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주현 후 제5주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3. 성화 Ⅳ '세상에서' 맺는 열매들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구약 | 사 58:1-12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 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 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 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 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 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 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 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 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 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응송 | 시 112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 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서신 | 고전 2:1-1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 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 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 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 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 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 마 5:13-20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 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 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 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 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마 5:13-14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소금과 빛이라 하시는데 '어디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② 사 58:6-8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 이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③ 고전 2:4, 5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씀과 전도의 힘을 어디 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3. 성화 Ⅳ '세상에서' 맺는 열매들
창 2:7절의 증언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다음 '생기(生氣)' 즉 당신의 '숨(네페쉬)'을 그 코에 '불어넣으심(와이파흐)'으로서 사람의 숨결이 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그 숨을 받아 숨을 쉼으로서 건강하고 충만한 삶을 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내적 환경을 오염시켰습니다. 마치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이 '네 안에서 너 없이' 라는 노랫말에서 '온 세상을 얻었으나 영혼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사람은 내적 생명을 잃어버린 채, 외적 껍질만 입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냥 껍질만 입은 존재로 내버려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내적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이 처해질 고독에 당신의 아들을 대신 던져 넣으심으로서, 그 사랑과 희생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적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내적 생명은 철저하게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어서 주님은 그 생명으로 '신생(新生, New Birth)'한 사람을 '성령으로 난 사람(born of Spirit)'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born of God)' 혹은 '거듭난 사람(born agai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거듭난 사람만이 걸어갈 수 있는 점진적인 성화의 여정을 계속 따라가고 있습니다. '수덕(修德)' 혹은 '신비(神秘)' 신학 저서들을 보면 '영성생활의 도정'은 여러 단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인간이 그리스도의 '완덕(完德)' 혹은 '완전(完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단계를 모두 밟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에서 좀처럼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육신에 속한 자' 혹은 '어린아이'(고전 3:1) 라고 표현하며,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다"(고전 3:2)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어린아이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영적 성숙에 접어든 사람들'(고전 2:6)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을 '영적인 사람'(고전 3:1), 혹은 '영을 따르는 자'(롬 8:5)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보았던 '산상수훈'대로 표현하면,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에 도달한 사람들'(마 5:48)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도 산상수훈과 관련해서 읽어야 하는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소금과 빛의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마 5:13a
먼저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란 다른 사람들이 아닌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과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애를 쓰다가, 그것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허무한 것지를 깨달아 어느 순간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현재에 애통하는 사람이 되고, 주님의 긍휼하심과, 주님이 사랑하신 평화의 소중함을 깨달아 자신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말라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너희'를 향해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팔복선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돌아서서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해지고, 진정으로 애통해하다가, 주님의 긍휼과 정의와 평화에의 목마름을 끌어안고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부름 받은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소금(할라스, ἅλας)'은 인내와 순결과 부패방지를 의미했었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언약과 연관해 사용되었습니다.(민 18:19) 뿐만 아니라 소금은 현재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극소량으로 사용하면 비료로 쓰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 이 소금은 하찮은 것임에도 절대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마 5:13b
짠 맛이 없는 소금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소금은 그 맛을 잃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을 구성하는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蒸溜)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늪지 등에서 염분을 추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염분을 추출한 다음에 남은 불순물은 아무 맛도 쓸모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맛을 잃은 소금이란 바로 그 불순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개 이 맛을 잃은 불순물은 지붕 위에 뿌려졌는데, 당시 지붕은 운동장이나 집회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소금이 맛을 잃는 현상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소금을 말씀하실 때,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소금의 사명은 '양념'이거나 '방부제'이거나 입니다. 그러니까 소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도 의미도 없습니다. 소금은 어딘가에 들어가 섞일 때만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금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능적 상대성입니다. 소금은 어디엔가 섞여 맛을 내야하고, 어디엔가 섞여서 썩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같은 의미로 하신 듯싶습니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마 5:14, 15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서로 보면 이렇습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빛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빛은 아무 곳에나 있으면 안 됩니다. 빛은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빛은 주위 환경이나 타인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빛의 가공할 속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밝히 비치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길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 5:16
