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대림절 제3주 믿음이 있는 기다림
■ 읽기 | Lectio
구약 | 사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 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응송 | 시 146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서신 | 약 5:7-10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복음 | 마 11:2-11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35:4-6을 묵상하십시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회복과 치유는 누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입니까?
② 마 11:4, 5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 신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이란 5절에 따르면 어떤 것들입니까?
③ 약 5:7, 8을 묵상하십시오.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는 농부의 자세 중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것은 무엇입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믿음이 있는 기다림
오늘 우리는 대림절 세 번째 초를 밝혔습니다. 대림절이 한 주간씩 지나며, 기다림의 시간이 깊어지고, 오시기로 약속된 그 분에 관한 말씀들을 전해 들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배움의 기간'이라 했던 헨리 나우웬의 고백에 공감이 갑니다. 대개 기다림에는 조바심이 동반됩니다. "이 기다림이 의미 없이 끝나는 건 않을까?" 하며 기대만큼 초조함도 내면에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영원한 계절'에서 이렇게 단언합니다."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림절은 장차 일어난 그 어떤 아름다운 광경에 대한 기대 때문에 내적 초조함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반대로 내적 평온과 기쁨을 심화시킨다. 기다리고 있는 그 분이 이미 오신 분으로서 내 마음의 고요 속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기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를 감각적으로 느끼기에 출산하는 날 놀라는 일이 없다. 오히려 기다림 속에서 이미 알게 된 그 아기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듯 우리도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내 존재의 중심에 영접하는 것이기에 이 대림절은 초조함보다는 설렘이 짙어가는 계절이고, 그런 만큼 나의 내면을 단장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를 바로 그 기다림과 그에 따른 설렘과 기대 안으로 초청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오셔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며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 6)고 예언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마 11:3) 라고 제자들을 보내 초조하게 물어올 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마 11:4)며 오늘 구약성경 5절과 6절에서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즉 맹인이 보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저는 자가 사슴 같이 뛰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지금 당신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사 40:3, 마 3:3)로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마 3: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하는 천국을 맞이하기 위해 '철저히 회개할 것'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그리도 간절하게 호소하던 세례 요한이고 보면 그가 옥중에서 보여주는 이 초조한 모습은 너무 낯설고 연민을 갖게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초조함과 조바심에서 나의 초조함과 조바심이 오버랩 되며 내심으로는 참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공감이 동시대 사람들에게나, 그 이후 사도들에게도 같은 마음이어서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야고보도 이렇게 간절하게 당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b-8)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행복함에 머물러 계십니까? 아니면 세상 염려와 초조함으로 타들어가고 계십니까?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 사 35:1, 2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의 근거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폐허 위에 서 있습니다. 치열했던 에돔과의 싸움이 그들을 광야 메마른 땅에 궁핍하게 놓이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사막이 백합처럼 피어나는 이상(사 35:1)을 보여주며, 그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선포합니다. 이 희망은 단순한 충동이나 들뜸이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에 기초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의미 가득한 희망입니다. 따라서 이 희망은 획득한 희망이 아니라 베풀어진 희망이고, 이미 그 자체로서 구원의 열매요 징표인 희망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 사 35:3, 4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 이것은 어지간한 걱정이나 염려에서 오는 현상이 아닙니다. 원문대로 하면 '밑으로 쳐진 손', '흔들리는 무릎'이라는 의미인데, 지금 그들은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무서움에 손은 축 쳐져 있고 무릎은 떨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삶을 영위해 갈 만한 모든 힘을 상실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사 35:4a),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원하신다"(사 35:4b) 요즘처럼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이 말씀에 우리의 희망을 두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감정적인 충동이나 들뜸이 아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믿음으로써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희망, 획득한 희망이 아니라 베풀어진 희망, 이미 그 자체로 구원의 열매인 희망, 그런 희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되는 이사야의 희망 이야기를 보십시오.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사 35:5, 6
맹인과 귀머거리 이야기는 이사야 6장에서부터 등장하는 주제인데, 지금 이사야가 언급하는 맹인과 귀머거리는 육체적인 장애와 영적인 장애 모든 상황에 대한 언급입니다. 육체의 장애로 보거나 걷지 못하는 것도 아픔이지만, 영적 완악함과 강퍅함으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 편에서는 모두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육체와 영을 함께 어루만져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예언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생태계의 회복도 함께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이 회복되는 것과 생태계가 회복되는 것을 동시적, 동연적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는 상생의 관계인 것인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나라와 나라 모두 더불어 건강해야 모두 함께 건강한 법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여기셨는지,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을 재차 조명해 주십니다.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마 11:2, 3
