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6주 육신을 따르는 자, 영을 따르는 자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25:19-34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 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 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 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 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 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 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응송 | 시 119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서신 | 롬 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 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 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 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 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 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 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복음 | 마 13:1-9, 18-23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 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 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 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13:22을 묵상하십시오. 완고하거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에 마음이 정령당할 때, 나타나는 영적 현상은 무엇입니까?
② 롬 8:5, 6을 묵상하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의 관심사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 결과는 각각 어떻게 다릅니까?
③ 창 25:32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에서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으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육신을 따르는 자, 영을 따르는 자
현대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표면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까닭에 깊이의 차원을 잃어버린 '종교인'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 되면 불가불 자신의 영적 깊이에 대한 통찰력을 갖기 때문에 보다 깊은 곳을 응시하게 되고, 영적 그리스도인으로의 변형을 이루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입문과정에서 간과해버린 깊이의 차원을 다시 되돌아보거나 되찾지 못하고 영적 진보가 멈추어 버린 채, 유사 크리스처니티에 속아 불행한 신앙인이 되고 마는데, 오늘날은 이런 불행한 기독교인이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훈련과 성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에서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깊이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전적 훈련'이 필요한데, 그 고전적 훈련이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피상적인 삶을 떠나 깊이 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훈련이고, 영적 세계의 깊은 내부를 탐구하는 훈련이고, 그럼으로써 공허한 세상에 해답이 되는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훈련은 영적 거장에게도 필요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자녀들을 돌보는 사람, 그릇을 닦는 보통사람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리처드 포스터는 도널드 코간(Donald Coggan)의 고백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나는 한 나그네로서의 영원을 향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형상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영적 훈련을 최선을 다해 받고 계십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라고 고백했던 고대 시인처럼, '피상적 그리스도인', '표면적 그리스도인'을 벗고, '깊이가 있는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에 도달하기 위한 갈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토마스 머튼은 자신의 책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초심자라는 말을 듣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생동안 초심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랬기에 토마스 머튼은 자신의 일생을 엄격한 침묵과 훈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이런 영적 훈련이 왜 필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태중에서 싸우는 쌍둥이로 인해 고민에 잠긴 리브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창 25:22) 그런 리브가에게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 창 25:23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리브가의 태(胎) 안의 풍경과 우리가 지난주에 읽은 바울의 곤고함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두 국민이, 즉 두 민족이 리브가의 태중에서 싸움으로써 그녀에게 고민거리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이 두 법이 바울의 내면에서 싸움으로 바울의 곤고함이 되었습니다.(롬 7:21-24) 훗날 에서와 야곱은 '장자의 명분'에 대한 태도로서 각각 '육의 길을 걸은 자'와 '영의 길을 걸은 자'로 평가되는데(창 25:31-34) 그런 면에서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야곱과 에서가 선택한 각각의 길에 대한 판결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롬 8:5, 6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땅은 '에서의 마음'과 같다 하겠습니다. 하루 종일 들판을 뛰어다니는 분주한 마음 밭에 말씀이 뿌리내릴 토양이 갖추어질리 만무합니다. 주님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마 3:23)라고 말씀하시는데,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란 곧 '영적 훈련을 받는 사람'을 뜻하고, 영적 깊이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더해지는 것이겠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 마 13:1-9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앉아계실 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마 13:1,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마 13:2)이라는 상황설정, 그리고 비유를 마치신 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서, 거기 있는 '큰 무리'가 모두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다. 바닷가의 '큰 무리'처럼 많은 신앙인들이 있지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는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마음 토양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은 오늘 비유에서 각각 '네 종류의 밭'으로 설명하신 후에 그 의미를 이렇게 풀어주십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 마 13:19-23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네 종류 밭의 의미도 설명을 해주셨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성찰하자면 '마음을 가꾸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악에게 내주는 길 가의 땅처럼 단단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해 허약한 마음이다가 환난이나 시험이 왔을 때 이내 넘어져버리는 돌밭과 같은 마음으로 방치하지도 말고,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그런 마음이 되지도 말고, 어떤 씨앗이 떨어져도 충분히 결실할 수 있을 만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을 가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토마스 머튼의 고백처럼 일생동안 나는 초심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엄격한 말씀훈련과 침묵과 기도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뒤덮고 있는 돌을 걷어내는 작업이고, 가시와 엉겅퀴를 마음으로부터 뽑아내는 작업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중심성이 뽑혀 나갈 때, 우리 마음엔 비로소 말씀이 자라게 되고,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글자 안에 가두어 두고, 말씀을 한낱 지식이나 정보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는 '아는 것'에 목표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와 소통하시는 '편지'이고 '장(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정보나 지식이 아닌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성훈련의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독(聖讀)' 혹은 '성스러운 독서', 혹은 '성서 독서', '성령에 의한 독서'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을 체화(體化) 하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 렉시오 디비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게 하는 믿음의 원천이었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훌륭한 안내자였습니다.1084년 설립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Monks)'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해 올라가야 할 '네 단계의 영적 사다리'로서,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ntemplatio)을 언급했습니다. 첫째 사다리인 '독서(lectio)'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둘째 사다리인 '묵상(meditatio)'에서는 그 말씀 중에서 '지금', '나에게' 꼭 하시는 어떤 말씀을 계속 되뇌면서 그 맛을 음미합니다. 