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탄 후 제2주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1. 칭의(Justification)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1-05 11:10
조회
1410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구약 | 합 2:2-4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응송 | 시 1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서신 | 롬 4:5-9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복음 | 요 1:9-14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롬 4:5을 묵상하십시오. 혹 일을 아니하거나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실 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합 2:4을 묵상하십시오. 혹 마음이 교만하거나 그 속이 정직하지 못할지라도 그가 살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③ 요 1:12을 묵상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권세가 주어진다고 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칭의를 영어로는 'Justificaton'이라고 합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뜻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 칭의(稱義)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이고, 성경이 말하는 칭의 안에는 아주 감격스러운 측면이 깃들어 있습니다. 칭의의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하라면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겁니다. 이 선언은 죄인의 법적 책임을 제거시키는 것이고 죄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출 23: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그리고 신 25:1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재판의 엄숙성을 봅니다. 의인을 의롭다 하고, 악인을 악하다 하는 것이 재판입니다. 그래서 이 재판에는 반드시 어떤 쪽으로든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의인에게는 석방이 주어지겠지만, 악인에게는 형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형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형벌은 무섭습니다. 성 밖으로 쫓아내든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치든지 입니다. 그러니 이 재판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곧 '죽음에서 살아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이 주어졌습니다. 스물여덟 살의 사형수에게 그 최후의 5분은 짧았지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오늘까지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작별 인사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 난 그는 사형집행 직전의 그 5분간을 생각하며 평생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됩니다. 그 사형수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극적으로 목숨을 보전하게 된 이 '의롭다 함'을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오'라고 합니다. 감격스러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가 쌓아올린 공로와 의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가?
②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는가?
■ 읽기 | Lectio
구약 | 합 2:2-4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응송 | 시 1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서신 | 롬 4:5-9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복음 | 요 1:9-14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묵상 | meditatio
① 롬 4:5을 묵상하십시오. 혹 일을 아니하거나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실 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합 2:4을 묵상하십시오. 혹 마음이 교만하거나 그 속이 정직하지 못할지라도 그가 살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③ 요 1:12을 묵상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권세가 주어진다고 했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그리스도인의 美와 완전 1. 칭의(Justification)
2020년 우리교회의 표어는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입니다. 표어에 따른 성구는 마 5:48의 말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이고, 실천과제는 ①칭의(Justification, 롬 4:5), ②신생(New Birth, 요 3:8), ③성화(Sanctification, 빌 3:12-15), ④완전(Perfection, 히 6:2)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자기중심을 떠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며, 역사 가운데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 형상을 인간에게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길잡이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여정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신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부응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완전' 즉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2020년 표어를 '그리스도인의 미(美)와 완전'으로 정하고, 그 과정으로서의 실천과제를 칭의, 신생, 성화, 완전으로 정한 이유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구원의 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아름다움 또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의 구원 이해는 '칭의(Justification)'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함으로서 '오직 믿음'이라는 개혁자들의 전통 위에 견고히 서 있으면서, 동시에 '신생 즉 거듭남'과 '성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혹은 '완덕(完德)'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전통을 잘 아우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구원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美)'입니다. 결코 광신적이지 않고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점진적인 구원의 여정' 속에서 자연스레 우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과 '그에 대한 성도의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의 여정이 '성화'라는 순례 길을 통과해 마침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도달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드러내는 아름다움은, 세상을 향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지'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 때 비로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주님의 소명(召命)에 부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출발선인 칭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성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칭의를 영어로는 'Justificaton'이라고 합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뜻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 칭의(稱義)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이고, 성경이 말하는 칭의 안에는 아주 감격스러운 측면이 깃들어 있습니다. 칭의의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하라면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겁니다. 이 선언은 죄인의 법적 책임을 제거시키는 것이고 죄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출 23: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그리고 신 25:1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재판의 엄숙성을 봅니다. 의인을 의롭다 하고, 악인을 악하다 하는 것이 재판입니다. 그래서 이 재판에는 반드시 어떤 쪽으로든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의인에게는 석방이 주어지겠지만, 악인에게는 형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형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형벌은 무섭습니다. 