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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1주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2. 신생(新生, New B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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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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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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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겔 36:24-28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 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 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 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 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응송 | 시 63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 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서신 | 벧전 1:3-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 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복음 | 요 3:3-8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 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3:5을 묵상하십시오.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② 겔 36:25-26을 묵상하십시오. 맑은 물이 정결케 하는 물이라면, 새 영 즉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③ 벧전 1:3-4을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 도에게 주어지는 산 소망은 무엇으로 연결되는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오늘은 그 아름다움으로 가는 두 번째 여정인 '신생(新生, New Birth)'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신생'을 다른 말로 '중생(重生, regeneration)'이라고도 하는데, '성령으로 난 사람(born of Spirit)' 혹은 '거듭난 사람(born again)'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born of God)'을 뜻합니다. 이 신생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께서 '거듭난 사람' 혹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이 있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느 날 밤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인데, 요한은 이 사람을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요 3:1) 라고 소개합니다. 신학자이고 수도원장이기도 한 안셀름 그륀(Anselm Grun)은 밤중에 예수를 찾아 온 니고데모의 내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인간의 삶이 어떻게 실현되고, 어떻게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유대인의 물음만이 아니라 그리스인의 전형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든 시대의 전형적인 물음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 나선 때가 밤이라는 시간 설정은 요한복음에서 항상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밤은 여기서 내적 어둠과 암흑, 감각의 무디어진 상태를 상징한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괴로운 나머지 예수를 찾아 나서고, 그분에게서 자신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를 원한다." 무의미한 삶에 괴로웠던 니고데모, 그래서 '인간의 삶'과 '온전한 구원'에 관한 물음을 품고 밤중에 당신을 찾아온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으로 피신한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몰고 호렙산에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데, 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습니다.(출 3:2) 그리고 그는 신비한 불꽃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하신 말씀이 이랬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신을 벗으라"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샬 네알레카(ךילענ־לשׁ)'인데, 고대근동 사람들이 신 앞에 나아갈 때, 육체의 덮개를 벗듯이 너도 그렇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네 길'을 걷지 말고 '나의 길'을 걸으라는 뜻이겠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것'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껏 모세는 자기 신을 신고, 자기가 뜻하는 곳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자기 방식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는 양 갈래 길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의 실존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을 선포하시고, 삶의 짐들을 지워, 에덴동산 밖으로 내쫓으셨습니다. 에덴동산 밖, 그 낯선 땅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을 낳았고, 그들의 삶은 인류 앞에 열려진 두 가지 삶의 길을 보여줍니다. 첫째 아들 가인은 질투에 휩싸여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창 4:3-8) 하나님은 가인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시지만,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 자식 에녹을 낳고 도시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정합니다.(창 4:17)
하나님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에 아담과 하와에게 또 한 명의 아들을 허락합니다. 하와는 그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습니다. 셋 역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로 짓습니다. 창 4:26에 의하면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가인과 에녹의 길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자신의 힘과 욕망대로 사는 삶이라면, 셋과 에노스의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 거듭난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기 '이전'의 모세나 가인 혹은 에녹과 같은 그런 삶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 신'을 벗고 '하나님 뜻'을 따라 살기 시작한 모세와 같은 삶,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셋과 에노스와 같은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내 삶에도 열매가 맺히는데, 그 첫 열매는 '참 믿음의 열매'입니다.
'신생' 즉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은 첫째로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을 넘어섭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명제나 신구약 성경에 함의된 어떤 명제에 대한 단순한 동의를 넘어섭니다. 만약 믿음이 거기서 그치는 것이라면 마귀들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에 따르면 귀신들에게도 그만한 믿음은 있다는 것입니다.(약 2:19)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고 떨지만, 그러나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약 2:17)이며, '헛것인 믿음'(약 2:20)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기만 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지만 경외함도 순종도 없는 믿음입니다. '신생' 즉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은 내 안에서 내적 기질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믿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쌓은 공로나 의가 결코 자기 죄를 대속할 수 없음을 자각해서, '자기 육체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리고 단지 불쌍한 자, 자기 파괴자, 무력한 죄인으로서 입을 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을 벗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은 지속적으로 죄를 이기고 악한 말과 악한 행위를 마침내 이기게 됩니다. 성령으로 난 믿음, 거듭난 믿음이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품으로부터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평화의 열매도 아름답게 맺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르익은 곳에는 사람과의 평화도 무르익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 있는 곳에 맺히는 또 하나의 열매는 '소망'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 있는 곳에 맺히는 또 하나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과거의 경험 속에 박제화 된 죽은 믿음의 사람이지 않은가?
