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탄 후 제1주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61:10-62:3
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 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 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 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 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 할 것인즉 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응송 | 시 148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 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서신 | 갈 4:4-7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 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 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복음 | 눅 2:22-40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 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도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 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 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 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 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 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 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 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의 위에 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61:10, 11을 묵상하십시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모습(10절)과 현상(11절)을 각각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② 눅 2:25-35을 묵상하십시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에게 성령께서 어떤 은총을 주십니까?
③ 갈 4:4, 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 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2020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았습니다. 성탄절과 함께 찾아온 이 마지막 주일이 희망어린 새해를 전망하며 행복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작금 우리가 목격하는 풍경들은 한편으론 기괴스럽기까지 합니다. 다섯 명 이상 모여서는 안 되고, 심지어 가족들마저 함께 식사하지 못하고 각자 구석을 찾아 돌아앉아 밥을 먹습니다. 마치 천지창조 이전, 혼돈과 공허로 표현된 그 혼란의 순간을 보는 느낌마저 듭니다. 분명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당신이 옳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며, 1만2천여 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고,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했던 그녀의 치유경험이 따뜻하게 녹아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 '방전되고 꺼져가는 나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쓴 글이 있습니다.
"직장생활이든 감옥생활이든, 부자든 빈자든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나 집중을 받은 경험이 적으니 사람들은 아플 수밖에 없다. 충전기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배터리처럼 내 존재 자체가 계속 방전만 거듭하다 꺼져간다. 방전의 종착점에 서 있는 사람의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이고 몸은 탈진상태다.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살아지지도 않는다. 치솟는 자살율과 추락하는 출산율은 그렇게 생명과 멀어지고 있는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작금의 코로나 19 상황을 지나오며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방전이 아닐까 합니다. 환경의 방전, 건강의 방전, 경제의 방전, 사실 이 모든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보다 말씀이 전하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경고를 듣게 하시려고 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내셨는지도 모릅니다. 이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병과 함께, 사람들이 가장 힘겨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경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 초래한 생태위기의 이면에 경제 만능주의의 폐해가 있습니다. 경제는 영어로 '에코노믹(economic)'인데,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와 '노미아(nomia)'의 합성어입니다. '오이코스'는 '집' 곧 우주라는 큰 생명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노미아'는 '가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경제'란 다름 아닌 우리가 사는 우주라는 큰 생명의 집을 가꾸는 것입니다. 집(가정)은 돈으로만 가꾸어지지 않습니다. 돈만으로 집을 가꾸려고 하면, 그 집은 부자가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돈보다 소중한 생명과 사랑이 소멸된 비정상적인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經濟)의 한자어도 그렇습니다. 경제는, 다스릴 경(經), 세상 세(世), 건널 제(濟), 백성 민(民)으로 구성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인데,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경제란, 단순히 생계만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 우주를 가꾸어 생명을 일구고, 백성을 살리는 방편인데, 경제를 변질시켜 돈을 목적으로 삼고, 오로지 자본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생태계를 가꾸기보다 파괴하고, 경제를 탐욕의 도구로만 삼으니 방전된 생태계가 끝내 미쳐서 이렇게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삶의 자세로 사는 존재일까요? 성탄이 이틀 지난 오늘 우리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질문입니다.
마리아의 태(胎)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듯이, 여러분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까? 진정 그러하다면 성탄이 이루어진 존재로서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일제히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희망임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찬양'에서, 이 땅에 이루어질 성탄과 메시아 사역을 내다보며, 바로 그 메시아를 보내실 여호와께 찬양을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구원은 마치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뿌려진 씨앗을 움돋게 하듯(사 61:11) 새롭고 싱그러울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 5)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때가 찼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아들이 땅이 싹을 내게 하며, 동산이 뿌려진 씨앗을 움돋게 할 그 구원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음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시므온이란 노인은 평생 동안 바로 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 2:25)였습니다. 그런 시므온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품에 받아 안고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눅 2:29-30 공동번역)라고 찬송을 하는 장면은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그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부른 찬송은 '시므온의 노래'란 제목으로, 교회의 오랜 예배 전통 안에서 따라 불리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서일과에 등장하는 이들은 각각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고 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런 예언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 사 61:10
이 말씀은 '여호와의 종에 대한 찬양'입니다. 즉 메시아의 도래와 그 분이 하실 사역을 내다보며, 그 메시아를 보내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사야가 말씀하는 이 '겉옷'이란 몸 전체를 가리는 망토 같은 옷을 가리킵니다. 이 망토는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이사야가 말하는 '공의의 겉옷'으로서의 망토는 이스라엘의 자격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메시아의 사역의 결과로 우리에게 입혀 죄를 가려주신 '구원의 겉옷'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 사 61:11
