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2주 도마의 고백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4:32-37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 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 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응송 | 시 13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서신 | 요일 1:1-10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 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 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 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 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 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복음 | 요 20:19-31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 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 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 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 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20:27을 묵상하십시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신 후 당부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② 행 4:32-35을 묵상하십시오. 성령의 은총을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으로 삶에서 어떤 변화를 보였습니까?
③ 요일 1:1-3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요한이 '들은 바', '눈으로 본 바', '손으로 만진 바'를 사람들에게 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도마의 고백
부활주일과 성령강림절 사이의 50일을 '부활시기'라고 하는데, 이 '부활시기'는 부활주일을 빼고 여섯 주일로 되어있습니다. '재생의 시기' '광명의 시기' 등으로도 불리는 부활시기 동안의 주일들은 각각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되는 고유한 주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우리가 맞이한 부활절 제2주는 '도마 주일'이라고 불리고, 교회는 이때를 지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접한 도마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그의 일시적 의심의 태도는 깊은 믿음을 향해 갑니다. 동서고금의 많은 회의론자들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부활신앙을 흔들어보지만 대표적인 도마의 의심 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역시 신성한 성경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믿고, 우리가 나누는 말씀을 통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인사하시는 주님 음성을 심장 가득이 채우시고, 우리를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숨결을 폐에 가득이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각각의 세 집단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나게 됩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직후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고,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는 오순절 직후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게 되고, 서신서의 말씀인 요한일서를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60년 쯤 지났을 때, 사도 요한이 이끌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네 번째 집단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역사적 예수님을 직접 보지도 못했고, 사도 요한이 직접 써서 보낸 서신을 읽을 수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를 이끌어 줄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분을 모시고 있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듯이, 지금 우리들 가운데도 함께 계시며, 사도 요한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우리 역시 신앙의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복음서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 요 20:19a
안식 후 첫날 저녁은 우리 기준으로 주일 저녁에 해당합니다. 이때는 시간적으로도 저녁이지만, 제자들 마음도 슬픔과 두려움으로 어둠이 깃들어 있을 때입니다. 요한은 이때 제자들이 모인 곳의 '문들(뒤론 θύρῶν)'을 닫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질려 문들마다 막대기를 가로질러 끼움으로서 '케클레이스메논(κεκλεισμένων)' 즉 굳게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를 처형한 사람들이 언제 자신들마저 체포하러 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집의 문만이 아니라 마음의 문까지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잠겨 있는 문을 개의치 않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앞으로 부활할 우리의 육체가 어떠할지를 얼핏 보여주십니다.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 20:19b
이때 잠겨있는 문을 통과해 들어오신 주님의 몸은, 성육신 하실 때 동정녀의 태(胎)의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셨던 바로 그 몸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행하셨던 기적들보다 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육체에서 죽음을 완전히 몰아낸 참된 하나님으로서 제자들 앞에 서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 마음에 드리운 어둠을 쫓아내 주고자 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b)라신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에게 평강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평강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영혼은 언제나 평화로 가득 찹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당신께 일어난 빈 무덤 사건의 전말은 바로 육체의 부활임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가지셨던 육체와 부활하신 후 가지신 새 몸 사이에 분명한 연속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당신께서 육체로 계실 때나 부활하신 후에나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슬픔과 비탄에 잠겨있던 제자들은 이 때 비로소 기쁨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요 20:21
주님은 또 한 번 그들에게 평강의 인사를 하십니다. 한 번 하신 평강의 인사를 왜 또 다시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당신의 오심이 늦어지면서 제자들이 결코 작지 않은 시련들에 직면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요 20:22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던(창 2:7), 창세기의 장면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주심으로써 인간을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것과,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 곧 새로운 창조임을 묘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동적인 순간, 그 자리에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만 있었다는(눅 24:33) 누가의 증언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 20:25)라고 할 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딱 잘라서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요 20:25
도마가 품었던 이 의심은 오늘 우리 신앙에 유익이 됩니다. 그의 의심이 우리 믿음을 확고히 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의심은 도마만의 마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속마음은 도마와 같았을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제자들의 의심이 두려움으로 나타났다면, 도마의 의심은 사실 확인에의 열망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다르게 평가할 여지가 있습니다. 더욱이 여드레가 지난 다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여전히 문들이 닫혀있었던 사실(요 20:26)로 미루어 보면, 도마의 의심은 다른 차원에서 조명될 필요도 습니다. 이미 여드레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었고, 상처 입은 손과 옆구리를 본(요 20:20) 제자들이 여전히 두려워서 문들을 닫아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마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 여부가 안 믿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도 있고 오히려 더 안 믿거나 의심하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도마는 그의 언어에서도 드러나듯이 대단히 세밀하고 이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의 예수님의 반응입니다.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요 20:27
