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PDF
성령강림 후 마지막주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읽기 | Lectio
구약 | 렘 23:1-6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 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응송 | 시 46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서신 | 골 1:11-20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복음 | 눅 23:33-43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 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 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렘 23:3-6을 묵상하십시오. 거짓 목자 대신 나서신 하나님은 유다의 구원의 시기를 어느 때에 맞추고 계십니까?
② 눅 23:39-42을 묵상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행악자는 자신의 구원의 때를 어디에 맞추고 있습니까?
③ 골 1:15-18을 묵상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실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 기 도 | Oratio
■ 묵상 나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난 해 6월 개봉한 '아일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한 터키 병사 슐레이만과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일라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가슴 아픈 순간들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는데, 그 중 주연 배우인 김설이 직접 부른 '아리랑'은 어린 아이 특유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음성으로 전쟁이 가져다 준 아픔들을 가슴에 전달해 줍니다. 어쩌면 아리랑만큼 우리 민족의 가슴에 저며 있는 시대의 아픔을 잘 다독여주는 노래도 드물겠습니다. 아리랑이 처음 기록으로 남은 것은 1790년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실린 '농부사(農夫詞)'의 후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세기 후반 경 농부들이 '아리랑'과 유사한 이 노래를 곧잘 불렀는데, 이 노래가 공동체의 생산 활동과 관련된 민중의 소망이 담긴 흙의 노래였다는 점, 그러던 것이 구한말 대원군 섭정기와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 거친 민족의 위기를 거쳐 오면서, 사회적 요구와 추세에 따라 점점 민중을 넘어 민족의 절실한 소리로 수용되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이 노래에는 우리 근대사의 애환이 고루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대의 애환을 담아낸 노래는 사실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 모든 나라마다에는 자기들 시대의 애환과 요구를 담은 이런 '시대의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현세에 희망을 둘 수 없어서 먼 미래에 희망을 둘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읽다 보면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렘 8:18)라고 노래하는가 하면,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렘8:21) 라고 애통함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기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토록 슬퍼하며 노래했던 것일까요?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 조국이 망하는 순간을 직접 경험한 선지자였습니다. 자기 조국이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비통함, 그것은 일제에 강제로 합병되던 순간을 경험한바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공감할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던 당시 유다의 왕은 시드기야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고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는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죽었습니다.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질병에 걸려 죽었고, 전쟁이 끝난 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남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지식인들과 기술자도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유다 땅에는 주로 하층민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런데 조국의 몰락보다 더 가슴 아픈 건 몰락 직전에 사람들이 보인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 라며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위협하는가 하면,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을 때는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렘 26:8b) 라며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그를 겁박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나마 정직했던 요시아 왕이 죽자 유다의 왕들은 노골적으로 친 이집트 정책을 펼치며 이집트의 힘을 빌어서 바벨론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신탁을 전한다는 선지자들조차 하나님보다 이집트를 더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렘 2:8) 이게 당시 유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심지어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시 목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 렘 23:2a
1절에서는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라고 그들을 나무라셨던 하나님께서 2절에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흩으며,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겔 34:4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시 목자들을 향해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라고 나무라시며,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를 치는 목자들이 쫓기는 자를 돌보고, 상한 자를 싸매 주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기를 바라시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양 떼를 흩으며 몰아내고 돌보지 않는 그들을 보며 마음이 아프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 렘 23:2b
그러면 이렇게 악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신 후에 하나님의 대안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 렘 23:3, 4
하나님께서는 '내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대개 인칭 대명사를 필요로 하지 않은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즉 '와아니(ינאו)'라고 말씀하심으로서 당신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십니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표현하면, 이 말씀은 "내가 내 양 떼의 나머지를 내가 내쫓았던 모든 땅들로부터 모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거주지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입니다.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 렘 23:5, 6
