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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3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1-23 15:42
조회
944
주현 후 제3주 (나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욘 3:1-5, 10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 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 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응송 | 시 62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 였다 하셨도다
서신 | 고전 7:29-31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 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복음 | 막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 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15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② 욘 3:5을 묵상하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을때,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③ 고전 7:29-31을 묵상하십시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첫째 단언 '때가 되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절박하게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시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때'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처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구별되는 시간 개념으로 '카이로스(χαιρὸς)' 즉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시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때'가 찼다는 겁니다. 이 표현은 완료 수동형입니다. '때'가 밖으로부터의 어떤 힘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힘이 '때가 차게' 함으로서 목적하고 있는 건 과연 뭘까요?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구약의 때가 차고 신약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으며, 요한의 때가 차고 예수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으며, 흑암의 때가 차고 구원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구원의 때가 지금 막 찬 것입니다.(단 7:22, 겔 7:12)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한 개념을 새로이 정립하게 됩니다. 시간이란 저절로 흘러 어느 때에 도달하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당신 구원을 실현시켜주심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시간들 안에는 어떤 신비로운 연속성이 있어서 하나님은 시간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온 세대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온 세대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구원은 단순히 그 점진적인 단계를 지속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보다 앞서 진행되어온 구원의 단계들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을 우리는 연대기적 시간(χρόνος)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시간(χαιρὸς)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신 그 때를 일컬어 '때가 찼다'(막 1:15)고 선언한 것입니다. 달이 차듯 구원의 때가 찼음을 본 것입니다.
둘째 단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구약성경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해왔습니다.(사 6:1-3;43:15;시 46;92, 95-98 등) 그래서 포로생활 이후에 다윗의 왕권에 대한 기억이 거의 희미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시온에 당신의 나라를 일으키시고, 당신의 왕권을 온 세상에 펼쳐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었습니다.(미 2:13;4:7;습 3:15;렘 3:17 등) 그런데 예수님께서 '때가 찼다'라며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요 18:36에서 그 나라를 '내 나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는데,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은 예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도래해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그 나라 밖에 머물러 있던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주님은 마침내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언을 하십니다.
셋째 단언 '회개하고'
넷째 단언 '복음을 믿으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시간적 절박성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변화에의 절박성을 우리에게 더해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회개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고, 회개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소유하고 예수님 자신이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최선의 수단입니다. 일찍이 사막의 교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방편으로서의 회개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개를 '펜토스(Penthus)' 즉 '통회의 슬픔'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막 영성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안토니는, 사람에게 으뜸가는 일이 이 '통회의 슬픔'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기 죄를 나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생각할 때, 대개 윤리적인 문제를 먼저 떠 올립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로,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다는 '존재론적 자기이해'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단절에 대한 통회의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단호히 돌아서게 되고, 그 순간이 바로 본래의 내 자리로 되돌아가는 순간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만큼 행복합니다. 죄에 대한 슬픔이 클수록 용서가 기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르면 용서의 은혜도 알지 못하고, 용서를 알지 못하면 사랑도 알지 못하며, 사랑을 모르면 은혜란 무의미한 빈 말이 되고 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많이 자기 죄를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가지 진짜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의인인 줄 아는 진짜 죄인이 있고,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진짜 의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요? 내가 진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때에 대한 '무심함'이 우리의 회심을 변질시키지 않았는가?
