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사순절 제2주 떠나라. 침묵을 지켜라. 기도하라.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창 12:1-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 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응송 | 시 12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 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서신 | 롬 4:1-5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 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 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 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복음 | 요 3:1-17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 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 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 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 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 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묵상 | meditatio
① 창 12:4을 묵상하십시오. 고형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브람 이 궁극적으로 따라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② 롬 4:1-3을 묵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③ 요 3:3, 16-17울 묵상하십시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떠나라. 침묵을 지켜라. 기도하라.
코로나 19로 인한 불안감이 깊어 가는 가운데, 오늘 우리는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위협하는 양상입니다. 확진자에 이어 사망자의 명단이 발표되는 걸 보면서 사람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도 목격하게 됩니다. 마스크를 사려고 줄을 서 있는 모습도 안쓰럽고, '오늘' 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을 염려해야 하는 형제들의 모습도 안타깝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처하는 전대미문의 낯선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낯설고 안타까운 시간을 종료하려면 우리는 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된 원인을 물어야 하고, 그 원인과 정직하고 치열하게 맞닥뜨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인간에 대한 자연 생태계의 반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명체의 서식지 파괴, 몸 중심의 욕망적 식생활, 빠른 육류생산을 위한 공장식 가축사육 등이 감염병을 몰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경칩이 지났으니 날씨는 따뜻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날씨가 따뜻해져서 코로나 19가 잦아든다 해도 겨울은 다시 올 것이고, 코로나 20, 21도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역사학자인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은 '전염병의 세계사'(히스토리아 문디 04)에서, 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이 주도하는 '미시 기생'과 피지배층에 기생하며 그들을 수탈하는 지배층의 '거시 기생', 이 두 구조가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분석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기생'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바로 그 '기생(寄生 parasitism)'입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들 틈새에서 기생하며 사람의 영혼과 가정을 파괴하고 마침내 이 사회에 바이러스를 몰고 온 신천지도 이 '거시 기생'의 한 부류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의 유행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이러스는 반드시 우리 몸과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찾아 기생한다는 사실입니다. 3월6일 현재 사망자 42명 중 대부분이 폐쇄병동의 환자이거나, 가난하고 병든 외로운 노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이렇게 사순절에 찾아온 바이러스의 침입 앞에서 우리가 비로소 생태계에 기생하며 그들을 수탈해온 우리 자신을 직시하게 되었고, 또 우리 곁에 존재하는 약한 분들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이 바이러스는 우리를 꾸짖는 스승이기도 하겠습니다. 부디 이 사순절에 찾아온 스승 앞에서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라는 재의 수요일의 엄숙한 요청을 따라, 지금 여기에서 낡은 자아의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아를 얻기 위해 걷는 신앙의 순례(巡禮)를 힘써 걸으시기 바랍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그가 1849년 8월 10일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지상의 법들은 발, 즉 열등한 인간을 위한 것이고, 천상의 법들은 머리, 즉 고귀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지상의 법이 한 차원 올라선 것이 바로 천상의 법입니다. 적절한 균형 속에서 지상과 천상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모든 기능들이 올바른 법칙을 따릅니다." 그래서 그는 지상(地上)에 살면서 천상(天上)의 법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가정교사로 일하며 틈틈이 아버지의 연필 공장 일을 도왔습니다. 당시 소로우가 만든 연필은 미국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소로우가 발명한 '흑연을 둥글게 깎는 기계' 덕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토지 측량사라는 명함도 있어서 마을사람들에게 대접받으며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다른 일'이 있었는데, 그는 누구에게 강요받는 삶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대로 삶의 길을 찾아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강둑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볕의 따뜻함을 느낄 때,
황금빛 모래를 헤치고 드러난 붉은색 흙을 바라볼 때,
부스럭거리는 마른 잎 소리와 개울에서 눈이 녹아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향수병 걸린 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듯 자신만의 고독을 찾아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갑니다. 토마스 머튼은 '침묵 속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사막으로 떠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세계로 인도되어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사람들'과 그들의 '말'을 소개한다는 것은 사실은 참 비현실적이고 철없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지상'에서 '천상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절을 두어 적어도 훈련과 수련의 절기인 이 때만이라도 '도시'에서 '보이는 세계'에 반응하며 살아온 우리 삶의 관성으로부터 단호하게 떠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에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는 길 떠나는 아브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복음서에는 구도자의 길을 나선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 12:1
아브람은 '떠남'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새로운 차원을 연 사람입니다. 아브람의 이 '떠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말미에 나오는 그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로부터 시작됩니다. 데라 일가의 족보를 간략하게 보도한 후 성경은 데라의 이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 11:31)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람 서사(敍事)를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절 안에 나란히 등장하는 '우르'와 '하란' 간에는 두 지역 모두 '달신'을 섬겼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정한 주기로 변화되는 달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삶의 은유(隱喩)를 읽어내곤 했는데,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우르'에서 '하란' 즉 달을 숭배하는 지역을 끼고 옮겨 다녔다는 것은 그 역시 달을 숭배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데라가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한 시기를 학자들은 대략 BC 2000-1800년경으로 보는데, 바로 그 시기가 아모리족의 대 이주 시기였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데라 가문의 이주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그런데 창세기 저자는 11장 말미에서 우리 시선을 끌만한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2) 그러니까 창세기 저자는 '달을 숭배하던 아버지 데라의 죽음'에서 '아브람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출발지점'을 찾고 있는 듯합니다. 낡은 질서가 깨져야만 비로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이 한 장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죽자 비로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남'을 당부하십니다. '네 아버지의 집', '네가 태어난 곳', '네가 살고 있는 땅' 그러니까 오래 된, 익숙한, 편안한, 그래서 길들여진 그 땅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익숙함과 편안함에 길들여진 그래서 나태해진 독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되는데, 한편 버거우나 절박한 심정으로 받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명령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떠남'에 따른 '약속'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 창 12:2, 3
