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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5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5-01 18:23
조회
1403
부활절 제5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8:26-40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 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 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 이사랴에 이르니라
응송 | 시 22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 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서신 | 요일 4:7-2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 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 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 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 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 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복음 | 요 15:1-8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 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5:5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결과가 맺어집니까?
② 행 8:34, 35을 묵상하십시오. 에디오피아 내시가 궁금해한 것과 빌 립이 설명해 준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③ 요일 4:7, 8을 묵상하십시오. 포도나무 가지로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여정이 어느덧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점점 밝고 맑아지며, 거울 속 얼굴 또한 덩달아 선명해지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도 시간이 흐르며 점차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에게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있는 우리에게도 주님의 부활은 점차 선명한 진리로서 각인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 이르는 50일 여정을 '기쁨의 50일'이라고 한 전통적 표현은 참 적절하게 여겨집니다. 이 '기쁨의 50일' 동안 우리는 부활이라는 주제를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을 통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부활주일에는 빈 무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신 장면을 보며 완결된 죽음이 싹틔워낸 부활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이 신비는 부활절 제2주일의 복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짓눌려 문들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숨 쉬며 사는 사람들에게 열려지는 새로운 존재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숨결인 성령을 받아 호흡하며 살 때, 우리의 거짓자아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아로 부활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부활절 제3주일의 복음에서 주님은, 이러한 부활 신비가 단지 추상적인 관념이나 은유가 아님을 당신의 부활하신 살과 뼈를 보여주심으로써 확인해 주십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이렇게 살과 뼈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활 생명이 우리의 살과 뼈 안에서도 약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몸은 당신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임을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靈)뿐만 아니라 육체를 위해서까지 '선한 목자로서'(요 10:11)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이 부활절 제 4주일의 복음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란, 호흡에 있어서도 주님과 결합되어 있고, 육체에 있어서도 주님과 결합되어 있는, 그러므로 존재 전체가 주님과 결합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말씀은 마침내 오늘 부활절 제5주의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는 선언입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같은 생명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도 같은 생명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와 예수님의 관계도 같은 생명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바로 그 놀라운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줄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성체 안에서 우리의 슬픔의 해독제가 되어 포도나무 가지들을 지탱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실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께 붙어 있으며, 당신께 힘을 받는 가지인 우리가 당신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당신의 피를 우리 안에 흘려보내시는 것입니다.
시편 80편에서 아삽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 바치는 비탄에 찬 기도에서, 여호와께서 과거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은총을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심은 것'에 견주어 찬양합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 80:8-11) 그러나 아삽의 이 감사와 찬양은 이내 비탄으로 바뀌고 맙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2-13)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돌보시던 포도나무는 어느새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유린되어지고, 이내 황폐해지고 맙니다. 그들이 받고 누리던 전폭적인 사랑이 그만 어느 날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평가에 의하면, 그들이 좋은 포도가 아닌 '들 포도열매(사 5:2)'를 맺었기 때문이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렘 2:21)'가 되었기 때문이고, 에스겔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쓸모없는 자들(겔 15:3-5)'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범한 악한 나무였기 때문(겔 15:8)'입니다. 그러나 아삽은 탄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이 포도나무를 결정적으로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시 80:14, 15) 아삽의 이 기도는 어찌되었을까요?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읽으면서 아삽의 이 간절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봅니다.
그대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또는 여행 중이거나 어떤 필요한 일을 할 때 그대의 입술은 지속적으로 성서로부터 어떤 것을 깊이 반추하게 하고 절구 안에 든 곡식처럼 시편을 빻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향기로운 나무에서 나는 냄새처럼 향기를 내게 하시오"
이러한 영적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튼실한 가지가 되게 할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영적 체험은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결합되는 것, 예수님 안에 닻을 내리고 뿌리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도와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모두를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결합시키시는 분이시고,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한 가지입니다. 주님은 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머무시는, 신앙의 신비를 이룬 이 상태가 바로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한 상태이고, 그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4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내 안에, 나와 더불어 계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성찬을 함께 나누시는 동안 이 말씀을 가슴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요 6:5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시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견고히 붙어있음으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고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찬을 함께 나누면서 정말 내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한 가지인지 우리 자신의 정체에 대해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한 가지로서, 성찬을 통해 주님의 수액을 공급 받는 나로서, 달콤한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어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과 분리되어 열매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주님의 가지로서 사랑의 열매를 마땅히 맺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8:26-40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 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 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 이사랴에 이르니라
응송 | 시 22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 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서신 | 요일 4:7-2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 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 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 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 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 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복음 | 요 15:1-8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 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5:5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결과가 맺어집니까?
