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17주 헤아림, 그리스도인의 품격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출 17: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 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 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 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 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 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 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 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 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 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 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응송 | 시 78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서신 | 빌 2:1-13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 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 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복음 | 마 21:23-32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 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그 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 부터라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 부터라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 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 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 묵상 | meditatio
① 출 17:7을 묵상하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를 시험한 물음을 보며, 그들의 불평과 원망의 궁극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여겨집니까?
② 마 21:28-31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 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③ 빌 2:8을 묵상하십시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과도 구별되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헤아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백범 일지를 읽다 보면 그분의 가슴에 맺힌 수탈당한 조국에 대한, 그리고 동지들에 대한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아픔이 행간마다에 촘촘하게 배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자신의 육십 평생을 회고해 보니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대개 사람이 귀(貴)하면 궁(窮)함이 없겠고, 궁(窮)하면 귀(貴)함이 없을 것이나, 자신은 귀(貴)해도 궁(窮)하고 궁(窮)해도 궁했습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강산이 다 자기 것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자기 소유가 없다 보니 자식들에 대하여도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아비라 하여 자식 된 의무를 하여주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기미년(1919년) 2월26일이 어머님 환갑이었기에 약간의 술과 안주를 마련해 친구들이나 모으고 축하연이나 하자고 아내와 의논을 하고 진행을 하려는데, 이 눈치를 아시고 어머님은 극히 말리셨습니다. "네가 곤란한 중에 무엇을 준비한다면 도리어 내 마음이 불안하니 다음으로 미루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백범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사 역량이 있다 하여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 잃고 집안 망하는 동포들이 수십 수백인데,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준비할 용기부터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일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지냈는데, 민국 8년(1926년) 나석주가 많은 양의 고기와 채소를 사가지고 와서 어머니께 드리면서 오늘이 선생님 생신인데, 돈은 없고 해서 의복을 전당하여 고기 근이나 좀 사가지고 밥해먹으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백범은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니께 너무도 죄송하여 죽는 날까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이후로 날짜를 기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살다 보면 간혹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을 때가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와중에 가난했던 것은 죄가 아닌데, 자식들에게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해준 것이 가슴에 맺혀 자식 된 의무를 바라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 잃고 집안 망한 동포들이 가슴에 맺혀 어머니를 위해 수연(壽宴)을 차려드릴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어머니 수연을 그냥 지나간 것이 가슴에 맺혀 죽는 날까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이후로 날짜를 기억하지 않았다는 백범의 일지를 읽으면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산다는 것, 염치를 가지고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염치(廉恥)'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독립운동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는 중에도 그걸 내세워 자기 부족함을 가리려 하지 않고, 도리어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사람다운 마음이고, 그리스도인다운 마음이라 여겨집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향한 교회의 마음이 바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참여하고, 비대면 예배를 하는 중에도 행여 교회로 인해 감염자가 늘지 않을까 마음 쓰여 하며, 조심하고 미안해하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 마음이 그렇지 못합니다. 미안해하고 염치없어 하는 마음보다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내가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거짓 자아에 기반을 둔 자기중심성에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현상은 생각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들을 봐도 그렇고, 복음서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구약성경에서 보았듯이 출애굽해서 신 광야로 나온 지 둘째 달 십오일 되던 때, 먹을거리가 떨어진 히브리들은 모세와 아론을 찾아가서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한다"(출 16:3)며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비참했던 노예생활을 망각하고 오히려 노예 시절을 미화하고 이상화하며 자신들이 얻은 자유를 무색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성경에 보면 그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 출 17:1, 2
르비딤이라는 곳은 신 광야에서 서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와디 페이(Wadi Peiran)'로 추청한다고 합니다. '와디 페이'는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로 평소에는 물이 넉넉했던 곳인데, 이때는 가뭄으로 말라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아시스인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극심한 목마름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힘들기는 모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모세를 찾아가 다툼을 벌이고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며 요구합니다.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이끌어 나오고, 어려움을 감내하며 자신들의 나라를 함께 일구어가는 모세에 대한 그 어떤 감사도 배려도 없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변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들을 보며 알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는 '불멸의 다이아몬드'에서 히브리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런 현상을 '중독(中毒)'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을 하든 아니하든 간에, 우리는 모두 기존 질서와 과거를 사랑하며 심지어 그것들에 중독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중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과거를 고집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며 사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들의 불평이 그저 단순한 불평이 아닌, 사실은 '불신앙'이었고, 그들의 불신앙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므리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 | 출 17:7
