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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6주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4. 완전(完全, Perf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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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0-02-16 13:34
조회
1538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출 3:4-10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 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 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 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 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응송 | 시 22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서신 | 히 6:1-3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 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 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복음 | 요 17:21-23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 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 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히 6:1-3을 묵상하십시오. 신자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에로 나아갈 수 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② 요 17:21-23을 묵상하십시오. 신자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 가 될 때, 세상이 '믿는 것'(21절)과 '아는 것'(23절)은 무엇입니까?
③ 출 3:9-10을 묵상하십시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어디로 보내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이라는 표어를 세우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성구에 맞추어 지금 새해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여정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뜻하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로부터 출발해서, '성령으로 난 사람(born of Spirit)' 혹은 '거듭난 사람(born again)'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born of God)'을 뜻하는 '신생(新生, New Birth)'의 구간을 통과하고, 성령의 도우심과 성도자신의 의지로서, 내면이 느린 속도로 숙성되어 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구간을 통과해, 마침내 오늘 '그리스도인의 완전(完全)' 혹은 '완덕(完德)'이라는 종착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 여정을 지나오면서 과연 나는 얼마큼 변화되었을까?
필립 얀시가 쓴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란 책에 보면 그가 매우 공감이 가는 고백 하나를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자신의 기존의 모습을 허물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부사람이라는 사실을 혐오했기 때문에 남부 고유의 발음과 억양 하나하나를 고쳐나갔습니다. 시골티를 벗기 위해 훌륭한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고,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변화를 위한 시도는 전반적으로 효과적이었고, 훗날 기자생활을 할 때도 그의 변화는 유용했으며, 마침내 그의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다 사라져 그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후, 의도적으로 형성한 자신의 성격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자기 안에 남아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개조하려던 계획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자신을 위해 의도하신 '자아(自我)'를 인식함으로써, 더욱 진정한 자아에 가까워짐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모세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그저 '필립 얀시'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아(自我)를 속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하시려는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책에서 문학교수인 마크 반 도렌(Mark Van Doren)이, 제자인 토마스 머튼을 13년 만에 만나기 위해 켄터키수도원을 방문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반 도렌과 머튼의 친구들은 뉴욕에서 파티만 좇아다니던 머튼이 독거와 침묵을 소중히 하는 수도자로 변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크 반 도렌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약간 나이가 들어보였다.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톰, 전혀 변하지 않았군 그래." 그러자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왜 변해야 합니까? 이곳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는 자기의 진실 된 모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이야기 하고 '성화'를 이야기 할 때, 나라는 존재가 완전하게 해체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형성해서 '나 아닌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居)하심'을 통해서 '진짜 나'를 찾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떠나 탕자가 되었던 둘째 아들이, 굶주림 속에서 돌아와 마침내 회복했던 '나'입니다. 그는 자신의 독백을 통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끌어안고 변치 않은 사랑을 주었을 때, 그 사랑 안에서 비로소 진짜 자신을 찾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서인지 훗날 '키에르 케고르' 역시 "이제,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나는 나 자신이 되려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역시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 자신에게 기도란 '사랑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을 '사랑받을 자'로 여기셔서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음성을 들음으로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그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고전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을 이루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계획하신 '진짜 나'를 회복하는 여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정과 관련해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한국영화 100년 역사 만에 처음으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 국제장편영화상, 각본상 등 4 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는 배우와 스태프들과 시나리오를 나눌 때도, 마치 만화처럼 꼼꼼히 그려서 나눈다고 합니다. 머릿속 상상이 배경과 인물, 카메라 앵글까지 고려한 콘티가 되고, 실제 영화에서 거의 그대로 구현된다고 합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그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배우의 수첩 하나까지 섬세하게 챙겼습니다. 당시 형사가 범인 프로파일로 가지고 다니던 수첩도 농협수첩이어야 한다고 해서 새로 제작을 했다고 합니다. 영화 '기생충'도 그런 만화적 상상력과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대사와 동작, 소품 하나까지 치밀하게 배치해서 마침내 아카데미상을 휩쓴 것입니다. 그렇게 디테일이 살아있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그는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냈고,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고유의 색깔과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내며 대중과 평단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스카는 그의 디테일을 보아주었습니다. 거장(巨匠)과 삼류는 디테일에서 결정 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디테일이 섬세하게 살아있으면 거장이 되고, 디테일이 허술하면 삼류가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 그 품격 높은 신앙생활은 디테일에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하게 '말씀'에 뿌리를 둔 믿음일까요? 말씀이라는 디테일 위에 견고하게 서 있을 때, 그 믿음은 '칭의에 도달하는 믿음'일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고, 말씀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함 받았음을 깨달아야 하고, 말씀에 비추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이 '신생(New Birth)' 즉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과거'에 물로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면, '지금'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이라는 디테일에서 실패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성령은 거듭난 사람들 안에 사랑의 거룩한 성정(性情)이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온유함과 겸손함의 열매를 맺히게 하며,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화의 여정을 힘써 걸어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그 계획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미와 완전에 도달할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안에서 '참된 나',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교리만 붙들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넘어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출 3:4-10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 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 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 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 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응송 | 시 22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서신 | 히 6:1-3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 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 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복음 | 요 17:21-23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 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 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 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묵상 | meditatio
① 히 6:1-3을 묵상하십시오. 신자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에로 나아갈 수 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② 요 17:21-23을 묵상하십시오. 신자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 가 될 때, 세상이 '믿는 것'(21절)과 '아는 것'(23절)은 무엇입니까?
