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6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0:4-9a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 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 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 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 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 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 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응송 | 시 31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 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서신 |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복음 |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 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 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 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 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50:4, 5을 묵상하십시오.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 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이사야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② 마 26:38-43을 묵상하십시오. 수난을 이겨내신 주님과, 주님을 팔 거나 부인하거나 수난을 피해 달아난 제자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③ 빌 2:5-8을 묵상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후,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 가셨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마 21:7)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행렬은 마태의 설명(마 21:4)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의 뜻이나 의지가 아닌, 슥 9:9의 예언 즉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는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군중들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 왕을 맞이하듯, 겉옷과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과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환호했습니다. '나사로의 토요일' 즉 '나사로의 부활'이 '죽음의 죽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면, 예루살렘 성을 향한 이 행렬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실행하심으로서 당신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보여주는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왕의 모습과 다릅니다. 우선 그 분은 왕궁이 아닌 골고다의 십자가와 무덤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스가랴의 예언대로 실행하신 이 입성은 당신 희생의 서막(序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교회는 종려주일로 기념하고, 이날부터 고난주간(성대주간)이 시작됩니다.마태는 복음서에서 이천 년 전 예루살렘 군중들의 철모르는 환호소리에 가려진 무서운 뒷이야기들을 담담하게 그려가고 있습니다. 환호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차디찬 법정에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 희망에 들떠하던 예루살렘 군중들은 현실문제에 부딪치자 전혀 이기적인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간들의 이기심과 변덕, 그리고 단 한 분 '무죄한 이'를 거슬러 자행되는 무자비한 인간들의 폭력을 복음서 저자들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인간의 광기가 집단으로 드러나는 그 현장에서 예수께서는 반대로 진정한 왕의 품격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 성서일과는 한결같이 주님이 당하신 수난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조명합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여호와의 종'의 셋째 노래를 통해서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종은 비록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귀를 열어 깨우쳐주시는 그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항상 옳음을 알고, 기꺼이 고통과 모욕을 감내합니다.(사 50:6, 7)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 안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참담한 모욕들을 당신의 '비움'과 '낮추심'이란 관점으로 증언합니다. 즉 예수의 수난이 적대자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당하신 폭력이 아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빌 2:7) 결과이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빌 2:8) 성부 하나님을 향한 순명이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마태 역시도 예수님의 수난을 '절대적인 자유'라는 측면에서 해석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향한 인간들의 폭력이 엄습해 오는 가운데 홀로 성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셨으며, 그 기도로서 성부의 뜻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서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마 26:39
군중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먼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십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돈을 바꿔주며 부당하게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마 21:13) 라시며 책망하십니다. 또 그곳을 떠나 성 밖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留)하기도 하시고(마 21:17), 다시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가르치기도 하시고, 토론을 벌이기도 하십니다.(마 21:23, 24)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다가 주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김으로서(마 26:14-16) 수난의 시계가 매우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할 즈음, 주님은 제자들을 모아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고(마 26:21-29),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마 26:36)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마 26:37) 라는 마태의 목격담과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하신 주님 말씀이 당시의 힘겨웠던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얼굴을 땅에 대시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실 때, 주님의 절박한 마음은 최고조에 달해 보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예수님의 삶을 '나아감과 물러남의 통일'이라고 표현하며, 지금 예수님이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는 이 겟세마네는 '물러나 하나님께 엎드리는 장소'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앞에 엎드리십니다. 그리고 '잔'에 관한 말씀을 꺼내십니다. 이 '잔(ποτήριον, 포테리온)'은 예수께서 마 20:22에서 '나의 마시려는 잔'이라고 표현하셨던 바로 그 잔으로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런데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주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지나가다'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출애굽 당시 유월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때 죽음의 사자가 히브리들의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주님은 그 장면을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당신을 멀리 지나가기를 성부 하나님께 엎드려 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나' 라는 단어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와 '그러나' 사이에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거대한 단절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한달음에 읽어버리면 예수님을 사로잡고 있던 고뇌의 깊이를 느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얼마나 숨 막히는 순간이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을 주님은 어떻게 해석하셨을까요? 얼마간의 시간이었을지, 주님은 마침내 이렇게 그 간절했던 기도를 맺으십니다.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마 26:39
이때 주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감히 헤아릴 순 없지만, 당신 목숨을 비워 아버지께 드리는 지금, 예수님께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자유'일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마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절대적인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운명의 손아귀에 내맡겨져 버린 듯 현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 앞에 다가온 현실들을 '절대적 자유'로 맞이하고 다스리고 이끌어 나가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나타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도 보십시오.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마 26:42
