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4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4:5-12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 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 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서신 | 요일 3:16-24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 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 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 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복음 | 요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0:1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시는 궁극적인 이 유는 무엇입니까?
② 행 4:11을 묵상하십시오.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 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③ 요일 3:16-17, 23-24을 묵상하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양으로 사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부활절 제4주일인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요 10:1-13절에 기록된 선한목자 비유의 결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각각 목자와 강도(1-3절), 목자와 타인(4-5절), 목자와 삯꾼(11-15절)을 비교해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서의 선한목자 비유는 그 절정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 하는 바를 더욱 생생하게 우리 가슴에 인식시켜 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강도나, 타인이나, 삯꾼과 달리 예수님은 '선한목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요한에 의해 전해지는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소개는 단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시켜 줍니다. 강도나 타인이나 삯꾼과 다르게 예수님께서 선한목자이신 이유는 무엇보다 당신 양들을 아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 요 10:14-15a
여기서 말씀하신 '안다'는 것은 성서적 의미에서 볼 때, 단지 지적인 앎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서 그리고 겪음으로서 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사례에 의해 입증됩니다. 하나는 비유적 사례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아버지와 친밀하고 아버지께서 나와 친밀하시듯, 내 양들 또한 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아시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의 참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진리 안에서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바라보십니다. 이 친밀함은 동일본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성과 실체의 동일함' 바로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듯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친밀함과 목자와 양 사이의 친밀함이 질적으로 같다는 말씀입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아는 것이, 사랑함으로서 그리고 겪음으로서 안다는 두 번째 사례는 목숨을 바치는 실천적 사례입니다.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요 10:14-15b
사랑의 힘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듭니다. 어떤 칼이, 어떤 형벌이, 어떤 죽음이 완전한 사랑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그 어떤 능숙한 자객도 감히 뚫을 수 없는 갑옷입니다. 그런데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희생에서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린다'는 표현을 다섯 번 반복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성격'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암시해 주는 것인데, 주님은 선한목자로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하고 사고(思考)하려 하거나, 신학적 해석을 덧붙이려 하기 보다는 소박하고 진솔하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아있음으로 쉬고 있는 이 '숨'이 바로 선한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 목숨을 버려 내게 주신 '숨'인 것을 음미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목숨을 버려 내게 주신 그 '숨'으로 호흡을 하는 가운데, 비로소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는 주님 말씀에 머리로 뿐 아니라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나를 아시고, 내가 주님을 아는 그 '앎'은 지력을 통한 사고(思考)나 추리를 통해 알아지는 그런 앎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내가 숨 쉬게 된' 그 호흡 속에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는 내가 되고, 나는 예수가 되는 생명의 결합'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숨 쉬어주시는 그 숨은 부활하신 당신의 숨입니다. 부활하신 선한목자께서 우리를 향해 쉬시는 그 숨을 받아 호흡하는 걸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가 들숨과 날숨을 무심히 내뱉지 않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서 숨 쉬며 살 때, 그 때부터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은 추상도 관념도 이론도 아닌, 신학도 교리도 경전도 아닌, 오로지 살아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내쉬는 숨을 마시고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 말씀은 감동적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 요 10:17
이 말씀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간의 사랑의 절정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죽어서 살리는 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사실을 더 생생하게 보여줍니다.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 요 10:18
여기에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계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이 모든 일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어떤 계명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계명'을 헬라어로 '엔톨레(ἐντολή)'라고 하는데 보통 '책무' 혹은 '의무'라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그리고 이 '엔톨레'는 항상 '사랑'이라는 말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어떤 책무를 받으셨는데, 그것은 사랑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책무를 주시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주님이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책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 때문에 죽으신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대상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버린 자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 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영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인 성령을 죄인들에게 부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스스로 우리를 대신해 죽음의 자리에 이르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명'인 동시에 당신의 양들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다름이나 모름이 조금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인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아무 상관없는 자이고 우리 신앙은 엉터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바라보면 우리는 정말 안 변합니다. 우리는 왜 예배만 마치면 마치 중독된 사람처럼 그렇게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주님과의 심층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이 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까? 그런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까이, 아니 깊이 속속들이 스며들어 계시는 목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속에서 활동하시면서, 우리에게 생기와 활기를 주시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어 계시면서 우리에게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영감을 주십니다. 목자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아는 '아심'은 이렇듯 놀랍고 경이로워서 탄성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아시는 아심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으며, 더구나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 영혼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자세히 세밀하게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몸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도 그분만이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그분께 맡기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靈)으로서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재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이렇게 당신의 영이 우리의 기질과 교만을 꺾고 내 목자이신 당신께서 원하시는 길을 우리가 담대히 걸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 소망이 아니라면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 마음으로 충만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운명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분이 세상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리고 이 분이 바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입니다. 거짓된 신앙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새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히 주님을 닮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며, 이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낮은 자나 높은 자,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 건강한 자나 병약한 자,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욕망들을 그리스도 안에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죽음도 주님처럼 아버지 뜻에 순명(順命)하는 죽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 삶을 진지하게 하나님께 드리다가 마침내 내 생명까지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죽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냥 생명의 기운이 다해서 죽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영원을 맡기는 순명의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살기 위해 죽고,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 그런 죽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복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당신 목숨으로 사랑하실 대상을 더 확대하고 있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요 10:16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양 우리'의 문을 열어서 우리를 당신의 양으로 받아들이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양 우리 안에 들지 못하고 들녘을 방황하는 양무리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향해 주님의 말씀을 들려준다면, 주님의 죽으심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은 주님의 양이 되어 구원의 '우리 안에' 들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오늘 사도행전에서 심지어 '예수를 죽인 사람들'에게까지 간곡하게 외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행 4:10-12
지금 베드로는 병자를 낫게 해 주고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행 4:2)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했다는 이유로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공회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고통스러운 장소에서조차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증언을 통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우리 안으로 심지어 예수를 죽인 사람들마저 초청합니다. 이렇듯 선한 목자의 죽음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바로 그 이유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일 3:16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요일 3:23-24
여기 주님의 양떼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모범들이 나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주님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라 호흡하며 살고 죽는 것' 이것이 부활절 제4주일의 교회력과 성서일과가 우리에게 그려주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나를 숨 쉬게 하신' 그 부활의 호흡을 힘써 지속하는 가운데 '선한 목자이신 예수는 내가 되고, 나는 예수가 되는 생명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추상으로도, 관념으로도, 이론으로도 말고, 신학으로도, 교리로서도, 습관으로도 말고, 주님이 내쉬는 숨을 내가 마시고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내 목자이신 주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진정한 앎의 감격 속에서 나의 예수님을 향해 찬미하고 예배하며 부활절 넷째주일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예수님의 숨결로 호흡하며 그 숨결로 살아가고 있는가?
②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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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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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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