③ 출 3:9-10을 묵상하십시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어디로 보내십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4. 완전(完全, Perfection)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이라는 표어를 세우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성구에 맞추어 지금 새해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여정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뜻하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로부터 출발해서, '성령으로 난 사람(born of Spirit)' 혹은 '거듭난 사람(born again)'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born of God)'을 뜻하는 '신생(新生, New Birth)'의 구간을 통과하고, 성령의 도우심과 성도자신의 의지로서, 내면이 느린 속도로 숙성되어 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구간을 통과해, 마침내 오늘 '그리스도인의 완전(完全)' 혹은 '완덕(完德)'이라는 종착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 여정을 지나오면서 과연 나는 얼마큼 변화되었을까?필립 얀시가 쓴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란 책에 보면 그가 매우 공감이 가는 고백 하나를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자신의 기존의 모습을 허물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부사람이라는 사실을 혐오했기 때문에 남부 고유의 발음과 억양 하나하나를 고쳐나갔습니다. 시골티를 벗기 위해 훌륭한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고,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변화를 위한 시도는 전반적으로 효과적이었고, 훗날 기자생활을 할 때도 그의 변화는 유용했으며, 마침내 그의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다 사라져 그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후, 의도적으로 형성한 자신의 성격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자기 안에 남아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개조하려던 계획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자신을 위해 의도하신 '자아(自我)'를 인식함으로써, 더욱 진정한 자아에 가까워짐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모세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그저 '필립 얀시'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아(自我)를 속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하시려는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책에서 문학교수인 마크 반 도렌(Mark Van Doren)이, 제자인 토마스 머튼을 13년 만에 만나기 위해 켄터키수도원을 방문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반 도렌과 머튼의 친구들은 뉴욕에서 파티만 좇아다니던 머튼이 독거와 침묵을 소중히 하는 수도자로 변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크 반 도렌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약간 나이가 들어보였다.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톰, 전혀 변하지 않았군 그래." 그러자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왜 변해야 합니까? 이곳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는 자기의 진실 된 모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이야기 하고 '성화'를 이야기 할 때, 나라는 존재가 완전하게 해체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형성해서 '나 아닌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居)하심'을 통해서 '진짜 나'를 찾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떠나 탕자가 되었던 둘째 아들이, 굶주림 속에서 돌아와 마침내 회복했던 '나'입니다. 그는 자신의 독백을 통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끌어안고 변치 않은 사랑을 주었을 때, 그 사랑 안에서 비로소 진짜 자신을 찾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서인지 훗날 '키에르 케고르' 역시 "이제,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나는 나 자신이 되려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역시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 자신에게 기도란 '사랑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을 '사랑받을 자'로 여기셔서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음성을 들음으로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그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고전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을 이루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계획하신 '진짜 나'를 회복하는 여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정과 관련해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 히 6:1, 2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표현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란, 원문에서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 말씀'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초 원리' 혹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 원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등등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집니까? 그럼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히 6:1)고 말씀하고, 그런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히 6:2)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지 말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교리로 만들어서 성도들을 그 안에 가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 장인 히 5:12-14에 보면 이렇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즉 '교리'에 머물러 있는 자를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히 5:12), '어린 아이',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히 5:13)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겁니다. '완전한 데'(히 6:2)로 나아가라는 겁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씀하는 '완전'은 헬라어로 '텔레이오테타(τελειότητα)', '성숙'이란 뜻입니다. 초보적 교리의 범주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덕망을 마음에 갖추고, '성숙한 자기'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지각(知覺)을 사용하기도 하고(히 5:14a),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分別)하기도'(히 5:14b) 합니다. 지성과 영성이 균형을 형성하고, 신앙과 삶이 일치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교리의 세계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신앙을 '삶 속에서' 완전으로 열매맺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3:12-14에서 자신은 이러한 삶을 이미 얻었다고 자만하지 않고, 삶으로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말씀합니다.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히 6:3
원문대로 읽으면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러한 삶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반대로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영화(榮化), glorification'입니다. 이 '영화'를 영성신학에서는 '신비(神秘)'라고도 표현하는데,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미와 완전'에서는 바로 '완전(完全)' 혹은 '완덕(完德)'에 해당이 되겠습니다. 이른바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완전하게 일치를 이룬, 이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표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바로 '제자들이 이 상태에 도달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요 17:21-23