요한의 이 질문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그토록 명쾌하게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했던 요한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30)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본 요한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의심하는 듯한 요한의 이 질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제로 요한이 지금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신 6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도 부인할 수 있는 사실인 듯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떤 점을 의심한 걸까요? 그가 마음의 여유를 잃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지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롯이 그를 사해 동쪽 마케루스(Machaerus) 요새에 있는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수감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나 정작 요한을 괴롭혔던 것은, 옥에 갇혀 있다든지 죽음이 임박해 있다든지 하는 그런 신상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시점은 제자들이 그에게 예수님의 근황을 전한 직후였습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히기 직전까지 그리스도의 힘찬 모습을 예언했었습니다. 그가 예언한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고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의 곡식을 거침없이 가려내는 심판자였습니다.(마 3:11, 12) 그러니까 요한은 메시아 사역의 주제를 '심판'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찾아와 전한 예수의 모습은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예수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간격이 생긴 것입니다. '메시야 사역에 대한 이해의 다름' 요한은 바로 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이 옳은 해석이라면,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에 대한 어떤 '관(觀)'을 구축해놓지 말고 다가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가 바라는 예수'가 아닌, '있는 그대로', '나타난 그대로'의 예수님으로 받아들여 믿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 입장에서는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 비천하고 나약하신 예수보다는 힘 있고, 능력 있는 예수님이 더 대하기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의 질문은 역설적으로 나타난 그대로의 예수님 모습이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한의 실망과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태의 진술에 의해 더욱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다시 전해들은 대답은 '인간 예수'가 행하신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마 11:4, 5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이 오늘 구약에서 선포되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어떠했습니까?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게 된다는 겁니다.(사 35:5, 6) 그러고 보면 애초부터 이사야가 노래한 메시아는 요한이 기대했던 '심판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의 메시아', '사랑의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노래가 '지금'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요한이 자신의 의심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려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즉 그는 마지막 율법으로서 복음을 세상에 소개하는 '소리'였습니다. 요 1:7은 그의 임무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그의 임무는 빛을 소개하고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외쳤던 논리대로 다시 말한다면, 율법 다음에 세상에 비치는 빛은 복음이었고, 율법은 복음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으며, 율법은 쇠해야 하고 복음은 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율법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가 마케루스의 감옥 안에 갇혀 있듯이, 마케루스의 쇠창살이 그를 감금하고 있었듯이, 그는 심판이라는 율법의 쇠창살에 갇혀있었습니다. 율법의 한계는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끝까지 용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끝까지 사랑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역할은 오로지 심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도 예수와 복음에 대해 좀 더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마 11:6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실제로 예수님 때문에 화를 내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메시아 스캔들'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믿는 성도들에게 보배로우신 존재이지만, 그러나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부딪히는 존재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존재요, 화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타나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마 11:7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 마 11:9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 광야까지 왜 요한을 찾아 갔던 것일까요? 참 선지자의 외침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암흑시대를 살면서 그들의 영혼은 목마름에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목마름이 아니라면 그 거칠고 척박한 광야까지 요한을 찾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실상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거짓 자아가 다 찢겨나가고 참 자아와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연어가 고향을 찾아가듯 영혼의 본향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우리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광야에 참으로 잘 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광야에서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마 11:11a)인 요한을 만나 마침내 회개할 수 있었고, '회개의 세례'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마 11:11b
물론 이 말씀은 아직 율법 안에 있는 요한의 실존에 대해 하신 말씀이지, 그를 비하해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율법의 시각에 사로잡혔을 때, 그 역시 '흔들리는 갈대'였음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대림절을 지나는 동안 주님을 묵상하며 새삼 복음의 은총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요한이 소유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용서와 사랑과 구원 그리고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과 다시 오심, 적어도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복음 안에서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성도라면 우리는 분명 세례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시선'과 '기다림의 설렘'을 우리의 가슴에서 멀리 떨어뜨리면 안 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약 5:7, 8
농부는 밭을 골라 씨앗을 심은 후에 서두르지도, 조바심 하지도 않습니다. 때가 오면 이른 비가 뿌려지고, 때가 오면 늦은 비가 뿌려지고, 그 비를 머금어 싹을 틔우고 마침내 열매가 맺힐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흙을 믿거나 심겨진 씨앗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흙과 씨앗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그렇듯이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이 있는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요한의 조바심과 의심과 초조함을 넘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요한보다 큰 자로서 의심과 조바심이 아닌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함으로서 마침내 아기 예수님께서 비천한 마구간으로 오셨듯이, 내 가슴에 탄생하시는 그런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 생각'이 예수님의 일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지 않는가?
②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성경말씀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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