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5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Lectio Divin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신약 | 행 7:55-60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 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 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응송 | 시 3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서신 | 벧전 2:2-5
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 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 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복음 | 요 14:1-14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 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 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 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 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 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 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 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4:12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어떤 사람이, 당신께서 하신 일을 그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② 행 7:55-60을 묵상하십시오. 스데반이 기꺼이 순교를 감당할 할 수 있었던 내적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습니까?
③ 벧전 2:2-5을 묵상하십시오.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부활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 중앙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靈)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밝게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부활의 소망을 실제적으로 묘사했습니다."거기에는 아직도 두려움과 죄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이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흩어지게 할 빛이 부활로부터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소망은 두려움과 죄책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그 죄성의 파도 아래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두려움과 죄책을 흩어버리고, 새로운 삶의 변화를 일으켜줄 뿐 아니라, 악(惡)이 선(善)에 의해 패배 당했다는 소식을 당당하게 공표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부활절 다섯 째 주일을 맞는 오늘,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부활절기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들을 복기해 보면 온통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말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부활절 제2주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문을 잠그고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시자마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하시고, 당신의 상처 입은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은 기쁨을 회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요 20:22)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새 창조'의 표지이자 결실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신 후에,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어 영적 존재가 되게 하셨듯이(창 2:7), 주님은 제자들을 부활 신비의 정 중앙에 서게 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요 20:22) 성령의 사람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셨고, 성찬을 통해 제자들의 눈을 밝게 하셨습니다. 그 사실은 부활절 제3주 말씀에 있습니다. 주님은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다가가셔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 성경에 쓰인 당신에 관한 기사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눅 24:27) 그리고 주막에서 떡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그것을 쪼개 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중에, 그들의 눈이 밝아지게 하셨습니다.(눅 24:30) 비로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다시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눅 24:33) 그리고 부활절 제4주 복음서에서 주님은 스스로를 목자로 표현하시고(요 10:1-4),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0:7, 9) 부활하신 주님께서 벽을 통과해 제자들에게 오셨듯이,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파스카 신비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요 14:1a
주님의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그 전에 하신 말씀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13장에서 당신께서 팔리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고, 뿐만 아니라 어디론가 가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3:21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라고 하시는가 하면, 요 13:33에서는 "일찍이 유대인들에게 말한 대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a)라고 물을 때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b) 라고 답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팔리시고, 떠나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 마음을 근심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당부로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마음(헬, 카르디아 καρδία)'은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중심지이고, 존재의 가장 심층적인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에바그리오스의 스승인 이집트의 성(聖) 마카리오스는 '마음'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장소'라고 소개하며, 이런 설명을 남겼습니다."은총은 빛의 자녀들 마음에 성령의 법을 새겨 놓는다. 마음은 모든 육체 기관의 주인이요 임금이다. 은총이 이 마음의 초원을 정복하면, 그 밖의 모든 지체와 모든 생명도 지배하게 된다. 지성이 있는 곳에 영혼의 모든 생각이 있으며, 바로 이곳에서 영혼은 선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존재의 가장 심층적인 곳'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장소'인 이 마음에 근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존재의 어디에 은총이 임할 것이며, 그들 존재의 어디에 성령의 법을 새겨놓을 것입니까? 또 마음이 '혼(프쉬케 ψυχή)' 혹은 '영(프뉴마 πνεῦμα)'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혼과 영이 근심에 정복당하면 인간은 어디로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고, 어느 곳에 자기 지성을 담아둘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요 14:1b
독일의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느냐 그러면 또한 나를 믿으라" '믿으라'는 이 말씀이 원문에서는 현재 명령법인 '피스튜에테(πιστεύετε)'로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계속해서 믿음으로서 근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믿듯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정복했던 근심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 마음에 임할 것입니다. 그들이 믿어야 할 것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 14:2, 3
