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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2주 그리스도인의 완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7 22:22
조회
979
사순절 제2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17:1-7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 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응송 | 시 22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서신 | 롬 4:13-25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 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 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복음 | 막 8:31-38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 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 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 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17:1-7을 묵상하십시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신 말씀에서 '완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② 롬 4:13을 묵상하십시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의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③ 막 8:34을 묵상하십시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도달하도록 하는 '완전'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부터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은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날씨도 한층 푸근해졌고, 겨울잠을 자던 생태계가 기지개를 켜며 깨어남을 알리는 봄비도 촉촉이 내렸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날이 꽤나 따뜻해졌고, 옷차림도 얇아지고 가벼워졌습니다, 정호승은 '꽃을 보려면'이라는 시에서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 고요히 눈이 녹이기를 기다려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면서, 지난한 기다림의 끝에 보이고 만나지는 꽃씨 안에 숨겨진 생명을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봄은 숨겨진 생명을 틔워내는 계절이고, 그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경탄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맞이한 사순절 두 번째 주일도 그렇습니다. 사순 시기는 어둠속에서 생명을 틔워내는 부활의 아침을 향해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의 내면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참된 믿음과 거듭남과 성화의 전 과정을 치열하게 감내해 냅니다. 이집트의 성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영적 노력을 거부하는 우리 내면의 거짓 자아를 꿈틀거리는 뱀에 비유하면서, "그 놈은 거기 똬리를 틀고 앉아서 영혼의 가장 치명적인 기관에 상처를 입히는데, 즉시 이 뱀을 죽여 버릴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깨끗함을 자랑해도 좋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불쌍한 죄인처럼 머리를 숙여 내 속에 있는 온갖 불순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영적 노력이 왜 꼭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말씀하십니다. 13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들려온 이 말씀은 아브라함으로서는 무척 뼈아픈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 사건 이후로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졌던 지난 13년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완전하지 못한 채 깊은 영적 침체에 시달린 13년이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기다리시는 13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완전'은 믿음의 완전이요, 그로 말미암은 행함의 완전함이었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라고 해석했습니다.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믿음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완전함'이라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해 했을 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무려 13년간 지체되었듯이, 성도가 믿음을 상실할 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하염없이 지체될 수 있음을 바울은 경고한 것입니다. 그 사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오늘 복음서에서의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즉각 반발했습니다.(막 8:31-32) 그 반발은 주님의 제자임에도,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을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입신양명에 겨운 시선으로 바라본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고 꾸짖으시며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3-34)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약 성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람의 나이가 어느덧 백 살에 가까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급함은 그의 믿음에 조금씩 회의(懷疑)를 뿌리내리다가 끝내 하갈이라는 애굽인 여종을 취해 아들을 낳고 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도 소중했지만, 자기 후사를 이어줄 아들도 절실했기에 영적(靈的) 바람과 인간의 본능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는 아브람을 우리가 봅니다. 그 회의와 번민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부터 아브람과 13년 동안 대화를 끊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아브람의 마음도 참 무겁고 안타까운 세월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나이 구십구 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배경인데, 13년 만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세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첫째 말씀은 이것입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기 위해 눈이 녹도록 기다리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듯,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지난한 자아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완전에 이르는 믿음'을 꽃처럼 틔우기를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나태해진 믿음을 꾸짖어주고 계십니다. 신앙이 타성에 젖고 형식적이 되면 눈물은 마르고 감동도 시들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메마른 나의 내면과 정직하게 대면해서 다시 눈물과 감동을 회복하는 계절입니다. 부디 우리 안에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믿음이 뜨겁게 회복되어서 가슴 벅찬 사순절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못 이룬 나만의 만족에 겨워 있지 않은가?
