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3주 몸의 부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3:12-19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 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 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 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 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응송 | 시 4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서신 | 요일 3:1-7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 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 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복음 | 눅 24:36-48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 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 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 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 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 묵상 | meditatio
① 눅 24:37-39을 묵상하십시오.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한' 제자들에 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이며,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행 3:12-1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목격하고, 부활 신앙으로 무장한 베드로는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③ 요일 3:3을 묵상하십시오. 주를 향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몸'의 부활
부활절 제3주일인 오늘 말씀들은 계속 이어지는 다른 주일의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보다 깊은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부활을 '신비'라고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써, 또한 성령의 힘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보여주신 그 무한한 사랑과 권능의 위대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믿기 어려운 일들을 통해 갖게 되는 다소간의 의문들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의 행위가 사형으로 단죄되어야 할 만큼 중대한 종교적 범죄였다면, 그런 분의 행동이 어떻게 인류를 위한 구원 행위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과 덧붙여서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이런 의문들은 부활의 신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듭니다. 최초의 복음 선포자들은 이런 의문들에 대해 어떤 신학적인 탐구로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인 부활을 깊이 내면화하고 음미하는 믿음으로써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역시 이러한 경향을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사도행전의 말씀은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행 3:2)를 치유한 것을 계기로 행한 설교의 일부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과 요한에 대한 군중들의 광적인 폭력을 막기 위해, 그들이 지금 목격한 치유사건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 행 3:12-15
무엇보다 우리가 이 증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베드로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의 잔혹함과, 그 유대인들이 잔혹하게 계획해서 살해한 사건에 전혀 다른 결과를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두 개의 의지가 첨예하게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3b-15a)라는 증언에서 드러나는 것은 파괴를 지향하는 유대인들의 '미움의 의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b)라는 증언에서 드러나는 것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회복시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 증언을 통해 인간이 자행하는 잔인한 폭력과 살인마저도 선용하셔서 생명의 역사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을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그들의 사나워진 마음을 매만지며 하나님의 마음을 세심하게 전해줍니다.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 행 3:17-18
너희들은 몰라서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한 것이고, 하나님은 미리 계획하신 일을 이루신 것이라는 베드로의 설명에서 부활의 신비가 감동스럽게 드러납니다.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자신이 쓴 또 다른 책인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도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매우 감동적으로 전해줍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이야기를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전해줍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이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여자들이 근심하고 있을 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6) 여인들이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는데, 누가는 그 때 사도들의 반응에 대해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눅 24:11) 그리고 같은 날 저녁에 글로바라는 이름의 제자와 다른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쯤 떨어진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이 그즈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으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8)며 마치 예수님을 힐난하듯이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에 그들 내면의 슬픔과 아쉬움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그때 그들은 눈이 가려져 있어서 지금껏 자기들과 함께 걸으신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날이 저물어 엠마오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비로소 눈이 밝아져 예수님인 줄 알아봅니다.(눅 24:30, 31) 그들이 감격 속에 오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에 가 보니 거기 열한 제자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며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꽃피워내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거기 섞여서 자기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떡을 떼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눅 24:35) 그리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안타깝게도 나머지 제자들은 이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 | 눅 24:36
그러니까 그들이 한창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을 때입니다. 누가는 바로 그 때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증언합니다.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눅 24:36b-37
지금까지 그들이 나누었던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감안하고 보면 지금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엉뚱합니다. 그들은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자기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靈)'이라고 생각했다는 건,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몸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십시오.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 눅 24:38-43
