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4주 우리의 진짜 자기 를 찾아서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22:1-14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 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 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 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 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 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 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 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 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 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 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응송 | 시 13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서신 | 롬 6:12-23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 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 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 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 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 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 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 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복음 | 마 10:40-42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 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 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22:3을 묵상하십시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의 요구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② 롬 6:13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누구에게 어떻게 내어주라고 합니까?
③ 마 10:42을 묵상하십시오. 우리 지체를 의의 종으로 내주는 것 가운 데 하나를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우리의 '진짜 자기'를 찾아서
18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계몽주의는 '이성(理性)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이성중심사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교가 유럽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성에 근거하여 신앙을 보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을 통해 진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이성을 영적 계시와 그리스도교 진리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성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교 진리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많은 부분에서 부적절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의 '진짜 자기',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영혼'과 접촉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계몽주의는 인간중심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 우리가 신앙체험을 통해 '진짜 자기'와 맞닥뜨리지 않고,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영혼'과 맞닥뜨려본 체험이 없다면, 단지 이성만으로 알고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프란치스코회 성직자인 '리처드 로어(Richard Rohr)'는 '불멸의 다이아몬드, 우리의 진짜 자기를 찾아서'에서 '우리는 종교인이 되는 것에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라며 이런 말을 합니다. "심리적 죽음, 관계적 죽음, 육체적 죽음은 가짜 자기에 연결된 우리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줄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죽음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가는데, 이 새로운 모습을 '영(靈)' 또는 '진짜 자기'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지 않으면 성령이 올수 없다"(요 16:7) 라고 하신 것처럼 '가짜 자기'가 죽어야 '진짜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주 아브라함과 하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육의 자녀를 떼어내는 아브라함의 고통스런 이야기(창 21:12-14)가, 육의 목표를 버림으로 영의 목표를 얻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육의 남편에게 버림받고 자식마저 죽어가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통곡하던 하갈이, 하나님께서 밝혀주신 눈으로 샘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창 21:15-19)는 고통이 어떻게 영적 진보를 이루어가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창세기를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 하란을 떠나게 하심으로서, 고향에서 누릴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해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에게 가장 불안했던 것은 자기 기업을 이어줄 상속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우려 할 때(창 15:2),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시며 매우 이성적으로 여겨지고,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그의 사고(思考)의 틀마저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며, 언약과 믿음을 통해 완성되어질 그의 미래(창 15:5)를 대안으로 제시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갖고 싶은 나라는, 자기 세대에 자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자기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사백 년이 더 지나간 후에 그의 자손들을 통해 이루실 '당신의 나라'(창 15:13)를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백 년 후의 그 나라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 세워지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보다 더 늙으면 생리적으로 자식을 생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브라함은 끝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에 이릅니다.(창 16:15) 그의 이 판단은 이성에 근거한 옳은 판단으로 여겨졌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육(肉)의 자녀'를 포기하게 하시고, '약속의 자녀'(창 17:19)이자, '말씀에 의한 자녀'(창 21:2, 3)인 이삭을 낳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자기 아들인 이스마엘을 끊어내는 일은 천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자기 이성으로 저질러놓은 일에 대해 스스로 결자해지(結者解之)합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3)고 약속해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핏줄을 끊어내는 아픔을 감내하며 여기까지는 하나님께 순종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감내해야 할 고통은 그것으로 다 끝이 난 듯싶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들이니, 이제 남은 것은 이삭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밖에 없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는 말씀은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창 22:1, 2
엘로힘 문서(Elohist source)로 분류되는 이 말씀은, 심미적(審美的)인 면에서나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창세기가 그려낸 아브라함 서사(敍事) 중에서 최고의 절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로 추방된 사건이 있고 나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당신께서 100세에 주신 아들이고, 언약의 아들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당신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요구에는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삭이 언약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게 세워주신 언약(창 17:20)이나,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맺은 언약(창 21:23-27)로 미루어 볼 때, 이삭만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언약의 계승자이자 수혜자였습니다. 창 17:19에서 하나님은 이삭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시면서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데, 그것도 번제(燔祭)로 드리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번제는, 당시 고대근동에서 성행하던 인신제사(人身祭祀)를 뜻하는 겁니다. 다른 아들도 아닌 '언약의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표현하신 그대로 '사랑하는 독자 이삭'(창 22:2)을 번제로 드리라는 이 모순된 요구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떤 심정을 가졌을까요?