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4주 생명을 향한 시선(視線)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민 21:4-9
4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 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응송 | 시 107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서신 | 엡 2:1-10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 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 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 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 | 요 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 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민 21:8을 묵상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다 불뱀에 물린 사람 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은 무엇입니까?
② 요 3:14-18을 묵상하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십 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③ 엡 2:10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생명을 향한 시선(視線)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어느덧 사순절도 중반으로 접어들었는데, 전통적으로 서방교화는 이 주일을 '기뻐하라' 주일이라고 불렀고, 성직자들은 이때 장미색 제의를 입었으며, 입당송은 '기뻐하라 예루살렘아'를 불렀습니다. 이 주일을 '기뻐하라' 주일이라고 부른 것은 부활절이 3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동방교회는 이 사순절 넷째 주일을 '성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그의 이름 '클리마쿠스(Climacus)'의 뜻이 '사다리'이듯이 부활절이 다가온 이 때, 한 걸음씩 믿음과 경건을 향한 수덕생활의 사다리를 흔들림 없이 오르자는 격려의 의미가 담겨진 주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부들을 포함한 영적 사람들의 주된 관심과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적 생활 혹은 영적 생활의 진보였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다가온 부활절에 시선을 두고 영적 발걸음을 신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 걸음을 걷는 여정에서 지긋지긋하리만치 신앙인을 괴롭히는 것이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육적 본성입니다. 때로는 온갖 사념(邪念)이 마음을 흔드는가 하면, 때로는 육적 본능(本能)이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순일하게 향하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에 따르면 하나님은 본디 당신 모상(模像)에 따라 이성적 존재들(logika)을 창조하셨는데, 그들이 바로 인간이며, 이 인간 존재는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의 표현을 따르면 영혼은 세 가지 각각 '다른 능력들' 혹은 '다른 부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인격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초인격적인 부분을 그는 '지성(知性 nous, 혹은 中心)'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이 지성은 하나님을 닮은 곳으로서, 하나님처럼 비물질적이며, 비육체적입니다. 그런데 이 지성이 어떠한 상황과 맞닥뜨리면, 논리적인 이해를 다루는 능력이 되기도 하고, 구체적인 인격으로 나타나게도 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를 가리켜 '이성적 혼' 즉 '이성적 능력을 부여받은 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다른 두 부분에는 비(非)이성적인 부분으로 '화처(火處 thymos)'와 '욕처(慾處 epithymia)'가 있습니다. 화처와 욕처를 통해 사념(邪念) 혹은 정욕(情欲)이 들어오는데, 화처가 본능을 따라서 요동을 치면 지성을 눈멀게 하고, 욕처가 짐승처럼 움직이면 보이는 대상에 눈이 멉니다. 그래서 화처와 욕처를 방치해 버리면 끝내는 영혼은 무지에 빠지게 되고, 육체는 짐승처럼 본능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 예를 오늘 구약성경에 나오는 출애굽한 히브리 자손들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 민 21:4
히브리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에돔의 동남쪽 경계를 따라서 홍해의 아카바만 쪽으로 남진하는 방향입니다. 에돔 동쪽으로 들어서서 에시온 게벨까지 이르는 평탄한 '왕의 대로(민 20:17)'로 갔으면 한결 빠르고 편했겠지만, 에돔의 방해로 인해(민 20:18-21) 그렇게 가지 못하고 바란 광야를 통과해(신 2:1) 계속 남쪽으로 행군하다가, 다시 에돔의 서쪽 국경인 세일 산 쪽으로 힘겹게 우회해서 에시온 게벨 곁을 통과해 모압 광야 길로 지나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성경은 그때 그들이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상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차르(רצק)'는 마음이 참기 어려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참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상한 그들은 마침내 원망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 민 21:5
"어찌하여...죽게 하는가?" 이 말은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어김없이 터뜨린 불만이었습니다.(민 14:2, 3;20:2-5;출 14:11, 12;16:3;17:3)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을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언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시려고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게 하고 있다'며 불평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고 말합니다. '하찮은 음식(켈로켈 לקלק)'은 '악한 음식'이란 뜻입니다. 지금 그들이 말하는 '악한 음식'이란 다름 아닌 '만나'를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40여 년 동안 내려주신 만나를 이들은 '하찮은 음식', '악한 음식'이라고 말하고, '우리 마음이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반응이 왜 이렇게 되고 만 걸까요? 화처와 욕처를 통해 사념(邪念) 혹은 정욕(情欲)이 들어오는데, 화처가 본능을 따라 요동치도록 방치하니 지성이 눈이 멀고, 욕처가 짐승처럼 날뛰다 보니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창조 이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을 때, 그들이 처했던 내적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도를 넘은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을 물게 하셨고 많은 사람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민 21:6) 중요한 것은 그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자신들의 죄를 정확하게 고백합니다.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 민 21:7-9
하나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를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라는 처방에서 우리는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보고 싶은 곳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라 하신 곳을 바라보는 것,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건, 작은 시선의 차이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할지를 분명히 일러주십니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4-15