제자들의 마음이 근심에 점령당해 있던 또 하나의 원인은 '죽음 이후' 자신들이 어디 거할지를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이후의 정처 없음에 대한 공포, 그것이 사람들 마음에 근심을 드리웁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명쾌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 아버지 집'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너희 거할 곳'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는 2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할 곳'을 확고하게 인식시켜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흔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는데, 그 곳이 어딘지 모르는 제자들로서는 아직 마음에서 근심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왜 그토록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주님 말씀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알아들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 14:4)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을, 어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걸어가야 할 물질적인 공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길'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길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 밖에서'만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라며 되묻는 도마의 질문에 그런 제자들의 심정이 안쓰럽게 묻어납니다. 오늘 우리도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질문에 직면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파고들어야 찾아지는 '길'을 비전이니 축복이니 하며 자꾸만 주님 밖에서 찾으려하는 까닭에 좀처럼 주님 안에 있는 평화를 얻지 못하고 교회 주변만 분주하게 맴도는 것입니다. 길을 묻는 도마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십시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 14:6
우리는 지금 특히 요한복음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론의 중대한 한 대목을 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길에서 찾고 있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요 14:7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보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입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12사도 외에 일곱 명의 지도자를 세웠는데, 그중 한 인물이 스데반입니다. 행 6:8-10을 보면 그에 대한 소개가 이렇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 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지금 스데반은 누명을 쓴 채, 재판을 받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던 장면과 비슷합니다.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자신을 변론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스데반은 행 7:2 이하에서 긴 설교를 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애굽 생활과 광야, 그리고 모세 이야기를 거쳐 이스라엘 왕조까지 거론합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결국 예수까지 죽였다는 사실을 거론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하면서도 그를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행 7:54)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사건전개가 바로 오늘 신약의 말씀인 행 7:55-60인데, 이때 스데반의 모습을 누가는 이렇게 소개합니다.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 행 7:55, 56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과 사뭇 다른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시고, 당신의 상처 입은 손과 옆구리도 보여주시고, 자기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음에도 여전히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b) 라고 말씀하시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2) 라고도 하셨지만, 여전히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에 점령당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 자신들이 어디 거할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 말씀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알아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 안에서' 길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 밖에서'만 길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어떻습니까? 지금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시선의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하는 것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하는 것은 얼마나 다릅니까? 똑같이 두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시선의 차이와 마음의 차이가 이토록 다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보십시오.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행 7:57-60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닮았습니다. 그의 상황, 그의 시선, 그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모두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렸던 기도합니다. 주님과 시선이 같은 사람, 주님과 마음이 같은 사람, 주님과 기도가 같은 사람, 그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가 하루아침에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으로 양육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영혼이 자란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벧전 2:2-5
사도 베드로는 왜 신앙인들에게 갓난아이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일까요?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듯이 하나님 말씀을 갈구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그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 요 14:12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 우편에 서는 것,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의 이상입니다. 아버지의 곁에 예수님께서 서 계시듯, 우리 또한 믿음의 결과로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곁에 있는 행복, 이 행복을 아는 사람은 스데반처럼 살 것이고, 그 행복이 막연하고 보이지 않는다면, 여전히 우리 마음은 근심에 정복된 채 정처 없는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는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목숨이 갈리는 순교의 시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고백을 따라 죽고 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신앙의 질어 떨어져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라 살지 못하는 우리들로 인해 얼마나 예수님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시대보다 더 날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래야만 사람들이 기독교를 신뢰하고,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은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입니다. 그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진짜 생명이 마침내 실체를 나타냈다는 의미입니다. 누가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으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고 했습니다.(눅 3:21) 스데반이 본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너희도 그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스데반이 보았던 그 하늘과 스데반이 보았던 그 주님을 본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삽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을 근심에 버려두지 말고, 매일매일 신령한 젖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성령의 은총이 '마음'으로 임하시도록 해서 여러분의 하루하루 속에 가슴 벅찬 파스카 신비가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시선을 땅에 두고 마음을 근심으로 채우고 있지 않은가?
② 시선을 예수님께 두어 마음이 은총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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