이 말씀은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한 다음에도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들을 유심히 보십시오. 이 약속의 핵심은 큰 민족과 복과 땅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에 있었습니다. 데라와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의심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합니다. 더구나 앞서 11장 30절에서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고 언급한 이후에, 12장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데라와 아브람의 '떠남'의 이유가 풍요와 다산(多産)에 대한 기대였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창세기 저자가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큰 민족이니 복이니 땅이니 하는 사족(蛇足)이 아닌 '말씀'과 '약속'이라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이상(理想)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떠남은 후손이나 땅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보십시오.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 창 12:4, 5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 떠났다고 증언해줍니다. 어느덧 칠십오 세가 된 적지 않은 나이에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5절), 그리고 '아버지 데라의 무덤'을 떠나는 아브람을 보십시오. 그는 현실적인 익숙함과 편안함을 내려놓고, 낯선 미래를 향해 '말씀을 따라서' 떠납니다. 그 떠남으로 인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 떠남으로 인해 '순종의 표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떠남으로 인해 훗날의 히브리들에게 그는 출애굽의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 말씀을 따라 떠나는 출애굽,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따라가야 할 표상입니다. 우리를 주저앉히는 익숙함과 편안함, 그로 인한 나태함, 이런 것들로부터 자꾸만 떠날 때 우리 삶이 맑아집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희곡작가이기도 한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을 가리켜 'Homo Viator'라고 했습니다. '떠도는 사람' 혹은 '길 위의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 마음에 근원적 그리움을 품고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참다운 인간상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바로 그 참다운 인간상을 지금 우리는 '말씀을 따라' 떠나는 아브람에게서 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아브람의 이 떠남에 대해 그것은 '믿음의 결과'였다고 소개해 줍니다.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람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람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 롬 4:1-3
창세기 저자가 아브람을 '말씀을 따라간 사람'으로 보았다면, 사도 바울은 아브람을 '믿음을 따라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에 의해, 말씀을 따라 길 떠나는 아브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신앙의 출발선상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아브람으로 하여금 안정된 도시적 삶을 청산하고 낯선 길을 떠나도록 불러내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고 낯선 길로 초대된 우리 자신을 확인하게 됩니다. 믿음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서 매 순간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떠남'입니다.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고,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이 됩니다. 오래된, 익숙한, 편안함이 이 땅에 바이러스를 몰고 왔다면 이 사순절의 여정을 걷는 동안 우리는 그 편안함이 몰고 온 나태함의 바이러스로부터 떠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도 우리는 길을 찾아 나선 '니고데모'라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가 소개해주는 니고데모는 훌륭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선생이었고 산헤드린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껏 반듯한 삶을 살아왔고, 율법은 그의 삶을 반듯함으로 이끌어 준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밤중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요 3:2
우리는 니고데모의 이 인사에서 그 동안 그가 살아온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이었습니다. 막 10:17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듯이, 그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무엇을 근거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정신세계를 더욱 격랑으로 몰고 갔습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요 3:3
하나님 나라의 조건으로 '율법적인 행함'을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인한 거듭남' 즉 '존재'로 답변하십니다. 충격 속에서 그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해 주십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요 3:5-8
니고데모는 성경을 수없이 읽고 가르쳐왔지만 그러나 '거듭남'이라든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는 표현은 전혀 생소하고 낯선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믿음은 율법에 근거한 믿음이었고, 지성에 의해 정리된 관념(觀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념적 믿음은 하나의 경향으로 여기고 말기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면'에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당혹스러움을 뒤로 하고 예수님은 또 한 가지를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 3:16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일관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면, '영생'도 '하나님 주신 독생자'로 인해 얻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함'을 구원의 길로 알고 있던 니고데모로서는 이제 자신의 지식세계에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로마인으로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궁전에서 그의 두 왕자의 선생으로 살던 아르세니우스(Abba Arsenius)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세상을 피해라. 그러면 너는 구원을 받으리라." 몰래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배를 타고 가서 사막에서 혼자 사는 생활로 들어간 아르세니우스는 다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다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떠나라! 침묵을 지켜라! 그리고 항상 기도하라! 이것들이 무죄의 원천들이니라." '떠나라. 침묵을 지켜라. 기도하라.' 이 세 가지는 세상이 우리를 세상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을 방지하는 세 가지 길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한 성령의 길로 나아가는 세 가지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자신을 떠남으로 성령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방역당국에서 하는 캠페인 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 두기'와 '잠시 멈춤'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순절의 영성과 정확하게 일치하는지 모릅니다. 함부로 아전인수로 속단하거나 해석해서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훈련 같기도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세상과 똑같이 질주해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질주를 잠시 멈추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침묵 속에 기도할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갈 나'를 기억하며, 오래 된, 익숙한, 편안함에 길들여진 낡은 자아(自我)를 새로이 정돈하며, 그 동안 생태계에 기생하며 그들을 수탈해온 나를 회개하고, 내 곁에 존재하는 이웃들에게 무심했던 나를 책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아를 찾아가는 2020년 사순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여전히 과거의 완고하고 낡은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
② 말씀을 따라 성령 안에서 참 믿음을 향한 '떠남'을 이루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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