예수님께서는 밤중에 당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당신이 높이 들려야 할 사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게 될 사건을, 모세가 광야에서 높이 들었던 놋뱀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그때 믿음의 시선으로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살았듯이, 지금 믿음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산다는 말씀입니다. '바라보는 것'은 영성생활에 있어서 '경청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말씀을 '경청'도 해야 하지만, 주님을 경외감 가득 '바라보기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때때로 영적 여정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이시며, 그 영혼과 상상력 안에 당신 영광의 모습이 깊이 새겨지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높은 산 위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 옷이 광채가 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고(막 9:2-8),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으며,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봄으로써 다메섹 도상의 바울처럼(행 9:3-5), 심한 두려움과 놀라움에 휩싸일 수도 있지만, 곧 고요와 평화 속에 잠겨들게 되고 깊은 내적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영적 전통 안에서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영적 성숙을 이루어가도록 발전된 영성훈련 방법이 바로 관상기도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의 영적 사다리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관상입니다. 그리스어로 관상(觀相)을 '테오리아(theori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어떤 목적으로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본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테오레인(theorein)'에서 왔습니다. 결국 관상이란 실재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점차 그 원천인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교부들에게 관상이란 '영적 인식'을 뜻하고, 그들은 관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앎을 지향했습니다. 독서의 단계에서 영적 사랑의 씨앗을 품게 되면, 묵상의 단계에서는 그 사랑의 씨앗이 꽃을 피우고, 기도의 단계에서는 사랑이 점점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상의 단계로 접어들면, 어느새 주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매 주 우리가 함께 나누는 성찬 역시 어느 면에서는 관상의 한 형태입니다. 주님의 살이요 피인 빵과 포도주를 높이 들어 예배하고 있는 교우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우들은 성찬 중에 그 빵과 포도주를 직관하며 우리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살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때 주님의 사랑이 가슴에 불붙은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놀라운 위로와 사랑을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눈물과 참된 기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의 물음을 안고 당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시선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 십자가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건 참혹한 죽음 너머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바로 그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증언해 주십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 3:16
앞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주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시며, 땅에 붙박여 있는 인간의 시선에 대해 매우 답답해하신바 있습니다.(요 3:12) 거듭남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가능한 것인데, 사람들의 시선이란 게 땅만 향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 옛날 광야에서 원망을 쉬지 않던 사람들은 온통 시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두고 있었습니다.(민 21:4)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편안함을 향한 그들의 시선은 끝내 그들의 영혼이 상실감에 젖어들도록 만들었고, 어느덧 만성이 된 탐닉과 상실감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마저 '하찮은 음식'이라며 불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대 끝에 놋뱀을 매달으신 것은 땅에 붙박인 시선을 하늘로 들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은 땅에 붙박인 시선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당혹해합니다.(요 3:9) 우리는 니고데모의 이 당혹해 하는 모습에서 그가 지금껏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살아온 그였지만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땅에 붙박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생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 갈증을 끌어안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좀 더 심층적인 말씀을 해주십니다.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요 3:18-21
요한복음은 서론에서 이미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선포한바 있습니다.(요 1:4-5) 그런데 오늘 주님은 슬픈 이야기를 하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요 3:19) 그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빛을 미워했고, 빛으로 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심판은 거기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그리스도 이전의 상태로 끌고 올라갑니다.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엡 2:1-3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잠식당하고 나쁜 생각에 골몰해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시선이 이 세상에 붙박여 있고, 관심이 육체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저 옛날 광야에 놋뱀을 달아두셨던 것처럼, 죽음에 처한 우리 앞에 십자가를 두시고 그 십자가에로 우리 시선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의 태도 여하로 우리의 하나님 이야기를 스스로 써 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시선은 십자가를 향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말하는 하나님 이야기는 과연 믿음의 시선에서 우러난 것입니까? 하나님은 당신 외아들의 죽음과 우리의 생명을 두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를 경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랑을 말씀합니다.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 엡 2:4-7
장대 끝의 놋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듯이,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과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내 세속의 환경과 조건에 마음상해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은총을 하찮다 여기며, 원망에 삼키어진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시선을 들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며 그분의 침묵에 배어있는 깊은 사랑을 감사하며 감사가 배어나는 삶을 살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엡2:10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우리의 새로운 자아(自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로서, 십자가에 배인 주님의 묵묵한 사랑에 감격하며 우리 역시 묵묵히 주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입니다. 땅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살지 말고, 시선을 들어 생명의 향기를 맡으며 살아, 내 삶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복된 존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시선을 땅에 두고 불평과 원망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시선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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