이렇게 과거와 기존 질서에 중독되어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미래를 불신앙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그 은혜를 궁극적으로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해져 가고, 나의 내면이 거칠고 사나워져 가는 것은, 내가 속한 환경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사실은 내 중심에 내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직후에 벌어진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23-27절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고, 28-32절은 '두 아들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먼저 앞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에 대해 대제사장과 원로들이 문제를 삼았습니다. 갈릴리의 일개 촌부가 대제사장에게 공인도 받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친 행위는 당시 성전지배 체제에 도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따졌습니다.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 마 21:23
원문에 보면 '이런 일'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안에서 행하신 일들, 즉 성전 정화 사건이라든지, 병 고침이라든지,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는 마치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권위의 문제를 들고 나섰습니다. '너에게 그런 일들을 할 권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말 신앙인이라면, 그들은 권위 따위에 대한 질문이 아닌 가르침의 내용과 관련한 질문을 했어야 하는 것이고,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에서 그가 가슴속에 참으로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덧 관행들과 권력의 맛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지성은 편견에 삼키어져버렸고, 그들의 감성은 완고하게 화석화되었고, 그들의 의지는 자기들의 이익이 아니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질문으로 응하십니다.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 마 21:25a
그들이 정말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가슴에 있는 그대로 대답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의논합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마 21:25b-26)며 경우의 수를 계산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가르침과 행동들이 자기들 권력에 위협이 되느냐의 여부에만 온통 촉각(觸角)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습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만 물었고, 예수가 정치적인지 아닌지만 의심했습니다.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 그리고 '천국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를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마 21:28-31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유(比喩)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미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들려주셨을까요? 여기 맏아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아버지 가겠나이다" 했지만, 정작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은 맏아들의 모습에서 너희들의 위선이 오버랩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그러나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 둘째 아들이 오히려 훨씬 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둘째 아들은 누구의 모습을 보여줍니까?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훗날 회개하고 돌아온 저 세리들과 창녀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참으로 모욕적인 한 마디를 남기십니다.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 마 21:32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풀 때, 세리와 창녀는 믿고 뉘우치고 회개하며 돌아왔지만, 너희는 그것을 보면서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공인된 하나님의 맏아들을 자처하며 정작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너희보다,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며 돌아온 저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좀 더 심층적으로 보겠습니다. 맏아들은 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듯하다가 마지막에 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었을까요? 당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지도자로서의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권위만큼이나 생활도 함께 보장받고 있었고 백성들의 존경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보장되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계속 누리기 위해 처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집착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부터 그들은 비본질적인 외형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만들어내는 것에 시간을 보냈고 봉헌된 제물의 양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으로 자신들이 행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행세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말씀은 공허해 지고 잡다한 권위와 의례에만 신경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중독'이 주는 후유증입니다.그리스도 신앙이란 게 무엇이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가도 둘째 아들처럼 말씀이 생각나서 돌아오는 삶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인이 살아가는 삶이 이웃들의 시선으로 볼 때, 그렇게 미련해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행동입니다. 자기의 길을 가다가도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 다시 포도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둘째 아들처럼 지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헤아려 주께서 가라하시는 곳으로 돌아서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합당한 사람이란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 세계를 완고하게 구축하고 그 안에서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리나 창녀처럼 회개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멈칫할 줄 아는 사람이요, 마침내 멈추는 사람이요, 회개하고 돌아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천국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마치 회개할 것이라고는 없는 듯 거들먹대는 의인들이 아니고 헤아릴 수 없는 죄를 가슴아파하며 뉘우치는 세리와 창녀들이 바로 그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빌 2:3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을 하는 동기가 다툼이나 허영이 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겸손함과 타인을 헤아려 존중하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마땅한 품격임을 바울은 말씀합니다. 랍비 요수아 벤 레비가 선지자 엘리야에게 물었습니다."메시아는 언제 오십니까?"
"당신이 가서 직접 물어보시오."
"그분이 어디 계십니까?"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분은 상처투성이의 가난한 사람들 틈에 앉아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상처의 붕대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싸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한 번에 하나씩 풀었다가 다시 싸매시며 이렇게 혼잣말하십니다. '어쩌면 내가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그 경우를 위해 나는 한시도 지체치 않도록 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헨리 나우웬 '영성수업' 윤종석 옮김 '두란노 2007' p.169-170)
상처투성이의 가난한 사람들 틈에 앉아 자기가 필요해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 '상처 입은 치유자'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 2:8b
신앙인이 도달해야 할 영성생활의 목표가 어느 지점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잠시도 인내하지 못하고 원망을 쏟아냈던 히브리인들이나, 자기권력 지키자고 타인을 공격하는 예루살렘 종교인들은 우리가 닮아야 할 표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의 붕대를 한꺼번에 다 사용하지 않고, 어쩌면 다른 사람이 필요해질지도 모르기에 그 경우를 위해 하나씩만 조심스레 풀어 사용하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고난의 시대에 더 향기 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마음이 완고해져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② 예수님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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