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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9주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8-04 11:08
조회
1255
성령강림 후 제9주 (가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32:24-31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 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 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 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 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 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응송 | 시 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서신 | 롬 9:1-5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내용 없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 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 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 라 아멘
복음 | 마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 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 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32:24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시작한 시점 은 언제입니까?
② 마 14:13, 14을 묵상하십시오.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를 향 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③ 롬 9: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누구 때 문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9:4, 32과 함께 묵상하십시오.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침묵과 고독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고독을 통해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게 하고, 그로 인해 겸손을 배우게 하며, 무엇보다도 내 생명의 원천이시고, 존재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존재와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그로 인해 일상의 삶에서 궁극적인 목표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 시간을 희생시켜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고, 삶의 관성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주기적으로 혼자 있게 하십니다. 성 바실리오는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러한 자유는 완전한 고독의 삶과 철저한 자아포기로서 이루어진다. 육신의 부모와 인간사회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바라는 목적,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리스의 성 에일레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침묵과 관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일으켜 육신의 감각을 떠나야 하며, 순명의 빛나는 갑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의 순명은 사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야 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창세기 저자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 32:24)라고 언급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또 그를 '홀로' 두셨음을 암시해 줍니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창 28:10)도 해가 진 광야에 '홀로' 처해져 하나님을 만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20년 만에, 자기 생의 또 다른 전환기에 그는 다시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남아' 고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다 보면, 그의 이 고독의 순간은 '자기 홀로' 있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시고, 그를 홀로 있게 하셨는데, 그 목적이란 성 바실리오의 표현대로라면, '이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되찾는 것'이고, 성 에일레드의 표현대로라면, '마음을 일으켜 육신의 감각을 떠나 순명의 빛나는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 지는 지난 20년 동안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 말해줍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20년 동안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으로부터 1남 1녀를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양떼와, 남종, 여종, 낙타, 나귀 등을 소유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창 30:43) 타향에서 외톨이로 살면서, 가정을 일구고 재산을 모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번창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배경은 아버지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28:3, 4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불러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창 28:13, 14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야곱을 찾아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부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과정에서 외삼촌 라반과 야곱의 계략이 치열하고 비정하게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창 31:32-42) 그런데 어느 날부터 외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야곱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외삼촌의 아들들은 야곱을 모함하기 시작했고,(창 31:1) 외삼촌 라반의 안색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창 31: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창 31:2) 이 말씀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리고 야곱이 라반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보라, 그것이 그에 대하여 이전과 같지 않았다."입니다. 이렇게 인간관계의 위기가 찾아오고, 그로 인한 피로감이 누적되자, 결국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봄에 양털을 깎는 이른바 '목동들의 추수기'를 이용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라반의 수중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이것은 훗날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전조(前兆)가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야곱을 주저하게 만드는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그에게 떠오릅니다. 20년 전에 장자의 명분을 뺏기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 에서의 원한이었습니다. 그는 20년이 지난 지금, 형의 원한이 여전히 그대로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자들을 형에게로 보냅니다.(창 32:3-5) 불행하게도 사자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비관적이었습니다. 형이 4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야곱에게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 요단강의 지류인 얍복 시내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곳만 건너면 고향 땅입니다. 그런데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먼저 선물을 보내 봅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들입니다(창 32:13-15). 그리고 그 날 밤을 천막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지새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그의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터를 건너갑니다.(창 32:21, 22) 그런 후에 어둠 속에 홀로 남아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구약성경의 배경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내가 발견하거나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찾아와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내 삶의 시간과 시간 사이, 그 분주한 마디와 마디 사이를 침묵으로 비워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서에 한 무리의 고독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요한의 죽음 이후로 마음 둘 곳 없어 하다가 갈릴리의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입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자인 '존 메인'은 '침묵으로 이끄는 말'이라는 자기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열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과의 만남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내적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타인과도 끝없이 불화합니다. 우리가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해 거짓 자아의 집요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경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도 모른 채,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아름답게 말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 안에 디딤돌을 놓듯이,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야곱은 자신을 되찾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으니 참 자기를 찾은 것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그의 영혼의 밝음과 행복이 느껴집니다. 성경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31) 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장면 전체에는 승리자의 장엄함이 묻어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얍복 나루터의 행복한 아침이 여러분에게 밝아오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일상의 분주함에 끌려가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하나님과 홀로'의 시간을 애써 갖고 있는가?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32:24-31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 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 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 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 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 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응송 | 시 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서신 | 롬 9:1-5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내용 없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 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 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 라 아멘
복음 | 마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 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 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32:24을 묵상하십시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시작한 시점 은 언제입니까?
