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7주내 존재의 지성소를 회복하라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28:10-19a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 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 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 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 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 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 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 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응송 | 시 139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 도하소서
서신 | 롬 8:12-17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 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 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 야 할 것이니라
복음 | 마 13:24-30, 36-43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 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 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 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 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28:16, 17을 묵상하십시오.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야곱에게 있어 벧엘은 어떤 땅이 되었습니까?
② 롬 8:13, 14을 묵상하십시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마 13:28-30을 묵상하십시오. 원수가 뿌려놓은 가라지에 대한 주인 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내 존재의 지성소를 회복하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적 생활 혹은 영적 생활의 목표는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말로 존재의 완성인 행복인데, 표면적 관점으로 볼 때, 행복이란 안정된 삶 즉 재산이나 건강이나 복지의 보증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행복은 물질적 혹은 지적 쾌락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상을 통해 초월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혹은 갖가지 정욕에서 벗어나 덕을 익히고,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행복이란 '존재의 충만' 즉 '하나님이 되라는 사람이 되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상태를 사는 것'입니다. 성 이레네우스에 따르면 "완전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처럼 완전하게 살라고 손수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하드라마는 에덴동산의 행복을 상실한 인간들을 완전한 구원의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행복에 이르는 여정'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形狀)이고, 관계성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녀이며 친구이고, 역할로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가 당신의 파트너로서, 당신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며 당신처럼 행복하라고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죄(罪)란 다름 아닌 '사랑의 거절'입니다. 죄(罪)란 하나님처럼 살라는 초대를 거절하고, 등을 돌려 '자기중심적 에고(ego)'가 됨으로서 자기의 벌거벗음을 보는 부끄러움입니다. '자기중심적 에고(ego)'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후에 사람이 스스로 형성한 '거짓 자아(自我)'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에고(ego)에 빠진 인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타인과의 분리였습니다. 자기 심장을 감싸고 있는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라며 감격해했던 아담이, 에고가 된 후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창 3:12)라며 하와와의 단절과 분리에로 나아갑니다. 이 타인과의 분리는 창조세계와의 관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땅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까닭에(창 3:17), 아담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주었습니다.(창 3:18) 이 때부터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의 동참이 아닌, 그저 먹고살기 위한 괴로운 노역(勞役)이 되고 맙니다. 빛에서 돌아서면 어둠이듯, 사랑의 거절은 에고(ego)이다보니, '하나님 창조사역에 대한 동역'이 아닌 '먹고살기 위한 노역'에 나선 사람들은 행여 자기 먹잇감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 타인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방어용 장벽을 쌓기 시작했으며,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에고의 중심에 탐욕이 있고, 이 탐욕이 좌절되면 분노로 나타나고, 탐욕이 충족되면 어리석음이 됩니다. 구약의 말씀들은 이렇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빠져 에덴동산에서의 행복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에게, 그 행복을 되돌려주시려는 하나님 이야기입니다.성령강림 절기를 걸어오는 동안 우리는 그 이야기들 중에서 아브라함 이야기와 이삭 이야기, 그리고 에서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육신을 따르는 길'과 '영을 따르는 길' 사이에서 때로 반항하고, 때로 순종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늘 구약의 말씀은 야곱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난 주 말씀에서 보았듯이 야곱은 형 에서와 뚜렷하게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었습니다. 떡과 팥죽에 마음 빼앗겨 장자의 명분을 넘겨준 형 에서가 '육의 길을 걷는 사람'의 전형이었다면, '장자의 명분'이라는 영적 가치에 마음을 두고 끝내 그것을 쟁취해낸 야곱은 삶의 구비마다 여지없이 드러나는 인격적인 약점에도 '영의 길을 걷는 사람'의 표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형과 달리 한 때 '영적 가치관'을 보였다 해서 그가 이미 '깊이를 갖춘 영적 사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로 지난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제련의 과정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를 광야의 외로움에 던져놓고 당신의 현존을 경험하게 하십니다.(창 28:10-22), 그리고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사는 동안 라헬을 얻고,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야곱 특유의 기질이 보는 사람이 질리도록 드러나게 하십니다.(창 29:14-31:55) 그는 가는 곳곳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척을 집니다. 