② 나의 믿음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라는 '완전'을 향해 가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17:1-7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 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응송 | 시 22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서신 | 롬 4:13-25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 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 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복음 | 막 8:31-38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 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 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 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17:1-7을 묵상하십시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신 말씀에서 '완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② 롬 4:13을 묵상하십시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의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③ 막 8:34을 묵상하십시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도달하도록 하는 '완전'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완전
오늘부터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은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날씨도 한층 푸근해졌고, 겨울잠을 자던 생태계가 기지개를 켜며 깨어남을 알리는 봄비도 촉촉이 내렸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날이 꽤나 따뜻해졌고, 옷차림도 얇아지고 가벼워졌습니다, 정호승은 '꽃을 보려면'이라는 시에서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 고요히 눈이 녹이기를 기다려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면서, 지난한 기다림의 끝에 보이고 만나지는 꽃씨 안에 숨겨진 생명을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봄은 숨겨진 생명을 틔워내는 계절이고, 그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경탄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맞이한 사순절 두 번째 주일도 그렇습니다. 사순 시기는 어둠속에서 생명을 틔워내는 부활의 아침을 향해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의 내면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참된 믿음과 거듭남과 성화의 전 과정을 치열하게 감내해 냅니다. 이집트의 성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영적 노력을 거부하는 우리 내면의 거짓 자아를 꿈틀거리는 뱀에 비유하면서, "그 놈은 거기 똬리를 틀고 앉아서 영혼의 가장 치명적인 기관에 상처를 입히는데, 즉시 이 뱀을 죽여 버릴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깨끗함을 자랑해도 좋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불쌍한 죄인처럼 머리를 숙여 내 속에 있는 온갖 불순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영적 노력이 왜 꼭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말씀하십니다. 13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들려온 이 말씀은 아브라함으로서는 무척 뼈아픈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 사건 이후로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졌던 지난 13년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완전하지 못한 채 깊은 영적 침체에 시달린 13년이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기다리시는 13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완전'은 믿음의 완전이요, 그로 말미암은 행함의 완전함이었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라고 해석했습니다.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믿음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완전함'이라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해 했을 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무려 13년간 지체되었듯이, 성도가 믿음을 상실할 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하염없이 지체될 수 있음을 바울은 경고한 것입니다. 그 사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오늘 복음서에서의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즉각 반발했습니다.(막 8:31-32) 그 반발은 주님의 제자임에도,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을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입신양명에 겨운 시선으로 바라본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고 꾸짖으시며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3-34)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약 성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 창 17:1a
창세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의 나이가 '구십구 세 때'였다고 설명함으로서, 이때부터 펼쳐질 아브람 서사(敍事)가 아브람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 진행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때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온 지 25년째(창 12:4) 되던 해로, 후손에 대한 소망이 완전하게 단절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때까지의 아브람의 삶을 복기해 보면, 그저 주변의 범인(凡人)들과 별 다르지 않게 인간적 바람을 좇아 살아온 삶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나이 60세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셔서 고향을 떠나 말씀을 따라서 살아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인생의 목표는 여느 고대인들처럼 '아들'의 범주를 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참 그렇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미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종들과 조카 롯의 사이에 양치는 일로 다툼이 벌어졌을 때, 그 문제를 덕스럽게 해결한 후에, 하나님께 땅과 후손에 관한 약속의 말씀(창 13:14-17)을 듣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또 조카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에게 재물을 약탈당하고 사로잡혀갔을 때, 집에서 훈련시킨 삼백십팔 명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가서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을 구출해 오는 장면은 참으로 멋지기만 합니다.(창 14:1-16) 그런데 유독 아들 혹은 후계자의 문제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과 잦은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그 갈등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던 것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회가 날 때마다 아브람에게 후손에 관한 약속을 해주셨었습니다. 창 12:2에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셨고, 창 13:16에서는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셨고, 창 15:2에서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했을 때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시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고도 했습니다.그런데 문제는 아브람의 나이가 어느덧 백 살에 가까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급함은 그의 믿음에 조금씩 회의(懷疑)를 뿌리내리다가 끝내 하갈이라는 애굽인 여종을 취해 아들을 낳고 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도 소중했지만, 자기 후사를 이어줄 아들도 절실했기에 영적(靈的) 바람과 인간의 본능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는 아브람을 우리가 봅니다. 그 회의와 번민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부터 아브람과 13년 동안 대화를 끊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아브람의 마음도 참 무겁고 안타까운 세월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나이 구십구 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배경인데, 13년 만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세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첫째 말씀은 이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 창 17:1b