땅이 싹을 낸다는 표현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여러 번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사 45:8에 보면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사 55:10, 11에서도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의 이런 표현들은 깊은 신앙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첫 장부터 시작되는 창조와 타락 이야기는 한 마디로 인간의 통합과 분열의 신학적 실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통합되어 있었을 때, 그는 하와와도 한 몸일 수 있었고, 땅과도 이웃이자 동료였고 친구일 수 있었으며, 자기 자신과도 갈등 없이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는 순간, 그는 모든 것과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하와와의 분열로 이어졌고, 하나님과의 분리는 자연과의 불화로 이어지고, 하나님과의 분리는 마침내 자신과의 분열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통합 가운데서, 영이 정신을 지배하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며, 육체는 물질을 지배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만 그 순서를 거꾸로 뒤집어 놓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물질이 몸을 지배하고, 몸은 정신을 지배하고, 정신이 영을 지배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로 인간의 영은 혼란과 어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두워진 영을 지니게 된 인간실존은 스스로를 통합과 균형과 조화의 존재로 경험하는 대신, 분열과 갈등과 충돌의 존재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생의 한 가운데서 비참하고 쓰라린 실존에 절망하거나, 아니면 이사야 선지자나 시므온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님과 통합되는 영적 회복과 위로를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가 선포하는 말씀에는 그 희망이 간절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700년 전에 이 땅을 살다 죽은 한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을 700년이 지난 후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리고 혹 그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세상이 바뀌어도 한참이나 바뀐 700년 후에 이미 화석이나 마찬가지인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희망을 두고 살아갈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현실적인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래서 믿음이 값진 것이기도 합니다. 수천 년 지난 화석과 같은 말씀에서 오늘의 희망을 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700년 전에 선포된 그 말씀을 정말로 붙들고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 같은 사람입니다. 누가는 시므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눅 2:25
여기에서 시므온이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것은 구약성경의 흐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을 가리킵니다. 후대의 랍비들은 이 '이스라엘의 위로'가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 성취되는 구원을 의미하는 까닭에 메시아를 '위로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시면 다윗 왕국이 재건될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윗 혈통의 왕이 태어나서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거라고 믿고, 현실 속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로마로부터의 독립운동에 나섰던 열심당원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땅의 침묵자'라고 불리는 소수의 사람들은 기도와 말씀묵상에 전념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기도 했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로 소개 된 시므온은 후자에 속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부연설명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시므온을 일컬어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라고 말할 뿐 아니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시므온을 '영적인 사람'으로서,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던 유다의 '남은 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동시대에 '기다리는 자'는 비단 시므온만이 아니었습니다. 막 15:43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또 요 1:47에서 주님은, 나다나엘이 걸어오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묻자 주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당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시사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들처럼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릴 때, 우리 가운데 벌어지는 놀라운 일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의롭고 경건하다고 평가해 주시고, 성령은 바로 그런 사람 위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기다림은 결코 막연하지 않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위로가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소개합니다.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갈 4:4, 5
여기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때'라는 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를 말씀하는 것이고, 그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마침내 도래했음을 시사 하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이신 예수를 율법 아래 놓이게 하신 것은, 율법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아들의 명분' 즉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사내아이가 출생한지 40일이 되면, 그 어미는 '부정한 피'로부터 정결케 되는 의식을 위하여, 어린양이나 산비둘기, 혹은 집비둘기 한 쌍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성전에 몸을 보여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런 율법의 정신에 순종해서 예수를 성전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고, 거기서 예수는 늙은 시므온에게 축복을 받으시고, 여선지자 안나를 통하여 구세주이심이 밝혀진 것입니다.(눅 2:36-38) 우리가 그 구세주를 믿고 의지할 때, 그 때 일어나는 일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 갈 4:6, 7
시므온은 바로 이 위로를 아는 사람이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예수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의롭고 경건할 수밖에 없었고,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누가는 그 기다림의 결과를 감동적으로 증언합니다.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눅 2:26-32
시므온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위로를 만납니다. 어느 날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는 마침내 부모 품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아기 예수님을 건네받아 자기 품에 안고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 젖먹이 예수 안에 은폐되어있음을 그의 눈이 본 것입니다. 그가 본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보십시오.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 눅 2:34, 35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마리아는 '칼이 마음을 찌르듯 하는' 비극적인 순간을 견뎌야 하는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메시아의 어머니'라는 영광과 함께 '슬픔의 어머니(Mater Dolorosa)'로 묘사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의 장차를 통하여 이루어질 비극마저 알고 있었고, 그래야만 완성될 구원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게 산다는 것에는 이렇듯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헤아리며 공감하는 영적안목을 갖추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걸까요? 지난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행복해하는 시므온처럼, 우리의 시선은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향하고 있으며, 우리의 가슴속은 예수님으로 채워져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시선이 순일하게 주님을 향하고 있지 않거나, 우리 가슴이 온통 세상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자칫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진 유사 크리스천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꽃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신합니다'라는 책을 쓴 유선경 작가에 의하면, 사람의 얼굴이 45센티미터 이하 거리로 들어오면 더는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상대의 눈동자에 내가 들어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무얼 더 바라볼 게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하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을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그곳에 가고 싶다면 안 되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안 되지요."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만 바라보다가, 어느덧 주님과 내가 너무 가까워져서,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림도 바라봄도 필요 없는 완전한 구원의 상태, 그럼으로써 이웃이나, 창조질서와도 통합을 이루고, 자기 자신과도 갈등 없이 통합되어 있는 영적 상태, 바로 거기에 시므온이 있었던 것이고, 우리 또한 바로 그 영적 자리로 초청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성탄이 이루어졌습니까? 주님이 이루신 그 위로와 구원을 결코 놓치지 말고, 성탄의 행복 속에 2021년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가슴에 품은 꿈이 표면적 세상에서 표류하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궁극의 위로를 바라보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