빛이 사람들에게 비치게 하는 방법으로 주님은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착한 행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지난 주 말씀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자신과 이웃을 위해 애통하는 것, 온유함으로 긍휼을 실현하는 것, '의(義)'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 등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그래야 빛인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소금과 빛의 역할과 관련해서, 주님께서 거듭거듭 강조하시는 것은 '세상 속에서'라는 겁니다. 혹자는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라고 하는데, 그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소금과 햇빛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내는 사람인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참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게 있어서 '세상'이란 선민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과 대립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세상은 오히려 경계하고 극복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세상을 경계하고 극복할 대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부패를 막고 맛을 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유폐되어버린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이끌어내야 할 대상으로 여겨 세상 어둠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국적으로, 피부색으로, 이념과 문화로, 성별과 빈부의 차이로 온통 가르고 나누지만,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소금이며 빛 된 너희'는, 온유함이 복이며, 자비함이 복임을 아는 너희는, 나뉘고 갈라진 세상에 빛을 비치게 해, 갈라진 세상이 얼마나 부패한 세상인지 알게 하고, 온유와 자비가 회복된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우리는 '지금', 과연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 속에서' 온유한 자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 속에서' 자비한 자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의를 갈망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 속에서' 의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고 있을까요? '세상 속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있을까요? '세상 속에서' 청결한 마음 그대로 살아내고 있을까요? 오히려 욕망에 겨운 자로 살고, 사납고 음흉하며 교만한 자로 살고, 박해하는 자로 살고, 평화를 깨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약 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착한 행실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 사 58:7-11
사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다분히 종교 의식으로 금식을 하면서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사 58:3) 하며 생색을 내기에 바빴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비와 다툼으로 일관하고 약한 자들을 주먹으로 치는 일(사 58:4)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그런 왜곡된 금식의 관행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풀어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그들이 진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는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때때로 감동적인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서 병의 사슬을 벗겨주신 후에 단 한 번도 "내가 너를 고쳐주었다고, 그러니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고친거라"(마 9:22, 막 10:52, 눅 18:42 등)고 말씀하시면서 일체의 부담조차 갖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은 참 신앙의 의미를 그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사(私)'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서 착한 행실을 실천하려면, 우리에게도 '사(私)' 즉 '사사로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한 삶은 결코 내 능력이나 내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은 바울 사도에 따르면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고전 2:4, 5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그것만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18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도(大道)가 폐(廢)하여 유인의(有仁義) 하고, 혜지(慧智)가 출(出)하며 유대위(有大僞) 한다." 대도(大道)가 무너지니까 그 결과로 인의(仁義) 즉 어짊과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람의 지혜가 대단한 취급을 받게 되니까 그 결과로 거짓이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어짊이나 올바름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지혜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착한 행실을 위해 자꾸만 인간적인 노력을 더하려고 하는 것은 내 안의 빛을 잃어버린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빛을 향해 서 있고, 주님의 빛이 내 존재를 밝히고 있으며,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나를 감싸고 있다면, 여덟 가지 복의 사람이 되는 것, 혹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착하게 사는 것은 매일매일 우리 일상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성화의 삶이란 바로 그렇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상에서' 그리고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지는 열매라 하겠습니다. 오늘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하는 우리로 인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빛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세상이 맛을 회복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부당하게 묶인 사람들이 놓임을 받고,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압제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으며,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가 가벼워지며,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굶주린 사람이 배부름을 얻고,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헐벗은 사람들이 옷을 입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평화가 실현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인 나로 인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야 세상은 우리로 인해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오늘로 성화에 관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모든 생각을 포함하는 발생학적 생각은 모두 여덟 가지인데, 이른바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영적 태만), 헛된 영광, 교만이라 했습니다. 이 모든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는 우리 능력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 머무르느냐 머무르지 않느냐, 욕정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영혼에 스며들고 포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 밖으로 떨어져 나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탕자와 같은 삶을 살게도 하지만, 그러나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είς έαυτὁν δὲ ἐλθὼν)' 즉 냉정하게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허무를 인정할 때는, 하나님은 당신 사랑으로 우리 내면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 삶에 시작된 성화의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사도 바울은 갈 4:19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며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주기를 갈망했던 그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고, 정념과 욕망의 지배에서 단호히 벗어나 주님을 향해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의 자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찾는 자리입니다.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돌아서는 자리는 애통하는 사람만이 찾아가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성도에게 비로소 위로가 필요한 형제가 보이고, 궁핍함을 채워줄 형제가 보일 것이며, 의롭게 살아가야 할 세상도 보일 것입니다. 탐식보다는 절제가 행복하고, 탐심보다는 청빈이 행복하며, 교만보다는 겸손이 행복하고, 음욕보다는 사랑이 행복하며, 태만보다 신실함이 행복하고, 분노보다 관대함이 행복하고, 헛된 영광보다 거룩한 고난이 행복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 되겠습니다. 이 행복을 알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인의 미와 완전'은 이제 한껏 가까워진 목표가 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덟가지 행복으로 사는 삶이고,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사는 삶이겠습니다. 이 여정의 끝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존재 가득 빛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나의 경건함이 혼자만의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② 나의 '소금과 빛 된 삶'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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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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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6주 복 있는 눈, 복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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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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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5주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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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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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4주 제2의 본성을 쇄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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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