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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3주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3. 성화Ⅱ, 자아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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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0-01-25 23:47
조회
1063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왕상 19:3-8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 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 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 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응송 | 시 46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 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서신 | 롬 7:18-24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 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복음 | 눅 15:13-20a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 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 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 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왕상 19:4, 5을 묵상하십시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 다"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엘리야의 마음은 어떤 상태입니까?
② 롬 7:21을 묵상하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 는 것이로다"는 바울의 고백에서 어떤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까?
③ 눅 15:17을 묵상하십시오.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깨달 은 아버지와 자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믿음과 '칭의(稱義, Justification)'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을 향해 걷는 발걸음이 '성화의 입구'인 '신생(新生, New Birth)' 즉 '거듭남'을 통과해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구간을 지금 함께 걷고 있습니다. '신생'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성과 결정성'이 특징이라면,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과 성도 자신의 의지로서 내면이 느린 속도로 숙성되어 가는 '점진성'이 그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화의 이 '느림의 구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집니다. 마치 기차가 어느 구간을 느리게 통과할 때, 바깥 풍경을 더 세심하게 감상할 수 있듯이, 신자는 성화의 여정을 느리게 통과하는 동안 자신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찰이 깊고 성숙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에 한 발 더 바짝 다가서게 됩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크레이그 슈와츠'라는 거리의 인형술사가 등장을 하는데, 어느 날 그는 서류정리를 하다가 실수로 서류철을 캐비닛 뒤로 떨어뜨립니다. 그 서류철을 주우려고 캐비닛을 옮기던 중, 그는 이상한 문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놀랍게도 그 문은 유명한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로 연결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는 15분간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들어가 머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당시 관객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 무명의 인형극 연출가인 크레이그 슈와츠는 비록 15분간이지만, 자신이 아닌 말코비치가 되어서 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어느 날 크레이그는 자신의 아내 로티에게도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가는 통로를 경험하게 해주는데, 이 경험들을 통해서 로티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질문은 심각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의 의식 깊이에는 무엇이 내재할까? 내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일까? 타자가 나의 의식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타자는 내 안의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타자는 나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게 되는 것일까?" 이렇게 '존 말코비치 되기'는 타인의 몸속에서 '나 아닌 그'가 되어봄으로서 역설적으로 '감춰진 자아'를 사색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아 보이고,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신앙의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에게 깊은 절망을 느끼고 신앙의 슬럼프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엘리야 같은 선지자입니다. 한때 그는 갈멜산에서 혈혈단신으로 우상숭배자 850명과 싸워 승리한 영웅입니다.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 앞에 당당히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도망 길에 오릅니다. 살기 위해 황급히 국경을 넘어 브엘세바까지 도망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 누워 그가 하는 독백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후에 걸어갈 발걸음을 토마스 머턴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켜라. 하나님의 숨을 호흡하라. 가능하면 하나님의 하늘 아래서 일하라. 그러나 도시에서 살며 기계들 가운데서 일하고 지하철을 타야 하며, 범람하는 라디오 뉴스가 귀를 멀게 하고, 건강을 해치는 음식을 먹어야하며. 주변사람들의 정서가 권태로움으로 마음을 병들게 하는 그런 곳에서 살아야한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잃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영혼에 심겨진 고독의 씨앗으로 받아들여라." 우리는 정말 무지막지한 공해와 소음 속에서 때로는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로 살기도 하고, 그러한 가운데 다른 이들보다 조금이라도 유능하다고 느끼면 이내 '날조된 위대성'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해야 하고,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성화의 여정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일상의 분주함도, 권태로움도, 때때로 내 삶 속에서 거두는 성과도 모두 내 영혼에 심겨진 고독의 씨앗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창조자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는 우리 존재의 가치를 '자기중심성' 안에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증된 당신 사랑 안에서 찾도록 하셨습니다. 이 진실을 숙고만 하는 것과, 이 진실을 체험하고 따르는 것은 다릅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신의 실체를 보았으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자신의 실존에 대한 성찰 없이 교리로만 믿는 믿음이 아닌가?
②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함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선 신앙인인가?
■ 읽기 | Lectio
구약 | 왕상 19:3-8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 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 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 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응송 | 시 46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 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서신 | 롬 7:18-24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 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복음 | 눅 15:13-20a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 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 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 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왕상 19:4, 5을 묵상하십시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 다"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엘리야의 마음은 어떤 상태입니까?
② 롬 7:21을 묵상하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 는 것이로다"는 바울의 고백에서 어떤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까?
