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부활절 제4주 예수님만 나의 목자
신약 | 행 2:42-47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 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 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서신 | 벧전 2:19-25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 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 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 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 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 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복음 | 요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 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 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 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10:10을 묵상하십시오. 도둑이 온 이유와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② 벧전 2:24을 묵상하십시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당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 행 2:42-47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양으로서의 우리 삶은 어떠 해야 합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예수님만' 나의 목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19가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으로 치달으면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數)가 숨 가쁘게 갱신되는 현황을 아침마다 눈으로 보게 되는 건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투명하고 섬세하게 대처해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연일 한국의 대처에 대한 외신의 호평이 쏟아지고, 외국 정상들의 찬사가 쏟아지는 걸 보면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게 자랑스러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건 신천지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구원파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냈다면, 코로나 19는 신천지라는 이단 사이비가 온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내게 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와 사회는 이단의 발흥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1950년대에 등장한 통일교나 전도관을 비롯해서, 1960년대에 활동한 이단 단체들 가운데는 양도천이 계룡산에 세운 세계일가공회, 이유성이 계룡산에 세운 새일 수도원, 그리고 18세 유재열이 과천에 세운 오늘날의 신천지의 뿌리가 된 장막성전 등이 있습니다. 1970년대를 지나며 이단은 40여 개로 늘어나고, 1988년 기준으로는 무려 96개로 더 늘어나는데, 그 중 통일교, 전도관(천부교), 구원파, 성락교회 등이 급속도로 신도 수를 늘리며 계보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이후로 통일교는 JMS(정명석)와 생령교회로 갈라졌고, 구원파는 권신찬,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로 나뉘었고, 전도관은 유재열의 장막성전을 거치며 이만희의 신천지 등으로 갈라졌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 19라는 역병이 대구의 신천지예수교 신도들로부터 대규모로 확산된 것이 드러나면서, 거짓말을 '모략 전도'라며 정당화하는 전도 방식으로부터, 청소년을 포함한 신도들을 가출시키는 반사회적 만행까지 신천지의 정체가 하나씩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단 사이비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에는 한국 교회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입니다. 교회마다 성장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바른 구원관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제대로 심어주지 못한 까닭에 성도들이 구원파나 신천지 등 이단들의 미혹에 쉽게 넘어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단들의 미혹에 바르게 대처하고 예수님 안에, 온전히 그 분의 착한 양으로서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 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착한 목자의 상(像)'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이 '착한 목자'로서의 예수님 설명은 이스라엘처럼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에게는 정서적으로 가장 이해가 빠른 설명이겠습니다. 목자는 수많은 낮과 밤들을 자기 양들과 함께 지낼 뿐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대화를 나눔으로서 단순한 양치기가 아닌 아버지로 인식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때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오늘 성서일과의 테두리 안에서 보면 응송인 시편 23편을 통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 23:1-4
우리는 여기에서 목자의 고유한 사역을 봅니다. 목자의 임무는 자기 양떼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어떤 곳입니까? '음산한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곳입니다. 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카리스마타 수도희의 정원기 목사님은 '메멘토 모리(죽음에 관한 묵상)'에서 '죽음은 인생의 끝자리에서 맞닥뜨리는 한 폭의 강'이라며, 부모를 먼저 보내드리고 한두 친구, 그리고 스승마저 앞서 보내고 나면 서서히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누구나 그 끝을 의식하기 마련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음산하지 않은 까닭은 고요한 마음으로 멀리 바라보면, 죽음은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바다가 아니라 강이고 비록 지금은 안개에 싸여 또렷하진 않지만 내디딜 마른 땅이 초록에 반짝이는 곳이며, 마른 땅 밟듯 그 강을 건너 사랑하는 사람을 와락 끌어안고 이승에서 감내했던 서러움에 소리 내 우는 곳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초록에 반짝이는 마른 땅이 되었을까요? 나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에서 그 목자의 섬세한 모습을 봅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요 10:1-3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절에서 6절까지는 목자와 양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10절까지는 문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 번째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목자와 도둑의 차이를 설명하십니다. 목자는 정식으로 문으로 들어가지만,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비유에 와서 보면 그 문은 바로 '목자인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7절에서 당신에 대해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 깃들여 있는 메시아적 신분입니다. 특히 이 장면이 수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13장 조금 전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결정적인 순간을 우리가 맞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는 3절의 말씀을 통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최선을 다해 당신 양떼를 부르시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자기 양을 불러 인도해 가는 목자의 모습과 양의 반응을 보십시오.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요 10:4
이 장면은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 우리에서 매일 아침 벌어지는 광경입니다. 목자들은 하나의 양 우리를 함께 공유하며 각자 자기가 맡은 양들을 돌본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양들은 자기들의 목자를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가 우리 안에 들어가 부르면 양들은 각각 자기 목자를 따라 나섭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양들은 끝까지 우리 안에 남아서 자기 목자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밤새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 역시 양들의 주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출입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도둑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양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을 넘어 다른 데로 몰래 들어가 낚아챌 수 있는 양들을 억지로 끌고 갑니다. 양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피해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양들의 이 반응을 통해 '진짜 목자'와 '가짜 목자'의 차이를 설명하고, 스스로 목자라 하지만 실상은 양을 삼키려는 거짓 목자들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 요 10:6