② 성령으로 거듭나 참 믿음, 참 소망, 참 사랑을 맺고 있는가?
■ 읽기 | Lectio
구약 | 겔 36:24-28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 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 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 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 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응송 | 시 63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 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서신 | 벧전 1:3-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 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복음 | 요 3:3-8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 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요 3:5을 묵상하십시오.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② 겔 36:25-26을 묵상하십시오. 맑은 물이 정결케 하는 물이라면, 새 영 즉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③ 벧전 1:3-4을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 도에게 주어지는 산 소망은 무엇으로 연결되는 것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2. 신생(新生, New Birth)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이라는 표어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성구가, 2020년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그 첫 번째 실천과제로서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존 웨슬리의 구원 이해는 '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함으로서 '오직 믿음'이라는 개혁자들의 전통 위에 견고히 서 있으면서, 동시에 '신생 즉 거듭남'과 '성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혹은 '완덕(完德)'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전통을 잘 아우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 영적 여정을 충실히 따름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가 온전해질 때, 그 여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美)'입니다. 결코 광신적이지 않고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 그 향기롭고도 절제된 그리스도인다움이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점진적인' 구원의 여정 속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오늘은 그 아름다움으로 가는 두 번째 여정인 '신생(新生, New Birth)'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신생'을 다른 말로 '중생(重生, regeneration)'이라고도 하는데, '성령으로 난 사람(born of Spirit)' 혹은 '거듭난 사람(born again)'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born of God)'을 뜻합니다. 이 신생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께서 '거듭난 사람' 혹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이 있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느 날 밤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인데, 요한은 이 사람을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요 3:1) 라고 소개합니다. 신학자이고 수도원장이기도 한 안셀름 그륀(Anselm Grun)은 밤중에 예수를 찾아 온 니고데모의 내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인간의 삶이 어떻게 실현되고, 어떻게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유대인의 물음만이 아니라 그리스인의 전형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든 시대의 전형적인 물음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 나선 때가 밤이라는 시간 설정은 요한복음에서 항상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밤은 여기서 내적 어둠과 암흑, 감각의 무디어진 상태를 상징한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괴로운 나머지 예수를 찾아 나서고, 그분에게서 자신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를 원한다." 무의미한 삶에 괴로웠던 니고데모, 그래서 '인간의 삶'과 '온전한 구원'에 관한 물음을 품고 밤중에 당신을 찾아온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요 3:3
주님의 이 말씀의 속뜻은, 비록 그가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그럴듯한 외적 신분과 달리 그는 지금 하나님 없는 사람이고, 그런 면에서 이방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R. 래리 쉘턴(R. Larry Shelton)에 따르면 신생 혹은 중생의 개념이 유대문화와 헬라문화 모두에서 자연이나 개인의 삶속에 나타난 결정적인 변화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의 이 갈급한 내면에 '거듭남'이라는 화두를 제시하신 듯싶습니다. 우리는 이 거듭남의 신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일찍이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생'을 기대했는데, 그들이 기대한 신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와 연관됩니다. 사 65: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고 이 말씀은 사 66:22에서 이렇게 연결됩니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대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그 사역을 감당할 주체로서 하나님은 '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힘'으로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훗날 사도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그러니까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꿈꾸었던 우주적 신생이 하나님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인데,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 성취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베드로가 믿음으로 바라보던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도 요한은 지금 내가 '보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고백의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창조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함께 도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에 이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사건이 장차 모든 인류에게 일어날 새로운 재창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오순절 날 공동체에 임하신 성령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남의 방법을 묻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 3:5