③ 눅 15:17을 묵상하십시오.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깨달 은 아버지와 자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3. 성화 Ⅱ. 자아 성찰
믿음과 '칭의(稱義, Justification)'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을 향해 걷는 발걸음이 '성화의 입구'인 '신생(新生, New Birth)' 즉 '거듭남'을 통과해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구간을 지금 함께 걷고 있습니다. '신생'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성과 결정성'이 특징이라면,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과 성도 자신의 의지로서 내면이 느린 속도로 숙성되어 가는 '점진성'이 그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화의 이 '느림의 구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집니다. 마치 기차가 어느 구간을 느리게 통과할 때, 바깥 풍경을 더 세심하게 감상할 수 있듯이, 신자는 성화의 여정을 느리게 통과하는 동안 자신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찰이 깊고 성숙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에 한 발 더 바짝 다가서게 됩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크레이그 슈와츠'라는 거리의 인형술사가 등장을 하는데, 어느 날 그는 서류정리를 하다가 실수로 서류철을 캐비닛 뒤로 떨어뜨립니다. 그 서류철을 주우려고 캐비닛을 옮기던 중, 그는 이상한 문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놀랍게도 그 문은 유명한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로 연결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는 15분간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들어가 머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당시 관객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 무명의 인형극 연출가인 크레이그 슈와츠는 비록 15분간이지만, 자신이 아닌 말코비치가 되어서 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어느 날 크레이그는 자신의 아내 로티에게도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가는 통로를 경험하게 해주는데, 이 경험들을 통해서 로티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질문은 심각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의 의식 깊이에는 무엇이 내재할까? 내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일까? 타자가 나의 의식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타자는 내 안의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타자는 나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게 되는 것일까?" 이렇게 '존 말코비치 되기'는 타인의 몸속에서 '나 아닌 그'가 되어봄으로서 역설적으로 '감춰진 자아'를 사색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아 보이고,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신앙의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에게 깊은 절망을 느끼고 신앙의 슬럼프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오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엘리야 같은 선지자입니다. 한때 그는 갈멜산에서 혈혈단신으로 우상숭배자 850명과 싸워 승리한 영웅입니다.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 앞에 당당히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도망 길에 오릅니다. 살기 위해 황급히 국경을 넘어 브엘세바까지 도망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 누워 그가 하는 독백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왕상 19:4
한편으로는 자학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그를 보며 '이게 인간이다' 싶습니다. 하나님은 말없이 천사를 보내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놓아주십니다. 그리고 푹 자도록 그대로 놔두었다가 다시 천사를 통해 저를 어루만집니다. 기운을 낸 엘리야는 사십 주 사십 야를 걸어 호렙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산은 오래 전에 모세가 왕자에서 살인자로 전락했을 때, 40년 동안 숨어 살며 자신과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이 산에서 모세는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었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산으로 엘리야를 보내셨을까요? 그가 자신을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보면 바울 역시도 엘리야와 비슷한 고백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롬 7:18, 19
우리는 엘리야의 독백과,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보면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같은 고민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느 날 자신을 성찰하다가 놀랍게도 자신에게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을 원하는 마음은 자신에게 있지만, 그러나 선을 행함은 없었습니다. 선을 행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금껏 자기가 신앙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신앙이 아닌 고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은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며 절망스러워 하던 바울은 비로소 그리스도를 향해 정직하게 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롬 8:2에서의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로소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만이 죄와 사망에서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더러움과 무능함에 절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응송에서 시인은 이렇게 당부합니다.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시 46:10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토마스 머튼은 '침묵 속의 만남'에서 이런 기도를 주님께 올립니다. "오, 주님, 자신을 살펴볼 때 자신에게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라곤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 그런데 하나님, 그 허무는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당신 사랑으로 눈에 띄지 않게 채워진 허무입니다. 자기 안에 하늘나라를 갖고 있는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이제는 더 이상 주목할 만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 하나님, 그러나 그들 안에서 당신의 빛은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고 그 빛을 보는 모든 사람은 당신을 찬미합니다." 가만히 멈추어 자신을 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내가 눈여겨볼 만한 것이라곤 전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이 가난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 진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에게서 우리는 그 적나라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의 둘째아들에게서 보는 모습은 마치 삶의 극단적인 한계 상황에 도달해 있는 로뎀나무 아래 있는 엘리야 같은 모습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며 괴로워하는 바울 같은 모습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한때는 천하를 호령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진짜 자신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진짜 모습, 그 궁색한 몰골이 너무 놀라워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누가는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 눅 15:13