그리고 세 번째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는 피곤함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마 26:45, 46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절대적 자유로 결단하신 죽음은, 그 어느 것 아닌 '엎드려 기도하신 결론'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학자들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놀라운 유사점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란 어떤 시간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성부께 영광을 돌리시게 될 바로 그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요 17:1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수난을 자신의 영광이자, 아버지의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동기를 구약성경과의 연관에서 찾았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위에 있는 24절의 '최후의 만찬' 석상으로 돌아가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실제로 슥 13:7에 보면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말씀의 성취를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서 찾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당신을 체포하려 할 때, 그때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 마 26:56
유다가 절망에 빠져 성소에 내동댕이친 은으로 대제사장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장면에서도 마태는 구약의 말씀의 실현을 보았습니다.(마 27:3-10, 렘 32:6-15, 슥 11:12-13)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비참하게 현실에 이끌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에게 다가온 수난과 죽음이 구약에서 이미 밝히신 하나님의 뜻임을 아시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명할 것을 결단하고, 절대적 자유로서 맞이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이 모습을 떠올렸었습니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 2:6-8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어 굴욕을 감내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順命)이었습니다. 자유로서 죽음을 피해가실 수도 있었지만, 자유로서 죽음을 감내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우리는 주님의 이 모습을 보며 자유를 선물로 받은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을 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였던 오리게네스(Oregenes)는 '영성의 최고 형태는 순교'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교의 권면'이라는 저서에서 '참되고 완전한 제자란, 그분을 따라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매우 현장감 있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묘사해 보여줍니다.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 사 50:6, 7
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제2 이사야입니다. 그는 영성이 남달리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도 큰 고통을 당했는데, 그 고통은 뺨을 맞고,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했다'는 건, '얼굴의 빛을 잃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같은 표현을 에스겔 선지자는 겔 3:9에서 "이마를 금강석 같이 하였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뺨을 맞고,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했음에도 어떻게 얼굴의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사 50:4
여기 '학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림무드(דומל)'인데,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도 있지만 '제자', '학생'이라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혀와,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 같이' 알아듣는 귀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침마다 말씀을 하시는데, 그때마다 귀를 깨우치셔서,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그 기가 막히는 수욕(受辱)을 당하면서도 얼굴의 빛을 잃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참되고 완전한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엎드려 기도해야 할 것이고, 이사야처럼 귀를 열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수난사를 계속 읽어가다 보면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라며 예수를 거슬러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예수를 죽음에 넘겨주며, 그러나 이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는 퍼포먼스를 보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는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너희는 유죄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정의'를 '불의'로 바꾸어 가면서 까지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사활을 겁니다. 그 부끄러운 선택은 지난 2천 년 동안 예배 때마다 자기의 이름이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억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또 빌라도의 말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피를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돌리라"고 대답합니다.(마 27:25)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아걸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기와 심지어 자손마저 불행에 넘겨주고 맙니다. 마음이 굳으면, 사람은 이렇게 미련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울며 기도하실 때, 잠에 빠져있던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넘겨주고(마 26:47),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마 26:58-75)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하나같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마 26:56)따라서 예수님의 수난사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인간들의 불의한 심판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범죄 후에 스스로 목매달아 죽은 유다의 절망적 행위(마 27:5)는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 눈이 어두운 오늘날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진리보다, 성실보다, 정의보다 오로지 자신의 성공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빌라도처럼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질병과 고통에 내몰려 있음에도 맥을 놓고 나태의 단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겟세마네 동산의 세 제자들처럼, 주님과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의 수난사에 비추어 본다면 어쩌면 우리 모습이 꼭 그럴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수난사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 비극적 사건의 장본인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수난사의 주역들은 오늘날도 역사의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요, 힘든 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방향을 잃고, 유다처럼, 빌라도처럼, 대제사장이나 군중들처럼, 혹은 연약한 제자들처럼 방황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 신앙인으로 사는 의미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절대적 자유'로 십자가를 짐으로서 이기적인 자신을 죽이고, 타산적인 자신을 버리고, 순수하고 진정한 자아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하면 안 되는 우리의 소명(召命)이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직시함으로서만 내면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순수해질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아침마다 귀를 열어 말씀을 들었던 이사야처럼, 기도 가운데 자신의 원(願)을 내려놓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시며 '절대적 자유'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말씀에의 경청과,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 절대적 자유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명함으로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감격스러운 결실이 매일매일 삶 속에서 실현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말씀과 기도에 잠들어 있음으로 마음이 어두워있지 않은가?
② 이사야처럼, 예수님처럼 말씀과 기도로서 승리하고 있는가?
번호 | 다운로드 | 제목 | Language | 작성일 |
41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6주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
KOR | 2024.11.17 |
41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5주 나를 넘어 하나님께로
|
KOR | 2024.11.10 |
410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4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
KOR | 2024.11.02 |
409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3주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KOR | 2024.10.26 |
408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2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
KOR | 2024.10.19 |
407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1주 하나님만이 오직 최선이시다
|
KOR | 2024.10.12 |
406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20주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KOR | 2024.10.05 |
405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8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
KOR | 2024.09.21 |
404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7주 내 언어의 원천(源泉) 마음
|
KOR | 2024.09.14 |
403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
KOR | 2024.09.07 |
402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
KOR | 2024.09.01 |
401 | 다운로드 |
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
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