② 행 8:34, 35을 묵상하십시오. 에디오피아 내시가 궁금해한 것과 빌 립이 설명해 준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③ 요일 4:7, 8을 묵상하십시오. 포도나무 가지로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여정이 어느덧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점점 밝고 맑아지며, 거울 속 얼굴 또한 덩달아 선명해지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도 시간이 흐르며 점차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에게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있는 우리에게도 주님의 부활은 점차 선명한 진리로서 각인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 이르는 50일 여정을 '기쁨의 50일'이라고 한 전통적 표현은 참 적절하게 여겨집니다. 이 '기쁨의 50일' 동안 우리는 부활이라는 주제를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을 통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부활주일에는 빈 무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신 장면을 보며 완결된 죽음이 싹틔워낸 부활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이 신비는 부활절 제2주일의 복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짓눌려 문들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숨 쉬며 사는 사람들에게 열려지는 새로운 존재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숨결인 성령을 받아 호흡하며 살 때, 우리의 거짓자아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아로 부활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부활절 제3주일의 복음에서 주님은, 이러한 부활 신비가 단지 추상적인 관념이나 은유가 아님을 당신의 부활하신 살과 뼈를 보여주심으로써 확인해 주십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이렇게 살과 뼈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활 생명이 우리의 살과 뼈 안에서도 약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몸은 당신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임을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靈)뿐만 아니라 육체를 위해서까지 '선한 목자로서'(요 10:11)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이 부활절 제 4주일의 복음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란, 호흡에 있어서도 주님과 결합되어 있고, 육체에 있어서도 주님과 결합되어 있는, 그러므로 존재 전체가 주님과 결합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말씀은 마침내 오늘 부활절 제5주의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는 선언입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같은 생명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도 같은 생명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와 예수님의 관계도 같은 생명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바로 그 놀라운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줄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성체 안에서 우리의 슬픔의 해독제가 되어 포도나무 가지들을 지탱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실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께 붙어 있으며, 당신께 힘을 받는 가지인 우리가 당신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당신의 피를 우리 안에 흘려보내시는 것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 요 15:1
이 짧은 소개말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역할이 분명해졌습니다. 농부이신 성부 하나님은 땅을 기름지게 가꾸시고, 포도나무이신 성자 예수님은 가지를 뻗고 열매가 자라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라는 밭을 가꾸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는 구약시대 당신의 백성들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해 가지치기를 당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으십니다. 구약성경에도 포도원의 비유가 등장을 하는데,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약성경의 포도원 비유는, 하나는 사랑의 표증으로서의 비유이고, 하나는 불충의 표증으로서의 비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1, 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그런가 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2:21에서 "내가 너를 순전한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며 안타까워하고, 에스겔 선지자는 겔 15:1-6에서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묘사하며 그들에게 돌아올 징벌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포도원 혹은 포도나무로 표현한 구약성경의 이야기들마다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연과 더불어 분노와 징벌의 심연도 예감하게 해줍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 자비의 언약인 동시에 심판의 예언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시편 80편에서 아삽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 바치는 비탄에 찬 기도에서, 여호와께서 과거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은총을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심은 것'에 견주어 찬양합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 80:8-11) 그러나 아삽의 이 감사와 찬양은 이내 비탄으로 바뀌고 맙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2-13)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돌보시던 포도나무는 어느새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유린되어지고, 이내 황폐해지고 맙니다. 그들이 받고 누리던 전폭적인 사랑이 그만 어느 날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평가에 의하면, 그들이 좋은 포도가 아닌 '들 포도열매(사 5:2)'를 맺었기 때문이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렘 2:21)'가 되었기 때문이고, 에스겔 선지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들이 '쓸모없는 자들(겔 15:3-5)'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범한 악한 나무였기 때문(겔 15:8)'입니다. 그러나 아삽은 탄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이 포도나무를 결정적으로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시 80:14, 15) 아삽의 이 기도는 어찌되었을까요?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읽으면서 아삽의 이 간절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 요 15:1