허랑 방탕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너무 많아서 자신도 하나님도 돌아볼 새가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허랑방탕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렇게 자신을 돈으로 포장하고 여자와 쾌락에 묻혀 젊은 한 때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자신을 지켜줄 것 같던 돈이 어느 날 보니까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 나라에 흉년이 닥쳐오고 말았습니다. 그 흉년은 단지 한 지역만 휩쓴 것이 아니고, 그가 이상향이라고 생각해서 찾아온 그 나라 전체를 휩쓸었습니다. 돈이 사라지니 어느 순간부터 친구도 여자도 다 사라지고 맙니다. 누가는 이때 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 눅 15:15a
그는 자기의 이상향이던 나라에서 더부살이 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눅 15:15b-16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먹지도 않을뿐더러 돼지를 치는 직업을 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돼지를 칠 뿐 아니라, 그 돼지의 먹이인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그마저 주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이상향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엄청난 자만을 비워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를 떠난 성공을 꿈꾸는 자만(自慢), 그것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떠난 자유 혹은 자기애(自己愛)라는 포승줄에 매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끌려 다니는 정처 없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 욕망이 우리 마음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지 우리는 눈치를 채야 합니다. 그렇게 에고의 주위를 맴도는 우리에게서 무슨 착한 것이 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 5:21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사 5:21 공동번역) 다행히 탕자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기적이고 신비입니다. 그 실패 가운데 주저앉아버리거나 자살하지 않고 그가 자신에게 정직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습니까?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 눅 5:17a
탕자가 어디로 돌이킵니까?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είς έαυτὁν δὲ ἐλθὼν)"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그는 자신에게로 왔다'입니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 자신의 허무를 정직하게 인정하면, 하나님은 당신 사랑으로 우리 내면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탕자는 모든 것이 없어져 가는 상황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자기 눈에 뜨인 자신은 돈도 친구도 여자도 이제는 다 옛날일 뿐인 영락없는 거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비참한 순간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독백을 보십시오.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눅 5:17b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절절한 깨달음과 아버지의 유능함에 대한 그리움이 지금 영상처럼 오버랩 되고 있습니다. 그에게 실패는 참으로 쓰라린 것이었지만, 그 실패를 딛고 회복한 믿음은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 길은 생명이 회복되는 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점진적으로 숙성되어 가는 이 성화의 여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 자신이고, 자신을 성찰하며 스스로의 무능함에 절망할수록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벗고 하나님께로 진정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씨앗'에서 자신의 거짓 자아에 대해 통렬하게 회개합니다. "나는 가면을 쓰고 태어났다. 나는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따라서 예정된 나 자신을 부정하는 누군가로 존재한 모순의 표징 안에서 태어났다. 처음부터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존재였기에, 나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였다." 그는 같은 책에서 자신이 쓰고 있다는 그 가면이 있게 된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내린 평가 때문이기도 했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숭배 때문이기도 했는데, 토마스 머턴은 그것을 '날조된 위대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그 날조된 위대성에 속아서 스스로에 대해 '내가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그 평가 안에서 비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갈멜산의 승리 후에 스스로 속아버렸던 자신이고(왕상 19:22-40), 사도 바울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알기 전에' 곤고함 속에서 마주했던 자신이고(롬 7:24),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친구들과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스스로에 대해 속아버렸던 자신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그 '날조된 위대성'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로 하여금 40주야를 호렙산을 향해 걷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사망의 몸'(롬 7:24)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지고 가서 자기 존재를 그 분께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에 대해 절망하던 끝에 '아버지를 향해' 돌아갑니다. 성화를 향한 점진적인 발걸음은 바로 이 회심(回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그리고 이후에 걸어갈 발걸음을 토마스 머턴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켜라. 하나님의 숨을 호흡하라. 가능하면 하나님의 하늘 아래서 일하라. 그러나 도시에서 살며 기계들 가운데서 일하고 지하철을 타야 하며, 범람하는 라디오 뉴스가 귀를 멀게 하고, 건강을 해치는 음식을 먹어야하며. 주변사람들의 정서가 권태로움으로 마음을 병들게 하는 그런 곳에서 살아야한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잃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영혼에 심겨진 고독의 씨앗으로 받아들여라." 우리는 정말 무지막지한 공해와 소음 속에서 때로는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로 살기도 하고, 그러한 가운데 다른 이들보다 조금이라도 유능하다고 느끼면 이내 '날조된 위대성'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해야 하고,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성화의 여정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일상의 분주함도, 권태로움도, 때때로 내 삶 속에서 거두는 성과도 모두 내 영혼에 심겨진 고독의 씨앗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창조자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는 우리 존재의 가치를 '자기중심성' 안에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증된 당신 사랑 안에서 찾도록 하셨습니다. 이 진실을 숙고만 하는 것과, 이 진실을 체험하고 따르는 것은 다릅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신의 실체를 보았으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 눅 15:20
우리 성화의 여정은 바로 이 통쾌한 회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 다시 내일부터 우리 모두는 회색 도시의 사람으로서, 기계들 가운데서 일하고, 지하철을 타야하며, 범람하는 뉴스를 들어야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정서의 권태로움을 견뎌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증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회색 도시를 사랑의 도시로 가꾸고, 기계들 가운데서 사람의 온기를 발현하며, 피곤한 지하철에 양보와 사랑을 꽃피우고, 겸손의 미덕이 뉴스가 아닌 상식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성화의 걸음을 인내심 있게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자신의 실존에 대한 성찰 없이 교리로만 믿는 믿음이 아닌가?
②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함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선 신앙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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