하나님은 5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라고 말씀하시고, 6절에서도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라며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때' 그리고 '그의 날'은 '시간으로 계산되는 어떤 시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시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실 때'인데, 사실 이 '메시아의 시간'이라는 것이 믿음의 시선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참 막연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대개 이럴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이건 희망이 아니라 '희망 고문'입니다. 왜 주님은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불의한 자들은 역사를 유린하고 자기 백성을 다 흩어지게 하고 있는데 왜 주님은 '때가 이르도록' 기다리라 하시고, '그의 날'을 기다리라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더구나 오늘 복음서에서 보면 유다 백성들이 그토록 대망하고 기다려왔던 메시아의 모습도 전혀 자기들의 기대 같지가 않습니다.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눅 23:33, 34
예수님께서 악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셔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 악한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렇게 초라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이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 눅 23:35-37
여기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관리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있습니다. 군인들도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시대에 살고 계셨다면 저 분이 나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장면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희망을 함께 꿈꾸던지, 아니면 이제 그만 단념하고 돌아서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던지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내가 거기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실 때, 베드로가 왜 그렇게 그 앞을 막고 항의했었는지 그때 베드로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점점 자기 기대에서 멀어질 때,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런 제자들을 생각하다 보면 아리랑의 노랫말에서 감지되는 우리 선조들의 심성은 정말 착하고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신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그러면서 나를 실망시키고 떠나가는 사람을 그냥 바라만 보고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게 우리 선조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아리랑의 원래 참 뜻은 '참 나를 깨달아 인간완성에 이르는 기쁨의 노래'라는 겁니다. 김동철 시인이 '한 민족의 얼 아리랑 그리고 사투리'라는 책에서 한 말인데, 아리랑 할 때의 '아(我)'는 '참 자아(自我)'를 의미하고, '리(理)'는 '깨달아 다스리다'는 뜻이고, '랑(朗)'은 '즐겁다, 밝다'는 뜻이라고,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은 '참 자아(自我)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노랫말의 뜻은 '참된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라고 합니다.그런데 '참된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가려면' 우리가 반드시 넘어 서야 할 언덕이 '십자가의 언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나에게 희망으로 여겨지지 않는 진짜 이유,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성공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성공에의 집착과 '지금 당장' 그것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조급함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두 명의 죄수를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눅 23:39-42
이 두 사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한 사람에게서 오버랩 됩니다. 여기 한 사람은 유대인들과 똑같은 관점으로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는 예수가 지금 당장 자기를 이 사형 틀에서 내려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예수에게서 현실적인 희망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눅 9:24)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물론 그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이 사형 틀에서 내려가게 해주기를 간절히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방법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방법인 십자가에서 자기의 희망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지금' 무언가를 해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작은 포기가 아닙니다. 그는 '지금, 여기서 살고 싶은 망상'을 포기함으로서 '당신의 나라에서 사는 참 희망'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의 때에, 그의 나라에서, 그에게 기억되는 나'가 '진짜 나' 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은 뭐라고 대답해주셨습니까?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눅 23:43
이제 우리는 신앙의 한 해를 마무리 짓고, 신앙의 새해인 '대림절'을 맞이합니다. 진짜 나를 찾아주실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리며 우리 자신을 정돈하는 시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그 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골 1:13
사실 바울의 이 말은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발언을 할 때, 로마 제국은 가이사에 대한 신격화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식민지 곳곳에 가이사의 동상들이 세워졌고, 로마는 그에게 놀라운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만물의 기원과 동등한 존재', '생명과 생기의 기원', '평화의 왕' 등등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이사에게나 사용하는 그 호칭들을 예수님에게 적용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 즉 가이사의 세계에서 건지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골1:15)이라고 소개하면서, "만물이 그분 안에서(in), 그분으로 말미암아(through), 그분을 위하여(for)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골1:16) 이것은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로마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가이사의 거짓과 횡포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지금은 온통 어둠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구해 내셔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시선을 정돈시켜 줍니다. 지금 우리는 혼돈스러운 세상의 복판에서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을 한 주 앞둔 오늘, 다윗의 뿌리에서 돋아날 새순, 평화의 왕으로 오실 아기 예수를 묵상하는 성도는 가슴에 고여 오르는 희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 '참 자아'를 찾은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이 '참 자아'를 버리고 그저 세상 희망만 찾아 떠나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날 것입니다. 부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기를 발견하고, 거짓 자아가 빠진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아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참 평화를 누리고 영원히 행복한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Praxio
① 내 기대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지 않은가?
②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진정한 희망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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