결국 이런 논쟁적인 성격을 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까닭에 그 다음 '문에 관한 비유'로 이어집니다.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 10:7-10
과연 누가 그 도둑이요 강도인 것일까요? 당당하게 문을 통과해 양 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 양들을 죽이고 멸하려고 하는, 도둑이며 강도인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비유로만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도둑이며 강도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하신 8절의 말씀을 근거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겨냥해 말씀하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필사본들은 '다' 라는 표현을 아예 삭제해버린 것들도 있고, 또 어떤 사본은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표현을 삭제해서 그런 통속적인 오해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 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 즉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슬러 비열하고 집요하게 벌이고 있는 음모들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8절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는 '눈이 먼' 사람들(요 9:39-41)이었고, 스스로 '안다'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무섭도록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눈이 멀고 무지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폭력으로 없애려 들었습니다. 예수를 쳐서 없애야 그의 양떼를 흩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 26:31에 보면 예수님께서 슥 13:7의 예언을 인용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참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자기 양을 지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는 양떼를 쳐서 흩어지게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양떼를 쳐서 흩어지게 하려는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a)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유혹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했던 사탄은, 지금은 거짓 목자들을 이용해 양떼를 쳐서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 양들을 지켜내려 애를 쓰시는 겁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 지금 우리는 주님의 이 심정을 헤아려 생명을 지켜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를 지나면서 한국 교회는 많은 물음과 대안을 놓고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또한 '교우들과 이웃의 건강'을 염려해서 많은 교회들이 그 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현장예배를 온라인예배 혹은 가정예배로 전환해서 드려왔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가 갖게 된 물음은, 첫째로, '교우들은 온라인예배와 가정예배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로, '주일예배를 온라인 혹은 가정예배로 하는 것이 과연 '참 예배'라는 측면에서 옳으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한 것은, 예배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전체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더욱이 미혹할 자를 찾아다니는 이단들로부터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있어 참된 예배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한국 기독교 목회자협의회와 한국 기독언론 포럼이 여론조사 기관인 (주)지앤컴 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바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예배를 온라인예배 또는 가정예배로 대체하는 동안 교회예배를 그리워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기독교인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3.7%는 온라인예배 혹은 가정예배가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70.1%가 '교회에서의 예배만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예배나 가정예배가 '교회예배와 비슷하다'는 대답도 37.0%가 있었고, 오히려 '교회예배보다 더 좋았다'는 대답도 9.3%나 있었다는 사실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온라인예배나 가정예배로 드릴 때, 어떤 태도로 드렸는지를 묻는 물음에서는 10명 중 3명 가까이는 교회에서처럼 적극적으로 예배하지는 않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된 후 교회예배 참석 의향을 묻는 물음에는 '예전처럼 교회에 가서 예배할 것 같다'는 대답이 85.2%, '교회에 잘 안 가게 될 것 같다'는 대답이 1.6%, '필요한 경우 교회에 가지 않고 온라인예배나, 방송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한 분들도 12.5%에 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뉴스앤조이'에서는, 「'왜'와 '어떻게' 사이에 놓인 예배」 라는 주제의 기사에서 테르사 베르거가 자신의 책 '예배, 디지털 세상을 만나다'(CLC)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테르사 베르거는 디지털 세상과 예배를 연결하면서, '예배의 공간을 온라인에서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를 묻고,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예배전통을 통해 답을 모색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색을 통해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은 '코이노니아를 통한 교회의 공동체성'과 '성례전'의 문제였습니다. 책에서 테르사 베르거는, 2세기 중반 유스티누스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제들을 통해 성찬 식탁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일일이 전달해 준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의 결론에서 기자는, 코로나 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예배가 어려운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종교 집회가 대안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조차도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예를 들어 온라인 환경에 익숙지 않은 노년층, 스마트 기기나 PC를 구입하기 어려운 이웃을 교회는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예배에 참여해 함께 예배하는 것에 힘쓰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그 이유는 예배에는 말씀 뿐 아니라 성례전도 있기 때문이고, 또한 교회예배를 통해 교우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행 2:42
여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에 전념하는 삶, 서로 교제하는 것에 전념하는 삶, 함께 떡을 떼는 것에 전념하는 삶,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삶,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란 그런 것이겠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더니 그 결과는 참으로 눈이 부셨습니다.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행 2:47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도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가르침을 듣는 것에 전념하고, 서로 교제하는 것에 전념하고, 함께 떡을 떼는 것에 전념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가운데, 예수님 안에 힘써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벧전 2:22-24
왜 주님은 죄도 없으시고, 거짓도 없으시면서,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감내하셨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 안에 견고하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영적 차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생명 하나 살리기 위해 세상의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대결하시는 분, 때로는 지팡이로 나약하고 눈 어두운 나를 인도해 주시고, 때로는 막대기로 거짓 목자와 사나운 이리를 쫓아내시는 분, 음산하고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에서 내 이름을 불러 곁에 두시는 분, 그 분만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두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서 그 분의 양으로서의 행복한 삶,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삶,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대결해 이기는 삶, 그리하여 세상에서도 칭송받는 삶을 우리 모두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거짓 목자의 미혹에 속아 참 목자이신 주님을 잃고 있지 않은가?
② 참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말씀, 성찬, 교제로 생명을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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