-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 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 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 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 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 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 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복음 | 요 6:24-35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 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 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출 16:12, 요 6:32-33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리신 만나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② 요 6:35을 묵상하십시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리 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두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③ 엡 4:10-13을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셨다가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국불교 근본경전 중의 하나인 '능엄경(楞嚴經)'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이에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달을 쳐다봄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고 달의 본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이 어찌 둥근 달만 잃은 것이겠는가? 손가락 또한 잃어버린 것이다."(능엄경 제2권)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스님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을 두고 생긴 사자성어가 '견지망월(見指忘月)'입니다. 본질은 외면한 채, 지엽말단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것을 두고 흔히 쓰는 말입니다. 손가락을 보고 달의 본체로 여기는 사람이 결국에는 둥근 달만 잃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마저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후로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견지망월(見指忘月)'에 빠지는 건 전적으로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이고, 그에 따른 결과도 스스로의 몫입니다. 뒤집어서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말도 있는데, '가리키는 손가락은 잊고 달을 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읽으며 느끼는 건 예수님은 후자를 권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주 복음서의 장면으로 잠시 돌아가 보면 유월절이 가까운 때(요 6:4),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몰려오는 걸 보시고 빌립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이렇게 물으실 때, 예수님은 군중을 바라보는 빌립의 마음이 당신과 같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대답은 예수님의 바람을 비켜갔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예수님은 영(靈)으로 가슴으로 대답하기를 바라셨는데, 빌립은 육(肉)으로 머리로 수치로 계량해서 대답합니다. 로버트 파빙은 '참된 양식'이란 책에서 '함께 빵을 나누고, 자신을 함께 공유하는 것' 이 두 개념이 식사의 참된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실 때, 예수님 마음은 단지 저들의 배만 불려주는 것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떡이란 그저 배나 불려주는 음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심리적이며 지적인, 나아가 영적인 양식이었습니다. 따라서 함께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곧 사회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대답과 무관하게 사람들을 잔디밭에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들의 원대로 주십니다.(요 6:11)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요 6:12)고 증언하고, 심지어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도 했습니다.(요 6:13) 그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은 "저 분이야 말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며,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 삼으려 합니다.(요 6:15)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오병이어 표적은, 오늘 구약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광야체험을 연상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광야에서 주려 죽는다며 원망하는(출 16:3) 히브리들을 배불리실 목적으로(출 16:8, 12) 해질 때는 메추라기를 몰아와서 고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 떡을 주셨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군중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워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까지 따라와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요 6:25)하고 묻습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방금 자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호기심과 배부르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얄팍한 감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요 6:26
헬라어로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이라 하는 이 '표적'을 루터는 '짜이헨(Zeichen)'이라고 번역했는데, '표시, 신호, 부호'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표적'이 시대마다 사람들에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이었고, 사람들은 이 '표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떡에만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먹고 배부른 것' 이것은 정말 인간에게 영원한 유혹이자 처절한 숙명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의 식욕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적 차원에서 이 먹는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섭리, 창조질서에 속합니다. 먹어야겠다는 욕망이 작동되지 않으면 인류는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먹는 것에만 영혼을 몰입시키는 '집착'입니다. 그게 가버나움까지 따라온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요 6:27
이 말씀은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썩을 것들에 목매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바로 이 양식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 정말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양식은 바로 신앙의 원초적 대상으로서의 당신 자신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되묻습니다.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요 6:28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민족이기 때문에, 영생을 위한 양식도 무언가를 해야 얻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눅 10:25에도 보면 어떤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랬습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 요 6:29
'행함'을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을 해답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대화가 평행선을 달립니다.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 요 6:30
이들의 관심사가 다시 표적으로 돌아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에 마음을 두지 말고, 표적이 가리키는 분께 마음을 두라고 예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셨는데, 군중들은 여전히 표적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이들처럼 신앙과 삶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몇몇 논쟁이 오간 뒤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그들의 관념을 교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십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니 | 요 6:35
당신의 정체가 '생명의 떡'이시라는 이 선언은 당시 유대 군중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선언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의 떡'이고 정말 그분만이 '생명의 양식'이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은 우리가 '떡으로 지탱하려는'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인 것이 분명합니다. 떡과 밥과 물로 지탱되는 생명과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얻는 생명은 정말 무엇이 다른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 전에 생명에 대한 성경의 대전제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나의 생명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의존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내 생명이 하나님께 의존된 생명이라는 것은, 내 존재를 든든하게 세우는 신학적 대명제입니다. 독일 신비주의의 아버지이고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표현이 '모든 존재자는 신적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입니다. '모든 모상(模像)의 근저에는 원상(原狀)이 있다'는 플라톤 사상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 표현인데, 그는 사람의 '말'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합니다.내가 말을 발설하면 여러분은 이 모든 말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 말은 고유한 의미에서 볼 때,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이런 연유로 나도 여전히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의 원상이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영혼 가운데 태어난 사실'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지만, 고유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고, 그런 연유로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역시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생명은 떡만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내 존재 안에 모셔 들임으로써 지탱되고 완성되는 생명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생명의 차원이 가슴에서는 체감되지 않는 것일까요? 여전히 내가 '견지망월(見指忘月)'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어서일까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듯이, 어떤 이는 행위에서 답을 찾고, 어떤 이는 교리에서 답을 찾고, 어떤 이는 관념에 머물러 있는 거 아닐까요? 누구를 사랑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랑학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으면 그는 사랑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렇듯이 예수님을 공부해서 그분에 관해 다 알고 나면 예수님 생명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은 말씀으로만 존재하지 않으시고,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게 된 걸까요? 사랑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살과 피가 합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내가 살과 피로 섞이는 것 없이 그저 지식으로만 그 분을 알려 한다면,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그분 것이고, 내 생명을 내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로서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요 6:35b
주님께 가지는 않으면서 표적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라'고 하시고, 또 '믿으라'고 하십니다. '견월망지(見月忘指)' 즉 손가락을 넘어 이제는 달을 봐야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신뢰해야 합니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면 그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고, 사랑하면 내 생명이 그의 생명이 되는 존재의 새 차원이 열리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가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께서 요 3:16절을 새롭게 해석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서 우리가 당신 형상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엡 4:10
이 말씀에서 '내리셨던 그'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즉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고 증언합니다. 고대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지상 위에 일곱 층의 하늘이 있다고 믿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곱 층의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올리우셨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만물의 충만'은 곧 '우주의 충만'인데, 그 중심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 자녀들의 충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엡 4:13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 기울여야 할 것은 잡다한 표적이나 교리나 하는 사족이 아닌, 당신 생명을 내게 주어, 내가 되심으로서, 나와 당신이 하나이게 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오라' 하신 그분께로 가야하고, '믿음으로' 내 존재가 온통 예수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오라' 하신 주님께로 힘써 가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 이제는 '내가 아닌 예수 생명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다시는 예수님 주변이나 목마르게 배회하며 썩을 양식이 목적인 초라한 존재가 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답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으로 영혼을 채우며, 천상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신앙의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시야가 매여 있지 않은가?
②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과 마음을 두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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