이 일에 대해 교부 '로마누스'는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진 그의 손이 어떻게 성하게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그 순간은 도마의 신자 됨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건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에 예수님의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신 말씀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이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 20:29
사실 이 말씀은 도마 뿐 아니라 거기 있는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고,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눈으로 보고서야 믿는 믿음'보다는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복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되 '잘 믿고', '올바로 믿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주님 말씀 하실 때, 그 음성을 심장 가득히 채워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셨으니 그 숨결을 내 존재에 가득 채워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도마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이후로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 20:28
예수님은 도마가 당신의 신성을 고백하도록 이끄셨고, 도마는 자기의 손이 하나님을 만졌다고 믿었습니다. 도마는 이 순간 진리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도마가 비로소 참 믿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도마의 이 고백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 속에서 성찰해 봐야 합니다. 당시 현실 속에서 '나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로마 황제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가 최고 권력을 손에 쥐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 즉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황제가 신으로 군림하던 시절, 도마는 주님을 향해 '퀴리오스' 즉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퀴리오스는 누구일까요? 물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속마음도 그런 걸까요? 오히려 시대정신 속에서 현실적으로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을 숭배하는 우리는 아닐까요? 교리적으로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베드로의 고백이 있었기에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했던 주님께서 기뻐하셨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나 이후로 사람들은 이 고백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질서가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진리로 여겨졌습니다. 존재 가득 주님이 느껴지고 경험되지 않는 신앙은 그렇게 신자를 나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질서에 스스로를 투항하게 하고, 우상이 주는 풍요에 더 마음을 빼앗기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고백이 도마의 심장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도마의 고백에는 "이제부터 나의 주님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닌 오로지 주님이십니다"라는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며, 이 고백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심장으로, 폐로, 온 존재로 주님의 음성을 느끼고, 주님의 숨결을 느끼며 그렇게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믿는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누가는 초대교회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행 4:32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의 모습을 요한이 증언해 준 것이라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성령강림 후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령강림'이 몰고 온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믿는 무리'가 되었고, 그 믿음은 저들의 삶의 형태를 놀랍게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마음'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던 사랑이 제자들 공동체에서 반영된 현상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마음도 여러 마음이어야 할 텐데, 그러나 사람들 안에 불어넣어주신 하나님의 숨결은, 많은 마음을 하나의 마음으로, 많은 영혼을 하나의 영혼으로 만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이셨듯이, 그들 역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한 마음이 된 그들은 이내 '뜻'에 있어서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인격적인 일치상태가 그들에게서 감격스럽게 나타났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들은, 그 어느 것도 자기 개인의 소유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탐욕으로 분열된 마음이 성령 안에서 다시 하나로 일치가 되자, 놀랍게도 그들은 탐욕에서 해방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이러한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요일 1:1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이 성령강림 직후 제자들의 공동체에 형성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서신서의 말씀인 요한일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60년 쯤 지났을 때, 사도 요한이 고백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때 그들은 혹독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60여 년 전, 자신이 보았던 생생한 체험을 들려줍니다. 그는 태초부터 선재해온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표현은 이해가 가지만, 말씀을 '보았다'는 표현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했을까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도마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을 때, 그분의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넣었는데, 살이 손을 가로막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제자의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을 보고 손으로 만진 사람은 요한이 아니고 도마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도마가 한 개인이 아니고, 다른 제자를 대표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체험을 통해 그들은 생명의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생생한 체험을 전제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을 이어갑니다.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 요일 1:2
요한이 이 증언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요일 1:3
요한은 이 증언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들과의 사귐 안으로 초청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과의 '말씀이 있는 사귐'은 곧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더불어 누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주님의 음성을 느끼고, 주님의 숨결을 느끼는 이 느낌이 우리의 심장과 폐와 전 존재에 있다는 것은 내가 주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의 모습도 보았고, 오순절 직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도 보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60년 쯤 지났을 때, 요한이 이끌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2천 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 역시 그들의 후예로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주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며, 진정한 의미로 '믿는 사람'이 되어 부활의 기쁨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신앙고백이 교리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③ 신앙고백과 삶의 변화가 일관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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