고향에서 형에서와 척(隻)을 지고 도망해온 땅에서, 그는 이번에는 외삼촌 라반과 척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이 가까워지고 형 에서를 만날 순간이 다가오면서 그가 보여주는 처신은 야곱이 어떤 기질의 인간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형이 있는 곳으로 보내며 "당신께 바칠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뒤에 있다"(창 32:5)는 사실을 알리게 합니다. 그리고 형 에서에게 바칠 가축들을 떼로 나누어서 맨 앞에 가게하고(창 32:13-15), 자기는 거리를 두고 맨 뒤에서 따라갑니다. 종들마다에게 시켜서 형을 만나면, 이 많은 가축들은 모두 야곱의 것인데, 형에게 바칠 예물이라고 전하게 합니다.(창 32:13-20) 얍복 나루에 이르러서는 밤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아들들을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자기 소유는 제일 마지막에 건너가게 합니다.(창 32:21-23) 형이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라고 볼 때, 두 아내와 아들들을 먼저 보내고, 소유는 제일 마지막에 건너가게 한 걸 보면, 가족보다 소유를 더 보호하려 했다는 의심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침내 홀로 남은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게 되는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며 버티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중상을 입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야곱에게서 굳은살처럼 억겁 진 에고의 허물들이,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을 성화시켜 가시는 과정에서 그가 홍역처럼 치러야 건너지는, 심지어 거짓 자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인생의 한 시기마저 건너뛰게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때가 되면 사춘기를 겪어야 하고, 또 때가 되면 갱년기를 겪어야 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도 사춘기와 갱년기를 모두 겪게 하시며 영(靈)이 한 배동씩 자라게 하십니다. 야곱은 마침내 가나안 땅 세겜에서 그의 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 하몰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아들들이 그 복수를 하겠다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그의 인생전체가 혼돈으로 빠져들어 가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야곱의 반응이 의미심장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 35:1)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
벧엘이란 곳은 야곱에게 있어, 자기 존재의 지성소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야곱으로서 만났던 곳이고,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야곱으로서 제사한 곳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야곱이 벧엘에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을 뵙게 되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 창 28:10-11
형의 복수를 피해 집을 떠나온 야곱이 가장 먼저 직면한 곳은 광야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 안에서 보면 대개 여행 중에 밤을 맞으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집을 방문해 묵곤 했습니다.(창 19:1-3;삿 19:11-21) 하지만 야곱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별 아래 누워야 했습니다. 외로움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가 언제 이렇게 멀리 부모와 떨어져 본 적이 있었을까요? 창세기 저자에 따르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고, 주로 장막에 머물러있는 사람이었습니다.(창 25:27) 어머니 리브가는 그런 야곱을 형 에서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주로 집에만 머물러 있던 야곱이, 어머니를 떠나 나그네가 되어 걷다가 처음으로 어머니 없는 광야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광야의 야곱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를 거기 두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곳은 야곱의 인생 전체에서 지성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의도적으로 그곳을 반복해 조명합니다. 11절에서는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라고 말하고, 1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이라고 말하고, 17절에서는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마침내 이 곳에 '벧엘'이라는 새 이름이 부여됩니다.'벧엘'은 히브리어로 '베트엘(לא⎺'תיב' 즉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그 제의적인 장소로 부르시고, 그 성소에서 야곱을 만나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그곳은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모든 인간적 수단이 의미 없어지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곳입니다. 야곱은 그 광야의 고독에 직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마음의 길'에서 수사 안토니우스를 소개하며 그는 낡고 거짓된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나기 위해 사막의 완전한 고독으로 들어서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사막은 '회심의 장소'였고, 고독은 '변형의 용광로'였으며, 낡은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는 지성소였습니다. 만약 야곱이 자기 존재의 지성소인 이 광야의 체험이 없이 그냥 나머지 인생을 살아버렸더라면, 그는 끝내 자기 기질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척을 지며 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하란에 당도하기 전에 그를 광야의 고독에 직면하게 하시고, 그곳을 자기 인생의 지성소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이후로 펼쳐지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다 겪은 후에 가장 참담한 순간 비로소 하나님의 명령(창 35:1)을 받아들여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라며 벧엘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만나려면, 회심의 장소요, 변형의 용광로인 광야의 고독에 반드시 직면해 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흐트러질 때마다 말씀이 들려오는 장소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내 존재의 지성소'를 기억하고, 반드시 그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의 야곱은 아직 그곳이 자기 존재의 지성소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다만 그곳에 있는 한 돌을 가져다가 그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려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창 28:12-15