② 마 14:13, 14을 묵상하십시오.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를 향 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③ 롬 9: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은 누구 때 문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9:4, 32과 함께 묵상하십시오.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침묵과 고독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고독을 통해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게 하고, 그로 인해 겸손을 배우게 하며, 무엇보다도 내 생명의 원천이시고, 존재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존재와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그로 인해 일상의 삶에서 궁극적인 목표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 시간을 희생시켜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고, 삶의 관성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주기적으로 혼자 있게 하십니다. 성 바실리오는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러한 자유는 완전한 고독의 삶과 철저한 자아포기로서 이루어진다. 육신의 부모와 인간사회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바라는 목적,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리스의 성 에일레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침묵과 관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일으켜 육신의 감각을 떠나야 하며, 순명의 빛나는 갑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의 순명은 사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야 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 창세기 저자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 32:24)라고 언급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또 그를 '홀로' 두셨음을 암시해 줍니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창 28:10)도 해가 진 광야에 '홀로' 처해져 하나님을 만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20년 만에, 자기 생의 또 다른 전환기에 그는 다시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남아' 고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다 보면, 그의 이 고독의 순간은 '자기 홀로' 있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시고, 그를 홀로 있게 하셨는데, 그 목적이란 성 바실리오의 표현대로라면, '이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되찾는 것'이고, 성 에일레드의 표현대로라면, '마음을 일으켜 육신의 감각을 떠나 순명의 빛나는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 지는 지난 20년 동안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 말해줍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20년 동안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으로부터 1남 1녀를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양떼와, 남종, 여종, 낙타, 나귀 등을 소유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창 30:43) 타향에서 외톨이로 살면서, 가정을 일구고 재산을 모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번창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배경은 아버지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28:3, 4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불러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창 28:13, 14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야곱을 찾아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부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과정에서 외삼촌 라반과 야곱의 계략이 치열하고 비정하게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창 31:32-42) 그런데 어느 날부터 외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야곱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외삼촌의 아들들은 야곱을 모함하기 시작했고,(창 31:1) 외삼촌 라반의 안색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창 31: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창 31:2) 이 말씀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리고 야곱이 라반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보라, 그것이 그에 대하여 이전과 같지 않았다."입니다. 이렇게 인간관계의 위기가 찾아오고, 그로 인한 피로감이 누적되자, 결국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봄에 양털을 깎는 이른바 '목동들의 추수기'를 이용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라반의 수중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이것은 훗날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전조(前兆)가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야곱을 주저하게 만드는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그에게 떠오릅니다. 20년 전에 장자의 명분을 뺏기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 에서의 원한이었습니다. 그는 20년이 지난 지금, 형의 원한이 여전히 그대로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자들을 형에게로 보냅니다.(창 32:3-5) 불행하게도 사자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비관적이었습니다. 형이 4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야곱에게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 요단강의 지류인 얍복 시내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곳만 건너면 고향 땅입니다. 그런데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먼저 선물을 보내 봅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들입니다(창 32:13-15). 그리고 그 날 밤을 천막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지새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그의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터를 건너갑니다.(창 32:21, 22) 그런 후에 어둠 속에 홀로 남아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구약성경의 배경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창 32:24
어둠이 깊은 나루터에 홀로 앉아 야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나간 20년간 자기가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혈혈단신으로 건너온 땅에서 분명 큰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러나 외적 성취만 가지고는 자신을 다 설득할 수 없는 내적 목마름과 피로감이 몰려왔을 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육신의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에게 질책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씨름을 걸어옵니다. 그는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벌였습니다. 씨름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와예아베크(קבאיו)'인데, '먼지를 일으키다'라는 뜻의 '아바크(קבא)'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땅에 먼지가 일어나도록 격렬한 몸싸움을 한 것인데, 성서학자들은 이것을 야곱이 '필사적으로', '눈물 흘리며' 기도한 것에 대한 묘사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란 '천사'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30절에서 야곱이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자'로 보입니다. 야곱은 그를 붙잡고 놓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집요함'이기도 혹은 '절박함'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 창 32:25
