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8주 목자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삼하 7:1-13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 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 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 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 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 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 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 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 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 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 이다
서신 |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 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 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 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 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 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 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 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 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복음 | 막 6:30-34, 53-56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 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 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 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 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하 7:6을 묵상하십시오.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라는 하나 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가슴에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② 막 6:30-31을 묵상하십시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③ 엡 2:12-13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상태와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상태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목자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쉼
어느덧 7월도 중순을 지나 하순으로 치닫고, 이제 사흘이 지나면 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우들 중에는 이미 휴가를 다녀오신 분도 계시겠고, 현재 휴가 중이거나 혹은 계획 중인 분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19의 창궐 속에서 맞는 휴가는 어쩐지 우리로 하여금 '쉼이 결여된 휴가' 혹은 '불안한 휴가'라는 미증유(未曾有)의 감정에 젖어들게 합니다. 하지만 부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온전한 쉼이 있는 휴가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성령강림 후 제8주인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과 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신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자 되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세 위격 모두 안에 내재된 근본적 성품에서 우러난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의미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각각의 역할로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먼저 구약성경은 목자이신 성부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에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삼하 7:6)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 즉 '출애굽' 때부터 다윗의 시대까지 오랜 세월동안 줄곧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며 이스라엘과 함께 다니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라고 했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라고 했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라고 했던 오늘 응송의 다윗의 시(詩)를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서에서는 목자이신 성자 예수님의 두 모습이 교차됩니다.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라"(막 6:31)고 말씀하십니다. '한적한 곳'은 쉼이 있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찾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큰 무리를 보셨을 때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느껴져"(막 6:34)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붙잡고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 돌봄과 가르침 속에서 양들은 쉼을 얻기도 하고, 자신을 찾기도 하고, 생명을 얻기도 합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 때'와 '이제'를 비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엡 2:12)란 말씀은 우리가 한 때 목자 없는 양이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 때'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이방인이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이 없는 무리였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이 반전의 중심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엡 2:14-16)과 성령님의 이끄심(엡 2:18)이 있었습니다. 보혜사이신 성령님 역시 친히 목자가 되셔서 우리 내면의 인격을 감동시키시고 움직여서 참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찾아 나아가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성전이 되어 가는 존재"(엡 2:21)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구약성경을 통해서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춤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에게 체통 없는 행동이라며 힐난까지 받았지만 그러나 다윗은 인간이 만든 허상인 체통보다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다윗의 춤추는 그 모습이 아직 여운으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 삼하 7:1
그러고 보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추었던 다윗의 춤은 평안의 시대를 맞이하는 서막(序幕)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이 시기는 다윗의 집권 후반기로서 '모든 원수'(삼하 7:1)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 해결된 직후였습니다. 즉 사울 가문과 연루된 문제들이 해결되고(왕하 1-4장),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시온산성을 빼앗아 그 성의 이름을 다윗성이라 하고(삼하 5:6-9),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삼하 5:25), 다윗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신앙적으로 완벽하게 평안을 찾은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선지자 나단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 삼하 7:2
이때 다윗은 두로 왕 히람이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서 지어준 백향목 왕궁에 살고 있었습니다.(삼하 5:11-12) 자신은 그렇게 화려하고 안락한 왕궁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천으로 덮인 휘장 안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실 성전을 건축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다윗의 그 마음을 읽어서인지 나단 선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 삼하 7:3
나단의 이 말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나단 선지자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양 즉흥적으로 말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사무엘상하를 집필한 신명기 사가(史家)가 '인간적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를 분별하고, '인간적 생각'을 전하는 자를 거짓 선지자로,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는 자를 참 선지자로 냉정하게 구분하는 신학적 틀을 가졌던 것으로 볼 때, 만약 나단 선지자가 자기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한 것이라면, 그건 선지자로서 매우 위험한 태도였습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나단 선지자가 이렇게 짧게 대꾸한 것을 냉소적 반응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한정된 공간 안에 가두려 하는 다윗의 속내를 헤아리고 실망한 선지자가 냉소적으로 짧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실제 왕조 전통과 선지자 전통 사이에 갈등이 실재했던 당시 분위기로 볼 때, 후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성전 건축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 삼하 7:5