내가 되뇌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게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반복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완전히 스며들고 동화(同化)됩니다. 읽기와 묵상에서 중요한 것은,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려 나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사다리인 '기도(oratio)'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나의 응답이 나오는데, 그것은 감탄일 수도 있고, 감사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각오나 다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청과 응답이 깊어질수록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또한 깊어져서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관상(contemplatio)'의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한 이 '네 단계의 영적 사다리'는 오르기가 쉽지만은 않아 꾸준한 영적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고전적인 훈련에 참여함으로서 비로소 '피상적 그리스도인', '표면적 그리스도인'을 벗고, '깊이가 있는 그리스도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영성, 신비가의 숨'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성생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신보다도 자기에 가깝게 자기 안에 침투하여 충만해 있는 사랑의 따뜻한 힘으로서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진정시키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김으로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심화해 가는 것"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영성생활의 의지를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롬 8:3, 4)고, 그리고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롬 8:6)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서신서에서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좀 더 심층적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사도 바울의 절규를 기억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내적 싸움을 겪으며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새로운 깨달음이란, 자기 내면의 싸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자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은 깨달은 바울이 마침내 마음 가득 이렇게 감사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우리가 이 지점에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지금 사도 바울이 율법은 틀렸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라고 교리적 선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도 선한 것이지만, 그러나 율법을 통한 구원은 목마르기 이를 데 없고, 그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은 곤고하던 차에,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 마련된 대안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오늘 말씀인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마련된 대안이 보다 구체화 된 형태로 고백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롬 8:1, 2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롬 7:25) 이유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찾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내면의 한 축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지금껏 자신을 온통 곤고함으로 몰아넣던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준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 들어오면서 부터 '성령' 혹은 '영'이라는 단어를 무려 21번이나 반복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 '계명', '법'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성령'이나 '영'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롬 8:3-6
지금까지 바울이 그토록 곤고함에 시달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이 요구하는 삶을 자기의 연약한 육신으로 감당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율법은 선하고 의로운 것임에도 자기 안에 깃들인 '죄성(罪性)'이 완강히 버팀으로서 율법은 늘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 안에 깃들인 '죄성(罪性)'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려 가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에서입니다.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 창 25:29-34
여기 등장하는 에서는 '육신을 따르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떡과 팥죽을 주는 대신 요구했던 '장자의 명분'이란 자기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족장사를 통해 내려온 영적 유산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에서 '장자의 명분'이란 다른 동생들에 비해 아버지의 상속을 두 배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문에서의 장자의 명분이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대를 이어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동생 야곱이 바로 그 '장자의 명분'이라는 영적 가치에 마음을 두고 있을 때, 형 에서는 '떡'과 '팥죽'에 마음을 빼앗겨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맙니다. 이건 작은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동생 야곱이 영을 따라 영의 일을 생각했다면, 형 에서는 육신을 따라 육신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동생이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요구해도, 오히려 동생을 타이르며 장자의 명분을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면 안 된다고 충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에서를 보면서 자기 훈련 없는 신앙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 나약함 속에서 육신의 생각의 지배를 받을 때, 그는 한 그릇 식물을 얻으려고 장자의 명분을 판 소인배가 되고 만 것입니다. 훗날 그의 울부짖음이란 얼마나 공허하고 부질없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고 우리에게도 엄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신을 따르지 않게 되고(롬 8:9a),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롬 8:9b) 그러려면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형상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던 도널드 코간의 고백처럼, 말씀을 읽는 훈련,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훈련에 나설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마침내 '영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피상적인 삶에서 떠나 영적 세계의 깊은 내부를 탐구하며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롬 8:6) 응송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 시 119:112
시인의 고백처럼, 주님 말씀에 마음 기울이며 사는 까닭에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을 생명과 평안으로 채워주시고, 이제는 곤고함이 아닌 기쁨과 찬미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육신을 따르며 육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② 영(靈)을 따르며 영적 결실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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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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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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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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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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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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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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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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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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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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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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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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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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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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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