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5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24:34-38, 42-49, 58-67
34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35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 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36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 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7 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38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 하라 하시기로 42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 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43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44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도 길으리 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 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45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 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하 건대 내게 마시게 하라 한즉 46 그가 급히 물동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이르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낙타에게도 마시게 한지라 47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 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 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48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49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주셔서 내가 우 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 들을 보내며 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61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 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 주하였음이라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 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 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응송 | 시 145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 키시는도다
서신 | 롬 7:15-25a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 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 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복음 | 마 11:16-19, 25-30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 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 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 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 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롬 7:21-23을 묵상하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바울에게 함께 있 던 것은 무엇이며, 바울은 그 정체를 무슨 법이라고 했습니까?
② 롬 7:25을 묵상하십시오. 죄의 법에 사로잡혀 힘겨워하던 바울이 감 사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로 말미암음입니까?
③ 마 11:28을 묵상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신에게 로 초청하시며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5주이자, 맥추감사주일입니다. 24절기로는 소서(小暑)를 이틀 앞두고 있는데, 장마전선이 우리나라에 머무는 시기이다 보니 자연히 습도는 올라가고 더위가 시작되는 요즘입니다. 우리나라 농경문화에서는 이 즈음 보리추수를 마치기 때문에, 교회는 해마다 7월 첫째 주를 맥추감사절로 지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시에 살며 농사를 짓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7월 첫 주에 맞이하는 이 맥추감사절을, 지나간 한 해의 절반을 돌아보며 한편으로는 지난 반년의 삶을 회개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하며, 주님과 함께 남은 반년을 시작하는 절기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들은 이 즈음을 지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절한 말씀들로 다가옵니다.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라며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가 그토록 곤혹스러워하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율법의 선함을 이루려 했기 때문입니다.(롬 7:19)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에 절망해 버린 그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a) 어쩌면 바울과 같은 이 곤고함은 사실은 모든 인류가 처해 있는 영적 현실이기에,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서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라시며 사람들을 당신께로 불러 모으십니다. 진정한 쉼은 이 부르심을 따라 주께로 가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 한 멍에를 멜 때(마 11:29), 비로소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당부를 따라 메소포타미아 나홀까지 찾아가서 만난 이삭의 신붓감인 리브가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데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창 24:34) 라며, 자신의 어느 것도 내세우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 주인인 아브라함 안에 자기 존재를 종속시킵니다.(창 24:35-46) 심지어 그는 하나님을 소개할 때도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창 24:42, 48) 라고 호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성은 결코 초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인 아브라함으로 인해 더욱 존귀하기만 합니다. '아브라함 안에서 존귀한' 이 늙은 종은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 분과 한 멍에를 메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모든 곤고함과 수고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주님과 한 멍에를 멜 때 비로소 쉼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것에 우리 고민이 있습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성(理性)의 벽에 막혀 그리스도께로 가지 못합니다. 신앙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죄성(罪性)의 벽에 막혀 온전히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나,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같은 은수자들은 이런 죄성을 '정념(情念 Passion)'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정념에는 '물질을 대상으로 삼는 정념'과 '정신적 또는 비물질적 정념'이 있습니다. 물질을 대상으로 삼는 정념에는 식탐, 탐욕, 정욕 등이 있고, 정신적 또는 비물질적인 정념은 분노, 악의, 비방, 수다, 권태, 거짓말, 무감각, 두려움, 허영 등이 있습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에 따르면 이 중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가장 큰 방해거리는 분노라고 합니다. 또한 분노와 유사한 것이 악의와 원한인데, 이런 것이 마음에 상처를 낸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이 이런 정념들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롬 7:15
내용이 다소 심각해서 우선 사도 바울이 어떤 의미를 담아서 이 말씀을 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은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를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뜻하는 바와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적 분열을 겪을 때, 신자의 신앙적인 갈등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회의(懷疑)가 찾아드는 시점이 바로 이러한 분열에 싸일 때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바울은 14절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며 다소 극단적으로 실망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바울의 이런 고백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나간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바울만큼 신실했던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었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지식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었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나머지는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그에게 삶이란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살아가는 삶이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 그리스도께 스스로 붙잡혀 산 삶이었습니다.(빌 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깃든 이 '영적 불화'의 현실을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바울과 같은 이런 적나라한 자기고백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보십시오.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롬 7:17-20
유진 피터슨은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실, 내게는 명령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율법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계속해서 나의 최선의 의도를 좌초시키고 있다면, 분명 내게는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내게는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뜻을 품을 수는 있으나,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로 결심하지만, 실제로는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악을 행하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결국에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나는 결심하지만, 결심만 하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 내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매번 패배하고 맙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끊임없는 불화(不和), 이 갈등이 지금 바울을 그토록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10절에서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보다 더 깊은 좌절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보는 바울은 어떤 '한계'에 직면해 있는 모습입니다. 그 한계란 바로 율법의 한계를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거기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율법 체제의 정점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하는 고백이라고 보기엔 이상하리만큼 좌절감이 배어있습니다. 계속되는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 롬 7:21-23
