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5주 밑으로 기어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40:21-31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 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 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같도다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 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 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 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응송 | 시 147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서신 | 고전 9:16-23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 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 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 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 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 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 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 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복음 | 막 1:29-39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 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 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 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 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1:33-34을 묵상하십시오. 여기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참상은 무엇 이며, 병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② 사40:28-31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이며, 그 하나님께 우리가 가질 자세는 무엇입니까?
③ 고전9:19-23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자신의 자유함과 존귀함을 내 려놓고 모든 사람과 같이 된 이유를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밑으로 기어라
21세기는 '몸과 감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회 현상들 속에서 '몸'은 단연 우리 시대의 중요한 담론이 되고 있고, 지배적인 화두(話頭)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의 몸이 지니는 육체적 한계 즉 장애나 질병에 대한 치유가 주된 관심사였다면, 현대에 와서는 미적 불완전에 대한 불만족과 결핍이 새로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는 '건강한 몸'에 관심이 많았다면, 21세기에 와서는 '아름다운 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감성의 시대'에 몸은 더 이상 정신과 영의 종속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의 문화가 주도하는 삶의 변화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아름다운 몸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시대적 신조어까지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팬데믹 후 일 년을 넘기고 있는 작금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 사태는 우리 몸의 건강을 위협하는 만큼이나 정신적 피로 또한 더해가는 중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 안에서 표현하자면 몸의 건강이 위협받는 만큼, 영적 피로 또한 가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하지 못하는 영적 피로가 이웃들의 몸의 안전을 배려하지 못하게 할 만큼 영적 이기심을 갖게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시조시인 소재순은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던 순간을 이렇게 애절하게 읊었습니다.믿음은 연약한데 뜻 않던 환난으로
의식은 총총한데 못 견딜 동통으로
간절한 통회의 기도마저 막혀버린 순간이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 막 1:29-33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장 먼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자 거짓말처럼 열병이 떠나갑니다. 그 작은 동네에서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졌겠습니까? 저물어 해질 때가 되자 온갖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안드레의 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면을 마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 막 1:33
우리는 마가의 이 표현에서 당시 사람들이 처해있던 현실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보셨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을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막 1:34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마다, 언제나 그 문제를 약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아테네 문명을 몰락시킨 천연두라든지,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라든지, 이러한 전염병과의 싸움을 겪으면서 인간은 의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병과의 투쟁을 통해 인류 문명은 과거의 치료의학에서 현대의 예방의학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권력과 자본이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약의 정치'는 인간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었고, 결국 돈이 인간의 생명을 결정짓도록 만들었습니다.어떤 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 '평화의 도성'에서 "평화와 전쟁이 누가 더 잔인한가 경쟁하다가 평화의 잔인함이 전쟁의 잔인함을 이겼다"고 했던 말을 패러디해서, "병과 약이 누가 더 잔인한가 경쟁하다가 약의 잔인함이 병의 잔인함을 이겼다"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병은 병든 사람만 거꾸러뜨렸지만, 약은 인류 모두를 거꾸러뜨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잔인함입니다. 사람이 병들고, 사회가 병들 때도, 사람들은 돈을 중심으로 여겨서, 병든 사람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서를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찾아가셨다는 사실이 눈물이 겹도록 고마웠습니다. 주님은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을 사회의 중심으로 보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아픈 사람을 그 사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보아주셨습니다. 마치 우리 몸 전체가 아픈 곳을 위해 헌신하듯이 주님은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헌신하셨습니다.원주의 예수라 불리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가장 많이 당부하는 말이 '밑으로 기어라'입니다. 그의 이 당부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따듯함에서 나온 당부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지긋지긋하게 인식되는 이유는,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배나 기도 등 교회내적 가치를 수호하는 것을 지금 불안해하는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 더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를 하고, 경건한 자태로 기도와 금식을 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이웃과 형제의 아픔을 헤아려, 그들 아래로 바짝 엎드려 밑으로 기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피 흘려 이루신 복음은 전혀 그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의 자택인 봉산동에서 시내 중심가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로 족한 거리인데, 장일순 선생은 그 길을 걸어가는데 대개 두 시간씩 걸렸다고 합니다. 길가의 좌판 장수, 기계 부속품 가게 주인, 리어카 채소장수, 식당 주인, 아니면 농부들,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끊임없이, 벌이 얘기, 아이들 얘기, 농사 얘기, 살림살이며 시절 얘기를 나누는데 보통 두 시간씩 걸렸다는 겁니다. '좁쌀 한 알'을 쓴 최성현씨는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아하! 이것이 '밑으로 기어라'로구나." 했다고 합니다. 민초들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을 무등태운 채 진흙 창을 기어가야 모두가 산다는 성찰이 배인 행동입니다.
장일순 선생은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잘 모시라"고 하면서 자신 역시 누구를 대하든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처럼 대했습니다. 마 5:9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일순 선생은 그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읽지 않고, "하나님의 아녀(兒女)가 될 것이다"라고 읽는다고 합니다. '아녀(兒女)'는 아이와 여자를 말하는데,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표현을 신앙인의 눈으로 고친 것입니다. 그 눈과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의 눈과 마음이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감격스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 사 40:27
마치 시 44:24에서 시인이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하며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섭섭해 하듯이,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께 "주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나의 정당한 권리도 지켜 주시지 않는다"며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불만에 섬세하게 대답해 주십니다.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 사 40:28-31
하나님은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하시며, 이미 그들이 지나온 역사 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의 사랑을 잊었다고 그들을 다그치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설명해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힘을 주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그 어떤 타박도 없이 예수님은 문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병든 몸을 고쳐주시고,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억눌린 영혼들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불쌍한 사람들을 형제로 혹은 당신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와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열거하시면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하십니다. 당대의 가장 약하고 가난한 자,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힌 자마저 주님은 당신 자신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러한 주님과 비슷한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서신서에서의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 고전 9:19-23
여기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그들과 같아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그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었고,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당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해보셨습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러한 일들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 내 헌신의 중심이 되고, 갇힌 사람이 있는 곳이 내 헌신의 중심이 되고, 주린 사람이 있는 곳이 내 헌신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 갇힌 자 등 가장 약한 자들을, 당시 사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보아주셨습니다. 마치 우리 몸 전체가 아픈 곳을 위해 헌신하듯이, 주님은 아픈 사람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마음이 곧 당신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그들과 같아졌다고 고백하는 바울에게서 우리는 주님 닮은 바울의 마음을 봅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그러나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 기꺼이 '자기 입장'을 내려놓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헨리 나우웬은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라고 묻고, 동정, 이해, 용서, 우정 등 상처의 치유에 필요한 단어들을 나열한 후 "하지만 나는 환대(歡待 hospitality)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웃과 형제를 내 마음 안에 환대해 들이지 않는 한 그 어떤 치유도 일어날 수 없음을 그는 안 것입니다. 환대는 나 아닌 타인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입니다. 한 사회의 아픔도, 한 개인의 아픔도 모든 치유는 환대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과 환대의 원형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가슴 벅찬 이 사역을 감당하라고 초대받고 있습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형제와 이웃을 보고 있지 않은가?
② 아픈 형제가 있는 곳이 내 헌신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