이 한 말씀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지 못해 일어난 신앙의 참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엘 샤다이' 즉 네 의심과 달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것과 같은 네 늙은 육체에서도 나는 새 생명을 싹틔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비탄에 젖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름으로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벧엘의 야곱을 찾아가 위로하셨고(창 35:11),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미디안의 모세를 찾아가 확신을 주셨으며(출 6:3),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찾아가셨습니다.(욥 40:2)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십니까?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을 보십시오.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창 17:1c
'완전하라'의 히브리어 원문은 '타밈'인데, 비난할 것도 없고 흠도 없는 깨끗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안의 타락 이후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완전'을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브람이 믿음으로 온전히 설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아브람의 13년은, 그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던 13년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을 사절했던 13년이었습니다. 그가 계속 그렇게 살아가도록 놔두어도 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첩을 통해 낳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얻은 행복도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행복에 겨워 사는 동안, 그를 통해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뜻은 한없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행복에 하나님의 행복도 반영되어 있습니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은 비난받을 것도 없고 흠도 없는 행복, 즉 육(肉)의 만족으로만 끝나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행복한 그런 행복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었던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않고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라고 노래했던 눅 2:29에서의 시므온의 행복과, 자기가 갈망했던 자식을 품에 안고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여기는 아브람의 행복은 참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순수하고, 흠 없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세 번째 말씀은 '언약(베리트)'이었습니다.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 창 17:2
이 언약은 여기에서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 차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이 언약을 체결해 주셨지만, 다시 한 번 후손에 관한 언약을 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아브람이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창 17:3),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십니다.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 창 17:4, 5
그리고 이 언약은 1년 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화답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와 대화를 끊으셨던 13년은 그가 다시 믿음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신 13년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바로 그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 롬 4:13
이 말씀은 오늘 구약의 말씀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의(義)'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을 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무려 13년이나 지체되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13년간의 냉전은 그냥 무의미한 냉전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하염없이 지체되는 냉전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지체된다면 그처럼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베드로를 보면서 그런 염려가 한낱 기우(杞憂)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막 8:31-33
이 말씀에서 드러난 베드로의 불신앙은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길을 막는 것에서 섬뜩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불신앙이 예수님의 길을 막는 결과로 나타났다 점에서, 그를 향해 사탄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꾸지람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존 웨슬리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하지 않습니까?"라고 묻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경험상으로나 성경에서 볼 때,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 무지에서 자유로울 만큼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사랑(요일 3:1), 마음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엡 3:16), 범사에 우리 길을 인도하시며(잠 3:6), 모든 것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 분의 섭리(롬 8:28)을 압니다. 둘째, 그래도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본 것은 그분이 하시는 일의 단편일 뿐이요,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뿐이니 그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욥 26:14) 하늘에서 증언하시는 분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며, 이분들이 한 분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요일 5:7) 그렇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를 향해서도 오래 참으며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무지를 넘어, 연약함을 넘어, 실수를 넘어 이 세상의 시험이나 유혹을 넘어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순종할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 무지와 연약함과 실수와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시험과 유혹을 당하시고 이기시는 방법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히 2:18, 4:15)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그가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때그때 불완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무지나 실수 혹은 연약함과 유혹이 완전히 없는 '완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거룩(holiness)의 다른 이름입니다. 성령의 돌봄과 도움 안에서 꾸준하게 자라가는 사람이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순종하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어디까지 자라가야 할까요? 주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이 갖추어지기까지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웨슬리께서는 '자기부인'이란 설교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의 뜻을 따르는 길을 그리스도교 영성의 대강령으로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제자로 남아있게 되는 일에서 '자기부인'은 절대적이고도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옳음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신을 부인해야 했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다려주신 13년은, 그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자기를 부인하도록 기다려주신 기간이었습니다.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기 위해 눈이 녹도록 기다리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듯,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지난한 자아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완전에 이르는 믿음'을 꽃처럼 틔우기를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나태해진 믿음을 꾸짖어주고 계십니다. 신앙이 타성에 젖고 형식적이 되면 눈물은 마르고 감동도 시들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메마른 나의 내면과 정직하게 대면해서 다시 눈물과 감동을 회복하는 계절입니다. 부디 우리 안에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믿음이 뜨겁게 회복되어서 가슴 벅찬 사순절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못 이룬 나만의 만족에 겨워 있지 않은가?
② 나의 믿음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라는 '완전'을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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