사도 바울은 14-25절 안에서만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무려 스물 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그가 애타게 반복하는 '나(ego)'는 '자랑스러운 나(super-ego)'가 아닙니다. 본능에 얽매인 '타락한 나'입니다. 자기 안에 두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죄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도 그 안에 있습니다. 바울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다른 본성 또한 독버섯처럼 그를 지배합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엄청난 전쟁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 존재 안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을 것이냐 짓지 않을 것이냐? 선을 행할 것이냐 행하지 않을 것이냐? 사람을 의식할 것이냐 하나님을 의식할 것이냐? 이 전쟁 중에 마침내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롬 7:24
이것은 바울의 절규입니다. 그가 얼마나 심하게 내적 투쟁을 벌였는지 이 절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힘겨워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그 열쇠를 바로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악을 행하면 속편하게 저지르고 핑계라도 대볼 수 있겠는데, 율법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도, 본능을 따라 악을 행하는 것도 순전히 자기 의지로 결정하고, 그 책임 또한 자기가 져야 한다고 하니 바울은 그게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자신 안에 있던 내적 싸움을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져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롬 7:25
바울의 이 고백은 거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 본성을 극복하기 위한 율법적인 노력에서 연속적인 좌절을 맛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라며 뼈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부짖음을 토해냈던 바울이, 그러나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일곱 번째 계단인 '애통'에서 '세례 받은 후에 흘리는 눈물은 세례 자체보다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세례는 이전에 내 안에 있던 악들을 씻어내지만, 세례 후에 범한 죄들은 '눈물에 의해' 씻겨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양심의 가책에서 나오는 복되고 즐거운 슬픔을 굳게 붙잡으라'고 요한 클리마쿠스는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나의 선함과 악함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의지의 굳건함 혹은 약함도 아니었습니다. 나의 인식의 올바름 혹은 그름도 아니었습니다. 이 실존의 곤고함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신뢰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 1:6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롬 8:2에서도 바울은 죄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인간을 해방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의가 강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에 대해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좋은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율법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은 그의 지성을 한껏 빛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자랑스러운 자신의 혈통도, 자신을 그토록 빛내주었던 율법도, 자기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도록 하지 못했고,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막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비로소 시선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마 11:25, 26
'환희의 찬가'라고 불리는 이 구절에서 주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를 향해 감사하십니다. 그 감사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금 바울을 떠올리게 됩니다. 과거에 그가 자랑했던 '다른 사람과 자기를 차별하는' 세속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수단이었던 지혜와 슬기를 끝까지 고집했더라면 그의 존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마지막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 내려놓았습니다. 혈통도 지식도 슬기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감사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감사도 바울 같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차별할 수 있는 어떤 인간적 조건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 분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수고한 대가로 얻은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대가로 내게 주신 그 분의 생명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나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악한 본능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악한 본능에 시달리며, 여전히 그 본능에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이나 복음이나 도대체 무엇이 다른 거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여전히 나의 뇌리 속에 남아 있음에도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마11:28-30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정말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믿음은 단지 교리적인 수락이 아닙니다. 마음이 온유하신 예수님, 마음이 겸손하신 예수님과 '한 멍에를 메는 것'과, '주님께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끊임없는 수행 즉 꾸준한 영성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곤고함과 수고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주와 한 멍에를 멜 때, 비로소 쉼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말씀을 통해 보았던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하나님의 이 모순되어 보이는 명령 앞에서 그는 번민의 밤을 지새운 후, 침묵의 사흘 길을 걸어, 순종의 모리아 산을 오릅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단에 올려놓고 칼로 찌르려 할 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 다급하게 그를 부르시는데, 그 장면은 곱씹을수록 참 압도적으로 다가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1)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순종의 자리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아브라함,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라시며 미리 준비해 놓으셨던 숫양이 그의 눈에 뜨이게 하십니다.(창 22:13) 주님과 한 멍에를 멘다는 것은 그런 것이겠습니다. 주님께 듣고 배운 말씀이 내 가슴에 시퍼렇게 살아있고, 그래서 주님께 순종하는 자리에 내가 굳건히 서있으며, 그런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할 때, 그때 주님은 나대신 죽어주시는 숫양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해 죽고자 할 때, 하나님은 숫양을 죽여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 숫양의 죽음이 훗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시는 멍에였습니다. 주님은 그 멍에를 메자고 하십니다. 멍에를 메고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메고 살라고 하시는 겁니다. 자기 대신 멍에를 지고 죽은 숫양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죽지 않고 산, 아들 이삭과 함께 기쁨 속에서 모리아 산을 내려갔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늙은 종은 어쩌면 이 모리아산의 일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그는 그렇게 경외감 속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창 24:34) 라며 '아브라함의 종인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창 24:42, 48) 라며, '자기 주인의 하나님'을 자랑스러워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곤고함은 내 힘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곤고함의 짐을 예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한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말씀에 순종할 때, 진정한 쉼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고, 그 때 참된 감사가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내면의 곤고함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가?
②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과 한 멍에를 메고 배우기를 힘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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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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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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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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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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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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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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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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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