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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2주 그리스도인의 미와 완전 3 성화(聖化, Sanct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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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0-01-18 22:52
조회
1666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창 45:2-5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 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 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 셨나이다
응송 | 시 1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서신 | 빌 3:10-15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 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 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 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 타내시리라
복음 | 마 8:5-10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 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 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묵상 | meditatio
① 빌 3:12을 묵상하십시오. 이미 얻었다 함도,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바울이 오로지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② 창 45:5을 묵상하십시오. 요셉은 자신을 형들이 애굽에 팔아버린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③ 마 8:6을 묵상하십시오.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 로워하나이다"라는 백부장의 호소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이라는 표어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을 토대로 1월 첫 주에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하여, 1월 둘째 주에는 '신생(新生, New Birth)'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단계적으로 진보해서 완전에 이르는 과정을 칭의, 신생, 성화, 완전으로 인식했는데, 이것은 동방 교부인 마카리우스의 구원관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점진적으로 성화시켜서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주님의 당부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게 하시는데, 그 여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품위 있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생각해보았던 '신생' 즉 '거듭남'은 웨슬리에 따르면 '성화의 문' 즉 '성화의 입구'입니다. '신생(新生, New Birth)'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결정적이고 순간적이며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면, '성화'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느린 속도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웨슬리는 '신생의 결정성' 즉 순간적인 요소와 '성화의 과정' 즉 점진적인 요소에 주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웨슬리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칼빈 역시 구원론에 있어 '성화'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칼빈은 '개신교인은 선행을 간과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며, 칭의만 강조하고 선행을 무시한다'는 가톨릭의 비판에 맞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와 함께 연합함으로 이중은혜를 받는다. 첫 번째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자비로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하고 촉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비롯해 감리교와 장로교 등 개신교 신앙은 모두 구원의 여정에 있어 '성화'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거룩하게 됨'이며, 다른 표현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빌 2:5)이라 하겠습니다. 빌 1:6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자 심판의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거룩해져 가는 여정은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빌 3:19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네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자랑으로 생각하며, 땅의 일만을 생각한다며 분개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러한 '불초(不肖) 신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닮지 않은 신자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주님께서 당부하시는데, 우리는 어떤 신자인 걸까요?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예수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합니다.
"저녁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 가에서 있는 어느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당시 웨슬리가 체험한 이 뜨거움은 불처럼 뜨거운 체험만이 아니라,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뜻합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죄를 씻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간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후의 그의 삶은 이 체험의 의미를 확인하고, 가슴의 깨달음을 손과 발의 실천으로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개인적 성화는 물론이고 사회적 성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영국사회에 만연한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을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웨슬리를 교회 밖으로 내쳤지만, 웨슬리는 내쳐진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성화를 이루었습니다. 똑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같은 영국 안에서 노예제를 지속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노예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이성은 지금 과연 어디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요? 웨슬리는 믿음에서 출발해 성화에 이르는 여정을 부정적이고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탐구하였습니다. 먼저 믿음에서 출발해 성화에 이르는 여정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성화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육체의 본성을 죽여 철저하게 '잘라내는 것' 즉 거룩하지 못한 본성과 애착을 끊어내야 하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새로운 것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이 죽어야만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를 때, 우리로 와서 죽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에서 성화로 나아가는 여정에 우리는 이 '옛 자아의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성화의 긍정적인 면이 빛을 발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거룩한 성정(性情)이 우리의 내면에서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믿음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총은 말씀과 성찬을 통해 성화를 향해 자라갑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온유함과 겸손함의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출발해 성화에로 나아가는 여정은 마치 믿음의 모험과도 같이, 때로는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죽음을 통과하는가 하면, 때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 생명이 내면에 채워지는 짜릿한 반전이 거듭되는 여정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윤동주도 예수님을 향해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 라며 십자가의 역설을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역설을 통과하며, 모난 것은 깎이고, 내면의 미성숙함은 성숙해져서,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미와 완전이 우리 존재와 우리 공동체와 사회에 완성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교리로서의 믿음에 머물러 삶의 변화가 없는 신자이지 않은가?