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이 사건을 두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 그를 부르셨다고 단정을 짓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창세기 저자는 이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에 대해 일체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이 장면을 읽는 우리로서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창 22:3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즉각적인 순종으로 반응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라는 표현으로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난밤 그는 단호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보면 그가 쓴 '간(肝)'이라는 시가 소개됩니다.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1947년 12월28일 시인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를 소개하는 서문에서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며 노자의 오천언(五千言)을 예로 들어 이렇게 시를 해석했습니다.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基志) 강기골(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가 예로 든 '노자의 오천언(五千言)'이란, 노자의 실용주의 3장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해석을 찾아보니까 뜻이 이랬습니다. '虛其心(허기심)'은 '마음은 비운다'는 뜻이고, '實其腹(실기복)'은 '배를 튼튼하게 한다'는 뜻이고, '弱其志(약기지)'는 '뜻은 약하게 한다'는 뜻이고, '强其骨(강기골)'은 '뼈는 튼튼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인 정지용은 윤동주의 이 시(詩)에서 "본디 의지가 약했던 윤동주가 일본에게 자신의 '약한 의지' 즉 '살'을 내던지고, 대신 '뼈' 즉 '나라'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라며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은 그를 애통해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보면 하나님의 요구를 듣고 밤을 지새운 아브라함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때 그의 침묵이 하도 결연해서 누구도 그 내면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아내 사라를 향해서도, 그리고 사랑하는 이삭을 향해서도 침묵합니다. 그 침묵은 아들은 죽음의 자리로 데리고 가는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이 몰고 온 아비의 침묵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종으로서의 침묵일 수도 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일러주신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창 22:4
성경에서 '삼일'이란 관용구는 어떤 중요한 일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기간입니다. 이 '삼일' 동안 길을 걸으며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추측해 보면, 그는 분명히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간을 쪼아 먹히는 대신, 그 보다 귀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즉 육의 목표를 버림으로 영의 목표를 얻는 것입니다. 삼일 길을 다 걸은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이삭을 바칠 곳을 멀리 바라보며, 종들에게 한 말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창 22:5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의 이 말에 대해 해석이 분분한데,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17-19에서 아브라함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무조건 순종이 밤을 지새며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면,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이 살리시리라는 믿음은 지난 삼일을 걸으며 그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직 아버지의 결단을 모릅니다. 산을 오르며 나누는 부자간 대화가 애틋합니다. 아들 이삭이 "내 아버지여"(창 22:7) 하고 부르자, 아버지가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고 대답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b) 하고 아들이 묻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후로 벌어지는 장면을 따라가 보면, 결국 이 일은 아브라함의 말대로 되어 집니다.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으셨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붙였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창 22:14)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정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오직 이삭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늘어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이삭이 살아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아브라함이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육의 것을 포기하고 영의 것을 얻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삭을 통해 장차 늘어나게 될 '별보다 티끌보다 더 많은 자손'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해 해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3, 18)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이룰 큰 민족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그냥 '큰 민족'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삭을 두고 약속하신 '그 나라'는 그냥 '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빵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하여금 그 고통스러운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고뇌어린 여정 중에 낡은 자아, 표면적인 자아가 깎여나가고, 하나님께서 모리아에 준비해 두신 새 자아, 진짜 자아를 찾게 하신 것입니다. 그 제련(製鍊)의 과정을 통과함으로서만 아브라함과 이삭은 주변에 흔한 '떡으로만 사는' 그런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그런 나라의 믿음의 표상으로 비로소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삼일 길을 걸어 끝내 이삭과 함께 도착한 그 여호와의 산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숫양은 그냥 이삭을 대신한 단순한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양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셔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그 길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걸으실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사흘간의 담담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듯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과 무덤 속의 사흘이 성경에 하도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감정이 있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의 슬픔을 누르시고,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하나님은, 훗날 당신 자신에게 그 요구를 하시고, 스스로 그 요구를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 희생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이 모리아에서 죽으셨습니다. 칼로 이삭의 목을 찌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의 동작을 멈추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하고 울부짖던 당신의 외아들은 침묵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우리의 미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여호와 이레'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롬 6:13, 14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궁극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지만, 오늘 말씀 안에서 보면 죽음 같은 시간을 감내해낸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고, 이삭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죽음 같은 시간 속에서 진짜 자기를 찾아낸 아브라함처럼, 죽음의 순간을 통과함으로 진짜 생명을 얻어낸 이삭처럼, 거짓된 자기, 꾸며진 자기, 표면적 자기를 십자가에서, 모리아산에서 단호히 찌르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던 그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다시 찾은 진짜 자기, 그 귀하디귀한 지체를 다시는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이제부터는 법의 영향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감내하며, 아들을 죽이려고 올라갔던 그 순종의 산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삭을 데리고 다시 그 산을 내려올 때, 그 영혼은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가짜 자기'로 살고 말면 죽어도 체험할 수 없는 그 행복을 '진짜 자기'로서 매일매일 체험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표면적 자기, 가짜 자기에 익숙해진 '종교인'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② 깊은 영적 순례를 통해 진짜 자기를 회복하고 '신앙인'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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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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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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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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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