② 때에 대한 '예민함'이 우리 회심을 온전함으로 이끌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욘 3:1-5, 10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 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 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응송 | 시 62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 였다 하셨도다
서신 | 고전 7:29-31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 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복음 | 막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 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막 1:15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② 욘 3:5을 묵상하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을때,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③ 고전 7:29-31을 묵상하십시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주현 후 제3주인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부름'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 교회력과 성서일과의 강조점은 '부름'보다는 '회개'에 더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오늘 성서일과 전체를 요약해 주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때의 긴박감과 변화에의 절박성을 한껏 고양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이라는 때를 놓쳐버리면, 회심과 변화의 가능성을 영원히 상실해버릴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때의 긴박성'은 요나가 니느웨에 선포한 구약 성서일과의 경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는 요나의 경고를 니느웨 사람들은 마음으로 듣습니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욘 3:5)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한 것 즉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욘 3:5) 그런가 하면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때(카이로스 καιρός)'가 단축되었음을 경고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고전 7:29) 여기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그 때'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뜻합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때의 긴박성'을 마음에 두고 가능하면 결혼이나 매매, 혹은 세상 물건을 사용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권고인데(고전 7:29-31), 바울의 이 말씀은 결혼도 하지 말고, 매매도 하지 말고, 세상의 물건을 쓰지도 말라는 극단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록 우리가 현세의 시간 안에서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답게 현세를 초월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현실세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자기 존재 안에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이루며 사는 것이고, 현세의 시간을 완성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회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바로 그런 회심을 요청하십니다.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막 1:14
이 말씀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마가가 예수님의 설교 앞에 부연해 놓은 '때'에 관한 언급 즉 "요한이 잡힌 후"라는 연대기적 인식입니다. 아마 이 상황 설정은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활동 사이의 사역의 연속성을 말하기 위한 마가의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자기의 사역을 마치면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막 1:7)라고 했던 바로 그 분이, 요한의 사역을 이어서 지금 막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마가는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만 사역의 장소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막 1:5)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막 1:14) 사역을 이어가십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사가 유다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소외된 땅인 갈릴리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겠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 오셔서'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봐야 하겠습니다.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선포한 메시지는 네 개의 단언(斷言)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 네 개의 단언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골자가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첫째 단언 '때가 되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절박하게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시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때'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처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구별되는 시간 개념으로 '카이로스(χαιρὸς)' 즉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시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때'가 찼다는 겁니다. 이 표현은 완료 수동형입니다. '때'가 밖으로부터의 어떤 힘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힘이 '때가 차게' 함으로서 목적하고 있는 건 과연 뭘까요?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구약의 때가 차고 신약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으며, 요한의 때가 차고 예수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으며, 흑암의 때가 차고 구원의 때가 도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구원의 때가 지금 막 찬 것입니다.(단 7:22, 겔 7:12)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한 개념을 새로이 정립하게 됩니다. 시간이란 저절로 흘러 어느 때에 도달하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당신 구원을 실현시켜주심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시간들 안에는 어떤 신비로운 연속성이 있어서 하나님은 시간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온 세대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온 세대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구원은 단순히 그 점진적인 단계를 지속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보다 앞서 진행되어온 구원의 단계들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을 우리는 연대기적 시간(χρόνος)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시간(χαιρὸς)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신 그 때를 일컬어 '때가 찼다'(막 1:15)고 선언한 것입니다. 달이 차듯 구원의 때가 찼음을 본 것입니다.
둘째 단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구약성경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해왔습니다.(사 6:1-3;43:15;시 46;92, 95-98 등) 그래서 포로생활 이후에 다윗의 왕권에 대한 기억이 거의 희미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시온에 당신의 나라를 일으키시고, 당신의 왕권을 온 세상에 펼쳐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 있었습니다.(미 2:13;4:7;습 3:15;렘 3:17 등) 그런데 예수님께서 '때가 찼다'라며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요 18:36에서 그 나라를 '내 나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는데,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은 예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도래해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그 나라 밖에 머물러 있던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주님은 마침내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언을 하십니다.
