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21주 참된 신앙은 사랑으로 반응한다
Lectio Divina
구약 | 신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 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 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 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 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 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 을 행한 자이더라
응송 | 시 90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 겁고 기쁘게 하소서
서신 | 살전 2:1-8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 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 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 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 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 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 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복음 | 마 22:34-46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 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 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 도 없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신 34:5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전해 받은 모세의 태도는 어 떠했습니까?
② 마 22:37-39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큰 계명과 둘째 계명은 무엇입니까?
③ 살전 2:7, 8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을 어떤 심정으로 대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참된 신앙은 사랑으로 반응한다.
여름 지나고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상강(霜降)마저 한달음에 지나쳐 갔습니다. 상강은 24절기 중 열여덟 번째 절기인데, 밤에는 온도가 급강하해서 서리가 내리고 이맘때쯤 농부들은 추수를 거의 끝내며, 동물들은 겨울잠에 들어갈 채비를 합니다. 옛 사람들은 상강으로부터 입동 사이의 기간을 5일씩 삼후(三候)로 세분해서, 초후(初候)에는 승냥이가 사냥을 하고, 중후(中候)에는 나무와 풀이 누렇게 물들고 낙엽이 지며, 말후(末候)에는 겨울잠을 자는 벌레들이 땅에 숨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듯 24절기 생태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창조질서의 엄중함과 그것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나무도 풀도 승냥이도 벌레들도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이때쯤이면 창조질서에 순응해 자기태도를 결정합니다. 사람이 물 흐르듯 행동할 때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하는데, 그러고 보면 '자연스러움'이란 참 신앙적인 몸가짐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행동이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에서만 우러나는 행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마치 이 즈음 나무가 스스로 잎을 떨구어 겨울을 준비하고, 승냥이도 벌레들도 겨울을 대비해 자기 행동을 결정하듯이, 오늘 구약성경에서 보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순종해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신 34:1-6
제임스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성화 중에 '멀리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세'를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며 40여년을 걸어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 서서 약속의 땅을 애타게 바라보고 죽어야 하는 모세의 아쉬움이 온몸에서 느껴지는 성화입니다.크리스티안 롤프스가 그림 작품에도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세' 그림이 있습니다. 신성함과 은혜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은 모세는 흰 머리에 희 수염이 길게 자라 있습니다. 몸에 새겨진 굵은 붓 터치는 그의 강인함과 험난했던 인생 여정을 보여줍니다. 굳게 다문 입술, 꼭 감은 누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땅과의 경계가 모호한 하늘에는 그의 마음처럼 검은 구름이 죽죽 끼어있습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며 하나님께 울며 떼를 썼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온 세월이 120년입니다. 갓난아기일적 채 눈도 뜨기 전에 나일강에 버려졌던 모세입니다. 비록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했다고는 하나 그것도 자기가 선택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나이 40이 되어 동족을 돌아볼 생각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살인자로 전락시켜 광야 유배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이 80이 되어 좀 편안하게 살고 싶을 무렵 하나님은 그를 불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후로 그는 말도 행동도 거친 히브리들과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를 40년이나 떠돌았습니다. 이제 비로소 모압 평지에 이르러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이 눈앞에 보이자 너는 그만 그 땅을 눈으로만 보고 여기에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어떤 항변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 신 34:5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공감'이 그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기 목숨보다 귀했고 하나님의 뜻은 그의 뜻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서 죽었고 그의 무덤조차 사람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추억시켜 줍니다.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 신 34:7
그는 기력이 다하고 힘이 소진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단풍은 떨어져야 할 때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만, 그는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받아들여 순명(順命)한 것입니다. 그의 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명은 어느 한 순간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우리는 시내산에 등정하는 모세의 모습에서 그의 영적 상승을 보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모세가 하나님을 뵙도록 허락받은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에게 더욱 '알 수 없는 분'의 이미지가 됩니다. 니싸의 그레고리오스에 따르면, 그는 전심전력으로 전진해가며 실재에 대한 지식에 다가서고 관상에 접근해 갈수록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의 영적 지식을 초월해 계셨고, 그의 영의 능력을 벗어난 존재이셨습니다. 그의 감각이 '지각'하고, 지성이 '보았다고' 믿는 순간 하나님 본질은 그 영적 지식을 초월해 계셔서 여전히 도달할 수 없는 분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하나님 알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자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함께 진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3)라고, 또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구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시는데, 당신께서 지나가신 후의 반영(反影)을 보여주심으로서, 그를 보호하시는 방법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교제에로 나아갈 수 있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에네르기아' 즉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맛보고 도달할 수 있는 실제적 현실 안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친구로 삼아 속 깊은 대화를 그와 나누셨습니다. 그렇게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과 사랑했기에 모세는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세는 비록 구약시대 사람이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입니다. 