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제3주 영혼을 빛으로 이끄는 근심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21:8-21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 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 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 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 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 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 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응송 | 시 86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 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서신 | 롬 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 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 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복음 | 마 10:24-39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 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 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 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 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21:11-14을 묵상하십시오. 아들로 말미암아 근심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후에 어떻게 바뀝니까?
② 마 10:28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고통에 직면해 있을 때에라도 정 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③ 롬 6:11을 묵상하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엇에 대 하여는 죽고, 무엇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라고 말씀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영혼을 빛으로 이끄는 근심
마르틴 하이데거의 후기 작품 가운데 '언어로의 도상'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하이데거와 두 명의 시인 즉 '게오르그 트라클'과 '슈테판 게오르게'와의 대화의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 작품입니다. 그 글에서 하이데거는 '영혼은 고통스러우나 선한 것'이라는 게오르그 트라클의 견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고통은 대립적 본질을 갖는다네. 고통은 한편으로는 영혼을 끊임없이 잡아 찢으나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고통을 고통으로서 이겨낼 때, 오히려 고통은 이 잡아 찢음을 역전하여 영혼에게 원초의 빛을 선사하는 것이지." 하이데거에 따르면 '고통을 고통으로 이겨내는' 즉 승화된 고통만이 참된 고통이고, 승화된 고통은 영혼의 본질을 회복시켜 성스러움에 도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트라클은 "거센 고통이 오늘날 영혼의 뜨거운 불꽃을 기르고 있네" 라고 노래하듯 화답을 합니다. 저는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하이데거와 트라클의 이 대화를 생각했습니다.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두 인물, 즉 아브라함과 하갈이 '거센 고통을 통과하며 영혼의 불꽃을 키워가는' 적나라한 모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육의 자녀를 떼어내는 아브라함의 고통스런 이야기(창 21:12-14)가, 육의 목표를 버림으로 영의 목표를 얻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던 중, 영의 눈이 뜨여 샘물을 발견하는 하갈의 이야기(창 21:15-19)는 승화된 고통이 영혼의 불꽃을 회복시켜 성스러움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 말씀을 아브라함과 하갈의 사건을 토대로 재해석 하면, 우리 스스로를 육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영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우리는 대개 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두려움으로 인해 건강과 안전에 더 힘을 기울이지만, 그러나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죽음은 몸이 아닌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인 창세기 2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인 1-7절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의 출생 이야기이고, 둘째 부분인 8-21절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이야기이고, 셋째 부분인 22-34절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 이야기입니다. 이 중,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를 형성합니다. 시간적으로 둘째 부분인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이야기는 첫째 부분인 이삭의 출생 이야기로부터 빚어진 사건이 되고, 내용적으로도 둘째 부분은 첫째 부분을 전제합니다. 그런가 하면 셋째 부분인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 이야기는 우물을 놓고 빚어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종들 사이의 갈등과 그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러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의 연속성 속에서 다시 보면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난 비정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는데, 그 때 사라의 반응을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아브라함의 노경에 낳은 아들'(창 21:7) 이삭이 그들에게 얼마나 벅찬 존재였을지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인지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전격적으로 할례를 행합니다.(창 21:4)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할례를 13세에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아기가 젖을 뗄 때, 마침내 큰 잔치를 베푸는데,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진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 창 21:8
이삭이 언제 젖을 떼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대 이집트나 앗시리아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기간이 대략 3살 정도였던 것으로 미루어, 이 때 이삭의 나이도 3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고대 사회에서 젖을 뗄 때까지 아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모두가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날 잔치 석상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창 21:9
'사라가 보았다'라는 표현과, 이스마엘을 소개하는데 있어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라고 한 것에서, 당시 사라가 이스마엘을 본 시선이 얼마나 경멸에 찬 것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까 애굽 여인 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희롱'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메짜하크, קחצמ'인데, '멸시하다', '비웃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가 3살 정도 되었다면, 이스마엘은 17세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17세의 이스마엘이 아직 아기인 이삭을 희롱한 사건에 대해 훗날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다'(갈 4:29)고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이 '적자(嫡子)'인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상실한 것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동생을 희롱하며 핍박했던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이스마엘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던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하자 그만 격노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사태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매우 불행한 방향으로 치닫습니다.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 창 21:10
하갈과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볼 때, 사라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쫓으라'는 사라의 요구는 아브라함과 하갈의 이혼(離婚)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밟아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 대해 지니고 있는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까지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함무라비 법전 등 고대 법(法)에 의해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으로서의 합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갈을 내쫓으라는 사라의 요구는 표면적으로는 이삭이 희롱당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지만, 법적인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내심이 실제적 이유임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라의 입장에서는, 하갈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따르면, 하갈을 통해서라도 남편의 대를 잇고 싶어 했던 것은, 사실은 사라가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한 후로 자신을 멸시하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다"(창 16:5)라며 분을 터뜨리고, 그 상황이 곤란했던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창 16:9) 라며 하갈의 운명을 사라에게 넘겨줍니다. 그때부터 사라는 마음 놓고 하갈을 구박하기 시작했고, 하갈은 구박을 견디지 못해 임신한 몸으로 도망칩니다. 빈들에서 방황하던 하갈은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는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을 듣고 돌아와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두 여인의 갈등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아브라함의 문제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음을 꼬집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그가 엄처시하(嚴妻侍下)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갈을 통해 대를 잇자는 사라의 주장을 따른 것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한 반증이 아닙니까? 그 믿음 없음의 결과를 오늘 말씀은 이렇게 보여줍니다.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 창 21:11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과, 거기서 비롯된 우유부단함은 고스란히 근심거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도록 가르치시는지를 봐야 합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 창 21:12, 13
지금 아브라함이 무엇을 근심하고 있습니까?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네가 정작 해야 할 근심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목적으로 나아가는 근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면 '영혼이 잡아 찢기는 고통을 역전시켜 영혼에게 원초의 빛을 선사하는 근심', '영혼의 본질을 회복시켜 성스러움에 도달하게 하는 그런 근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효섭 목사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얼마나 두텁고 오랜 어둠을 지나야
이리도 순백의 육신이 됩니까?