셋째 단언 '회개하고'
넷째 단언 '복음을 믿으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시간적 절박성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변화에의 절박성을 우리에게 더해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회개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고, 회개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소유하고 예수님 자신이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최선의 수단입니다. 일찍이 사막의 교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방편으로서의 회개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개를 '펜토스(Penthus)' 즉 '통회의 슬픔'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막 영성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안토니는, 사람에게 으뜸가는 일이 이 '통회의 슬픔'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기 죄를 나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생각할 때, 대개 윤리적인 문제를 먼저 떠 올립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로,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다는 '존재론적 자기이해'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단절에 대한 통회의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단호히 돌아서게 되고, 그 순간이 바로 본래의 내 자리로 되돌아가는 순간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만큼 행복합니다. 죄에 대한 슬픔이 클수록 용서가 기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르면 용서의 은혜도 알지 못하고, 용서를 알지 못하면 사랑도 알지 못하며, 사랑을 모르면 은혜란 무의미한 빈 말이 되고 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많이 자기 죄를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가지 진짜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의인인 줄 아는 진짜 죄인이 있고,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진짜 의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요? 내가 진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막 1:16-20
가까이 왔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도래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응답의 표본은 주님께서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시던 날 그들의 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부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 장면에서 정말 인상적인 것은 부름이나 응답이 똑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오늘 복음서에서 '곧'이라는 부사를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입니다.(막 1:20) 그리고 한 번은 제자들의 응답에서입니다.(막 1:18) 주님께서 '곧' 부르시니 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주님의 신속한 부르심 앞에서 제자들은 '곧' 과거를 떠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회심이란 그렇습니다. 신속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생각해보고, 계산해보고, 뒤돌아보면 우리는 주님을 영영 따라나서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즉각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할 것과 부정한 방법으로 착복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삭개오가 시간을 두고 고민했더라면 그는 결코 회심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울은 회심을 통해 지난날의 잘못된 열심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자신의 삶을 재구성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성서적 전통을 이어받아 삶의 총체적 변화로서의 회심(悔心)을 강조했습니다. 고든 스미스는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이란 책에서 훌륭한 회심의 7가지 요소를 정리했습니다.첫째, 믿음 즉 지적 요소의 회심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고의 변화를 통해 믿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 즉 진정한 참회입니다. 죄로부터 분명하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셋째, 용서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것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넷째,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에너지가 어디로 투입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다섯째, 물세례입니다. 이것은 성례전적 요소입니다. 여섯째,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적인 요소입니다. 일곱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적인 요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회심이 결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심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거쳐 거듭거듭 일어나는 영속적인 사건입니다. '회심의 변질'을 쓴 알렌 클라이더에 따르면 초대교회에서는 신념(Belief)에 변화가 찾아오고, 소속(Belonging)에 변화가 찾아오고, 행동(Behavior)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비로소 그것을 회심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그저 간단히 신념에 동의하면 회심한 것으로 여겨주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나 성도들을 들여다보면 알렌 클라이더의 이 진단이 결코 과장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오늘날 우리의 회심이란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모릅니다. '회심의 변질'에서 인용된 다른 글에 의하면, 회심이란 '삶의 방식의 재구성이고, 가치체계의 재구성'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킬 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회심이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았고,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심이 그래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요나 선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 욘 3:4a
40일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회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긴급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때의 임박성' 만큼이나 긴급하게 행동합니다.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 욘 3:4b
'때'를 예민하게 받아들인 그들의 회심이 그들의 인생 전체를 구원한 것을 봅니다. 이러한 시간적 절박성의 이야기는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도 민감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 고전 7:29-31
여기에서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는 말씀은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 역시 '시간의 절박성' 안에서 고린도 사람들의 회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으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기쁨이 있는 사람은 기쁨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가정이나, 삶의 희로애락이나, 상거래 등 인간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가치관도 하나님 앞에서의 영성생활보다 우선할 수 없으니 비록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세속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이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현세의 시간 안에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은 임시적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에 우리의 시선을 두고 '그 나라에 적합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부인되는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그 어떤 질적 변화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나약한 나'를 진실하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흙으로 돌아갈 육체로서의 나'와 진실하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진실한 만남의 결과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때에 대한 '무심함'이 우리의 회심을 변질시키지 않았는가?
② 때에 대한 '예민함'이 우리 회심을 온전함으로 이끌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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