여러분은 이 말씀이 금방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가십니까? 사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에서 뭉클하고 뜨겁게 공명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구약 학자였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에스겔 36장의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 겔 36:24-28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의미는 바로 이 말씀의 요약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맑은 물은 정결케 하는 물이고, 새 영은 새 창조를 일으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광경을 에스겔 선지자가 목격하고 겔 37:5-10에서 이렇게 전해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성령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오면 이렇게, 우리 육신에서도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뿐만 아니라,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살아나듯이, 우리가 새로이 창조되어 살아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실례(實例)를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체험에서 볼 수 있습니다.살인자가 되어 미디안으로 피신한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몰고 호렙산에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데, 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습니다.(출 3:2) 그리고 그는 신비한 불꽃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하신 말씀이 이랬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신을 벗으라"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샬 네알레카(ךילענ־לשׁ)'인데, 고대근동 사람들이 신 앞에 나아갈 때, 육체의 덮개를 벗듯이 너도 그렇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네 길'을 걷지 말고 '나의 길'을 걸으라는 뜻이겠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것'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껏 모세는 자기 신을 신고, 자기가 뜻하는 곳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자기 방식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는 양 갈래 길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의 실존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을 선포하시고, 삶의 짐들을 지워, 에덴동산 밖으로 내쫓으셨습니다. 에덴동산 밖, 그 낯선 땅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을 낳았고, 그들의 삶은 인류 앞에 열려진 두 가지 삶의 길을 보여줍니다. 첫째 아들 가인은 질투에 휩싸여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창 4:3-8) 하나님은 가인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시지만,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 자식 에녹을 낳고 도시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정합니다.(창 4:17)
하나님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에 아담과 하와에게 또 한 명의 아들을 허락합니다. 하와는 그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습니다. 셋 역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로 짓습니다. 창 4:26에 의하면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가인과 에녹의 길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자신의 힘과 욕망대로 사는 삶이라면, 셋과 에노스의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 거듭난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기 '이전'의 모세나 가인 혹은 에녹과 같은 그런 삶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 신'을 벗고 '하나님 뜻'을 따라 살기 시작한 모세와 같은 삶,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셋과 에노스와 같은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내 삶에도 열매가 맺히는데, 그 첫 열매는 '참 믿음의 열매'입니다.
'신생' 즉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은 첫째로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을 넘어섭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명제나 신구약 성경에 함의된 어떤 명제에 대한 단순한 동의를 넘어섭니다. 만약 믿음이 거기서 그치는 것이라면 마귀들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에 따르면 귀신들에게도 그만한 믿음은 있다는 것입니다.(약 2:19)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고 떨지만, 그러나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약 2:17)이며, '헛것인 믿음'(약 2:20)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기만 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지만 경외함도 순종도 없는 믿음입니다. '신생' 즉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은 내 안에서 내적 기질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믿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쌓은 공로나 의가 결코 자기 죄를 대속할 수 없음을 자각해서, '자기 육체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리고 단지 불쌍한 자, 자기 파괴자, 무력한 죄인으로서 입을 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을 벗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은 지속적으로 죄를 이기고 악한 말과 악한 행위를 마침내 이기게 됩니다. 성령으로 난 믿음, 거듭난 믿음이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품으로부터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평화의 열매도 아름답게 맺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르익은 곳에는 사람과의 평화도 무르익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 있는 곳에 맺히는 또 하나의 열매는 '소망'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벧전 1:3, 4
베드로가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의 열매로서 맺힌 소망에 대해 '산 소망'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죽은 소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이 있듯이 '산 소망'도 있는가 하면, '죽은 믿음'이 있듯이 '죽은 소망'도 있습니다. 죽은 소망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죽은 소망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소망은 교만한 자아(自我)에서 나온 것이라서 이후 모든 사람의 악한 말과 행위의 아비가 됩니다. 반면 산 소망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 역시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소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나의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깨끗하신 것 같이 나도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 있는 곳에 맺히는 또 하나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롬 5:5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하나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사랑은 나의 의지로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로서 거듭난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요? 첫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요일 5:1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나를 낳아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 다른 '그 분이 낳으신 예수님'도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웃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까닭에 하나님 사랑의 현시(顯示)인 예수 그리스도와 또 다른 예수인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 받은 이후에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성령이 지금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과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시냐고 묻는 것입니다. '과거'에 받았던 세례와 은혜로 '지금'을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세례 받은 탐욕장이, 세례 받은 험담장이, 세례 받은 거짓말쟁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열매는 하나님께로부터, 성령께로부터 맺혀진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자아의 열매일 뿐입니다. '과거'에 물로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면, '지금'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축복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거듭난 성도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과거의 경험 속에 박제화 된 죽은 믿음의 사람이지 않은가?
② 성령으로 거듭나 참 믿음, 참 소망, 참 사랑을 맺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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