성 밖으로 쫓아내든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치든지 입니다. 그러니 이 재판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곧 '죽음에서 살아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이 주어졌습니다. 스물여덟 살의 사형수에게 그 최후의 5분은 짧았지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오늘까지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작별 인사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 난 그는 사형집행 직전의 그 5분간을 생각하며 평생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됩니다. 그 사형수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극적으로 목숨을 보전하게 된 이 '의롭다 함'을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오'라고 합니다. 감격스러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롬 4:5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우리는 이 짧은 문장 안에서 극적인 반전을 보게 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에게는 형벌이 내려야 하는데, 오히려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의 상황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창 1:27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듯 사람도 거룩하고,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듯, 사람도 자비로우며, 하나님이 완전하시듯, 사람도 완전하며(마 5:48), 하나님이 사랑이시듯, 사람도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거했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거하셨습니다.(요일 4:16) 이 처음 낙원에서의 사람은 하나님을 알았고, 알았기에 거룩했고 행복했으며, 참된 기쁨이 그의 내면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영생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이 낙원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법을 주시며, 복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6, 17a)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을 어겼을 경우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b)고 형벌을 첨부하셨습니다. 사람은 이 법을 지켰을까요? 사람은 이 법을 지키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대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은 영(靈)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죽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죄와 형벌은 온 인류에게로 확대되어 전해졌습니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롬 5:12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형벌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요한은 우리를 찾아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로고스 찬가'로 잘 알려진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신학적 가사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 1:9-14
한 시인은 이 말씀을 묵상하던 끝에 벅찬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상이 고요 속에 잠기고 밤은 달려서 그 한 허리에 다다랐을 때, 주여, 전능하신 말씀이 하늘 보좌(寶座)에서 내려오셨나이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신비를 기념하오니, 당신 본성으로는 볼 수 없었던 성자께서 우리 인성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나시고, 시간을 초월하여 성부께로부터 나신 성자로서, 시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타락한 만물을 일으키시어 당신 안에 온전히 새롭게 하시고, 버림받는 인류를 다시 천국으로 불러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과 우리도 주를 기리며 축제의 기쁨을 소리 높여 노래하나이다." 만약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를 휘감은 어둠을 어쩌지 못하고 실의와 절망 가운데 태어나고 죽을 것입니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죽는 사람들을 향해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빛이 없기에 집착과 망상에 사로잡혀 살다가 죽는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창조의 첫 아침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던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따라서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 오늘 요한복음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새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 빛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말씀에 따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요 1:12)에게만 빛 안에서 살아가는 은총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설명하는데, 롬 1:16에서 그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소개하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라고 단언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이 감격스러운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의가 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義'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3:21, 22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마침내 이렇게 선언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가 만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義)'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칭의'는 하나님께서 판단착오로 사람에게 속아서 불의한 사람을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못 보셨거나 잘못 평가하셔서 실제로는 불의한 우리를 의롭다고 믿고 계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호소력 있는 당신 아들의 피로 마음이 누그러지신 그 분이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으로, 당신의 의(義) 혹은 자비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롬 3:25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리고 마침내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 롬 4:7-8
그러면 바울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합니다.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 롬 4:9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 받은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창 15:1-6의 말씀을 인용해 말씀한 것입니다. 일찍이 하박국 선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 말씀한 바 있습니다.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합 2:4
그러니까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칭의(稱義))의 개념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자기주장이 아니라 '말씀을 믿는 믿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과 말씀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다는 뜻인데, 다르게 표현하면 무형의 말씀에 의해 아름다운 유형의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말씀에 기초한다는 것은 이렇게 위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도 철저하게 말씀에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칭의에 도달하는 믿음'일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고, 말씀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함 받았음을 깨달아야 하고, 말씀에 비추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이 '신생(New Birth)' 즉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믿음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가 쌓아올린 공로와 의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가?
②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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