얼마나 무겁고 깊은 침묵 뒤에야
이리도 활짝 웃어집니까?
아, 얼마나 오랜 죽음 끝에야
이리도 영혼은 향기로워 집니까?"
'백합'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순백의 육신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둠, 활짝 웃어지는 웃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침묵, 영혼의 향기로 나아가지 못하는 죽음은 그냥 의미 없는 어둠일 뿐이고, 의미 없는 침묵일 뿐이고, 의미 없는 죽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순백의 육신으로 나아가는 어둠, 활짝 웃어지는 웃음으로 나아가는 침묵, 영혼의 향기로 나아가는 죽음이 있다면 그 어둠과 침묵과 죽음은, 백합을 피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근심은 아들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근심으로서는 나무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구속사의 출발선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근심이 보다 영적인 것으로 승화되어서, 영혼에게 빛을 선사하는 그런 근심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 창 21:14
하나의 절에서 두 개의 장면이 교차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아브라함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끝내 내쫓김을 당하는 하갈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들은 약속이 있으니 더 이상 근심하지 않고 하갈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갈의 입장에서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브엘세바 광야로 하루아침에 내침을 당한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후로 벌어지는 하갈의 처지를 매우 적나라하게 그려줍니다.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 창 21:15
하갈이 이런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후에 전개되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협상을 성사시키는 장면(창 21:22-31)이 나오는데, 그 협상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소와 양을 주는 대신 안전하게 소와 양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우물을 확보하는 협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31절의 말씀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이 브엘세바는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가죽부대에 물이 떨어져 죽어가고 있던 바로 그 광야입니다. 자기를 버린 남자는 사람도 아닌 짐승에게 먹이자고 우물을 확보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고, 그 협상이 성사되고 있는 바로 그 땅에서 그 남자의 여자와 어린 자식은 정작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지금 하갈과 이스마엘이 겪는 고통은 비단 물과 양식이 없어 죽는 고통만이 아닙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외에 마음마저 찢어지는 삼중의 고통 속에 지금 그들이 있습니다. 이게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비열한 인간의 역사를 뒤집고 새롭게 공의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 창 21:17, 18
'언어의 도상'에서 하이데거는 "거센 고통이 오늘날 영혼의 뜨거운 불꽃을 기르고 있네" 라던 시인의 고백을 받아서 "이 거센 고통을 지켜주는 자 누구일까?"라고 묻습니다. 이들의 고통이 거세어진 상황에서, 그들에게 처음으로 들려온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뒤에 이어집니다.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 창 21:19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시자, 눈이 밝아진 하갈이 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영안(靈眼)을 뜨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에 겨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의 불꽃을 기르시는 분, 거센 고통에서 그들을 지켜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마 10:28
'죽일 수 있는 육신'과 '죽일 수 없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몸도 영혼도 지옥에 멸하는 분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정말 시선을 두어야 할 것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어쩌지 못하는 어떤 현실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능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하갈이 그랬습니다. 그녀가 광야라는 '현실' 만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육신의 죽음을 직감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갈에게 말씀하시기를 시작하셨을 때, 하갈은 비로소 영의 눈을 떠서 몸도 영혼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선이 우리가 회복하고, 갖추어야 할 영적 시선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롬 6:10-11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르면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죽어야 할 나'가 있고, '살아야 할 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죽어야 할까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하여는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아브라함과 하갈의 사건을 토대로 재해석 하면, 우리 자신을 육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영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육에 대하여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의 영은 살 것입니다.(롬 6:8) 이것은 대립적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육의 씨를 버렸을 때,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영의 목표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울부짖던 하갈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그녀는 자신과 이스마엘을 살릴 수 있는 샘물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울부짖는 자를 살리실 때, 그 과정을 통해 영의 불꽃을 회복시키시고, 단지 육신의 고통을 회복하는 것만이 아닌 영적 회복을 통해 참 생명을 보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그 고통에 그만 시선을 빼앗겨, 바로 곁에 샘을 두고도 보지 못한 채 하갈처럼 울부짖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센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영적 진보로 길러지기를 바랍니다. 승화된 고통만이 참된 고통입니다. 고통이 오히려 영혼의 본질을 회복시켜 성스러움에 도달하게 하는 내적 감동이 매일매일 여러분의 삶속에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내게 다가온 고통을 의미 없는 푸념으로 지나지 않는가?
②고통이 신앙 안에서 내 영혼의 진보로 이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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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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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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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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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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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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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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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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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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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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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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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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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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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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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