그리스도교 영성이란 다름 아닌, 분열되고 해체된 실존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통합해서 회복시키기는 영성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 역시 아버지 안에' 있는데, 이제는 성부와 성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우리 안에' 있게 하자고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이렇게 인간을 점진적으로 성화시켜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안에 머무르게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믿음과 거듭남, 그리고 성화의 여정을 통과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에 신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구축하는 것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며, 인격들 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있는 곳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이 요구하는 '신자와 신자' 혹은 '신자와 이웃'의 관계는 단지 연합이나 동맹의 수준을 뛰어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일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의 소명과 삶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출 3:4
우리는 모세가 이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방황했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누가는 행 7:22, 23에서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가 속으로 품었던 생각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이게 마흔 살 때의 모세였습니다. 당대 최고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왕자로 살면서 궁중 지혜와 무예로 무장했던 그는 '자기 힘으로' 히브리들을 압제에서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지혜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파라오의 노여움을 사서 미디안에 숨어 사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렇게 40세에 미디안 광야에 들어와 어느덧 80세 노인이 된 모세를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출 3:5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당신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시기 전까지 그 땅은 그저 평범한 땅이었습니다. 매일 양떼로 이끌고 지나가며 보는 가시떨기도 그저 광야에 흔하디흔한 떨기나무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없이 실의에 빠져 터벅터벅 양떼를 이끌고 걷던 그 곳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자, 그곳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하나님 안'의 자리 즉 '성지'가 되었습니다. 훗날 예레미야시대, 믿음이 사라지고 가슴마저 말라버린 사람들, 이 뜨겁고 거룩한 땅을 믿음 없이 지나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이렇게 한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렘 2:6) 내가 아무리 거룩한 장소에 서 있더라도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을 때, 우리 삶의 자리는 속된 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으십니다. 그를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라"고 등떠미십니다.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 출 3:9, 10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특징은 사도적 임무에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입니다.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실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었습니다. 성 안토니(St. Anthony)라든지, 고백자 성 막시무스(St. Maximus)라든지,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St. Gregorius Palamas)같은 분들은 모두가 사막의 수도자였습니다. 그들이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모습을 당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위기에 처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필요로 하실 때, 그들은 사막 한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도시 한 가운데서의 소명에도 응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 안에' 또한 '그들이 주님 안에'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막이든 도시이든 찾아가서 순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을 이룬 사람들의 자태입니다.한국영화 100년 역사 만에 처음으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 국제장편영화상, 각본상 등 4 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는 배우와 스태프들과 시나리오를 나눌 때도, 마치 만화처럼 꼼꼼히 그려서 나눈다고 합니다. 머릿속 상상이 배경과 인물, 카메라 앵글까지 고려한 콘티가 되고, 실제 영화에서 거의 그대로 구현된다고 합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그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배우의 수첩 하나까지 섬세하게 챙겼습니다. 당시 형사가 범인 프로파일로 가지고 다니던 수첩도 농협수첩이어야 한다고 해서 새로 제작을 했다고 합니다. 영화 '기생충'도 그런 만화적 상상력과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대사와 동작, 소품 하나까지 치밀하게 배치해서 마침내 아카데미상을 휩쓴 것입니다. 그렇게 디테일이 살아있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그는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냈고,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고유의 색깔과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내며 대중과 평단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스카는 그의 디테일을 보아주었습니다. 거장(巨匠)과 삼류는 디테일에서 결정 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디테일이 섬세하게 살아있으면 거장이 되고, 디테일이 허술하면 삼류가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 그 품격 높은 신앙생활은 디테일에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하게 '말씀'에 뿌리를 둔 믿음일까요? 말씀이라는 디테일 위에 견고하게 서 있을 때, 그 믿음은 '칭의에 도달하는 믿음'일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고, 말씀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함 받았음을 깨달아야 하고, 말씀에 비추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이 '신생(New Birth)' 즉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과거'에 물로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면, '지금'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이라는 디테일에서 실패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성령은 거듭난 사람들 안에 사랑의 거룩한 성정(性情)이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온유함과 겸손함의 열매를 맺히게 하며,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화의 여정을 힘써 걸어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그 계획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미와 완전에 도달할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안에서 '참된 나',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교리만 붙들고 있지 않은가?
②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넘어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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