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중상을 입히고 맙니다. 그래도 야곱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날이 새려 하자 다급해진 천사가 그만 놓아달라고 말합니다.(창 32:26a) 그런데 이때 야곱의 대답이 뭐였습니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b) 그리고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십시오.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창 32:27, 28
비현실적인 장면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힘이 강하더라도 천사나 하나님을 완력으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이스라엘(לארשׂי)'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 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져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에서 져주심으로서 야곱 뿐 아니라 그 후손들이 민족적인 자신감을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나 하란에 올 때도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때도 야곱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었는데,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지금 마치 데자뷰처럼,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던 중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에 관한 대서사는 이 두 전승을 기둥으로 세워진 건축물과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자기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 창 32:29
이름을 알려달라는 말은 정체를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야곱에게 이름을 알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대신 그를 위해 축복(祝福)합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천사가 야곱에게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야곱은 그 사건의 의미를 알았다는 뜻입니다. 20년 전 '홀로 있다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곳 지명을 '벧엘(לא⎺'תיב)'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었는데, 20년 후 '홀로 있다가' 하나님을 다시 만났을 때는, 그곳 지명을 '브니엘(לאיבפ)'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짓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은 이렇게 영이 깨어나는 시간이고, 혼자 남는다는 말의 궁극적 의미 또한 영적입니다. 홀로 있을 때, 내가 있는 그 장소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홀로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카핑 베토벤'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베토벤의 악보를 대필해주는 안나 홀츠라는 여학생에게 베토벤은 "내 머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면서 "신은 나를 음악으로 채웠고 그리고 귀머거리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안나 홀츠는 음악의 형식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음악에서 중요한 건 올바른 형식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베토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에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야 해. 나는 귀 먹기 전까지는 듣지 못했네. 침묵이 바로 열쇠야. 음과 음 사이의 침묵. 침묵이 자넬 감싸면 자네 영혼은 노래할 수 있게 돼."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내가 발견하거나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찾아와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내 삶의 시간과 시간 사이, 그 분주한 마디와 마디 사이를 침묵으로 비워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서에 한 무리의 고독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요한의 죽음 이후로 마음 둘 곳 없어 하다가 갈릴리의 빈들까지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 마 14:13
마치 야곱이 두려움과 고독 가운데 얍복 나루터에 혼자 있었듯이, 이들 역시 영적 고독을 안고 빈들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연민(憐憫)이 복음서에 가득 나타나고 있습니다.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 마 14:14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의 영적 고독을 보신 것입니다. 둘 곳 없는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빈들로 예수님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독을 예수님께 보여드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채우시고 여러분의 브니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1b)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롬 9:4)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롬 9:32)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영적 시선이라면, 행위는 자기를 향한 육신적 시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멈추어야 할 순간'이 있음을 주지시켜 줍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분주한 행위를 멈출 때 비로소 나를 만날 수 있고, 나의 적나라한 무능함에 절망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걸어오신 싸움은 바로 그 진리를 일깨워주시는 싸움이었습니다. 분명히 홀로 있음의 시간은 야곱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홀로 있음은 그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자인 '존 메인'은 '침묵으로 이끄는 말'이라는 자기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열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과의 만남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말에 공감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내적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타인과도 끝없이 불화합니다. 우리가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해 거짓 자아의 집요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경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도 모른 채,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아름답게 말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 안에 디딤돌을 놓듯이,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야곱은 자신을 되찾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으니 참 자기를 찾은 것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그의 영혼의 밝음과 행복이 느껴집니다. 성경은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31) 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장면 전체에는 승리자의 장엄함이 묻어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얍복 나루터의 행복한 아침이 여러분에게 밝아오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일상의 분주함에 끌려가며 살고 있지 않은가?
②'하나님과 홀로'의 시간을 애써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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