이 말씀의 공동번역 성경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이 질문은 다윗의 성전 건축 의사를 반대하시는 일종의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실제 역대상 17:4에 보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라고 반대의사가 더 확실하게 표현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성전 건축을 반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현존 방식에 대한 다윗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 삼하 7:6, 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430년이나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하나님께서는 고정된 집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이동용 천막에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거처를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의 신들처럼 인간이 지은 화려한 성전 안에 안주하시면서 제사나 받으시려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모든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을 이끌고 다니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을 향한 자신의 계획이 오히려 하나님을 가두게 되는 결과로 초래되지 않도록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성전 건축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훗날의 다윗의 고백은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 23:1-4
이 시에서 다윗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3),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a),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b)입니다. 돌이켜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인도하시고, 함께하시고, 안위하시니 자신이 점점 강성하고,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삼하 5:10).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찔러주심으로 자신은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 수가 있었습니다.(삼하 7:1) 다윗의 강성해짐과 평안의 근원은 모두가 제도로서의 성전 체제가 아닌,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끌어 오신 결과였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이 목자이신 성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복음서의 말씀은 목자이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 막 6:30-31
이 상황은 12절과 13절로부터 이어지는 것인데, 파송 받은 제자들이 전도의 현장에서 행한 일, 즉 '회개하라고 말씀을 전파한 것'(막 6:12)과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친 것'(막 6:13)에 대해 매우 흥분해서 예수님께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는 고단한 사역이었지만, 가르치는 이들의 노고와 배우는 이들의 열성이 빚어낸 행복이 한껏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주님께서는 별다른 말씀 없이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라"(막 6:31)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적한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른 복음사가들도 그곳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공생애 중에 여러 번(막 6:45;7:24;8:10)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한적한 곳에 계시기를 원하셨지만 번번이 뜻대로 하지 못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쉼'이라는 걸 더욱 절감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양들에게 지금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필요함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한적한 곳'이 원문에는 '에레모스(ἔρημος)'로 되어 있는데, 외롭고 적막한 '광야'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시는 그 '한적한 곳'은 '휴식이 있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찾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진정한 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해 매우 의미 있는 해답을 제공해주는 사실입니다. 제임스 S. 컷 싱어(James S. Cutsinger)가 '마음에 이르는 길'에서 압바 아르세니오(Abba Arsenios)가 도시에 살 때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구원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던 그에게 하늘로부터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오야, 고독하여라. 침묵하여라. 그리고 쉬어라. 이것이 죄 없는 삶의 뿌리이니라."
'고독과 침묵과 쉼'은 영적인 언어입니다. 때때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한적한 곳에 홀로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소란하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고요를 얻고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kus)는 "만약 그대가 지금 있는 곳에서 고요에 도달할 수 없거든 유랑생활을 고려해 보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침묵은 타인과의 교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혀를 억제하고 신중하게 금함으로서 내면의 고요를 얻는 영적훈련입니다. 도시생활에서 비롯된 수많은 언설들이 때때로 피로와 갈등과 위기를 몰고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리비아의 성 탈라시오스(St. Thalassios)는 "오직 영적 대화만이 유익한 것이다. 어떤 다른 친절을 베푸는 것보다도 고요를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필로칼리아의 교부들은 '고요'를 '사념(思念)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쉼, 참된 휴식은 고독과 침묵을 통한 고요에 도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이끌어 한적한 곳에서 육체적 쉼만이 아닌 영적휴식을 얻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이 아닌 '큰 무리'(막 6:34)도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느껴져"(막 6:34)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그 돌봄과 가르침 속에서 양들은 쉼을 얻기도 하고, 자신을 찾기도 하고, 생명을 얻기도 했을 것입니다. 육체만이 아닌 마음과 영도 쉬는 진정한 휴식을 얻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 안에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과 혼을 놓아버리는 쉼이 아닌,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쉬는 참된 쉼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 때'와 '이제'를 비교합니다.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엡 2:12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목자 없는 양'이었던 우리의 과거를 일깨워줍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그 때'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를 가리키는데,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을 뜻하는 '코리스 크리스투(Χωρίς Χριστοῡ)'는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소외(疏外)로 인해 '그 때'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존재가 끝나고 말았다면 그 비극을 어찌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엡 2:13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데(δέ)'가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μακράν)' 양들이, 그래서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던 양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실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존재 가운데 일어난 기적 같은 반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반전의 중심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엡 2:14-16)과 성령님의 이끄심(엡 2:18)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혜사이신 성령님 역시 친히 목자가 되셔서 우리 내면에 임재하시고 현존하시니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은총이 가득한 존재인 우리를 '성전이 되어 가는 존재"(엡 2:21)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다윗보다 행복한 존재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기 원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 자체가 성전인 사람들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존재, 성령의 현존이 내면 가득 채워진 존재,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인 우리가 한적한 시간, 한적한 장소를 찾아서 내 안에 계신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행하게도 쉬어도 피곤한 삶이요, 휴가를 떠나면서도 평안함이 없는 고단한 삶을 살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쉬기까지 나에게는 참 쉼이란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한 성 어거스틴(St. Aurelius Augustinus)처럼, 나의 목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참된 쉼이 있는 여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그리스도와 떨어져 외형적인 성전만을 섬기고 있지 않은가?
② 목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