② 참 믿음의 사람으로서 인격과 삶의 성화에로 나아가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구약 | 창 45:2-5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 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 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 셨나이다
응송 | 시 1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서신 | 빌 3:10-15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 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 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 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 타내시리라
복음 | 마 8:5-10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 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 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묵상 | meditatio
① 빌 3:12을 묵상하십시오. 이미 얻었다 함도,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바울이 오로지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② 창 45:5을 묵상하십시오. 요셉은 자신을 형들이 애굽에 팔아버린 이유 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③ 마 8:6을 묵상하십시오.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 로워하나이다"라는 백부장의 호소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3. 성화(聖化, Sanctification)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이라는 표어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을 토대로 1월 첫 주에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하여, 1월 둘째 주에는 '신생(新生, New Birth)'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단계적으로 진보해서 완전에 이르는 과정을 칭의, 신생, 성화, 완전으로 인식했는데, 이것은 동방 교부인 마카리우스의 구원관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점진적으로 성화시켜서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주님의 당부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게 하시는데, 그 여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품위 있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생각해보았던 '신생' 즉 '거듭남'은 웨슬리에 따르면 '성화의 문' 즉 '성화의 입구'입니다. '신생(新生, New Birth)'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결정적이고 순간적이며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면, '성화'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느린 속도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웨슬리는 '신생의 결정성' 즉 순간적인 요소와 '성화의 과정' 즉 점진적인 요소에 주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웨슬리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칼빈 역시 구원론에 있어 '성화'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칼빈은 '개신교인은 선행을 간과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며, 칭의만 강조하고 선행을 무시한다'는 가톨릭의 비판에 맞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와 함께 연합함으로 이중은혜를 받는다. 첫 번째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자비로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하고 촉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비롯해 감리교와 장로교 등 개신교 신앙은 모두 구원의 여정에 있어 '성화'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거룩하게 됨'이며, 다른 표현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빌 2:5)이라 하겠습니다. 빌 1:6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자 심판의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거룩해져 가는 여정은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빌 3:19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네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자랑으로 생각하며, 땅의 일만을 생각한다며 분개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러한 '불초(不肖) 신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닮지 않은 신자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주님께서 당부하시는데, 우리는 어떤 신자인 걸까요?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예수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합니다.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빌 3:10, 11
사도 바울이 알고 싶어 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이미 7절에서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다." 라고 고백했을 뿐 아니라, 8절과 9절에서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는 왜 그토록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며, 그는 왜 그토록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한 걸까요?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본받으려 한 것입니다. 그 소망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뺀 나머지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로지 그리스도께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믿음이 바울을 성화에로 이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칭의와 신생과 성화는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거룩한 믿음에서 거룩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계속되는 고백을 보십시오.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빌 3:12
그는 분명 회심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목표를 새롭게 세운 사람이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그리스도를 앎'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가 살아낸 '부활의 권능이 있는 삶'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바울의 고백에서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도달한 현재의 상태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표 사이의 갈등입니다. 나는 아직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열망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달려가노라'고 선언합니다.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빌 3:13, 14
그의 시선은 오로지 푯대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달려갑니다. 그는 이 '달려감'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완성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수도원 전통에서는 '수덕(修德) 생활'이라고 합니다. 수덕이란 '덕(德)'을 닦는다는 뜻이고, '덕(德)'이란 맑고 밝고 깨끗하며 고요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으로 지어나가는 행실과 살아나가는 삶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화의 여정인데, 이 여정은 마음과 행실로 사람의 덕을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모름지기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내면에 떨어진 겨자씨만한 믿음을 붙들고 기도하며 노력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살해의 위협을 받던 끝에 이집트로 인신매매를 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원한과 복수심에 불타고 있어야 할 그의 삶을 그다지 어둡게 그려내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팔려가서 이집트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을 때(창 39:1), 그는 그곳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성적 유혹을 당합니다.(창 39:11, 12), 그 때 요셉의 말이 이랬습니다.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 창 39:9
성경은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했지만, 요셉은 듣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창 39:10) 그는 자신의 불행을 동정하며 일탈하거나, 자기 불행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켰고, 자기를 아껴주는 주인의 신의에 보답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더더욱 끄는 것은 형들이 요셉을 찾아왔을 때입니다. 형들이 그를 찾아온 순간은 호의를 베풀 수도 있고, 마음의 복수를 이룰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알아보고 떨고 있는 형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창 45:5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사건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생명의 역사에 주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믿음으로부터 맺히는 열매가 분명합니다. 믿음이 아니라면 요셉과 같은 고백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상(模相)을 따라 이성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모상인 이성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건강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헤아려진 하나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 온전함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나아와서 이렇게 간구합니다.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 마 8:6
우리는 그의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언어, 그리고 자신의 하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하인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죽일 수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인은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하인을 사랑합니다. 그가 자기 하인을 부르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하인을 '파이스(παις)'라고 부릅니다. '파이스(παις)'는 하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아들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그가 자기의 하인을 아들처럼 여기고 사랑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마 8:10
주님은 그의 인격을 칭찬하시지 않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믿음과 성화는 다른 언어가 아닙니다. 믿음에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 믿음, 진정한 믿음은 사람의 이성과 인격에 영향을 끼치고,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자신의 온전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감리교회에 다닌 분들은 1738년 5월 24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웨슬리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그날, 그의 심령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저녁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 가에서 있는 어느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당시 웨슬리가 체험한 이 뜨거움은 불처럼 뜨거운 체험만이 아니라,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뜻합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죄를 씻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간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후의 그의 삶은 이 체험의 의미를 확인하고, 가슴의 깨달음을 손과 발의 실천으로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개인적 성화는 물론이고 사회적 성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영국사회에 만연한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을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웨슬리를 교회 밖으로 내쳤지만, 웨슬리는 내쳐진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성화를 이루었습니다. 똑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같은 영국 안에서 노예제를 지속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노예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이성은 지금 과연 어디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요? 웨슬리는 믿음에서 출발해 성화에 이르는 여정을 부정적이고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탐구하였습니다. 먼저 믿음에서 출발해 성화에 이르는 여정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성화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육체의 본성을 죽여 철저하게 '잘라내는 것' 즉 거룩하지 못한 본성과 애착을 끊어내야 하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새로운 것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이 죽어야만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를 때, 우리로 와서 죽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에서 성화로 나아가는 여정에 우리는 이 '옛 자아의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성화의 긍정적인 면이 빛을 발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거룩한 성정(性情)이 우리의 내면에서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믿음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총은 말씀과 성찬을 통해 성화를 향해 자라갑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온유함과 겸손함의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출발해 성화에로 나아가는 여정은 마치 믿음의 모험과도 같이, 때로는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죽음을 통과하는가 하면, 때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 생명이 내면에 채워지는 짜릿한 반전이 거듭되는 여정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윤동주도 예수님을 향해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 라며 십자가의 역설을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역설을 통과하며, 모난 것은 깎이고, 내면의 미성숙함은 성숙해져서,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미와 완전이 우리 존재와 우리 공동체와 사회에 완성되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교리로서의 믿음에 머물러 삶의 변화가 없는 신자이지 않은가?
② 참 믿음의 사람으로서 인격과 삶의 성화에로 나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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