너무 오랫동안 황폐해 있었던 포도원이, 너무 오랫동안 쓸모없었던 포도나무가, '나는 참 포도나무'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 비로소 회복되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이 선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포도나무를 갖다 심으신 하나님의 본래적 숙원이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포도나무를 가져다 가나안에 심으시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참 포도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작디작은 나라의 백성들이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그토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정치와 경제에 밝은 왕을 요구하면서부터 그들은 주변나라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들 포도 같은 존재들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떡이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해 새로운 차원의 삶을 꽃 피우는 그런 나라가 아닌, 정치 경제 군사력에 의존된 풍요를 갈망하는, 심지어 이방우상들에게마저 풍요를 구걸하는, 그들은 영락없는 속물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 15:1) 여기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들 포도가 되고 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당신께서 친히 '참 포도나무'가 되심으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장구한 세월 그토록 이루어지지 않던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혼자서만 참 포도나무가 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일컬어 '가지'라 부르시며 당신 안에서 '함께' 참 포도나무가 되도록 우리를 당신에게 결합시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 15:3-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정체를 시원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여기에 '둘이 하나이요 하나는 둘'이라는 신비의 등식이 생깁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산술입니다. 열매는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만 열립니다. 하나는 하나이고, 둘은 둘이라는, 주객 분리의 종교 단계는 내적 생명의 결속과 교류가 단절되거나 차단된 '표면적 종교'의 단계입니다. 여기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란, 눈에 보이는 외적 성과물이나 업적 또는 에고(ego)의 성취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내적인 영혼의 열매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런 영적 열매는 둘이 하나이요, 하나는 둘이라는 신비의 등식을 이해하는 신앙의 사람들에게만 깨달아지는 그노시스(gnosis)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겁니다.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주님의 선언이 자못 비현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 영과 몸이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려진 영적 수준으로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세기 말경에 살았던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성경을 열심히 읽을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대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또는 여행 중이거나 어떤 필요한 일을 할 때 그대의 입술은 지속적으로 성서로부터 어떤 것을 깊이 반추하게 하고 절구 안에 든 곡식처럼 시편을 빻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향기로운 나무에서 나는 냄새처럼 향기를 내게 하시오"
이러한 영적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튼실한 가지가 되게 할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영적 체험은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결합되는 것, 예수님 안에 닻을 내리고 뿌리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도와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모두를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결합시키시는 분이시고,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한 가지입니다. 주님은 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머무시는, 신앙의 신비를 이룬 이 상태가 바로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한 상태이고, 그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4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내 안에, 나와 더불어 계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성찬을 함께 나누시는 동안 이 말씀을 가슴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요 6:5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시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견고히 붙어있음으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일 4:7-10
가지가 포도나무에 속해 있듯이, 사랑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속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나타날 때, 세상은 그 열매를 보고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가지임을 알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빌립에게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일러줍니다.(행 8:26) 빌립이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사야의 글을 읽는데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며 빌립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기를 청합니다.(행 8:30, 31) 빌립이 이사야의 말씀에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해줍니다. 그러자 내시가 수레를 멈추고 빌립에게 세례를 받습니다.(행 8:32-39) 한 영혼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광야까지 빌립을 보내 말씀을 풀어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심정을 내 가슴에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실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분,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 것입니까?"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고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찬을 함께 나누면서 정말 내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한 가지인지 우리 자신의 정체에 대해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한 가지로서, 성찬을 통해 주님의 수액을 공급 받는 나로서, 달콤한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어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주님과 분리되어 열매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② 주님의 가지로서 사랑의 열매를 마땅히 맺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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