우리는 예수님께서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신 것, 그리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맛있게 잡수시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져서 모인 곳의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걸고 있을 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라시며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상처는 십자가 처형당할 때 생긴 상처였는데, 예수님께서 그 상처를 보여주신 이유는, 당신께서 죽기 전에 가지셨던 육체의 몸과 부활하실 때 가지신 새 몸 사이에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영(靈)'이 아닌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제자들은 비로소 기쁨을 회복합니다. 당신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에게도 주님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셨을 때, 그 때 도마의 고백이 이랬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일관되게 같은 목소리로,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데, 주님은 '몸으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확고한 부활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몇 가지 남았습니다. 우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보인 현상들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요 20:19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숨어 있을 때,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그곳을 통과해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그 몸이 사실은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몸이 아니라고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오늘 말씀 앞에 있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에서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인 줄 알아볼 때, 이미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눅 24:31) 함께 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신 이런 현상도, 주님 몸이 우리의 몸과 똑같지 않는 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또 오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구운 생선을 맛있게 드시고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또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맞아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분명히 하시려고, 앞에서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분명히 몸으로 부활하셨으면서도 슬쩍 보여주시는 이런 모순적인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영인가 싶었는데 당신의 상처 난 몸을 보여주시고, 몸인가 싶었는데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우신, 그 모습 앞에서 우리는 어리둥절합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 중 하나는 이런 이야기를 허황된 것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허황된 이야기에 매여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태도는 당시 누가를 포함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경험을 '일상적인 보이는 세계'의 경험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생명 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두 번째의 입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진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려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벗어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자들 뿐 아니라 비기독교 사상가들 중에도 토론된 바 있는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 현대신학에 많은 공헌을 남긴 분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사도신경 해설'에서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역사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반적인 규칙을 통해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열린 입장을 보여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란, 사람들이 경험과 지식으로 기존에 알고 있는 것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정말 진실한 사람'이라면 자기 경험과 지식 외의 사실들에 대한 가능성을 결코 닫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과학의 발전이 그랬습니다. 지금까지의 과학적 논리로 해명이 안 되는 어떤 현상들을 연구하면서 발전해왔습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해 오셔서, 살과 뼈를 보여주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셨다는 제자들의 경험은 분명 의학이나 생물학의 논리로는 해명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함으로서 종말에 완성될 생명을 미리 경험한 것입니다. 그 경험에 힘입어서 제자들은 혹독한 박해들을 버티어 냈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시라고 증언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영과 몸을 하나로 봅니다. '몸이 없는 영'은 참된 인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라고 지난 이천년 간 고백해 온 것입니다. 물론 이 고백에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몸의 부활'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 이 질문이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 부활의 형태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우리의 궁금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몸이 썩어 없어집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더욱이 요즘 우리 장례 문화는 거의 화장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냐? 화장하면 지금과 같은 몸으로 살아나는 게 가능하냐?"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물음에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여기서 두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고전 15:43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그리고 고전 15:52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여기서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몸은 없어집니다. 아무도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막힌 설명을 했습니다. 그 설명이 바로 '변화'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 그렇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죽습니다. 사람의 몸과 같습니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음으로서 다시 살아납니다. 바울에 따르면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씨앗의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꽃으로 살아나고, 곡식으로 열매로 살아납니다. 심기고 죽은 그 씨앗에서 나왔지만 그 씨앗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때 '심겨서 죽은 그 씨앗'이 중요한 것이 '그 씨'가 없었으면 꽃도 열매도 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의 내 몸'이 중요한 것이 '지금의 내 몸'이 없으면 '부활할 몸'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변화'입니다. 이건 단순히 '모양만의 변화'가 아닌 '존재의 질적 변화'입니다. 과거의 자기 몸은 죽고 썩었지만, 그 몸에서 질적으로 완벽한 자기 몸이 부활한 것입니다. 그 부활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그래서 지금 내 몸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지금 내 몸이 부활의 몸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일 3:2, 3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장래의 우리 모습이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깨끗한 삶을 살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관념도 지식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과 뼈'를 가지신 완전한 인격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믿음, 부활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꽃에서 주님께서 피워내신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열매에서 주님께서 맺히신 부활을 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일, 매순간, 매사의 어디에나 주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고, 내가 보는 모든 것, 내가 만지는 모든 것, 내가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이 주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내가 살과 뼈를 가진 육신으로 그분을 보면 그 분의 살이 아닌 것이 없고, 내가 살과 뼈를 가진 육신으로 그분을 만지면 그 분의 뼈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우리 신앙고백의 '진정성'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모두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 24:36)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에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지식으로, 관념으로 부활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② '몸의 부활'을 믿음으로서 삶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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