삼위일체란 사랑으로 존재방식을 삼으시는 하나님의 현존 원리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사랑의 연대성을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방식으로 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으신 우주만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불가분리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지체를 이루고, 모든 생태계는 창조질서 안에서 하나의 지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이 순환관계를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과 일치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요, 모든 창조세계의 존재 방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의 중심에 주님이 당부하신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의 존재방식이 깨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행복하고 생태계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죄, 타락, 고통, 불행, 죽음, 어둠이란 모두 다 이 사랑의 관계성의 파기를 뜻하는 말들입니다. 이것은 우주론적 진리이고 동시에 내적 진리입니다. 에덴동산의 죄와 타락이란 다름 아니라, 이 사랑의 관계의 파기를 뜻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모든 관계의 파괴였으며, 급기야 인간은 자신마저도 조각조각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비극과 고통의 원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파기된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고, 조각난 자아를 재통합하여 당신 안에서 하나님과 통합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조각난 자아가 통합되고, 이웃과 생태계와 더불어 관계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랑으로 연합해야 하는 것임을 일러주십니다.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마 22:34-36
예수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기 위해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는 충격적입니다. 속에 살의(殺意)를 가득 품고 예수님께 접근하면서도 그러나 속마음을 감추고 마치 진심으로 율법이 궁금해 묻는 듯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음흉함을 모른 체하고, 모든 율법 중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이 가지는 절대적 수위성을 신명기의 표현을 들어 말씀해주십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마 22:37-40
첫째 계명이 하나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이라면, 둘째 계명은 그 언약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천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첫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충실성을 요구하며, 둘째 계명은 이웃에 대한 신실성을 요구합니다. 본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충실성 안에서 이웃과 신실하게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하면 안 되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충실성이 우선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혼동하거나 그 우선성을 뒤바꿔 놓을 때, 그것은 그럴듯한 유사 크리스처니티가 되고 맙니다.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우주와 역사와 세계의 중심에 하나님을 축출하고 인간을 두었습니다. 그것을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물질문명의 한계와 극대화된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신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이 되시게 하라는 말씀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목숨이 되시게 하라는 말씀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뜻이 되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에 계셔야 할 분이시고, 하나님만이 우리 목숨이 되셔야 할 분이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뜻이 되셔야 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회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내 마음에 이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율법 조항이나 잡다한 규례로 만나려 하지 않고, 마음으로 만나고, 목숨으로 만나고, 뜻으로 만나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이웃과 사랑으로 순환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이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숨이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뜻이십니까? 그래서 이웃이 내 자신처럼 여겨지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뭉클하게 다가오고 계십니까? 이 마음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이 예배를 마친 이후에도 여전히 무정한 얼굴로 율법 조항을 들이대며 누군가를 정죄하고, 이웃을 내 마음 밖으로 몰아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도 아니고 나와 내 이웃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뜻도 아닙니다. 서신서에서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 살전 2:7
이 편지를 쓰던 당시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유모'의 심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는 바울은 마땅한 사도의 권위를 포기하고 유모와 같은 자세를 취했습니다. 유모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아이들을 엄마의 마음으로 돌보아주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유모의 심정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복음만이 아닌 목숨까지도 주고 싶다고 합니다.(살전 2:8) 바울이 이렇게 격정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이유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고난은 돈이 없다거나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받은 박해를 가리킵니다.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 살전 2:14
바울의 이 말씀에 따르면 유대 지역에 있는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역시 동족들에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바울이 가장 먼저 고난을 받았습니다.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 살전 2:2
왜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까요? 그들은 율법 없는 하나님 신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까지는 용납할 수 있어도, 율법을 상대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헐뜯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을 거의 직업처럼 행하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 살전 2:8
바울은 하나님만 사랑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박해자까지 사랑한 바울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만 사랑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백성까지 사랑한 모세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존재 방식도 보다 선명하게 주어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지체를 이루고, 모든 생태계는 창조질서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룹니다. 바로 이 순환관계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요, 그분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 원리요, 모든 피조물의 존재론적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의 중심에 주님이 당부하신 사랑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사랑으로 존재방식을 삼고 있듯이, 하나님과 나 그리고 사람과 생태계 모두 사랑으로 순환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웃과도 사랑으로 다가가는, 우리 모두 그런 가을을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실천 | Praxio
① 바리새인들처럼 사랑 없이 교리만 남은 종교인이지 않은가?
②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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