야곱의 이 꿈 이야기는, 야곱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서, 야곱의 시각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가 나오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들과 여호와께서 등장하는데, 야곱의 진술이 너무 선명합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마침내 자기 눈으로 뵈옵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놀랍게도 그 내용이 오래 전 할아버지와 맺으신 언약과 같았습니다. 창 13:15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그런데 지금 야곱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창 13:16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에게도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게 하겠다"(창 28:14a)고 말씀하십니다. 창 13:14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b"(창 28:14)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오래 전에 약속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려주심으로서 할아버지에게 주신 비전이 야곱을 통해 계승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체험은 이렇게 구체적이었고, 선명한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창 28:16)에 압도된 야곱은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라고 경외감 속에서 고백하며,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의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짓습니다. 이런 야곱을 볼 때, 이후로 그는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 어떤 유혹에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름답고 신실한 영적 여정을 걸어갈 것만 같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함께 보았던 그의 형 에서의 마음이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히 12:16)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땅 같은 마음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이 드리운 존재로서 이스라엘 족장사를 이어갈 야곱의 마음은 알곡을 결실하는 좋은 땅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후로 야곱의 삶을 보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오직 육신의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많은 날들을 방황하며 허비합니다. '자기중심적 에고(ego)'가 되어버린 야곱, 이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좋은 씨와 가라지의 씨가 한 밭에서 같이 자라는 광경을 보여주시면서 가라지로부터 마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 마 13:24-26
여기 등장하는 밭이란 '좋은 밭'입니다. 곡식이 뿌려지면 백 배로, 육십 배로, 삼십 배로 결실하게 하는 밭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밭에도, 주인이 잠들면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다고, 그러면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광야에서의 하나님 체험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 마음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말씀도 자라지만, 탐욕도, 욕정도 분노도 함께 자랍니다. 원수가 와서 덧뿌려놓은 그 마음은 야곱도 예외일 수 없었고, 심지어 사도 바울마저 곤고해 했던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지체 안에서 '하나님의 법'만이 아닌 '죄의 법'이 함께 자라고 있다고 말입니다.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물어봅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 마 13:27-28a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마 13:28b) 라고 묻자 주인의 반응이 이랬습니다.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마 13:29, 30
주인의 일단의 반응은 '가만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포기'가 아닌 '유예'였습니다. 그 유예의 기간은 '추수 때까지'입니다. 추수 때에는 거두어 가라지는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곡간에 넣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롬 8:13
결국 주님께서 하시는 비유의 말씀도, 사도 바울의 서신서의 말씀도, 결론은 원수가 덧뿌려놓은 가라지로 살았느냐, 아니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야곱의 경우를 놓고 보았을 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에 우리 삶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도 그것을 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 28:15)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각색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야곱, 네가 이곳 벧엘에서 나를 만나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체결했던 언약을 확인하였지만, 그러나 이후로도 넌 여전히 '자기중심적 에고(ego)'를 어쩌지 못하고 '거짓 자아(自我)'를 부풀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네 형 에서와 척을 지고 떠났듯, 네 외삼촌과도 척을 지는 타인과 자신을 분열시키는 삶을 미친 듯이 살아갈 것이고, 행여 자기 먹잇감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너의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의 동참이 아닌, 너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괴로운 노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야곱아, 그러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너는 반드시 이곳 벧엘을 떠올리고 돌아와야 한다. 네 존재의 지성소인 이곳으로 말이다."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야곱은 에고의 길 끝에서 인생 전체가 혼돈에 휘말린 채로 절벽에 서고 맙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 그는 자기 삶이 극도의 혼란 가운데 섰을 때, 비로소 자기 존재의 지성소인 벧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음으로서 비로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서 계십니까? 이제 그만 질주하던 걸음을 멈추시고, 여러분의 벧엘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내 존재의 지성소인 예수께로 돌아가서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되라는 사람이 되는 행복'으로 가득한 매순간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육신의 요구에 이끌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②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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